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474
■ 2부 장강의 영웅들 (130)
제7권 영웅의 후예들
제 16장 신궁(神弓) 양유기 (7)
모든 것이 서동(胥童)이 노리는바대로 되었다.
그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극지(郤至)가 주왕실을 향해 출발하는 것을 확인한 서동은
재빨리 자신의 심복 부하를 불러 지시했다.
"너는 극지보다 앞서 주나라로 가 공손 주(公孫 周)를 찾아 나의 말을 전하여라.
'지금 진(晉)나라 권세는 극씨 일족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극지(郤至)가
언릉 전투의 승리를 천자에게 고하기 위해 주(周)나라로 갈 것입니다.
공손(公孫)께서는 꼭 극지와 만나 친분을 쌓아두십시오. 후일 공손께서 고국에 돌아오실
기회가 있을 때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전하라."
서동의 심복 부하는 빠른 말이 모는 수레를 타고 극지를 앞질러 낙양으로 달려갔다.
이때 공손 주(公孫 周)는 열두어 살의 소년인지라 순진했다.
서동의 밀사로부터 자신에게 도움되는 말을 듣자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
과연 며칠 후, 진나라 사신 극지(郤至)가 낙양에 당도했다.
공손 주(公孫 周)는 극지의 행동을 살피고 있다가 모든 공무(公務)를 마쳤을 때 그를 찾아가
인사를 나눴다."저는 공손 주입니다. 여기서도 늘 고국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이번에 초(楚)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모두가 주공을 비롯한 공실의 덕이지요."
공손 주와 극지 사이에는 이런 식의 별 의미 없는 대화가 오고갔다.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공관 복도 한구석에 그림자 하나가 숨어 있을 줄을.
그 그림자는 두말할 나위없이 진여공(晉厲公)이 비밀리에 보낸 염탐꾼이었다.
그 날 염탐꾼은 공손 주와 극지가 방 안에 앉아 단둘이 오랫동안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고
진(晉)나라로 돌아가 그대로 고했다.- 두 사람은 반나절 동안 밀담을 나누었습니다.
무슨 내용이 오갔는지는 거리가 멀어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진여공(晉厲公)은 웅패가 말한 내용을 온전히 믿어버렸다.
날마다 서동, 이양오, 장어교를 불러 극씨 일족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받으며 3극(郤)을
쳐없앨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 진여공(晉厲公)은 여러 후궁과 술을 마시다가 별안간 사슴 고기가 먹고 싶어졌다.
마침 궁중에는 사슴 고기가 떨어졌다.진여공이 내관을 불러 화를 내며 명했다.
"시장에라도 나가 구해오라."시종장인 맹장(孟張)은 서둘러 시장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 날따라 시장에도 사슴고기가 하나도 없었다.난감해진 맹장(孟張)이 시장 거리를
걷고 있는데 마침 저편에서 극지가 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날 극지(郤至)는 교외로 사냥을 나갔다가
사슴 한 마리를 잡아 수레에 싣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사슴을 본 맹장(孟張)은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대뜸 수레 위의 사슴을 어깨에 둘러메고는 말했다.
"장군님, 급히 쓸 곳이 있어 이 사슴을 제가 가지고 갑니다."
극지는(郤至) 황당하여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맹장을 향해 소리쳤다.
"이보게, 아무리 급하다고는 하지만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렇게 가져가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맹장(孟張)은 극지의 외침 소리를 들은 둥 만 둥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을 향해
바삐 수레를 몰았다. 극지(郤至)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내 어찌 저런 놈을 용서할 수 있으리오!"
그는 어깨에서 활을 내려 수레를 타고 가는 맹장의 등판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정확하게 맹장의 등 한복판에 가서 꽂혔다. 구슬픈 비명과 함께 맹장(孟張)은 수레에서 떨어져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뒤늦게 맹장의 죽음 소식을 들은 진여공(晉厲公)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극지(郤至)란 놈이 이젠 못 하는 짓이 없구나. 이대로 있다간 내가 먼저 그자의 손에 죽을 것이다."
그는 곧 서동, 이양오, 장어교를 자신의 처소로 불러 의논했다.
"극지(郤至)란 놈이 노골적으로 나를 업신여기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 자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서동(胥童)이 대답했다."극지 한 사람만 죽여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극기(郤錡)와 극주가 군사를 일으키면 일이 복잡하게 됩니다. 그들이 군대를 내기 전에
아예 한꺼번에 그들을 처단하십시오.""그렇습니다. 신에게 무장 병사 8백 명만 내어주십시오.
오늘 밤 그들을 들이쳐 일거에 3극(郤)을 소탕하겠습니다." 이양오였다.
그 또한 예전에 극기(郤錡)에게 토지를 빼앗긴 적이 있어 3극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있었다.
진여공(晉厲公)이 고개를 끄덕이며 군사를 내주려 할 때 서동 옆에 앉아 있던 장어교(長魚矯)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안 됩니다.""안 되다니?""극씨(郤氏) 일파는 사병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궁중 무사들보다 몇 갑절 많습니다. 그들과 싸워 이기면 다행이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면
주공의 입장만 난처해집니다.""그럼 어쩌겠다는 말인가?""신(臣)에게 묘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으로 싸움을 벌여 해결해 달라는 소송을 내고는 그들 앞으로 나가 판결을 내려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그러면 우리는 쉽게 그들 곁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후 기회를 보아 그들을 찔러 죽이면 만사가 해결됩니다.
나머지는 군사를 동원하여 소탕하면 누가 감히 이번 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거 좋은 생각이다."그들은 곧 세밀한 계획을 짜나갔다.며칠이 지나서였다.
장어교(長魚矯)는 3극인 극기(郤錡), 극지(郤至), 극주(郤犨)가 강무당 사정(射亭)에 모여
회의중이라는 정보를 얻었다."기다리던 때가 왔도다."
그는 급히 청불퇴(淸怫魋)를 불러 함께 얼굴 여기저기에 닭 피를 발랐다.
청불퇴는 장어교가 시정(市井)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으로 힘이 세기로 소문이 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청불퇴를 청역사(淸力士)라고도 불렀다.
분장을 마치자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심하게 싸운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장어교(長魚矯)와
청불퇴는 가슴속에 비수를 숨기고 서로 욕설을 퍼부어가며 강무당 사정으로 향했다.
문을 부수듯 뜰 안으로 들어가서는 정자 위에 앉아 있는 3극(郤)을 향해 호소했다.
"대신들께서는 제 말 좀 들어봐주십시오."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제발 우리의 시비곡직(是非曲直)을 판결해주십시오."
3극(郤)은 두 사람의 음흉한 계책을 알 리 없었다.
극주(郤犨)가 정자 위에 앉아 있다가 두 사람을 자기 앞으로 불러 물었다.
"너희들은 무슨 이유로 유혈이 낭자하도록 싸웠는가?""제가 먼저 말씀 올리겠습니다."
청불퇴(淸怫魋)가 흥분한 표정으로 허리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손을 품속에 넣는가 싶더니 비수를 꺼내 번개같이 극주의 가슴을 향해 찔렀다."아악!"
방심하고 있던 극주(郤犨)는 아무런 방어 태세도 갖추지 못하고 그대로 가슴에 비수를 맞았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쓰러졌다.
순간, 강무당 정자 위로 두 개의 그림자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하나는 극주 옆에 앉아 있던 극기(郤錡)가 칼을 뽑아들고 청불퇴를 향해 덮쳐드는 움직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강무당에서 도망치려는 극지의 몸놀림이었다.
장어교(長魚矯)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청불퇴를 향해 날아드는 극기(郤錡)의 칼을
대신 가로막은 것이었다.두 사람은 강무당 앞뜰로 내려서며 서로 치고 막고 싸웠다.
그 사이 극지(郤至)는,"자객이다!"
외치고는 강무당 문을 박차고 나가 밖에 세워둔 수레에 올라타고 달아났다.
청불퇴(淸怫魋)는 힘도 세었지만 잔인하기도 했다. 그는 층계 위에 쓰러진 극주(郤犨)의 가슴을
다시 한 번 찔러 완전히 목숨을 끊어놓고는 장어교와 칼싸움을 벌이고 있는 극기를 향해 덮쳐갔다.
극기가 비록 백전의 장수라고는 하지만 시정에서 싸움질만 해온 청불퇴의 힘과 기교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장여교와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던 터였다.
청불퇴(淸怫魋)의 칼날이 번쩍 빛나며 극기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상체를 뒤로 젖혀
겨우 피하긴 했으나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가슴까지 그대로 그어졌다."헉!"
극기(郤錡)는 비틀거렸다.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장어교가 극기의 배를 노리고 칼을 힘껏 내질렀다.
어찌나 세게 찔렀던지 칼끝이 등판 뒤로 삐져나왔을 정도였다.
청불퇴(淸怫魋)가 주변을 둘러보며 다급히 외쳐댔다.
"극지(郤至)란 놈이 달아났소. 난 그놈을 뒤쫓을 터이니 그대는 여기 두 놈의 목을 끊으시오."
한편, 정신이 반쯤 달아난 극지(郤至)는 쉴 새 없이 채찍을 휘두르며 자신의 집을 향해 수레를 몰았다.
그런데 1마장도 채 가기도 전에 저쪽 앞에서 8백 명의 무사를 거느리고 달려오는
서동, 이양오와 마주쳤다.서동(胥童)은 극지의 앞을 가로막고 외쳐댔다.
"이놈, 극지야. 우리는 주공의 명을 받고 네놈들을 죽이러 왔다. 어서 순순히 내려 포박을 받으라."
극지(郤至)는 대답 대신 황급히 수레를 돌려 오던 길로 다시 달아났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행동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청불퇴(淸怫魋)가 뒤쫓아와 눈앞에까지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아, 여기서 내가 이렇게 죽는가!"
극지(郤至)가 탄식하는 중에 청불퇴는 날렵하게 극지의 수레 위로 뛰어올라 번쩍 하고 칼을 휘둘렀다.
허리에 칼을 맞은 극지(郤至)는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수레 밑으로 떨어졌다. 서동과 이양오가 달려와
역시 마구 칼을 찔러댔다. 극지의 몸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난자를 당했다.
그때 장어교가 극기(郤錡)와 극주(郤犨)의 목을 끊어 양손에 들고 그 곳으로 달려왔다.
서동과 이양오는 난자 당한 극지(郤至)의 목마저 끊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목 세 개를 들고
조문으로 들어갔다.
이로써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3극의 세도는 살아생전의 위용과 달리 비참하게 그 종말을 맞았다.
지난날 극극이 진나라를 방문하여 진경공(晉景公)에게 바치는 제경공의 옥 한 쌍을 가로채었을 때,
진나라의 뜻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예언한 바 있다.
- 극극은 용기는 있을지언정 예(禮)는 전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전공을 내세워 두 나라 군주를 욕보였다.
언제까지 이 영화가 이어질 것인가?그로부터 14년이 지난 BC 574년(진여공 7년).
극씨(郤氏) 일문은 멸족당하고 말았다.여기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47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