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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상윳따니까야(Samyutta nikaya) 경전의 구성및 설명(5-2)
2.상윳따니까야(Samyutta nikaya) 경전의 구성및 설명
■제4권
원래 PTS본 3권의 전반부 경전을 독립시킨 것이다. 이 전반부에는 제22상윳따부터 제24쌍윳따의 제일장까지의 다음과 같은 3개의 쌍윳따가 포함되어 있다.
「제22쌍윳따 존재의 다발(Khandha-Saṁyutta)」
「제23쌍윳따 라다(Rādha-Saṁyutta)」
「제24쌍윳따 견해(Diṭṭhi-Saṁyutta)」
제22쌍윳따, 「존재의 다발 쌍윳따」는 3개의 장 즉 제일장 근본오십경(Mūlapaññāsa)과 제이장 중오십경(Majjhimapaññāsa)과 제삼장 후오십경(Uparipaññāsa)으로 모두 158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의 다발(五蘊)은 단지 추상적인 어떤 개념이 아니라 늙고 노쇠하고 병드는 실존 속에서 사유되어야 할 구체적인 현실임을 부처님은 나꿀라삐따경(SN. III. 1)에서 보여주고 있다. 늙고 병든 나꿀라삐따가 세존께 가르침을 청한다.
“세존이시여, 저는 늙고 노쇠하고 고령인데다가 만년에 이르러서는 몸에 병이 들어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립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더구나 세존과 바른 마음을 깨우쳐주는 수행승들의 모습을 결코 친견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오랜 세월 안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가르침을 베풀어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가르침을 준다
“장자여, 그대의 몸은 허약하고 낡아버렸다. 장자여, 그와 같은 몸을 이끌고 다니면서 잠시라도 하물며 건강하다고 자칭한다면 어리석은 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그것에 관해 이와 같이 ‘나의 몸은 병들었지만 나의 마음은 병들어서는 안 된다’라고 배워야한다.”
여기서 질병을 치료하는데 신의 은총이나 가피와 같은 신비적인 사상은 찾아 볼 수 없다. 누구나 몸은 비록 병들었을지라도 마음을 건전하게 유지한다면 질병을 극복하거나 치료할 수 있다. 이 한마디에 장자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났고 싸리뿟따를 찾은 장자는 마음이 병들지 않는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싸리뿟따는 참사람을 알고 또한 보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존재의 다발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 마음이 병들지 않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가르침을 전한다.
그 다음의 할릿디까니 경(SN. III. 9)은 내적인 정신적 측면에서의 출가의 삶과 재가의 삶의 차이를 보여주는 아주 보기 드문 경전가운데 하나이다.
“장자여, 재가의 삶이란 어떠한 것인가? 장자여, 형상이라는 특징의 주처에 사는 것에 매이면 재가의 삶이라고 부른다. 장자여, 소리라는 특징의 주처에 사는 것에 매이면 재가의 삶이라고 부른다. 장자여, 냄새라는 특징의 주처에 사는 것에 매이면 재가의 삶이라고 부른다. 장자여, 맛이라는 특징의 주처에 사는 것에 매이면 재가의 삶이라고 부른다. 장자여, 촉감이라는 특징의 주처에 사는 것에 매이면 재가의 삶이라고 부른다. 장자여, 사물이라는 특징의 주처에 사는 것에 매이면 재가의 삶이라고 부른다.”
재가의 삶이란 ‘존재의 다발이라는 집’에 집착하며 사는 것이고 출가의 삶은 존재의 다발에 대한 ‘모든 욕망, 탐욕, 환희, 갈애, 방편적인 집착, 정신적 편견, 독단, 선입견’을 뿌리 체 뽑아버리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짐이란 경(SN. III. 25)에서는 종종 후대의 불교에서 자아의 존재로서 오해되어 왔던 짐꾼(Bhārahāro)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거기서 짐꾼이 사람이라면 짐을 짊어지는 것은 갈애가 생겨나는 현상이고 짐을 내려놓는 것은 갈애가 소멸하여 해탈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붓다고싸는 ‘짐은 괴로움의 진리(苦諦)이다. 그것을 짊어지면 그것이 생성의 진리(集諦)이고 그것을 내려 놓으면 그것이 소멸의 진리(滅諦)이고 그 짐을 내려놓는 방법이 길의 진리(道諦)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자아라고 오해될 수 있는 짐꾼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붓다고싸는 자아라고 하는 것은 토끼뿔처럼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아에 대하여 ‘있다’거나 ‘없다’라는 것이 모두 성립할 수 없다고 했다. .
그리고 중요한 경전으로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을 다섯가지 종자라는 생물학적인 연기에 적용시킨 종자라는 경(SN. III. 54)이 있고 유명한 존재의 다발의 무아성을 질병에 대한 비유로서 입증하고 있는 다섯이라는 경(SN. III. 66)이 있다. 이 경전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존재의 다발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존재의 다발이 나라면 이 존재의 다발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존재의 다발에 대하여 ‘나의 존재의 다발은 이렇게 되라. 나의 존재의 다발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꽃이라는 경은 ‘물질도 불꽃이고 감수도 불꽃이고 지각도 불꽃이고 형성도 불꽃이고 의식도 불꽃이다’라는 구절로 유명하다. 모든 존재의 다발은 불꽃이다. 현명한 제자는 이 불꽃에 타죽지 말고 불꽃을 멀리하고 그곳에서 떠나야한다.
그리고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경전으로 언표의 길이라는 경(SN. III. 71)이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의 이론은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언어사용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현명한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혼동하지 않는, 과거에도 혼동하지 않았고 현재에도 혼동하지 않고 미래에도 혼동하지 않게 될 결점 없는 세가지의 언표의 형식, 표명의 형식, 시설의 형식이 있다. 이 세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과거의 이미 소멸되고 변괴된 물질은 ‘있었다’라고 언표되고 ‘있었다’라고 표명되고 ‘있었다’라고 시설된다. 그것에 대하여 ‘있다’라고 정의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라고도 정의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아직 생겨나지 않고 나타나지 않은 물질은 ‘있을 것이다’라고 언표되고 ‘있을 것이다’라고 표명되고 ‘있을 것이다’라고 시설된다. 그것에 대하여 ‘있었다’라고 정의되지 않고 ‘있다’라고도 정의되지 않는다....수행승들이여, 이미 생겨나서 나타나있는 물질은 ‘있다’라고 언표되고 ‘있다’라고 표명되고 ‘있다’라고 시설된다. 그것에 대하여 ‘있었다’라고 정의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라고도 정의되지 않는다.”
이러한 진술은 분명히 과거, 현재, 미래의 궁극적 실재를 주장하는 잘못을 경계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라는 언어사용에 붙여진 명칭에 불과하다.
그리고 집착이라는 경전에 의하면 존재의 다발에 집착하는 것은 악마에 묶이는 것이고 사자라는 경(SN. III. 84)에서는 존재의 다발들에 대한 상세한 정의가 내려진다. 희생물이라는 경(SN. III. 84)에서는 “이미 불을 끈 상태에서는 존재의 다발을 쌓지도 않고 줄이지도 않으며....,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는 존재의 다발을 포기하지도 집착하지도 않는다‘라는 포기의 철학이 전개된다. 그리고 걸식이라는 경전에서는 제자들을 꾸짖고 생각에 잠긴 부처님께서 하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은 눈물 없이는 읽어내려갈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다. 이 세상에서 ‘그대는 바루를 들고 유행한다’는 것은 저주이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한 아들들은 ‘결코 왕이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강도가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다.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는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에 떨어졌다. 괴로움에 떨어져 괴로움에 둘러싸여 있다. 적어도 괴로움의 다발들이 종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타당하고 합목적적인 이유가 있어 그러한 삶을 영위한다.”
아난다라는 경(SN. III. 105)에서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볼 때 집착하므로 보이고 집착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듯이 존재의 다발에 집착하여 그 존재의 다발이 나이다라는 생각이 일어난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띳싸라는 경(SN. III. 106)에서는 우리가 인생을 여행하면서 지나는 무명을 총림(叢林)에 비유하고 탐욕을 늪지대에 비유하고 분노와 절망을 절벽에 비유하고 풍요로운 평원을 열반에 비유했는데 탐진치에 대한 이 보다 탁월한 비유는 동서고금을 두고 찾기가 힘든 내용이다.
야마까라는 경(SN. III. 109)은 모든 것이 소멸한 아라한의 경지는 허무주의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열반과 단멸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누라다경(SN. III. 137)은 여래가 사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등의 사구의 문제에 대하여 여래는 물질이나 감수나 지각이나 형성이나 의식등의 존재의 다발과 동치되거나 동치지 않거나 간에 모두 부정되므로 사구로 시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이 논리는 연기법에서의 일이중도(一異中道)의 논리를 여래와 존재의 다발에 적용시킨 예에 해당한다.
강이라는 경(SN. III. 137)에는 인간이 삶 속에서 존재의 다발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마치 급류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강둑에 매달린 풀 한포기를 붙잡고 있는 것과 같다는 놀라운 비유가 있다. 결국 뜯겨지고 말 풀 한포기와 결국 파괴되고야 마는 존재의 다발은 모두 무상한 것이다. 우리는 이 무상한 것을 싫어하여 떠나서 해탈해야 한다. 그리고 포말이라고 하는 경전(SN. III. 137)은 금강경의 사구게를 연상하게 하는데 존재의 다발의 실체가 없음을 비유하여 물질은 포말과 같고 감수는 수포와 같고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가죽끈이라는 경전(SN. III. 99)은 존재의 다발을 따라 도는 인간의 운명은 가죽끈에 묶인 개의 신세에 불과하다는 부처님의 준엄한 질타가 숨어 있다.
그리고 도끼자루라는 경전(SN. III. 152)은 헤르만 gpt세의 데미안을 연상시키는 계란과 병아리의 부화에 관한 비유가 수행에 관련하여 등장한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수행승으로서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집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자 하면 바로 집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할 수가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닦기 때문이다. 무엇을 닦기 때문인가? 네가지 마음새김의 토대를 닦고 네가지 올바른 노력을 닦고 네가지 신통력의 기초를 닦고 다섯가지의 감각능력을 닦고 다섯가지의 힘을 닦고 일곱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닦고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을 닦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의 계란이 있는데 닭이 그것을 올바로 포옹하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키는 것과 같다. 그 닭은 발이나 발톱이나 머리나 부리로서 계란의 껍질을 부수어 병아리로 안전하게 출생시키고 싶다면 바로 발이나 발톱이나 머리나 부리로서 계란의 껍질을 부수어 병아리로 안전하게 출생시킬 수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의 계란이 있는데 닭이 그것을 올바로 포옹하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상함이라는 경전(SN. III. 155)은 존재의 다발이 무상하다고 지각하는 수행이야말로 어떠한 수행보다도 탁월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꽃향기 가운데 어떠한 것이든 재스민향을 그 최상으로 하듯이 모든 수행 가운데 무상함에 대한 지각을 태양이 떠오른 것만큼이나 장엄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모든 꽃향기가운데 어떠한 것이든 재스민향을 그 최상으로 한다.
제23쌍윳따 라다 쌍윳따」는 네 개의 품 46개의 경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모두 수행승 라다와 부처님의 대화 또는 부처님의 훈계로 이루어져 있다. 악마라는 경(SN. III. 188)은 존재의 다발은 ‘악마요 살해자요 살해되는 자’이니 그 존재 다발을 싫어하여 떠나서 그것으로부터 해탈할 것을 권하고 있다. 중생이라는 경전(SN. III. 189)에는 존재의 다발을 욕망하고 환희하고 갈애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모래로 만든 집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는 통찰이 들어있다. 기타의 경전들은 대부분 존재의 다발의 무상함과 괴로움 그리고 실체없음의 삼법인을 관련시켜 서술하고 있다.
「제24쌍윳따 견해 쌍윳따」의 제일장은 「흐름의 든 님의 품」 하나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로 존재의 다발에 집착하게 되면 이교적이고 외도적인 삿된 견해에 떨어진다는 사실에 관하여 주위를 환기시키고 있다.
■제5권
원래 PTS본 3권의 후반부 경전을 독립시킨 것이다. 이 전반부에는 제24상윳따의 제이장부터 제34쌍윳따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은 11개의 쌍윳따가 포함되어 있다.
「제24쌍윳따 견해(Diṭṭhi-Saṁyutta), 제이장」
「제25쌍윳따 들어섬(Okkantika-Saṁyutta)」
「제26쌍윳따 생겨남(Uppāda-Saṁyutta)」
「제27쌍윳따 번뇌(Kilesa-Saṁyutta)」
「제28쌍윳따 싸리뿟따(Sāriputta-Saṁyutta)」
「제29쌍윳따 용(Nāga-Saṁyutta)」
「제30쌍윳따 건달바무리(Gandhabbakāya-Saṁyutta)」
「제31쌍윳따 금시조(Supaṇṇa-Saṁyutta)」
「제32쌍윳따 구름(Valāha-Saṁyutta)」
「제33쌍윳따 밧차곳따(Vacchagotta-Saṁyutta)」
「제34쌍윳따 선정(Jhāna-Saṁyutta)」
제 24쌍윳따 「견해 쌍윳따」는 네 개의 반복 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붓다 당시의 이교도나 외도의 세계관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바람’이라는 경전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고 강물이 흐르지 않고 임산부가 출산하지 못하고 해와 달이 뜨거나 지지 못하고 모든 것이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다’라는 견해가 외도적인 사견임을 부처님께서는 지적하고 있다. 붓다고싸는 주석에서 ‘태양과 달이 뜨고 질지라도 그것들은 뜨고 지는 것이 아니다. 태양과 달의 원자가 뜨고 지는 것이다. 실제로 태양과 달은 기둥이나 산봉우리처럼 고정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자론에 입각해 있는 견해인 것을 알 수 가 있다.
그 다음의 ‘없음’이라는 경은 이것은 윤리적 허무주의를 고취시키는 철학적인 유물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아지타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은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론자이다. 그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물질적 원소만이 참된 실재라고 하여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인간은 네 가지 원소로 만들어졌으며, 목숨이 다하고 죽으면 땅은 땅의 세계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세계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세계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세계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기관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유물론자들은 감각적으로 지각가능한 인상만을 인정하고 분리된 지각에 물질적 실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인과성을 부정한다. 유물론자들은 시랑까가 언급한 자성론자(自性論者:svabhāvavādin)로서 물리적 개체를 구성하는 질료의 명령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내적 본성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결정론자이므로, 인간의 노력을 부정하고 도덕적 정신적인 모든 영역에서 인과성을 부정하며 따라서 무인론(無因論:ahetuvāda)을 주장한다.
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차별이] 없다.
② 모두 물질로 구성되었으므로 선악업의 과보가 없다.
③ 선악업의 과보가 없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의무] 아버지[에 대한 의무]와 같은 윤리적인 책임감도 없다.
이들은 그래서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몸이 파괴되고 단멸하고 소실하여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모든 것을 물질적 요소로 환원시키는 유물론자들은 감각적 유물론에 토대를 둔 쾌락주의를 지지했다.
인도에서는 이같은 유물론자들을 로카야타(lokāyata)라고 불렀으며 한역불전에서는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불렀다. 또한 짜르와까(cārvaka)라고 하는데, 그것은 유물론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도덕적 인과성의 부정에 따라 인간의 사후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허무론은 단멸론(斷滅論:ucchedavāda)이라고 불리운다. 넓게는 우연론이나 숙명론도 이러한 허무론에 속하며 특징적으로 도덕적인 허무주의, 무정부주의를 표방한다.
그리고 ‘업을 짓거나’라는 경은 뿌라나 깟싸빠(Pūraṇa Kassapa)의 견해를 대변한다. 그의 비결정론은 일상적 의미의 우연론이 아니라 불교적인 연기사상을 부정하는 절대적인 우연론으로서의 무인론이다. 모든 원인과 결과는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는 것처럼 초월적이고 완전히 우연적이어서 절대적으로 예측가능하지도 않고, 무법칙적으로 변화하므로 인과관계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으며, 인과적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으므로 단멸론(斷滅論:ucchedavāda)에 속한다. 따라서 인간 행위에 있어서도 도덕적 책임감은 성립될 수 없다. 그는 이와 같이 말했다.
“참으로 업을 짓거나 업을 짓도록 시켜도, 도륙하고 도륙하도록 시켜도, 학대하고 학대하도록 시켜도, 슬퍼하고 슬프하게 하여도, 피곤해하고 피곤하게 하여도, 전율하고 전율하게 하여도,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가택을 침입하고 약탈하고 절도하고 노략질하고 타인의 처를 겁탈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면도칼처럼 예리한 바퀴로써 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조각조각 고깃덩이로 잘라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갠지스 강의 남쪽을 다니면서 살육하고 또한 살육을 시키며, 절단하고 절단하도록 시키며, 학대하고 학대하도록 시켜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갠지스 강의 북쪽을 다니면서 보시하고 또한 보시하도록 시키고, 제사지내고 제사지내도록 시켜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 없으며 또한 공덕의 과보도 없다. 보시에 의해서도 수행에 의해서도 계행을 지키더라도 진실을 말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란 없으며 또한 그 공덕의 과보도 없다.”
이러한 주장이 뿌라나 깟싸빠가 윤리적인 삶을 부정하는 무작설(無作說:akiriyavāda)이라고 불리우는 견해를 갖게 된 이유이다. 붓다는 그러한 깟싸빠를 무작론자(無作論者:akiriyavādin)라고 부르고, 자신은 작론자(作論者:kiriyavādin)라고 불렀다. 다음에 등장하는 고쌀라가 강한 의미의 결정론자라면 깟싸빠는 비결정론자이다. 붓다가 깟싸빠를 비난한 것은 도덕적 책임감에 입각한 윤리적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그의 비결정론 때문이었다.
그리고 ‘원인’이라는 경에는 붓다 당시에 결정론을 주장한 사람은 막칼리 고쌀라(Makkhalī Gosāla)였다. 그는 모든 것은 자연의 불변의 법칙으로 생겨난다고 주장했으며, 인간의 모든 체험에서 우연을 추방하였다. 그의 주장은 극단적인 자연적 결정론으로 붓다는 이러한 숙명론적 결정론이 모든 이교적인 이론 가운데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불교의 무자비한 입장은 고쌀라의 견해를 폄하하고 때로는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는 비록 극단적인 결정론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결정의 범주를 종(種)으로 규정한 과학적인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모든 동물, 모든 유정, 모든 존재, 모든 생명은..... 결정과 종과 자연의 본성에 의해서 서로 변이하여 여섯 가지 종류에 따라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받는다.
‘견해로’라는 경은 특히 절대적인 도덕부정론을 주장하는 빠꾸다 깟차야나(Pakudha Kaccāyana)의 세계관을 싣고 있다. 그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 괴로움의 요소, 즐거움의 요소, 목숨의 요소이다. 이 일곱 가지는 만든 것이나 만들게 한 것이 아니고 창조된 것이거나 창조하게 한 것이 아니고 생겨나지 않았으나 견고해서 석녀와 같고 산봉우리와 같이 서있고 기둥처럼 단단하여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서로 핍박하지 않는다. 서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것이 조금도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유물론적으로 7요소설(七要素說:地 paṭhavīkaya, 水 āpokāya, 火 tejokāya, 風 vāyokāya, 苦 sukha, 樂 dukkha, 靈魂 jīva)을 뜻하는데,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유물론자들과는 다른 이원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깟차야나가 인정하는 영혼은 물질적인 것으로 지극히 유물론적이다. 이들 7요소는 불생산(不生産)이며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서로 인과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토대 위에 ‘만약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잘라도 아무도 누구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 아니며 단지 7요소 사이를 따라 칼이 통과한 것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진아(眞我)의 불괴성과 불변성을 주장하는 초기 베단따적인 우빠니샤드의 영원주의(常住論:sassatavāda)에 영향을 받은 허무주의이다.
제25쌍윳따 「들어섬-쌍윳따」의 는 모든 것이 무상하고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을 지각하는 것이 바로 진리의 흐름에 들어서는 것임을 설하고 있는 10개의 경전이로 이루어져있다.
제26쌍윳따 「생겨남-쌍윳따」 쌍윳따는 12처나 18계가 생겨나는 것이 곧 괴로움이 생겨나고 질병이 유지되고 늙고죽음이 나타나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제27쌍윳따 「번뇌-쌍윳따」는 모든 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은 마음에 수반되는 번뇌임을 10개의 경전에서 설한다..
제28쌍윳따 「싸리뿟따-쌍윳따」는 열 개의 아난다와 싸리뿟따의 대화를 담고 있다. 아난다가 사리뿟다에게 물었다. “벗이여, 싸리붓따여 그대의 감관은 청정하고 안색은 맑다. 존자여 싸리뿟따여, 그대는 오늘 어떻게 지내며 보냈는가?” 싸리뿟다는 아난다에게 대답했다, “벗이여, 이 세상에서 나는 원하는 대로 완전히 무한의식의 세계를 뛰어넘어 아무 것도 없는 무소유의 세계에 든다. 벗이여, 나는 이때에 ‘나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든다’라든가 ‘나는 무소유의 세계를 성취했다’라든가 ‘나는 무소유의 세계에서 나온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전의 사유는 후대에 사리불(싸리뿟따)을 중심으로하는 금강경의 무주, 무소득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제29쌍윳따 「용-쌍윳따」, 제30쌍윳따 「금시조 쌍윳따」, 제31쌍윳따 「건달바무리 쌍윳따」, 제32쌍윳따 「구름 쌍윳따」은 보시를 통해서 공덕을 쌓으면 사후에 원하는 무리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설하는 경전들로 이루어져있다.
제33쌍윳따 「밧차곳따 쌍윳따」는 다음과 같은 설명될 수 없는 명제(無記)들 ― ① 세계는 영원하다. ②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③ 세계는 유한하다. ④ 세계는 무한하다. ⑤ 영혼과 육신은 같다. ⑥ 영혼과 육신은 다르다. ⑦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⑧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⑨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⑩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 않지도 않다. ― 은 존재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임을 설하고 있다. 경전은 존재의 다발이 있을 때에 그 존재의 다발에 대하여 무지하고 올바로 분별하거나 통찰하지 못함으로서 이러한 견해를 일으킨다고 설하고 있다.
제34쌍윳따 「선정 쌍윳따」은 삼매에 들었을 때의 수행자들의 능력의 차이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선정을 닦는 자는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하지만 삼매에서 안정에 능숙하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선정을 닦는 자는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하지만 삼매에서 안정에 능숙하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선정을 닦는 자는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하지도 삼매에서 안정에 능숙하지도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선정을 닦는 자는 삼매에서 집중에 능숙할 뿐만 아니라 삼매에서 안정에 능숙하다.” 경전에서는 그밖에 깨어남(일어남), 인내, 공경, 이익, 성취, 결정, 행경, 대상 등에 관하여 삼매에 든 수행자들의 차이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제6권
원래 PTS본 4권의 전반부 경전을 독립시킨 것이다. 이 전반부에는 제35상윳따만을 다루고 있는데 이 제35쌍윳따는 많은 경전군을 내포한 관계로 4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35쌍윳따 여섯감역(Saḷāyatana-Saṁyutta)」
이 「여섯감역 쌍윳따」의 여러 부류의 경전들은 모두 여섯가지 내적 또는 외적인 감각영역에 관해 다루고 있는데 맛지마니까야에서 짧은 경에 가깝다. 제1장에서 제3장까지는 실제로 각각 50여개의 경전을 포함하고 있으나 제4장은 PTS.판본의 계산방식과는 달리 모두 93개의 경전을 포함하여 「여섯감역 쌍윳따」는 총 248경으로 이루어졌다.
여섯 가지 감역(六入)이란 무엇인가. [인연 쌍윳따]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여섯 감역이란 무엇인가? 시각의 감역, 청각의 감역, 후각의 감역, 미각의 감역, 촉각의 감역, 정신의 감역이 있으니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여섯 감역이라고 부른다.”
여섯감역(saḷāyatana)이란 개념에 대한 아비달마적인 다른 이견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를 주는 일체경(Sabbasutta)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어떠한 것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현상,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실로 일체라고 부른다.”
■제7권
원래 PTS본 4권의 후반부 경전을 독립시킨 것이다. 이 후반부에는 제36상윳따부터 제44쌍윳따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은 9개의 쌍윳따가 포함되어 있다.
「제36쌍윳따 감수(Vedanā-Saṁyutta)」
「제37쌍윳따 여인(Mātugāma-Saṁyutta)」
「제38쌍윳따 잠부카다까(Jambukhādaka-Saṁyutta)」
「제39쌍윳따 싸만다까(Sāmaṇḍaka-Saṁyutta)」
「제40쌍윳따 목갈라나(Moggallāna-Saṁyutta)」
「제41쌍윳따 찟따(Citta-Saṁyutta)」
「제42쌍윳따 촌장(Gāmaṇi-Saṁyutta)」
「제43쌍윳따 무위(Asaṅkhata-Saṁyutta)」
「제44쌍윳따 시설되지 않은 것(Abyākata-Saṁyutta)」
제36쌍윳따의 「감수(느낌) 쌍윳따」는 31개의 느낌 즉 감수를 다루는 경전으로 이루어져있다. 싱할리 본에는 느낌은 여섯감역에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앞의 「여섯감역 쌍윳따」에 소속시켰으나 미얀마본을 위시해서 다른 판본들은 독립된 쌍윳따로 다루고 있다. 감수는 12연기의 한 고리일 뿐만 아니라 네가지 새김의 토대(念處:satipaṭṭhāna)의 한 부분으로 이다. 포기하여(Pahānena SN. IV. 205)의 경은 즐거운 감수는 탐욕을 야기시키는 원인이고 괴로운 감수는 분노를 야기시키는 원인이고 중성적인 감수는 무지를 야기시키는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즐거운 감수에서 유래하는 탐욕의 경향도 포기되어야 한다. 괴로운 감수에서 유래하는 혐오의 경향도 포기되어야 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에서 유래하는 무지의 경향도 포기되어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은 감수야말로 우리의 범부적 삶을 지배하는 실존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장본인임을 심연(Pātāla:SN. IV. 206)이라는 경에서 다음과 같이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커다란 바다에는 심연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배우지 못한 범부는 있지 않은 것 존재하지 않은 것을 두고 ‘커다란 바다에는 심연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심연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괴로움의 느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인 괴로움의 느낌을 경험하여 우울해하고 피로해하고 슬퍼하고 통곡하며 미혹된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심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견고한 지반을 얻지 못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현대 실존철학의 정곡을 찌르는 진술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괴로운 감수와 접촉해서 우울해하고 피로해하며 슬퍼하고 통곡하며 미혹에 빠진다면 두 번의 괴로움이라는 화살을 맞는 것과 같다. 그러나 괴로운 감수와 접촉해서 우울해하고 피로해하며 슬퍼하고 통곡하며 미혹에 빠지지 않는다면 괴로움이라는 하나의 화살을 맞는 것과 같다.(SN. IV. 207) 그는 감수의 심연에 빠지지 않는다. 특히 부처님은 이러한 괴로운 감수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설법을 괴로움이 심한 환자들을 방문하여 설한다.(SN. IV. 210-213) 그리고 감수를 바람에 비유한 경전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허공에 여러 가지의 바람이 분다. 동풍도 불고 서풍도 불고 북풍도 불고 남풍도 불고 먼지 있는 바람도 불고 먼지 없는 바람도 불고 찬 바람도 불고 더운 바람도 불고 작은 바람도 불고 큰 바람도 분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몸에는 여러 가지의 감수가 일어난다. 즐거운 감수도 일어나고 괴로운 감수도 일어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도 일어난다.”라는 시설은 그것은 감수가 단순히 느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서 폭풍처럼 일어나는 복잡한 감정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감정은 인간의 애증 뿐만 아니라 어리석음이나 지혜를 수반하는 거치른 감각적인 쾌락이나 고통에서부터 깊은 명상에서 오는 미묘한 즐거움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씨바까(Sīvaka:SN. IV. 230)라는 경은 불교에서의 업사상이나 연기사상이 결코 숙명론적인 업사상이 아닌 것임을 보여주는 데 입증자료로서 주어지는 유명한 경이다. 부처님은 이 경에서 “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논파하고 있다. 그 경에 따르면 어떠한 감수들은 담즙이나 점액이나 바람이나 체질이나 계절의 변화나 불운한 사건이나 우연한 피습에 의해서 생겨나므로 과거의 업보의 성숙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란 그러한 많은 원인들 가운데 하나 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연기법에서의 인과의 동시성을 일상적으로 긍정하는 언표로서 놀라운 통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승(Bhikkhu:SN. IV. 232)이라는 경은 108 가지로 인간의 느낌을 분류했는데 그 때문에 이 경은 특히 아비달마 철학에서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리고 청정한 정신적인 것(Suddhikaṃ nirāmisam:SN. IV. 235)이라는 경은 기쁨, 행복, 평정, 해탈을 각각 감각적 쾌락에 기반을 두는 육체적인 것과 선정에 기반을 두는 정신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제37쌍윳따 「여인 쌍윳따」는 34개의 짧은 경전으로 이루어져있다. 마음에 들고 들지 않음(Manāpā'manapā:SN. IV. 238)의 경에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회관행적인 여성관이나 남성관을 피력되고 있다. 남자에게 마음에 드는 여인의 조건이 다음과 같이 “수행승들이여, 다섯가지 요소에 해당하는 여인을 남자들은 지극히 마음에 들어한다. 다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용모가 아름다운 것, 재산이 많은 것, 덕성이 풍부한 것, 부지런한 것, 남편을 위해 아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서술되고 있고, 여인에 마음에 드는 남자의 조건은 다음과 같이 “수행승들이여, 다섯가지 요소에 해당하는 남자를 여인들은 지극히 마음에 들어한다. 다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용모가 준수한 것, 재산이 많은 것, 덕성이 풍부한 것, 부지런한 것, 아내를 위해 아이를 잉태시킬 수 있는 것이다.”라고 열거되고 있다. 그밖에 여인만이 겪어야하는 특수한 고통으로 ① 시집가서 친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 ② 월경, ③ 임신, ④ 분만, ⑤ 남자에게 시중드는 것을 들고 있다.(SN. IV. 289) 그밖에 여인이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으로 태어나는 이유로 인색함과 질투심 또는 “믿음이 없는 것, 부끄러움이 없는 것, 챙피함이 없는 것, 분노를 품는 것, 지혜가 열등한 것”을 들고 있다. 그밖에 범죄, 파계, 배움이 부족한 것, 나태, 부주의, 오계를 지키지 않는 것 등이 지옥으로 윤회하는 이유에 해당한다. 물론 몸이 부수어지고 목숨이 다한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이유는 지옥에 태어나는 조건과는 정반대의 조건을 갖춤으로서 가능하다고 경전은 설하고 있다.
제38쌍윳따 「잠부카다까 쌍윳따」, 제39 쌍윳따 「싸만다까 쌍윳따」는 각각 16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졌는데 ‘1) 열반, 2) 거룩한 이의 경지, 3) 설법자, 4) 무엇이 있다면, 5) 안식, 6) 최상의 안식, 7) 감수, 8) 번뇌, 9) 무명, 10) 갈애, 11) 거센 물결, 12) 취착, 13) 존재, 14) 괴로움, 15) 존재무리, 16) 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동일한 주제로 이루어져 있고, 질의 응답자가 다를 뿐, 모두 열덟가지의 성스러운 길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마음새김, 올바른 집중이 그들 주제에 대한 해답으로 주어져 있다.
제40쌍윳따 「목갈라나 쌍윳따」는 신통제일의 목갈라나가 어떻게 수행하고 노력하여 선정을 성취하고 또한 특징을 뛰어넘는 마음의 삼매를 이루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목갈라나는 명상 중에 아직 제거되지 않은 미세한 번뇌인 의식을 제거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에 스승인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그에게 나타나서 도와줌으로서 목갈라나가 초월적인 지혜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 후에 목갈라나는 천상계에 올라가 하늘사람들에게 삼보에 귀의함으로서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설한다.
제41쌍윳따 「찟따 쌍윳따」는 짓따와 주변 사람들과의 담론을 기록한 모음집인데 10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져있다. 찟따는 부처님의 재가 신자가운데 가장 탁월하게 가르침을 이해하고 설법할 수 있는 법사였다. 그는 여러 번 수행승들에게 가르침을 설했으며 수행승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돌려주며 “그대의 지혜의 눈은 심오한 부처님의 말씀에 정통해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 쌍윳따의 도처에서 보인다. 찟따는 재가 신자이지만 세계와 시설될 수 없는 무기(無記)의 법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에 대한 깊은 이해와 모든 선정의 단계를 이해하는 명상에서의 깊은 체험을 갖고 있었다. 또한 부처님 당시에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불교와 경합하던 자이나교의 우두머리와 부처님과 만남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찟따가 그와 만나 대화를 나눈 역사적인 기록이 이 쌍윳따 안에 존재한다. 먼저 니간타(Nigaṇṭha:SN. IV. 297)라는 경에서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바르다마나가 질문한다. “장자여, 그대는 실로 수행자 고따마의 가르침에는 ‘사유가 없고 숙고가 없는 삼매가 있고 사유와 숙고의 소멸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까?....사유와 숙고가 소멸될 수 있다면 그물로서 바람을 막으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사유와 숙고가 소멸될 수 있다면 자신의 손바닥으로 갠지스강의 흐름을 막으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존자 찟따는 그가 사유와 숙고가 없는 두 번째의 선정 뿐만아니라 네가지 선정에 대해 직접 체험하고 알고 있음을 설명하여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아쩰라(AcelaSN. IV. 300)라는 경은 찟따의 오랜 친구인 아쩰라 깟싸빠의 “장자여, 나는 이 30년간의 출가생활을 통해 벌거벗고 삭발하고 가친 모래를 뿌리는 것 이외에 인간을 뛰어넘는 법, 고귀하고 탁월한 앎과 봄, 안락한 삶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담론이 시작된다. 그 경에는 유행자의 고행자적인 삶의 허무함과 올바른 가르침을 만났을 때의 기쁨과 해탈의 성취가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의 간병(Gilānadassana:SN. IV. 302)이라는 경은 그가 임종에 처해서도 많은 하늘사람과 인간들에게 무상(無常)의 진리를 설파해서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하는 장엄한 설법을 전개하고 있다.
제42쌍윳따 「촌장 쌍윳따」는 여러 마을의 촌장들과 부처님과의 담론을 기록한 것으로 모두 13개의 경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들 촌장들은 재가 신도들이 아니고 대부분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어느 정도 적대적인 사람들인데 부처님은 이들과의 대화에서 매우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가르침을 통해 승리를 거둔다. 촌장 짠다는 이 세상에 포악한 무리들이 많은데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부처님은 그 답변으로 단지 탐진치 때문이라고 추상적으로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매우 분석적으로 접근한다.
“촌장이여, 이 세상에서 어떤 이는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탐욕을 버리지 못해서 남을 화내게 하고 남이 화를 내면 자신도 화를 내게 되면 그는 포악한 자라고 불린다. 성냄...어리석음... 촌장이여, 이 세상에서 이러한 이는 포악한 자라고 불리는데 이러한 것이 원인이고 이러한 것이 조건이 된다.(SN. IV. 305)”
그리고 뿌따(Puṭa:SN. IV. 306)라는 경은 매우 흥미있는 경으로 배우마을의 촌장 딸라뿟따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오늘날의 영상 매체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 내재되어 있다.
“촌장이여, 과거에 중생들이 탐욕을 떠나지 못해 탐욕에 묶여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배우가 무대가운데 극장 가운데 더욱 탐욕스러운 것을 가져와서 더욱더 탐욕스럽게 만들었다. 촌장이여, 과거에 중생들이 성냄을 떠나지 못해 성냄에 묶여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배우가 무대가운데 극장 가운데 더욱 성내는 것을 가져와서 더욱더 성내게 만들었다. 촌장이여, 옛날에 중생들이 어리석음을 떠나지 못해 어리석음에 묶여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배우가 무대가운데 극장 가운데 더욱 어리석은 것을 가져와서 더욱더 어리석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사(Yodhājīva:SN. IV. 308)라는 경을 위시해서 세 개의 경은 전쟁이 종교적인 믿음으로 합리화될 수 없다는 부처님의 담론이 기술되어 있다. 또한 연기의 필연성을 설명하는 유명한 경전으로 서방인(Paccahābhūmaka:SN. IV. 311)이라는 경전이 있다.
“촌장이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서 ‘버터기름이여, 참기름이여, 잠겨라 물밑으로 가라앉아라. 버터기름이여, 참기름이여, 바닥으로 가라앉아라.’라고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버터기름이나 참기름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합장하고 찬탄하고 순례한 까닭에 잠기거나 물밑으로 가라앉거나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인가?”
이 경전에 따르면,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을 아무리 저주한들 지옥에 보낼 수가 없으며 그는 인과의 필연성에 따라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다.
흥미있는 것은 소라(Saṅkha:SN. IV. 317)라는 경전에 의하면, 단순한 반복적인 습관에 의한 숙명적으로 지배되는 자이나교적인 인과이론을 부처님께서 명쾌하게 부정하는 연기법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라도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면 모두 괴로운 곳 지옥에 떨어진다...누구라도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 그 만큼 그 때문에 운명이 이끌려진다.’는 자이나교의 주장에 대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이론으로 척파한다.
“촌장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밤이나 낮이나 때때로나 살아있는 생명을 빼앗는다면, 생명을 빼앗던가 생명을 빼앗지 않던가 그 어느 시간이 더욱 많을 것인가? 세존이시여, 어떤 사람이 밤이나 낮이나 때때로나 살아있는 생명을 빼앗는다면, 생명을 빼앗는 시간이 적고 생명을 빼앗지 않는 시간이 더욱 많을 것입니다. 촌장이여. 누구라도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 그 만큼 그 때문에 운명이 이끌려진다면, 그렇다면 아무도 니간타 나따뿟따의 말처럼 나쁜 곳 지옥으로 갈 수가 없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단순한 양적인 반복에 의해서만 인과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라 고동소리가 멀리 퍼져 나아가는 것처럼 질적인 것이 단순한 양적인 반복보다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훌륭하고 잘 선택된 가르침에 따른 조그마한 노력이 능히 모든 악을 제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가정(Kulaṃ:SN. IV. 322)이라는 경은 부처님이 기근이 든 지방을 여행하다가 자이나교를 믿는 적대적인 촌장을 만나 어려운 시기에 탁발을 구하는 것은 가정파괴 행위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이와 같이 “나는 어떠한 가정이라도 예전에 단지 요리된 음식을 보시한다고 해서 피해를 본 것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촌장이여, 가정이 패망하는 데는 8가지의 이유가 있다.”라고 설하며 8가지 이유를 답변한다.
제43쌍윳따 「무위 쌍윳따」는 열반에 관한 44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져있다. 첫 번째의 품은 열반에 이르는 다양한 수행방법에 관해 11개의 경을 통해 설명한다. 두 번째 품은 언어를 뛰어넘는 열반에 대한 다양한 부정적이나 긍정적인 33가지 묘사가 각각 하나의 경전을 이루어 내용적으로 동일한 33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이 가운데 부정적인 언표로 표현된 것은 다음과 같다. ① 무위(無爲:asaṅkhata):이것은 모든 조건지워진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② 무루(無漏:anāsavam):세 가지의 번뇌, 즉 감각적 쾌락의 번뇌(慾漏:kāmāsava), 존재의 번뇌(有漏:bhavāsava), 무명의 번뇌(無明漏:avijjāsava)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③ 불로(不老:ajaraṁ):열반은 늙음의 조건이 소멸된 상태이다. 그에게는 자아에 의해 집착되지 않은 존재의 다발의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④ 무견(無見:anidassana):anidassana는 ‘볼 수 없는’의 뜻이 아니라 ‘지시하지 않은’의 뜻으로, 나의 소유(이것은 나의 것이다)는 조건적인 세계를 지시하므로 아라한은 그러한 세계를 지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⑤ 무희론(無戱論:nippapañca):열반은 일체의 희론, 사견희론(邪見戱論)이나 정견희론(正見戱論)을 모두 떠나 있다. ⑥ 무재난(無災:anītika):열반 속에는 해침을 당할 만한 ‘자아’의 세계가 없다. ⑦ 무재난의 상태(無災法:anītikadhamma):열반의 무위법에는 조건지어지는 재앙이 존재할 만한 유위법적인 상태가 없다. ⑧ 무에(無恚:avyāpajjha):열반은 분노(vyāpāda)가 소멸한 상태이다. ⑨ 사라짐(離貪:virāga):열반은 탐욕(rāga)이 소멸한 상태다. ⑩ 불사(不死:amata):아라한의 일상적인 죽음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는 불사이며 다만 목숨이 다할 때에는 존재의 다발의 짐을 내려놓을 뿐이다. ⑪ 갈애의 소멸(愛盡:taṇhākkhaya):열반에는 모든 종류의 갈애, 즉 감각적 쾌락에의 갈애, 존재․비존재에의 갈애가 소멸되어 있다. ⑫ 무착(無着:anālayo):갈애나 집착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열반에 대한 긍정적인 언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끝(終極:antam):아라한에게 ‘해야 할 것은 모두 해 마쳤고(kataṁ karanīyaṁ) 더 이상 윤회의 상태(nāparam itthattāya)가 아닌 것’을 말한다. ② 진리(眞諦:saccam):아라한의 인격 속에 지혜에 의해서 파악되는 최상의 궁극적 진리를 의미한다. ③ 피안(彼岸:pāra):피안은 윤회의 고통스런 세상을 건너갔다는 의미를 지닌다. ④ 극묘(極妙:nipuṇa):nipuṇa는 ‘성취된, 세련된’의 의미로, 열반은 다듬어지지 않은 개념적 사유로 파악될 수 없고 오로지 현자의 지혜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다. ⑤ 지극히 보기 어려운 것(極難見:sududdasa):조건지워진 사유의 근본구조를 초월하여 무지와 갈애가 소멸된 열반은 지혜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⑥ 견고함(堅固:dhuva):열반을 체험한 아라한에게는 조건지워진 세계로의 환원은 있을 수 없다. ⑦ 비추어봄(照見:apalokita):열반을 체험한 아라한에게는 자아를 위한 세계는 있을 수 없으며 세계를 떠나서 조견한다. ⑧ 적정(寂淨:santa):조건지어진 것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세계’를 주장하므로 적정은 있을 수 없다. ⑨ 탁월함(勝妙:paṇīta):열반의 체험은 조건지워진 삶의 세계를 초월함으로서 성취되는 가장 탁월한 체험이다. ⑩ 지복(至福:siva):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는 최상의 지복을 체험한다. ⑪ 안온(安穩:khema):‘나의 세계’는 언제나 불안정한 상상과 변화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가 소멸된 열반은 안온한 세계이다. ⑫ 아주 놀라운 것(希有:acchariya):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의 세계에서 열반의 체험은 윤회하는 존재들 사이에 매우 드문 일이다. ⑬ 예전에 없던 것(未曾有:abbhuta):열반은 생성과 소멸이 끝없는 윤회의 과정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미증유의 체험이다. ⑭ 청정(淸淨:suddhi):모든 염오(kilesa)의 소멸을 의미한다. ⑮ 해탈(解脫:mutti):열반은 완전한 해탈을 의미한다. ⑯ 섬(島:dīpa):윤회의 바다의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안전함을 뜻하는 열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너 자신을 섬으로 하라’는 부처님의 유교는 결국 열반을 성취하라는 말로 귀결된다. ⑰ 동굴(洞窟:leṇa):열반의 상태는 모든 유해한 번뇌의 숲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한 상태와 같다. ⑱ 피난처(避難處:tana):열반의 체험은 번뇌의 폭류나 마군으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발견한 것과 같다. ⑲ 귀의처(歸依處:saraṇa):열반은 곧 윤회의 고통 속에 헤매는 모든 중생들의 귀의처가 된다. 구경(究竟:Parāyaṇa):열반의 체험은 열반을 구경으로 하게끔, 아라한을 운명짓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제44쌍윳따 「시설되지 않은 것의 쌍윳따」는 부처님께서 시설하지 않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라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든가 하는 네가지 형이상학적인 명제 무기(無記)의 문제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
첫 번째의 경은 꼬쌀라의 국왕과 비구니 가운데 대지혜제일(大智慧第一:mahāpaññānaṃ aggā)였던 케마 사이의 여래의 사후의 존재를 두고 담론이 전개되는데 비구니 케마의 심오한 대답을 듣고 왕은 환희한다. 그밖의 경들은 모두 존재의 다발이나 여섯감역이 소멸한 여래를 시설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과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명제가 생겨나는 것은 우리의 집착을 통해 존재의 다발이나 여섯감역이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단지 목갈라나(Moggallāna:SN. IV. 391) 경과 밧차(Vaccha:SN. IV. 395) 경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 명제‘세상은 영원하다’라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든가 ‘세상은 유한하다’라든가 ‘세상은 유한 하지않다’라든가 ‘영혼과 육체는 같다’라든가 ‘영혼과 육체는 다르다’를 합해서 8가지의 형이상학적인 명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회의장(Kutūhalasālā :SN. IV. 398)이라는 경은 범부의 사후의 문제에 관하여 갈애를 연료빠알리어에서는 취착과 동일한 말이다로 해서 사후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가르침을 설하고 있고, 아난다(Ānanda:SN. IV. 40) 경은 유행자 밧차곳따의 ‘자아는 있는가’ 또는 ‘자아는 없는가’라는 명제를 다루고 있는데 부처님은 그가 이미 자아의 존재에 대한 부동의 선입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대답에 침묵함으로서만 올바른 대답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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