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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옴
출 34:27-35
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3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출 34:27-35 / [열 가지 명령을 주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네가 지금까지 너에게 내린 이 명령을 기록하여라. 내가 이 명령을 계약 조건으로 삼아 너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는다.' 28) 모세는 거기에서 여호와와 함께 40일 밤낮을 지내면서 물도 마시지 않고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다. 모세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계약의 기초가 되는 열 가지 명령을 두 돌판 위에 기록하였다. 29) [모세가 얼굴을 가리다] 모세는 손에 증거판 두 개를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다. 산에서 내려올 때, 하나님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자기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세는 알지 못하였다.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모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두려워하였다. 31) 모세가 아론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모세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32) 그러자 그제서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에게 다가갔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33)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 이야기한 뒤에 자기 얼굴을 가리개로 가렸다. 34) 모세가 여호와와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는 가리개를 벗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쓰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일이 이야기하였다. 35)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께 말씀드리러 들어갈 때까지 다시 가리개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하나님을 대면한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고 동시에 모세에게 주신 말씀의 권위를 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다(27-29) 산에서 40주야를 보낸 뒤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언약 회복의 상징으로 주신 돌판을 들고 내려왔습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얼굴은 빛났습니다. 이 빛은 출애굽기 24장 16-17절에서 그가 원래의 돌판을 받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산 위에서 빛나던 여호와의 영광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것입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은 모세가 정말 하나님을 만났음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모세는 자신의 얼굴이 빛나고 있는 줄 알지 못했습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더라(30-33) 모세는 백성들이 광채 나는 자신의 얼굴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먼저 사람들을 안심시킨 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난 광채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심을 갖고 더 주의 깊게 듣도록 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스라엘에게 모두 전한 뒤에야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더라(34-35) 모세는 백성들을 염려하여 그들 앞에 설 때에는 수건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려 광채를 차단했습니다. 모세가 수건을 벗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와(33:7-11) 나와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였습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의 광채와 빛으로 생생하고 강렬한 느낌을 사람들에게 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로움과 거룩함과 권위를 충분히 드러낸 일입니다. 모세는 말씀을 전한 후에는 얼굴의 광채를 감추기 위해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적용: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표상과 관련해 모세의 얼굴 광채를 보며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친히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축도문을 통해 당신에게 얼굴의 빛을 비춰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민 6:25). 바울이 말한 없어질 광채와 영원한 광채에 대해 묵상하고 나누기 바랍니다(고후 3:16, 18).
위기를 만나는 순간 그것이 위험이 될 수도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위기를 만나면 이제까지 단단하게 굳었던 마음과 습관이 부드럽게 변하여 힘을 약간만 가해도 새로운 마음과 습관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위기를 만나는 순간 영의 눈이 열려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찾게 되며,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위기의 순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그 위기는 아름다운 기회로 이어져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모세의 빛난 얼굴
출애굽기 34:27-35
우리 사람의 여러 지체들 중에 이 얼굴처럼 중요한 것은 다시없는 줄로 압니다. 그 사람의 얼굴은 곧 그 사람입니다. 얼굴을 보고서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 사람의 얼굴은 곧 그 사람의 이미지입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요긴한 오감의 작용이 바로 얼굴에서 이루어집니다. 얼굴은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창문이 된다는 점에 있어 얼굴은 그 사람의 전부요, 그 사람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바로 얼굴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참으로 정교하고, 다양하고, 풍부한 인격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수많은 생물 중에 하등 동물에는 얼굴이 없습니다. 여러 짐승에게 얼굴이 있다고 하지만, 생존을 위한 기능 외에 다른 가치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름답고 균형미가 있고, 성숙한 모습의 얼굴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얼굴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천하에 없는 엄청난 은혜를 받고 있다고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얼굴 모습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의 얼굴 모습은 곧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냐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시내산에 올라가 40일을 지내며 금식하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주신 증거의 두 돌판 곧 십계명이 새겨진 판을 손에 들고 내려오는데 그 얼굴에 광채가 나므로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웠다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 어려울 정도로 빛이 났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타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1. 모세는 오로지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때 얼굴에 빛이 났습니다.
많은 유력한 성경학자들은 본문에서 모세의 금식이 신명기 10장에 이어서 세 번째 40일의 금식이었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원래부터 얼굴에 빛이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로 성장할 때는 그의 얼굴에 교만한 빛이 있었습니다. 또한 애굽 사람을 쳐죽일 때는 혈기의 빛이 있었습니다. 미디안에서 양을 칠 때에는 그 얼굴에 고독과 근심의 빛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신앙의 빛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40일 동안 물도 음식도 입에 대지 않고 시내산에 올라가 금식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나게 된 이유는 그의 마음 전부를 오로지 하나님께로 향하였기 때문입니다.
2.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함을 통하여 빛이 났습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기도를 했습니다. 40일 금식이 세 번째입니다. 이렇게 힘든 시련의 기간을 참고 난 사람의 얼굴이 별로 좋지 못하였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피곤한 모세에게 주님은 이상한 광채로 그의 얼굴을 빛나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의 얼굴에 빛이 납니까?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에 빛이 나는 것입니다. 은혜의 빛, 기쁨과 감사의 빛이 넘쳐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기도는 어떠한 기도였습니까? 모세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백성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호렙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절하며 불복종하는 그들을 멸망시키지 말 것을 한숨과 눈물과 간곡한 호소로 여호와 앞에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에게 있어서 얼마나 좋은 일이며 희망적인 일입니까? 모세의 자녀들이 자라서 한 민족을 이루고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와 같은 영광을 제쳐놓고 오직 주 앞에 나아가 "이민족을 멸하려고 하면 차라리 주의 거룩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32:32)라고 간절히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 대신에 자기의 이름이 기록되기보다는 차라리 자기의 희생으로 그들의 이름이 보존되기를 간구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웃을 위한 결사적인 기도는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나게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얼굴이 인애로 빛이 나려고 하면 내 가정, 내 이웃의 죽은 영혼들, 하나님을 모르고 떠나있는 영혼들을 위하여서 모세처럼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려 달라고 하는 결단과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께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뿐 아니라 신약의 모세라고도 할 수 있는 사도 바울도 자신의 형제와 친척을 위하여 결사적인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롬9: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간절한 중보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웃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되 특히 불신 가족이나 이웃들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들의 얼굴을 빛나게 하십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고 또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고 환난과 사고 많은 땅위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켜주심에 대한 감사합시다. 아울러 모세와 바울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까지라도 아끼지 아니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나아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합시다. 불신 영혼들을 부둥켜안고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몸부림치며 결사적으로 기도할 때 피차 그 얼굴은 빛이 나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계명,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올 때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얼굴이 어떻게 빛이 날 수 있겠습니까? 시편기자는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① 하나님의 말씀은 절망자에게 소망을 줍니다.
② 하나님의 말씀은 고통과 슬픔에 사로잡힌 자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빛입니다.
③ 하나님의 말씀은 좌절과 포기의 자리에서 담대함과 용기를 얻게 하는 능력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마음을 오로지 하여 하나님께로만 향하였습니다. 그리고 반역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결사적으로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아가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였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얼굴을 찾아보니 참으로 다양한 인간사를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범죄하고 타락한 이스라엘의 얼굴은 숯보다 검은 얼굴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4:8에 보면 "이제는 그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 가죽이 뼈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거리에서 알 사람이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민족을 위한 마음에 수심으로 가득한 얼굴이었습니다. 그가 바사의 수산궁에서 왕에게 술을 따라 드릴 때에 왕이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느 2:2)라고 합니다. 느혜미야는 나라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황무해지고 성문이 다 불타 없어졌으며 민족이 뿔뿔이 흩어졌으니 어찌 그 얼굴에 수심이 없겠습니까? 느혜미야는 왕의 후한 사랑을 받아 이스라엘의 총독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성을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은 어떠한 얼굴이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인간으로 부끄러운 얼굴을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죄악에 사로잡히고 양심에 가책을 받으면 그 얼굴은 어두워지고 부끄러운 얼굴이 되고 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먼저 밝은 얼굴이어야 합니다. 항상 기쁘고 웃음이 가득하고 온유함이 흘러야 합니다. 이 죄악 세상에 살아가지만, 우리 주님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보니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매사에 긍정적이고, 얼굴은 해같이 빛나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은 소망으로 가득 차 있는 얼굴이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얼굴을 보니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삼상 16:12)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속 중심을 보시는데, 다윗을 보니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총리가 되신 요셉의 모습을 보아도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확신이 넘치고 소망이 있어 좋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인격과 성품은 반드시 그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 인간을 하나의 기계로 찍어내서 똑같이 만드시지 않고 모두가 다른 성품과 인격으로 창조하시고 얼굴의 모양도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얼굴은 우리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얼굴 속에 나타나는 인상, 얼굴 속에 비치는 인격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격이 성숙해지면 인상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흐리게 되면 얼굴이 흐리게 되고 마음이 즐거우면 표정도 밝아질 수가 있습니다.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 얼굴에 성실한 향기가 풍겨납니다. 그러나 추한 생각과 더러운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얼굴에서는 자연히 비열한 인상이 풍겨지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속이려야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얼굴은 영광스러운 얼굴입니다.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주는 얼굴입니다. 마음에 양심이 살아있고 평화가 있고 그 마음에 사랑이 있는 얼굴이 영광스러운 얼굴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스러운 얼굴은 순교자 스데반의 얼굴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천사의 얼굴이 된 것입니다. 천사의 사랑을 가졌기 때문에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로 나타난 것입니다. 얼굴은 그 사람의 인격이며, 그 마음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원형인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배우고 모방하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을 하고 주님과 함께 기도하고 주님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주님을 모방하고 닮는 생활인 것입니다.
본문의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사십일 사십 야를 지냈습니다. 그럴 때 모세의 얼굴에는 광채가 났습니다. 바라봄의 법칙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진리의 광채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그 얼굴을 들어 주실 때 우리에게는 참된 평안이 있고, 진리 안에 거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제사장의 축복 가운데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 얼굴 빛 아래서 살아야 합니다. 시편 시인은 고백합니다. "내가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5)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변화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눅 9:29).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세상과 짝하면 세상을 배우지만,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사십 주, 사십 야를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시간을 내야 합니다. 신앙을 위한 시간을 쪼개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미 들었던 말씀이었고, 한 번 기록되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에 분노하여 산 아래로 그 돌판을 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이제는 모세가 돌판을 깎아 가지고 산으로 올라갔으며, 하나님께 친히 말씀하시면서 그 돌판에 새겨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나의 마음 중심에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알아서 새겨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자신도 그 말씀을 들고 살기로 하였습니다. 그럴 때 그의 얼굴은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빛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얼굴을 가꾸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얼굴을 갖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성도의 아름다운 얼굴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데서 출발합니다. 주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령 충만 사람이 되어 기도하며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과 얼굴은 더욱 아름다워지기 바랍니다.
모세처럼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찾아오고 우리의 얼굴이 은혜의 빛으로 빛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출애굽기 34:28-35, 고린도후서 3:13-18 / 피영민 목사
서 론
레위지파의 모세는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백성들은 그 우상을 섬기며 먹고 마시고, 벌거벗고 춤을 추는 모습을 산중턱에서 보고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손가락으로 쓰신 두 돌비를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를 내지 않으셨고 한마디도 야단을 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의 분노는 의로운 분노였고,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돌비가 깨져버렸으니 하나님이 모세를 다시 산꼭대기로 부르셔서 다시 두 돌비를 깎아 만들어 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40주야를 떡과 물도 마시기 않고 기도하면서 두 돌비의 십계명을 다시 받아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40주야를 물도 마시지 않고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모세를 특별히 보호해주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가 두 돌비를 손에 들고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자신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모세는 깨닫지 못했지만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에 무서워 모세의 근처로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이에 모세가 백성들을 불러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전하며 하나님은 백성을 괴롭히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자비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니 우상을 만들지 말고 우상을 섬기지도 말며 일 년에 세 차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얼굴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3대 절기인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 가르친 후에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 수건을 덮습니다. 사람들의 두려움 때문에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기도를 하러 갈 때에는 수건을 벗었고 나올 때에는 다시 수건을 씁니다. 오늘은 모세의 얼굴에 있던 광채와 그 영광은 어떤 것이고 그 수건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34장의 사건을 본문으로 사도 바울이 설교한 내용이 고린도후서 3장입니다. 이 본문의 내용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설교를 중심으로 출애굽기 34장에 나오는 사건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Ⅰ.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어떤 것인가?
모세의 얼굴에는 영광의 광채가 났습니다. 제가 신학교 교수를 할 때 어떤 부흥강사가 아주 많은 은혜를 끼친다고 하여 학생들을 위해 모셨습니다. 그분은 검은 안경을 쓰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설교하시는 분이 왜 검은 안경을 쓰셨습니까?”하고 물으니 자신의 눈에서 광채가 나기 때문에 학생들이 바라보면 눈이 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살던 시대에 하나님을 알던 백성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이방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능력이 어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방의 백성들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오직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만 알았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압니다. 여호와 이외의 다른 이름의 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또한 여호와의 능력도 경험했습니다. 그 당시 전 세계 최고의 왕인 애굽의 바로 왕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였고, 홍해가 가로막아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 200만이 마른 땅을 건너는 것처럼 건넜습니다. 엄청난 능력인 것입니다. 또한 200만 백성이 광야에서 목이 말라 죽게 되었을 때에 반석에서 생수를 먹게 하셨습니다. 배고파 죽게 되었을 때에는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 먹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이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의 말씀을 받을 때에 하늘에서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 죄라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어떤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제사장이 되어야 하고, 어떤 종류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과 기도를 할 때에 친구와 대화하듯이 기도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가 누리는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인 것입니다. 사람의 영광도 대단하기는 합니다. 봉황이 수놓아져 있는 자리에 대통령이 앉는 모습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사람의 영광도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더 대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를 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고린도후서 3장 7절과 11절을 보니 모세에게도 영광이 있지만 그 영광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3장 9절에 나오는 정죄 직분도 영광이 있다고 합니다. 영광이 있기는 하지만 모세의 영광은 없어질 영광입니다. 즉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고후 3:7),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고후 3:11). 모세의 영광은 ‘사라질 영광’(Fading of Glory)입니다. 빛이 환하게 켜져 있다가 점점 어두워지다 완전히 꺼져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라질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광스러운 백성이요 사람이지만 그 영광은 사라질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고후 3:10). 어두울 때에는 촛불 하나도 영광스럽습니다. 빛이 환합니다. 그러나 낮에 태양이 떠 있는 곳에 촛불을 켜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양이 뜨면 촛불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랜턴은 밤에 필요한 것이지 낮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영광스러운 빛이라고 해도 더 큰 영광이 오게 되면 작은 영광은 아무 의미가 없고 쓸데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직분은 의문의 직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은 영의 직분이고, 모세의 직분은 정죄의 직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은 죄인들에게 의를 주는 의의 직분이기 때문에 모세의 영광은 사라질 영광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영원한 영광인 것입니다. 구원의 방법도 모세의 방법은 짐승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리는 죄 사함의 방법으로 의식법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는 예수를 믿음으로 사람이 죄의 모든 책임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는 큰 광명인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영광과 그 광채는 흐릿한 것이고 점점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은 영원한 영광인 것입니다.
도덕법, 즉 십계명이 쓸데없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십계명을 어긴 죄를 제사라는 의식을 통해 용서를 받는 의식법이 쓸데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의식을 통해 받는 죄 사함의 영광도 영광스럽지만 그 영광은 사라질 것이고, 약한 것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영광은 영원한 영광이고, 없어지지 않는 큰 영광이며 참된 영광입니다. 모세의 광채는 영광스럽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영광과 광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없어질 영광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한 영광을 받은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가졌습니다. 여호와만 경외하며 살면 됩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경외하면 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광은 영원한 영광입니다. 영원한 영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광은 모세의 영광보다 더 높은 것입니다.
Ⅱ. 모세 얼굴의 광채를 수건으로 덮은 것은 무슨 의미인가?
모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로 인해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출애굽기 34장의 사건과 고린도후서 3장의 바울의 해석은 약간의 모순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이유는 모세의 얼굴 광채로 인해 백성들이 모세에게 다가오기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없애고자 수건으로 가린 것으로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3장의 바울의 해석은 그와 다릅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후 3:13). 바울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율법의 영광은 일시적인 영광이고 사라질 영광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일시적인 영광에 주목하지 말고 앞으로 다가올 영원한 영광, 복음시대에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라는 목적으로 수건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모순된 것으로 보이지만 모순이라고 생각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호 보완적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모세가 백성들로 하여금 가까이 오지 못하는 두려움을 막기 위하여 수건을 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여호와 앞에 들어가 하나님과 말씀을 나눈 후에 다시 나와서도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들어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야 너의 얼굴에 광채가 난다고 하여 자랑하고 좋아하지 말라. 너의 얼굴에 난 광채를 띄고 돌아다니며 잘난 척 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의 얼굴에 있는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기 때문이다. 너의 얼굴에 있는 영광은 다른 사람이 부러워해서는 안 되는 영광이다. 너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하도록 수건을 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고린도후서 3장의 내용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그림자요 예표일 뿐이고 참 영광은 장차 올 영광이라는 것을 깨닫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참 영광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를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건을 벗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있던 수건이 이제는 유대인들의 마음속으로 이사를 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벗겨지지 않는 수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 3:14-15). 모세의 얼굴에 있던 수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덮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잘 압니다. 자신의 역사와 문화, 지리, 왕들도 잘 압니다. 어려서부터 구약성경을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십 번 수백 번 읽어도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구절구절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수건으로 덮여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고, 랍비들이 많은 주석들을 적어도 성경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없어질 영광에 주목하지 말고 참된 영광을 바라보라는 목적으로 쓴 수건이 도리어 없어질 영광을 자랑하고 참된 영광을 볼 수 없게 만드는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선한 목적으로 모세가 수건을 섰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니 이것을 바라보지 말고 앞으로 올 영광을 주목하라고 섰으나 도리어 그림자와 같은 영광을 바라보고 도리어 선한 목적이 왜곡되어 악한 목적으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탄의 역사입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이 세상의 신은 마귀입니다. 마귀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 불신자들의 마음을 가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리고 복음의 광채와 영광이 비쳐도 짙은 커튼으로 가리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영광의 복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앱 4:18). 마음의 수건이 가려지기 때문에 마음이 굳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며 그리스도의 영광의 본체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수건이 가려 있으면 복음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광과 복음의 광채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왜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도 모르며 죽고 난 후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사후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무엇이 악령의 역사이고 무엇이 성령의 역사인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한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수건이 마음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눈을 가리고 영적인 어두움에 있는 사람입니다. 불신자들은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어둡기 때문에 삶도 어두운 것을 좋아합니다. 술집도 어두운 곳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낮보다는 밤에 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두운 곳에서 안정을 느끼고 어두움에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마음의 눈이 가려져 영적인 어두움에 사는 것은 괜찮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영원한 어둠인 지옥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은 결국 영원한 어둠인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세의 무궁한 시간은 영원한 지옥에서 이를 갈며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음의 수건을 제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지옥은 거짓이 아닙니다. 이것을 거짓이라 하는 사람은 어둠에 있는 자요, 수건이 가려진 사람입니다. 성경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읽어도 깨닫지 못하며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는 것은 마음의 수건이 가려져 여전히 어둡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의 수건을 제거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마음의 수건이 제거되어야 그 다음부터 영적인 광명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Ⅲ. 불신자들이 마음의 수건을 제거하면 무엇을 얻게 되는가?
그렇다면 불신자들의 마음의 수건을 제거하면 무엇을 얻게 될까요? 바울은 세 가지를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모두 L자로 시작합니다. 첫째로 마음에 빛(Light)을 얻게 됩니다. 둘째로 마음에 참된 자유(Liberty)를 얻게 되고,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Likeness)을 얻게 되어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먼저 마음의 수건이 제거되면 마음이 빛을 얻게 됩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마음의 수건이 제거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큰 빛이십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9~10).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이시며 큰 빛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빛이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마음속에 빛을 비추어주시는 것입니다. 고로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빛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알게 되고 영적인 이해력을 얻게 되며 복음을 깨닫게 되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사후세계에는 어떤 영광이 있는지를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에 빛을 비추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아무리 권력이 많고 돈이 많아도 마음의 수건이 가려지면 영적인 면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읽어도 졸리기만 하며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글만 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3).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입니다. 그러나 어둠에 처한 죄인들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비취게 된 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사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건을 제거하게 되면 먼저 빛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은 빛을 보셨습니까? 아직 빛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들은 아직 보지 못한 것입니다. 내 영혼에 빛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분은 아직 받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의 수건을 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복음의 빛이 들어와 영원히 빛을 가지게 되면 그때부터 성경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합니다. 빛이 없을 때에는 성경을 읽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빛을 받게 되면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게 됩니다.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예배를 드리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빛을 받은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을 가지게 되고 아무리 언어에 뛰어나고 문법의 도사일지라도 마음의 빛을 받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의 수건을 제거하면 사람은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정치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방종적인 자유도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자유입니다. 마음의 수건이 제거되면 지옥으로부터의 자유, 멸망으로부터의 자유, 심판으로부터의 자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어둠으로부터의 자유, 정죄로부터의 자유, 마귀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유를 참 자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영적으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마귀에 묶여있습니다. 속에 귀신들이 득실거리기 때문에 귀신이 시키는 대로 살게 됩니다. 귀신이 죄를 범하게 하는 것입니다. 숯불을 가슴에 안고 데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음녀를 가슴에 품고 멸망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죄악이 즐겁다고 합니다. 어둡기 때문에, 마귀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마귀가 우리에게 명하여도 순종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무엇이기에 나에게 명령을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죄에 끌려다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사탄을 쫓아내면 되는 것입니다. 참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수건이 제거되면 자유를 얻게 됩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하여 영생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에도 점점 영광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이를 성화라고 합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천국으로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죽지 않고,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추하지 않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의 수건이 있구나. 복음을 들어도 믿어지지 않고 거부감이 드는 것을 보니 내 마음에 수건이 있구나. 이것이 나를 죽이게 하는 것이구나.”하고 깨닫는 사람은 그 수건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건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요?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 3:16). 유대인들도 주 예수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어지게 됩니다. 사람이 자신의 영혼에 스스로 빛을 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가 마귀의 올무에게서 자유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천국에 가서 영광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나는 내 힘으로 영광을 얻을 수 없으니 내가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 예수께로 갑니다.”하고 주 예수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고 영원의 빛과 자유와 영광스러운 영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34장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수건이 가렸다면 버리시고 예수께로 오셔서 영원한 빛을 받으시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의 얼굴 광채
출 34:28-35 / 임덕순 목사
모세는 두 번째 돌비를 받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첫 번째 돌비는 하나님께서 직접 돌 판까지 만들어 그 위에 당신의 약속과 명령을 새겨주셨지만, 두 번째 돌 판은 모세가 준비하여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두 번째 돌 판은, 첫 번째 돌 판을 이스라엘이 감당하지 못하여 깨뜨렸기 때문에 다시 새겨주시는 것이고, 돌 판도 모세가 만들어가지고 올라간 것이기 때문에 처음 받을 때보다 여러모로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돌 판을 받아가지고 오는 모세의 모습은 처음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첫 번째 돌 판을 받아 가지고 올 때에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없었는데, 두 번째 돌 판을 받아가지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는 광채가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 인사하면서 얼굴이 어둡다거나 밝다고 표현하는데, 모세의 얼굴은 밝은 정도가 아니라 광채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 광채가 얼마나 눈이 부셨던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모세에게 얼굴에 수건을 쓰고 나와 달라고 부탁해서 모세가 그들을 만날 때는 수건을 써야 했습니다.
1.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빛나는 모세의 믿음을 나타내는 광채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사랑해서 40일씩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올라가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친근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다 무서워하는 왕이라 할지라도 그 왕이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것을 아는 아들은 왕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 품에 달려가 안깁니다. 그러나 왕을 왕으로만 아는 백성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직접 뵙는 것은 고사하고 모세가 전해주는 말씀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고전15:40-41에서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라고 하여, 사람들이 장차 하나님 앞에서 누릴 영광이 사람마다 다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친밀한 삶을 사느냐,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받들어 순종했는가로 그의 영광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40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온전히 금식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오기 위해서 그런 고생을 두 번 씩이나 했습니다. 40일 동안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는 수고를 하면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율법을 기록한 돌 판을 받아온 것입니다. 마치 암탉이 알을 품고 있을 때 모이도 먹지 않고 가끔씩 내려와서 물만 마시고 다시 둥지에 올라가서 알을 품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그 율법을 전해주기 위하여 그 고생을 감수하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백성들의 삶에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백성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라면 자기의 생명을 잃을지라도 좋다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그가 말씀을 받아가지고 내려올 때 40일이나 굶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치거나 피곤한 모습이 아니라 승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광채가 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모하며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채는커녕 그 광채를 바라볼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는 광채였습니다. 모세가 처음 율법을 받으러 산위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은 셈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모세를 기다리지 않고 금송아지를 선택함으로서, ‘모세 너는 우리에게 필요 없는 존재야’ 라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런 일을 당했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그동안 모세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애굽 왕의 위협을 견뎌내며 생명 걸고 싸웠고,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용서를 받아내고 인도했는데, 그들이 40일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았을 때, 오만가지 정이 다 떨어져서 될 대로 되라고 하면서 그날로 그들을 떠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생명 바쳐 충성한 직장이라도, 어느 날 상사가 자기 방으로 불러서 이제 당신은 필요 없으니 우리 회사를 떠나달라고 한다면, 배신감이 들어서라도 당장 떠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그런 배신을 당하고도 그들을 떠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떠나라고 떼밀어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부모입니다. 자식들이 아무리 부모를 배척할지라도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배신을 하고 속을 썩여도 그들을 버릴 수 없고 품에 안아야 하는 것이 주의 종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자기를 버렸지만 모세는 자기 백성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그들을 위해서 울며불며 이들을 버리지 말라고 간구했고, 결국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냅니다.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주시겠다고 하시면서 그들과 다시 약속을 맺어주겠으니 돌 판을 만들어서 올라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 백성들이 살게 된 것입니다.
생명 바쳐 기도하던 모세는 얼마나 감사하고 좋았을까요?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40일 금식이 얼마나 힘든지 이미 경험했으면서도 돌 판을 만들어가지고 다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그 말씀의 설명을 들었고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돌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만나러 지금 내려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자기가 기도한 것을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자기 백성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너무나 좋았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했지만 배고픈 줄도 몰랐고 기쁘기만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것 같았을 것이고, 그의 얼굴에는 환희가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의 광채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돌 판을 받아서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광채가 빛났던 것입니다. 그의 얼굴에 빛나고 있는 그 광채는 모세가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빛나는 광채였습니다.
우리는 내 혈육, 내 가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임을 아십니까? 내 가족이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살게 하려고 모세처럼 울부짖어 기도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내 가족 중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그렇게 감격해 보셨습니까?
교회는 다니지만 그 가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껍데기 신자일 뿐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위해서 하나님께 모세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과 민족의 구원을 모세처럼 갈망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우리 민족이 주님을 믿기 시작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얼굴에 광채가 날 정도로 기뻐하고 감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식이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면 날아갈듯 기뻐하며 자랑하지만, 내 가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소망 없이 사는 것에는 감각도 없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간구도 없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얼굴에 있었던 광채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29) 모세의 얼굴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십 일간 산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내려오는 모세의 모습은 기진맥진하여 지친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고 환희에 차 있었으며, 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부럽지 않습니까? 우리 얼굴에는 언제 그런 광채가 날 수 있을까요?
셋째로,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그의 직분이 영광스런 직분이라는 증명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분은 천사 보다 나은 직분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기준을 가져다준 사람입니다. 그것은 율법인데, 율법을 잘 알고 나면 나는 죄인이라는 심각한 깨닫게 되고 자기를 구원할 구주를 찾게 됩니다. 이 율법이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구주를 찾게 만들기 때문에 율법은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신약시대에 복음을 믿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기본자세가 무엇인지를 알려준 율법의 말씀들을 무시하고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려고 그 얼굴에 광채를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는 율법을 무시하지 못하고 모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모세의 얼굴에 광채를 주신 것입니다.
이 모세의 율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복음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기준을 알려주어 자신이 그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절망하게 하지만, 복음은 구제불능인 너희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형벌을 받아주셨다. 그분을 너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과 사랑을 누리게 된다고, 하나님의 속마음을 알려주고 그의 사랑을 받아 누리게 해줍니다. 따라서 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훨씬 영광스러운 직분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3:7-9에서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라고, 전도자의 직분이 얼굴에 광채가 났던 모세의 직분보다 더 영광스럽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새겨주신 돌비를 안고 내려오는 모세의 모습은, 마치 아기를 출산하여 안고 나오는 어머니의 얼굴과 같았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가 기쁨, 성취감, 자신감에 차 있는 것처럼 모세는 그런 모습으로 돌비를 안고 내려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수고함으로서 자기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귀하고 보람 있는 일인지를 모세의 얼굴에 영광의 광채를 주심으로 증명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정말 영광스러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남들보다 윗자리에 앉고 남들보다 큰 권력을 누리고, 남보다 영광을 누려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손해도 무릅쓰면서라도 영혼구원을 위해서 몸부림치며 하나님께 매달려 결국 그들을 구원해 내는 전도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은 영원히 멸망할 죄인을 살려 천국으로 올려놓고, 마귀의 종이 되었던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가진 영광은, 잠간 얼굴에서 빛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빛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자기가 지은 죄를 벗을 길 없고 영원한 미래를 보장받을 길 없는 사람들에게 자기 목숨을 버려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상속자가 되게 해주신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이 놀라운 소식이 복음입니다. 따라서 가장 영광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 전도자의 직분은 가장 광채 나는 직분입니다. 다니엘 12장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하늘의 별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자, 백성들은 모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을 만날 때는 얼굴에 수건을 감고 나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왜 모세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갑게 맞이하지 못하고, 도리어 어색하고 두렵게 느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죄를 밥 먹듯이 짓던 사람이 성전에 올라오면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두려워서 손으로 얼굴을 가려보고, 고개라도 숙여야 조금 편안해집니다. 속된 사람은 세속적인 환경은 친근하게 느껴지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어떻게 해서든지 가려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편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걸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날 때 수건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불편했으며 두렵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 수건을 덮어씌우고야 마음이 편했습니다.
2.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에 씌운 수건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눈과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 벗어버려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수건이 있습니다. 마음을 덮고 눈을 가려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고 허망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아직도 말씀을 읽으면서 그 얼굴에 수건이 벗어지지 않은 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고후3:15-17) 우리는 이 수건을 어서 벗어야 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자유입니다. 복음은 죄에 얽매이고 편견과 무지와 두려움에 매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사랑을 깨닫게 하고 두려움과 얽매임에서 풀어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 내가 쓸데없는 것에 얽매였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엉뚱한 것에 얽매여 살았구나. 과거에 내가 지은 죄가 아직도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가계의 저주가 아직도 내 가정에 흐르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상처가 아직도 내안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내가 과거에 지은 죄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이미 용서받았고, 내 안에 있던 상처는 이미 치료되었고 다만 희미한 흉터만 남아있을 뿐이며, 가계의 저주라는 것이 아직도 내 가정을 얽어매고 있어서 그것을 끊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주님으로 모신 순간부터 그것들은 이미 내게서 떠나갔다는 것을 몰라서 그동안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고 힘들어 했구나.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적신이나 기근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했는데 그 말씀을 잊어서 나는 그동안 얽매인 삶을 살았구나.’ 하고 자유 함을 얻는 것입니다.
아직도 내 가계에 저주가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나의 하나님으로 믿기 시작한 그날부터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직도 내 안에 상처가 남아있어서 내적 치유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몸에는 지금 상처가 하나도 없이 깨끗합니다. 물론 과거에는 상처입고 다친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상처라도 한주일 정도면 거의 다 나았고 몇 달이 지나면 흔적도 별로 남지 않습니다. 영적인 상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슴 아픈 일이 있었어도 기도하고 용서하고 주님께 맡겨드리고 잊었으면 이미 다 치료된 것이고 없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꺼내게 하고 칼로 긁어놓고는, 이것 봐라 과거의 상처에서 아직도 이렇게 피가 나지 않으냐고 내적 치유를 받아야 한다고 우리를 속이는 거짓말들이 횡행합니다.
사람들이 주로 어떤 경우에 상처를 받습니까? 누가 나를 무시해서 상처 받았다고 하면서 가슴 아파 하는데 그게 상처입니까? 오히려 오른뺨 치는 자에게 왼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증거일 뿐입니다. 가슴 아파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 할 일입니다. 누구는 어릴 때 부모가 돌아가시고 외롭고 서럽게 자란 것이 상처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누가 가장 큰 상처가 있을법합니까? 욥이지요? 아들딸 십남매가 하루아침에 몰사하고, 어렵게 모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자기 가슴에 묻는 게 부모입니다. 그런데 자식 10남매를 잃은 욥이 상처받았나요? 아닙니다. “주신자요 여호와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나는 찬송할 뿐이라.”고 찬송하였습니다. 진정한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서 떠나지 않는 가시, 하나님이 뽑아주시지 않는 가시 때문에 도리어 강해졌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성도는 환난에서 상처를 입는 사람이 아니라 능력을 얻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가슴 속에 상처가 있으니 ‘내적 치유’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나, ‘가계의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정신을 바짝 차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을지라도 얼굴에 수건이 아직도 덮여 있어서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이해 못하고, 말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이단들이 유혹하면 금세 끌려가서 그들의 노예가 되어 물질과 영혼을 잃고 무지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말씀을 이해하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고후3:17에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욕심에서 벗어나고 자기 주관에서 벗어나, 나를 사랑하사 자기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알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복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얼굴에서 수건이 벗어지는 것이고, 그래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를 덮어 씌웠던 무지와, 자기주관적인 생각과, 미신적인 습관과, 세상 욕심의 수건들을 벗어버리고,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약속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수건을 벗는 것입니다.
아직도 내 영혼을 덮고 있는 수건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이 어색하고 두려워한 이유는, 그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미 용서하셨고 그들과 동행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고, 모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마저도 두렵기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불신과, 하나님의 진리보다 사람들의 말에 더 관심이 가는 마음은 수건이 덮인 모습입니다.
이제는 불신과 무지의 수건을 벗어버리고 자유롭고 광채 나는 신앙생활을 합시다. 이제는 과거의 자기 상처나 후벼 파면서 살지 말고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 빛이 나므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하기는커녕 우리를 두려워하고 부러워하며 따라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드는, 영광된 사명을 다하는 성도가 됩시다.
영광이 가득찬 얼굴
출 34:29-35 / 김영수 목사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나이 40이 되면, 모름지기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들 합니다. 이 말은 40세가 될 때까지는, 어느 모로 보나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삶에 흔들리지 않는 균형 감각과 신념을 가지고, 치우침이 없는 인생살이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책임질만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수준에 있는 것 같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성숙된 모습을 외부적인 치장의 모습으로 드러내 보이려고 수많은 돈을 투자하여 성형수술을 하고 호화스러운 집과 가구 및 자동차 등을 구입하는 것을 봅니다. 요즘 들어서는 남녀 노소를 구분하고 성형수술이 대 유행입니다. 특별히 여자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성공을 과시라도 하듯이 값비싼 외투와 자가용에 많은 투자를 합니다. 거기다가 자신의 얼굴을 젊고 아름답게 꾸미려고 값비싼 화장품으로 얼굴을 도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모를 몇 천만 원씩 드려 성형수술을 하고 값비싼 보석과 화려한 의복으로 단장하고 최고급 자가용으로 폼을 잡아도 그것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만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모에서 풍기는 호화로움과 사치에 있지 않고 내면에서 풍기는 온유와 겸손과 사랑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지도자 모세가 값비싼 화장품을 한번도 써보지 못하고 좋은 옷도 입어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친 바위산 꼭대기에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40일간을 모진 바람과 햇볕에 그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만나 뵙고 나니까 그의 모습은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황홀하고 빛나는 영광에 가득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세의 얼굴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입술에서 저절로 감탄과 경외의 탄성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이토록 끔 얼굴에 광채를 띄게된 이유가 무엇이며, 그러한 광채의 영광은 오늘날에도 가능할까요?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광채의 주인공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Ⅰ. 광채의 원인
모세는 출34장 1절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의 명령을 받들어 자신이 깨뜨린 두 돌 판을 처음 것과 똑같이 깎아서 다시금 하나님의 계명(십계명)을 받고자 시내 산으로 올랐습니다. 그리고 28절의 말씀대로 모세는 40주야를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기도하면서 두 번째 금식을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의 정성을 받으시고 다시금 모세가 준비한 두 돌 판에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기록해주셨습니다. (28절)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모세가 이렇게 두 번째 하나님의 계명(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주(晝) 40야(夜)를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사귐을 가지면서 그 얼굴에 광채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모세가 다시금 시내 산에 올라 40주(晝) 40야(夜)를 기도하면서 무슨 기도를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자신이 산에 올라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는 것을 보고 지루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금귀고리를 빼내어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32:4)하며 그 앞에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 제를 드리며 먹고 마시며 춤을 추었던 그 사악한 모습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용서와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중보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욕심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백성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특별히 금식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주를 향한 빈 마음보다는 굉장한 서원을 가지고 기도에 들어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기도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의 목적을 개인의 영달(榮達)과 안위(安慰)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로서 특별히 금식기도는 자신의 하는 일이 너무나 바쁘고 분주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정이 불일 듯 타오르는 것을 억제하고 오로지 주님 만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하여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뜻과 서원을 이루기 위하여 금식기도를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다 보니 금식기도를 한 후에 나타난 결과에 초점을 모으고 만일 기도한 소원대로 결과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도에 실패하였다고 하는데 이처럼 어리석고 부끄러운 신앙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백성들의 죄 사함과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받들어 행할 수 있도록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한 결과 해 같은 광채가 얼굴에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자신을 위하여는 빈 마음을 가지고, 오로지 살아있는 교회, 살아있는 목사, 살아있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깊은 영적 기도를 통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사랑과 희생에 하나가 될 때 우리 역시 모세처럼 얼굴에 진리의 광채, 영광의 광채가 해같이 빛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Ⅱ. 모세의 나타난 얼굴의 형태
1. 광채 나는 얼굴.
진짜 다이아몬드는 오랫동안 빛을 쪼이면 그 빛을 다이아몬드가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 갖다 놓아도 여전히 밝은 광채를 발한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오랜 전쟁터에 살다가 온 사람은 그 눈에 살기가 가득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실컷 웃으며 즐기다 나온 사람은 그 얼굴에 즐거움과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고 합니다.
모세의 광채 나는 얼굴이 하나님과의 오랜 대화와 만남을 통하여 얻어졌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나눌 때 우리 자신도 내가 모르는 사이 모세의 얼굴처럼 영광의 광채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2. 두려운 얼굴.
모세의 광채 나는 얼굴을 보고 백성들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0절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光彩)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니"
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광채 나는 얼굴을 보고 두려워했을까요? 그것은 모세가 위대(偉大)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함이 그 얼굴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목사인 제가 충분한 기도와 순종의 생활 없이 말씀을 준비하고 설교할 때 공허한 메아리의 울림처럼 성도들 속에 감화감동이 적게 일어나지만 새벽과 저녁으로 열심히 기도하며 더 나아가 금식하며 말씀의 은혜를 구할 때 그 말씀은 놀라운 파장과 능력을 일으키며 성도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제가 유능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함이 설교 속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나 성도 모두다 하나님의 위대함이 나타날 수 있도록 깊은 영성생활을 해야합니다.
스데반 집사도 비록 돌을 맞아 죽어갔지만 다른 사람들이 근접할 수 없는 영광의 광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사도행전 6장15절에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하였습니다.
이 땅에는 많이 배우고, 높은 지식과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존경받고 인정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얼마만큼 하나님과 깊이 있는 영적 교제를 나누었는가? 하는 속사람의 모습에 따라 그 상급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 사람보다 속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어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고후4:16)
3. 언약을 전달하는 얼굴.
모세의 세 번째 얼굴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주는 얼굴의 모습입니다.
31절-32절을 보십시오
"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 하니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모세는 광채의 두려움 때문에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아론과 나이 많은 어른들을 먼저 불러서 대화를 나눈 후 백성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제야 안심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에게 가까이 다가가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들었습니다. 이렇듯 모세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광채 나는 얼굴을 빙자하여 자신의 위엄을 높이거나 자신을 신성(神聖)시(視)하지 않고 겸손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받은 그대로의 말씀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간혹 부흥사 들 중에는 자신의 능력과 은사와 권위를 자랑하기 과대포장해서 전달하는 목사님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 예가 홀리보이스(holly boise)의 음성을 억지로 낸다거나 옷을 화려하게 입으며, 치유능력을 너무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백 번 낫고 귀합니다. 그러나 적은 능력이라도 말씀 그 자체에 능력이 있음을 믿고 진실하게 전달할 때 더 귀하고 아름다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계3:8)
이 귀한 진리를 믿고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은혜와 말씀을 사모하며 전하는 늘찬양교회 성도 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수건으로 가리운 얼굴.
모세의 네 번째 얼굴은... 얼굴에 나타난 광채를 가리우기 위하여 수건을 쓴 모세의 얼굴입니다.
33절-35절에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가리운 채 백성들과 만나는 장면입니다.
"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받을 때는 맨 얼굴로 있다가 백성들과 대면할 때 수건을 얼굴에 가리운 것은 이스라엘 장로들과 백성들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참 믿음을 심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참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올 때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듣고 받아드리려는 태도보다 어떤 기적과 표적을 바라고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점을 요한복음 4장 48절과 누가복음 11장 29절에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요 4:48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눅 11:29 /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복신앙, 신비주의, 도덕주의, 합리주의에 빠져 신앙생활을 하고있습니다. 모세는 이런 자들에게 광채 나는 얼굴을 가리우고 말씀을 전하므로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와 이적보다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변합니다. 저도 여러분도 세월이 흐르면 늙고 힘이 없어집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저에게 나타나는 기적과 이적만을 바라보고 따라왔다고 합시다. 그러다가 만에 하나 저의 능력이 감소되거나 사라지면 여러분들은 늘찬양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시편119편 105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나이다."는 신앙을 가지고 주의 말씀을 더욱 귀히 여기며 쫓는 늘찬양교회 성도 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세상은 변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영원토록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마5:18)
Ⅲ. 영광의 광채를 드러낼 사람
지금까지 우리는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의 광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같은 광채가 모세 한 사람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마5:14)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5장 8절에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또 늘찬양교회를 통해 이 어두운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영광으로 밝게 비추는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영광의 광채를 어떻게 하면 나타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기도하므로 가능합니다. 기도하되 특별히 새벽에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새벽미명에 기도하셨습니다
나뭇잎이 언제 윤기 있고 파릇파릇 합니까? 이른 아침입니까? 아니면 정오입니까? 아니면 늦은 오후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새벽에 보이는 나뭇잎이 더 생기 있고 파릇파릇합니다. 더욱이 새벽 이슬을 머금은 나뭇잎은 아침햇살에 유난히 빛납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광의 광채를 드러내며 유지하며 전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새벽마다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아침햇살을 머금듯 새벽기도를 통해 꿈을 먹고 비전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후, 또는 저녁이 되어 드리는 기도는 하루 온종일 삶으로 인하여 피곤하고 기운이 없어 허공을 치는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로 새벽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새벽0시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있던 은성 기도원의 엄두섭 목사님은 매일 0시에 산 속 암자에 들어가 기도한 후 새벽 4시에 내려와 새벽예배를 인도하시는데 그 얼굴에 광채가 나는 듯 하였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영성을 유지하며 영광을 광채를 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여기다가 아침 경건의 시간(Q.T)은 더 한층 하나님과 가까운 곳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날마다 깨어있는 기도생활, 경건생활, 말씀생활, 전도생활, 찬양생활로 영광의 광채를 드러내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Ⅳ.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끝으로 모세가 훌륭한 영적 지도자로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남을 수 있는 것은 그가 겸손하고 온유한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세가 자기에게 나타난 '영광의 광채'로 인해 자신을 신(神)으로 등장시키거나, 과거 광야를 지나오면서 자신을 향해 분을 발하며 불평한 사람들을 색출하여 벌을 주어도 어느 한 사람 배격하거나 도전할 사람이 없었건만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우는 겸손'의 방법을 통해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였고, 말씀을 떠난 기복신앙이나 신비주의를 따르지 않도록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삼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눅8:56)이르시고 오히려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 겸손한 사람은 영성의 깊이를 간직하며 영광의 광채를 드러내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모세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믿음의 본(本)을 쫓아 영광의 광채 복음의 광채, 은혜의 광채, 찬양의 광채를 드러내며 살아가는 늘찬양의 용사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채하는 얼굴
출 34:29-35 / 이삼규 목사
H. 발작은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다. 한 권의 책이다. 용모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A. 프레보는 "남자의 얼굴은 자연의 작품, 여자의 얼굴은 예술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을 지냈던 아브라함 링컨은 "40을 지낸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얼굴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아마도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시기 전에 거울을 여러 번 들여다보았을 것입니다. 어땠습니까? 여러분의 얼굴은 광채가 나는 얼굴이었습니까? 기미 잡티 때문에 짜증나는 얼굴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두 번째 올라갔다가 하산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은 한마디로 “광채 나는 얼굴”이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로마에 가면 성 베드로 성당이 있습니다. 그곳에 유명한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모세의 상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515년에 오늘 본문을 주제로 하여 235cm의 “모세상”을 조각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모세의 머리에 뿔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왜 모세상을 조각하면서 머리에 뿔이 있다고 생각했을 까요? 그것은 그가 읽은 라틴어로 된 벌게이트 역본 때문이었습니다. 벌게이트 역본을 비롯하여 몇 몇 역본들은 ‘광채가 나다.’라는 말을 뿔이 달린 모세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빛이 나다.”(히, 카란)라는 동사와 “뿔”(히, 케렌)이라는 명사의 어근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본문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얼굴이 빛이 나다.” 또는 “얼굴에 광채가 나다.”라는 번역이 더 조화를 이루는 것을 봅니다.
1.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이유를 살펴봅시다.
1)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 34: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모세는 이미 사십일 사십 야를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송아지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급히 하산을 하였다가 다시 율법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와 역시 사십일 사십 야를 시내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함께 한 시간이 팔십일 팔십 야였습니다. 그것도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면서 지낸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한 것입니다. 그것도 보통 금식입니까? 떡은 물론이거니와 물도 마시지 않았으니 절대금식입니다. 요즘도 40일 금식기도를 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대부분은 물은 마시면서 금식합니다. 절대금식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셔서 40주야를 금식하셨습니다. 모세와 같이 절대 금식을 하신 것입니다.
조다난 에드워드 목사님은 일주일 동안 금식을 한 후에 성도들에게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 얼굴에 나타나는 영감 때문에 많은 교인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은혜 받는 역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금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금식하는 시간은 어떤 일 때문에 바쁘게 뛰는 시간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과만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오로지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금식하는 시간입니다. 음식을 굶는 것이 큰 것이 아닙니다. 금식하는 동안에 주님과 나누는 영적인 교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중요한 시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얼굴은 광채가 나십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과 마귀가 함께 하는 사람은 얼굴이 다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까?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그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분명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얼굴은 다릅니다. 광채가 납니다. 그러나 마귀가 함께 하는 얼굴은 살기가 납니다. 어둡습니다.
출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가 누구 때문에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났다고요. “여호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얼굴이 다릅니다.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2)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출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것은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변화산의 사건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에게 어떤 신비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한 목적이었습니까? 누가복음 9장을 보십시다.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님이 뭐 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까?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주님의 용모가 언제 변화되었습니까?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 되고 그 옷까지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모세는 얼굴 꺼풀만 광채가 났지만 우리 주님은 옷에서까지 광채가 났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어진 이는 사흘만 보지 않다가 다시 만나도 그 모습이 달라져 있어 눈을 비비고 새롭게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부지런히 갈고 닦는 사람은 그 모습이 날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는 사람의 모습이 어찌 빛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십니까? 그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의 영향력이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대화하는 상대를 잘 골라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과 오랜 친교를 나눈 뒤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와위엄의 표시로서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난 것입니다.
3)말씀을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첫 번째 돌 판을 받아서 가지고 하산 할 때도 역시 같은 영광의 광채를 소유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산하면서 돌 판을 던져 깨뜨리면서 그 영광의 광채를 상실한 것입니다. 모세는 그토록 쉽게 타락의 길로 들어선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해서 엄청난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대노하였습니다.
출 32: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 뜨리니라.
분노는 얼굴의 광채가 사라지게 합니다. 40주야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은혜를 듬뿍 받은 모세였습니다. 분명 그의 얼굴에는 광채로 빛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분노하는 순간 그 얼굴의 광채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 받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말이 40일이지 40일 동안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은혜 받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쏟는 것은 일순간입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를 잠재우지 못하면 순식간에 받은 은혜를 쏟아버립니다. 힘들게 은혜 받았는데 그 은혜를 너무나도 허망하게 상실하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자신도 그것을 압니다. 은혜를 회복하는 길이 얼마나 험하고 힘들다는 것을 불 보듯이 뻔히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은혜를 상실하고 맙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다혈질적인 성품의 소유자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항상 은혜를 간직하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 같은 사람도 은혜를 쏟아버리지 않았습니까? 모세가 다시금 은혜를 회복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까? 역시 처음과 똑같은 기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40주 40 야를 절대 금식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회개하고 다시금 말씀을 회복 할 때 모세의 얼굴은 영광의 광채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광채를 소유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영광의 광채를 상실하셨습니까? 소유하신 분은 더욱 말씀을 의지하는 삶을 사십시오. 만일 상실한 분이 계신다면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각오로 말씀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모세의 얼굴에 빛났던 영광의 광채가 여러분의 얼굴에도 빛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2.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모세의 직분에 영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모세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축복이요 만족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극히 영광스럽게 생각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그의 얼굴에 광채가 있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일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도록 하셔서 모든 백성들이 모세의 말에 복종하게 하신 것입니다.
율법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모든 인류를 구속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무시하고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복종해야 할 영광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복종해야 하고 존중되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정죄하는 율법의 직분이 그토록 영광스럽다면 사람을 살리는 복음의 직분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고후 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 3: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 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는 율법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치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얼굴에 영광을 더하셔서 그의 말씀의 권위를 높이셨습니다. 이 모세의 율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것이 복음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을 맡은 우리는 모세가 가졌던 것보다 훨씬 큰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복음의 사역자의 얼굴에 직접적으로 광채가 있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의 광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면 그 누구도 복음을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광채를 숨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반드시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탄의 세력이 무력화 되고 죄 가운데 빠져 있던 자들이 그 악한 습관과 의식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영광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입니다.
2)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난 것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하게 될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분과 말씀을 나누고 그분이 주신 말씀을 회복하여 다시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직분을 감당하라고 광채를 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대화하는 가운데 그의 영광이 그의 얼굴에 전해져서 그도 하나님의 영광을 얼굴에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영광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소유하게 될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우리 구원의 목표는 단지 성품이 변화되어 착하고 의롭게 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몸의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몸의 구속입니다. 우리의 몸이 새로워지는 것이 구원의 최종적인 열매입니다. 지금처럼 병들고 약한 몸이 아닙니다. 날이 갈수록 늙어지고 쇠약해지는 몸이 아닙니다.
모세는 얼굴 꺼풀에서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온몸이 변화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단지 하나님과 영광의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 영광의 광채가 일시적으로 그의 얼굴에 전해진 것일 뿐입니다. 그의 얼굴의 광채는 점점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용모가 변하며 심지어는 옷까지도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얼굴 꺼풀에 나는 영광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온몸에서 영광의 광채가 빛나는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여 우리가 여기가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외쳤던 것은 엉뚱한 외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날을 바라보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비록 병들고 아프고 괴로움이 심하지만 우리가 그 나라에 이르게 되면 변화산에서 광채가 났던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3)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복된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출 34: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심지어 아론조차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위대해서라기보다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광채를 주어서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의 종에게 주신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만 수건을 벗고 말씀선포가 끝나면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었습니다. 그것은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을 배려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지도자는 자신의 표정을 그대로 다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 받습니다. 작은 일에도 지도자의 표정이 어두우면 대중에게 큰 불안을 주게 되고 큰 어려움이 있어도 자도자의 얼굴에 자신감이 있으면 그 얼굴을 보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기쁨과 자신감은 일부러 만들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자신도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몰랐습니다.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건을 썼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수건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가장 자연스러운 때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면 수건이 필요한 자는 누구였습니까? 모세에게 수건이 필요했습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수건이 필요했습니까? 수건이 필요한 자들은 모세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수건이 필요했다는 것은 아직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어색하고 두려운 것이며 자연스럽지 않다는 뜻입니다. 왜 그들이 모세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가워하지 않고 어색하고 두렵게 느꼈을 까요? 아직도 그들의 양심이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억눌려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편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걸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수건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어색했고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 수건을 덮어 씌워야 마음이 편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아직도 말씀을 읽으면서 그 얼굴에 수건이 벗겨지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 속에 빛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혀 알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방식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자유 함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대할 때 무엇을 느낍니까?
오늘 우리들의 수건은 율법의 수건이 아닙니다. 이 세상 욕심의 수건입니다. 그것이 씌워져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온전히 돌아올 때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의 욕심을 버리기 전까지는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거리가 멉니다.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 됩니다.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세상의 수건을 벗어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닮아가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애굽의 영광을 버리고 주님과 대화했을 때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게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얼굴에서는 어떤 광채가 빛나고 있습니까? 모세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광채를 소유하셨습니까? 율법을 전수한 모세도 얼굴에 광채가 빛났는데 하물며 복음을 전하는 의의 직분을 소유하는 우리들을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얼굴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와 함께 하는 사람은 마귀의 형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얼굴은 하나님을 반사하는 거울임을 기억하고 얼굴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 얼굴의 광채
출 34:29-35 / 이종윤 목사
흔히 40일을 금식한 사람의 얼굴은 밝고 빛나기 보다는 배곯은 얼굴과 초췌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인 모세도 40일씩 두 차례나 금식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섬긴 하나님은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구약의 모세와 신약의 스데반의 얼굴에 광채가 났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도 이들의 공통점은 온유함의 소유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민12:3절, 행7:60절). 오늘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나타나게 됩니다.
Ⅰ. 이 영광이 어떻게 모세의 얼굴에 임했는가?
① 모세가 산위에서 보았던 하나님의 영광의 반사광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를 함으로 하나님의 빛이 그에게 반사된 것입니다.
② 모세가 하나님과 교제한 결과였습니다.
③ 모세는 백성을 위한 강력한 증보기도를 위해 하나님과 교제를 하였습니다.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모세도 자기 백성을 위한 중복기도를 했습니다.
④ 모세는 오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진리와 의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Ⅱ. 모세 얼굴의 광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①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었습니다.
②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었습니다.
③ 하나님의 위임사항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였습니다.
④ 그의 권능의 증가였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 나는 광채 앞에 위압을 당했으며, 따라서 모세의 말은 불꽃같은 힘이 있게 되었습니다.
⑤ 하나님의 율법에 큰 영광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곧 율법의 완성이 됩니다.
Ⅲ. 모세는 왜 그 광채를 알지 못했는가?
① 거울이 없음으로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②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영광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 사람은 그 앞에서 먼지 같고 재와 같은 존재로 숨어버리게 됩니다.
③ 모세는 자기 얼굴에 광채가 나기를 소원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④ 타인에게 선을 행하고 자신은 포기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⑤ 모세의 주변에는 얼굴에 광채가 난 사람이 없었음으로 그도 자기 얼굴에 광채가 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⑥ 죄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에게 광채가 나지만 알지는 못합니다.
Ⅳ. 왜 모세는 수건을 썼는가?
① 모세 자신이 온유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시험에 들까봐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② 자기 비하를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는 자기백성과 함께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③ 모세는 반역과 우상숭배를 한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맺는말.
오늘 우리 성도가 모세의 얼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신 영광을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얼굴만 변했으나 그리스도는 인격전체에 광채가 났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얼굴을 가렸지만 그리스도는 자신의 얼굴을 나타냈습니다(계1:16절). 다음으로 죽었던 성도의 몸이 다시 부활할 때 모세의 영광보다 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살아나게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고전15:42-44절). 마지막으로 우리 성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모세처럼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자신의 얼굴에 은혜의 광선이 비쳐지고 자신의 눈으로부터 진리의 등불이 밝혀질 수 있는 우리 서울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