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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성 바오로 6세 교황. 묵상글(강론글)
1차(260528. 23:05), 2차(04:45), 3차(09:30)
29일 묵상글, 28일 23시 05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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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9일 금요일
[성 바오로 6세 교황 기념일] (요한16,24)
제1독서<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가 되십시오.>(1베드4,7-13)
사랑하는 여러분, 7 만물의 종말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기도하십시오.
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
9 불평하지 말고 서로 잘 대접하십시오.
10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
11 말하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봉사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무슨 일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영광과 권능을 누리십니다. 아멘.
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13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마르11,11-25)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를 받으시면서 11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타니아로 나가셨다.
12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13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4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15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
16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17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18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19 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20 이른 아침에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
21 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스승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22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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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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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2,24–26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이어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가장 깊은 역설을 보여 줍니다.
살기 위해 붙드는 길이 아니라
내어 줌으로 생명이 열리는 길,
자기보존이 아니라 사랑의 자기증여를 통해
열매가 맺히는 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말씀을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먼저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밀알이십니다.
당신 자신을 땅에 떨어뜨리시고
죽음까지 받아들이심으로
많은 이에게 생명의 열매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지 일반적인 윤리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가지 않은 길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먼저 걸으신 길을 따라오라 부르십니다.
아우구스티노의 시선으로 보면
“죽는다”는 것은 단지 육체적 죽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성의 죽음,
교만의 죽음,
내 뜻만 옳다고 여기는 완고함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밀알이 한 알 그대로 남는다는 것은
겉으로는 온전해 보일지 몰라도
실은 닫혀 있고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고
사랑을 위해 자신을 비울 때
삶은 비로소 열리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고
이 세상에서 제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그것을 간직할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목숨을 미워한다는 것은
생명을 업신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우상처럼 붙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자기 생명을 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곧 지금의 편안함만 붙드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하십니다.
이는 신앙이 단지 주님을 존경하는 데서 끝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건너는 길,
열매를 위해 자신을 내어 놓는 길,
숨은 자리에서 사랑하는 길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면
주님의 마음을 함께 살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제자의 길은
높은 자리를 얻는 길이 아니라
주님이 계신 자리, 곧 사랑의 자기증여의 자리로 가는 길입니다.
영성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영성이 왜 비움과 죽음의 언어를 품는지를 알려 줍니다.
영성은 나를 더 대단하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내 안의 불필요한 자기집착을 죽이고
하느님의 생명이 자라게 하는 길입니다.
밀알은 자기 껍질을 지키는 동안에는 안전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만 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만 하고,
내 자아를 지키는 데만 모든 힘을 쓰면
결국 한 알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자신을 내어 놓을 때
삶은 더 넓어지고
열매는 나를 넘어 다른 이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성 베다를 기억하는 오늘,
이 말씀은 역사 안의 신앙과도 깊이 이어집니다.
역사에 남는 믿음은
자기 이름을 남기려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바친 삶입니다.
밀알처럼 땅에 묻힌 이들의 기도와 희생,
숨은 충실함이
교회와 공동체의 역사를 살려 왔습니다.
그래서 참된 역사는
겉으로 크게 드러난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 놓은 이들의 열매로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한 알 그대로 남으려 하는가,
아니면 주님 안에서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지키느라
더 깊은 생명을 놓치고 있는가?
나는 주님을 따르고 싶다고 하면서도
정작 밀알의 길은 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 안에 떨어져라.
그러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주님,
한 알 그대로 남으려는 제 마음을 비추어 주소서.
저를 닫아 두는 자기중심성과 두려움을 벗게 하시고
당신 안에서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어 놓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작은 희생과 숨은 충실함 안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며
당신이 계신 자리로 저를 이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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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스페인 몬세라트 수도원에 머물며 이 고요함 속에서 기도하다 보니, 세상의 소란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시간 안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전쟁과 갈등으로 시끄럽지만, 이곳의 침묵은 오히려 더 분명하게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전하며 살고 있는가?” 최근 우리는 전쟁의 소식을 들으며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황님께서는 평화를 위한 ‘밤샘 기도’를 요청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사도행전의 베드로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는 더 이상 두려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교황 바오로 6세 역시 그러한 증인이었습니다. 교황님은 유엔에서 “전쟁은 더 이상 안 됩니다.”라고 외치며, 평화의 복음을 세상 한가운데 선포하였습니다. 어느 동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 오후, 성당에서 나온 신자들이 거리 한쪽에 작은 탁자를 펼쳐 놓고 거리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천주교를 알려드립니다.”라는 책자와 입교 신청서를 정성껏 준비해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차가웠습니다.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거나, 손사래를 치며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교하는 분들도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고, 표정에는 조심스러움과 망설임이 묻어났습니다.
그런데 길 건너편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 약 장수가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약 하나면 피로가 싹 풀립니다! 관절이 좋아집니다!” 과장된 몸짓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사람들을 끌어모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그쪽으로 몰려들었고, 웃고 떠들며 약을 사기까지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거리 선교를 하던 분들은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데, 왜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까?’ 결국 몇 사람이 용기를 내어 약 장수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의 길을 전하는데도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약을 파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때 약 장수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이 약이 그렇게 좋은 약은 아닙니다. 나쁘지도 않지만, 특별히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이 약을 정말 좋은 약이라고 믿고,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정말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그렇게 자신 없어 보입니까?”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 마음을 깊이 흔듭니다. 내용의 진실함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태도와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현대 사회는 ‘정보’보다 ‘신뢰’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진리를 향한다고 보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이성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가 말하는가?’, ‘어떤 태도로 말하는가?’를 통해 진실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확신 있게 전해질 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이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확신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로 그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았고, 세상의 위협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복음을 전할 때 어떤 모습인가?” 혹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세상의 시선과 반응을 먼저 생각하며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인은 스승보다 증인을 더 믿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확신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몬세라트의 고요함 속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뽑아 세우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가서 열매를 맺어라.” 그 열매는 바로 믿음의 확신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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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9. 성 바오로 6세 교황 기념일 .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시장하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로 다가가십니다.
잎이 무성한 것을 보고 열매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셨지만,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마르 11,14).
현대는 이른바 ‘폼생 폼사’의 시대입니다. 피부가 좋아진다, 날씬해진다 등 외모에 좋다고 하는 상품이 불티나게 팔립니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는 풍요로워 보이지만 안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하고 열심히 활동하는 신자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혼이 메말라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지만 이웃과 다투고, 열심히 성당에 다니지만 가족에게는 차갑고, 열심히 봉사하지만 교만한 마음이 크다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려한 성당 건물에 신자들이 가득하고 헌금이 넘쳐도 영성은 메말라 가는 공동체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참된 열매는 사랑입니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용서입니다.
나무가 열매를 잘 맺게 하려고 불필요한 잎과 가지를 쳐 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우리 삶의 불필요한 잎과 가지를 쳐 내는 고통도 참고 이겨 내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보다 내면의 참된 열매를 더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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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오늘은 그들 중 5위(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가 1839년 전라도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날입니다. 이들은 한국초기교회의 순교자들로서, 시대로는 오히려 103위 성인보다도 앞서 사셨던 분들입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는 병인박해 순교자 103위를 시성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교회를 일궈낸 이들이 누락되었다가, 2014년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신해박해(1791)부터 병인박해(1866)까지의 124위 순교자들이 시복된 것입니다.
그들 124위 중 최연소자는 12세로 이봉금 순교자이며, 최고령자는 75세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순교자입니다.
이들 가운데, 첫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종사촌이며, 전라도(현재 충청도) 진산 출신으로 1790년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신주를 불사르고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렀다가 체포령을 내려지자 자수했습니다. 그들은 1791년 12월 8일에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이들 중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첫 성직자로, 구베아 주교의 파견으로 1794년에 입국하여, 강완숙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성사를 집전했으며, 6년 만에 조선교회 신자 수를 1만 명으로 늘리는 데 큰 공로를 세웠습니다. 신유박해 때 귀국을 결심했다가 순교하기로 마음먹고 자수했고, 새남터에서 효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또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은 성 정하상 바오로와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의 아버지인데, 형 약전에게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에 입교했으며,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2권을 집필해 주문모 신부의 인가를 얻어 교우들에게 보급했고, 평신도단체인 ‘명도회’ 초대 회장을 지내다 1801년에 순교했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윤지충 바오로’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진산 군수가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또 다른 곳에 이송되어서도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고 문책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전합니다.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는 그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대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는 말씀을 몸으로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의 헌신”이야말로 곧 “순교”입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섬김의 순교”를 통하여 복음이 증거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형제를 존중하게 하소서!
형제를 섬김으로 당신을 증거 하게 하소서.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를 떠받들어 사랑으로 순교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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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관계 안에서 발견하는 하느님의 거처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하느님이 되실 것이다.” (묵시록 21장 3절)
이 말씀은 성경 전체가 향해 가는 가장 깊은 약속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단순히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는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 가운데로 내려오셔서 함께 사시는 ‘관계의 완성’입니다. 묵시록의 마지막 환시는 두려운 심판의 그림보다 먼저 “함께 머무르시는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멀리서 통치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핵심은 어딘가로 도망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과 관계 안에서 그분의 현존을 배우는 데 있습니다.
누군가의 아픔 곁에 머물러 주는 일,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일, 상처 입은 관계를 다시 품어 안는 일, 바로 그런 자리에서 하느님의 거처는 조금씩 세워집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것을 아주 아름답게 이해했습니다. 하느님은 크고 화려한 곳보다 가난하고 비어 있는 마음 안에 머무르십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아진 사람은 타인을 위한 공간이 되고, 그 빈자리 안으로 하느님의 숨결이 들어옵니다. 결국 구원이란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이란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죽음 이후에만 시작되는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미 조용히 열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하느님의 거처는 먼 하늘 끝에 있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눈물 흘리는 이의 곁에, 말없이 견디는 이의 하루에, 서로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손길에, 용서하지 못하면서도 다시 문을 여는 마음에 하느님께서는 조용히 거처하십니다. 그분은 사람을 떠나 홀로 영광받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사람들 사이에 머무르시며 우리의 관계를 당신 집으로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 안에서도 함께 머물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신다면, 우리도 서로에게 작은 거처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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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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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29 04:41
- 한생이 아니라 영생을
“이렇게 엘아자르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제 생각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축일에 마카베오서의
엘아자르 얘기를 독서로 선택한 전례적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엘아자르와 복자 윤지충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 다 제사를 거부하다가 순교하게 되는 점이 우선 같습니다.
그런데 제사 거부 때문에 순교하게 된 거라고 아주 단순화하여 얘기할 수도 있지만
속 내용을 보면 우리가 생각할 점이 많고 복잡합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겉으로는 박해자들이 원하는 대로 제사를 드려주고
마음속으로는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면 되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고,
겉으로 배교해도 속으로 배교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그렇게 해도 됩니다.
우리 박해 시대에도 그런 분이 많이 있었을 것이고,
마음속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도 그런 분들을 배교자라고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꼭 당신을 위해 순교하기를 바라실까요?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수명을 다하고 죽는 꼴을 보기 싫어하실까요?
우리도 우리 자식이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다 죽게 되길 바라지
고생고생하다가 죽고 병들어 신음하다가 죽게 되기를 바라지 않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더더욱 우리가 건강하게 살다가 죽게 되기를 바라시고
당신을 위해 죽는 것을 더 바라시거나 꼭 바라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러므로 순교자의 순교는 하느님의 강요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 때문이고
배교하지 않기 위해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하기 위해서 순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영생을 믿었기 때문에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고통스럽고 슬프기만 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은 일생을 집착하면 영생을 잃고
일생을 포기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믿은 분들이고
더 나아가 자기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곧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랐던 분들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순교 축일에 우리가 깨닫고 믿어야 할 것은
일생 때문에 영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생, 한평생, 한뉘, 이러한 생은 하나의 생입니다.
하나의 생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잃지 말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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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새 예루살렘 공동체는 성령의 숨결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생명력의 성령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
2026년 5월 28일 목요일
하느님의 현존을 갈망하는 어떤 마음에도 성령께서는 당신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 리처드 로어, 루카가 전한 복음
1971년, 리처드 신부님은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대교구의 청소년 피정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습니다. 첫 피정 내내 리처드 신부님은 그곳에 모인 소년들—"운동만 하던 아이들"—이 그저 예의상 자신을 받아주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예수님께서 바라보신 하느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이야기"인 탕자의 비유(루카 15,11–32)를 마치자, 소년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끌어안기 시작했습니다. 리처드 신부님은 성령께서 이렇게 뜻밖에 드러나신 순간을 맞닥뜨리고 적잖이 두려움을 느꼈다고 회상합니다:
저는 한 걸음 물러섰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 강론이 통했다면 감사해야 할 텐데 말이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갑자기 "방언으로 노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그때까지 방언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고, 누가 이끌어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성령께서 흘러넘치고 계셨습니다.
저는 약 십오 분쯤 그 상황을 가만히 숙고하며 참고 기다렸습니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함께해야 할지 몰라 그저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마침내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습니다. "얘들아, 옆방 오븐에 피자를 넣어둘게. 이십오 분 뒤에 그리로 와." 그러나 아무도 제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피자를 오븐에 넣고, 이십오 분 뒤에 꺼냈지만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제시간에 오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주차장을 건너 경당으로 돌아가 문을 열었을 때, 아이들은 모두 성 안토니오 성당의 높은 제대 둘레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내가 수련 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방언으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그 밤 내내 성당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 예루살렘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그 다음 금요일, 많은 소년들이 여자친구들을 데려왔고, 입소문을 타며 공동체는 빠르게 커져 갔습니다. 곧 소녀들 역시 방언으로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달에는 부모님과 조부모님까지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1]
리처드 신부의 친구들인 안드레아스 에버트(Andreas Abert)와 패트리샤 C. 브록먼(Patricia C. Brockman)은, 이 시기 리처드 신부의 사도직 안에서 성령께서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그가 가르치고 피정으로 이끌었던 젊은이들은 복음의 메시지에 압도될 만큼 깊이 감동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목마르고, 그 안에 묘사된 "함께 사는 삶"을 점점 더 갈망하며, 열정적인 젊은 사제였던 리처드 신부님 곁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의 주간 기도 모임은 뜨거운 은사적 기도로 시작되었고, 십대 몇 명에서 출발해 어느 순간에는 나이와 배경이 다양한 천 명이 넘는 이들로 확장되었습니다. 초기 교회의 모든 표징과 기적이 그들의 기도 가운데서 풍성히 피어났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단순한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더 깊은 결속 안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제자도로 살아가기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새 예루살렘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이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을 신뢰하는 교회의 꿈에 자신을 봉헌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든, 하나의 실험적 교회이자 살아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2]
Story From Our Community
“리처드 신부님이 성령을 "우리 삶의 빈틈을 채워 주시는 분"(filling the gaps)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들으며, 약 1년 전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제가 썼던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늘 새롭게 하시는 분,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하느님을 넘어 계신 분. 물처럼 흐르시고, 바람처럼 자유로우시며, 글자 바깥의 가장자리에서 발견되는 분. 구석진 곳에 숨어 계시고, 바라보지 않을 때 보이시며, 부재 속에서도 현존하시는 분,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드러나시는 분….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가 알고 있는 말의 벽을 허물어 주소서. 하느님의 사랑을 새로운 ‘혀’로—새로운 언어로—모든 이에게, 어디에서나 말하게 하소서….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가 어제의 무게에 짓눌린 존재가 아님을 알게 하소서. 오히려 바람이시고, 불이시며, 지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당신과 함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의 자유 속으로 날아오르게 하소서.
—Francis G.
References
[1] Richard Rohr, Essential Teachings on Love, selected by Joelle Chase and Judy Traeger (Orbis Books, 2018), 92–93.
[2] Richard Rohr: Illuminations of His Life and Work, eds. Andreas Ebert and Patricia C. Brockman, (Crossroad Publishing, 1993), xiii.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rman Khadangan,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의 불꽃을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불은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영감을 주며,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를 지탱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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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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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천주교는 사교(邪敎)가 아니라 진정한 길입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4위 동료 순교자 기념일에 다블뤼 주교님께서 쓰신 복자(福者) 윤지충 바오로(1759~1797) 대한 약전을 읽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는 현재 충남 금산군에 위치해 있는 진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산은 대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 그곳에 가면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진산 성지(대전 교구 관할)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의 가문은 여러 정관계 인사들을 배출한 명가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예의 바르고 총명했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25세 되던 1783년 과거에 응시해서 진사(進士)를 취득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물론 가문의 어른들과 주변 사람들의 기대도 컸습니다.
그런 윤지충 바오로가 1784년 겨울 경성에 머물렀을 때,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놀러 갔다가
운명 같은 책을 두 권 발견합니다.
그 유명한 ‘천주실의’와 ‘칠극’입니다.
순식간에 두 권의 책을 읽은 윤지충 바오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됩니다.
두 권의 책을 사본으로 만들어 계속 탐독하였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시작된 하느님과 진리에 대한 갈증은 그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있는 여러 가톨릭 관련 서적들을 읽은 그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좋은 교리교사로부터 예비자 교리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닌데, 가톨릭 관련 서적을 스스로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선포한
윤지충 바오로의 신앙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과 진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그 자발성, 그 적극성 앞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윤지충 바오로의 하느님과 진리, 새로운 세계와의 달콤했던 순간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조정은 조상제사 문제, 신주 문제를 이유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그는 즉시 관아로 자진 출두했습니다.
진산 군수와 윤지충 바오로 사이에 이루어진 심문 기록이 아직도 정확히 남아있습니다.
둘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통해 그가 얼마나 탁월한 신앙인이었으며, 그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군수: “소문이 매우 심각한데, 근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
윤지충 바오로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군수: “그것이 사교가 아니냐?”
윤지충 바오로: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진산 군수는 어떻게 해서라도 윤지충 바오로를 잘 설득해서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군수는 탄식을 터트리며 그를 전주 감영으로 이송시켰습니다.
전주 감영의 감사가 또 다시 묻습니다.
감사: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
윤지충 바오로: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감사: “그렇다면 천주의 종교가 사교가 아니더냐?”
윤지충 바오로: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감사: “너는 죽게 되더라도 이 종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윤지충 바오로: “만약 제가 높으신 아버지를 부인하게 된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디로 제가 갈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 때문에, 견고한 가톨릭 신앙 때문에, 임금 앞에는 반역자, 부모 앞에는 불효자, 친구들 앞에서는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윤지충 바오로는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과 의연함을 드러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에 대한 사형은 신속히 이루어졌습니다.
30대의 곤장을 맞고 난 그에게는 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형벌)이 언도되었습니다.
1791년 12월 8일 그는 33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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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기념일.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불사의 희망>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4-26).”
1) 구약성경 지혜서에 있는 다음 말을 순교자들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지혜 3,2-7).”
순교는 ‘불사의 희망’과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내세와 영원한 생명을 안 믿는 자들의 눈에는 순교자들이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이겠지만, 진짜로 어리석은 자들은 ‘안 믿는 자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또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욕심내고 집착하면서 하루살이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만일에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하고, 그게 이 세상의 전부라면, 믿음과 희망은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큰 세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믿고 있고, 그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과 희망이 고난을 참고 견디는 이유이고, 힘입니다.
2) 순교는 육신의 목숨을 바쳐서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5-26)”
따라서 순교는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것을 얻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순교자들이 박해자들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께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또 순교자들이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치는 것입니다.>
순교는 수동적으로 ‘당하는’ 일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4,17-5,2).”
3) 야고보 사도는 신앙인의 ‘인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야고 5,7-8).”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은, 농부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얻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순교만 놓고 생각하면, 모든 신앙인이 다 순교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순교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입니다.
순교는 옛날이야기만은 아니고, 오늘의 우리 일입니다.
그리고 순교는 이론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초인적인 모습으로 순교한 분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한 분들의 작은 이야기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자신이 신앙인으로서 실행하고 있는 작은 일들이 쌓여서 위대한 열매가 된다는 것을,
즉 영원한 생명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작은 씨를 심는 것과 같은 작은 일로 시작하고, 진행하다가, 끝까지 가서 보면,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위대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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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2:20 추가
요한 12,24-26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그가 순교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조상들의 제사 문제였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화를 일종의 ‘미신행위’로 여겨 금지했는데, 그로 인해 양반층에 속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윤지충 바오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위패를 불살라 버리고 천주교 예절로 장례를 치렀고, 그로 인해 투옥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를 문초했던 전라 감사는 후에 윤지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형문을 당할 때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791년 12월 8일 윤지충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얼굴로 군중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하면서 씩씩하게 나아갔다고 합니다. “예수, 마리아”를 여러 번 부르며 태연하게 칼을 받아 서른 셋의 나이에 순교하였고, 9일 만에 친척들이 시신을 거두었는데 전혀 부패하지 않았고 방금 피를 흘린 것처럼 형구에 묻은 피가 선명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그가 흘린 순교의 피는 보는 이들의 믿음을 깊어지게 만드는 구원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 하나가 땅 속에 심어지면 곧 싹이 터서 자라납니다. 그러면 원래 ‘몸’이었던 부분은 ‘떡잎’으로 변해 그 씨앗이 땅 속에 싹을 틔우고 자리잡는 데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주고 사라지지요. ‘몸’의 입장에서 보면 그 과정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몸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씨앗 자체가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 씨앗이 가진 ‘생명’이 나무라는 더 크고 가치있는 존재로 자라나 다른 수많은 생명들이 깃드는 터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씨앗이 이 과정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요? 내 몸이 사라지는 게 싫다며 끝까지 씨앗인 채로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영원히 씨앗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정한 기간 내에 땅에 심어지지 않으면 볼 품 없이 말라 비틀어져 한 줌 먼지가 되고 말지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그 존재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고 마는 겁니다. 지금의 삶을 조금 더 연장하려다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 자체를 잃고 마는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제대로 죽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주님 뜻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이 한 몸 기꺼이 썩어도 괜찮다는 굳은 각오를 지녀야 합니다. 그런 각오로 주님과 함께 죽는다면, 그분과 함께 부활하여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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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9.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 12:20 추가.
숨영성 묵상글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한다는 것과 미워한다는 것?....
만약 많은 신자들에게 호소력 있는 강론을 하고 싶다면, "왜 여러분은 자 목숨을 미워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은 아마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제목 자체가 너무 무겁고 우울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에는 어둡고 힘든 소식이 넘쳐나는데, 굳이 "자기 목숨(삶)을 미워하라!"는 내용의 강론을 들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또, 사람들 대부분은 "어떻게 하면 내 삶(목숨)을 미워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하며 살지 않습니다. 자기 삶을 긍정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시대에, 이런 제목은 전혀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그럼에도 제가 이 제목이 좋은 강론 제목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이 묵상하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루 한 번 결심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새롭게 선택해야 하는 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지금 이 순간 더 나은 삶을 사는 방법" 정도의 조언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으로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셨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 실천해야 하는지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가르침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되지만, 주님께서 같은 메시지를 여러 번 반복하실 때에는 더욱 깊이 귀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시작하시며 우리에게 일종의 경고를 주십니다. 이는 곧 "깨어 있어라. 이 말씀을 놓치지 마라. 깊이 생각해 보아라.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가르침을 복음서 곳곳에서 반복하십니다. 마태 10,37-39; 16,24-27; 마르 8,34-38; 루카 9,23-26; 14,27; 17,33 등에서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같은 진리를 전하십니다. 그중 마르코 복음 8,34-38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분을 따르려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자기 생명을 구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당신과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길이 참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의 삶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 드러날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원문 그리스어에서 앞에 두 번 등장하는 "목숨"은 프쉬케(psyche)로, 흔히 "영혼" 또는 "목숨(생명)"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생명"은 조에(zoe)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특별한 소명을 받은 선교사나 순교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보편적 명령입니다(마르 8,34).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날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과정, 곧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과정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들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로 들어선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한다는 것"은, 오직 현세만을 바라보며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라고 하실 때, 그 의미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이를 분명히 하십니다(루카 12,19-21). 그 사람은 풍요를 누리며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말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세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세상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광고와 소비문화는 끊임없이 "이걸 사야 행복하다."라고 속삭입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도 그런 것들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실제로 삶을 편리하게 해 줍니다. 저 역시 컴퓨터와 인터넷 덕분에 이렇게 강론을 준비하고 많은 분과 나누는 일이 훨씬 더 쉬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뜻보다 더 중요해지는 순간, 사도 요한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라고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영원한 생명을 지닌 이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12,25b)고 하실 때, 그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공로를 쌓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 의로움이나 선행에 대한 의존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중심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관절염, 허리 통증 등의 육체적 아픔이나 힘든 배우자 등과 같이 정신적으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고통이나 불편함의 상징이 아니라, "죽음의 도구"였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집착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자기 실현, 자기 만족, 세속적 성공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곧 떠날 이 세상을 위해 살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기부정은 어떤 영적 황홀경이나 일회적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드디어 해냈다! 이제 더 이상 자기부정은 필요 없다!"는 식의 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을 죽이는 일은 평생 계속되는 싸움이며, 매일 새롭게 선택해야 하는 길입니다. A. T. 피어슨(Pier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중심적 삶을 벗겨내는 것은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습니다. 껍질을 벗길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자주 무의식적으로 빠지는 이런 세상적 정신구조를 벗겨내고, 다시, 또다시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두고 그 뒤를 가까이서 따르려는 마음을 먹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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