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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女人)들의 한(恨)
강풍의 몸과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선혈이 낭자했다.
여인은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면서 울부짖었다.
"나마저 죽이거라!"
그녀는 돌연 갓난아기를 놓아버리고는 흑면군을 향하여 덮쳐갔
다. 그녀의 열 손가락은 흑면군의 목줄기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
나 흑면군은 살짝 뿌리치며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년아! 그 날뛰던 실력은 어디로 갔느냐? 불쌍한 계집, 내가
네 새낭군이라도 될 듯 싶어서 손에 사정을 두는 것이냐?"
그의 이러한 비웃음과 독설이 그치기도 전에 여인은 또다시 그
에게로 덮쳐갔다. 흑면군도 또한 다시 가볍게 손을 올려 뿌리치려
고 했다. 그러나 흑면군은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모든 기
력을 다하여 그에게 덤벼들며 목을 깨물어버렸다.
흑면군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붉은
피가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에 묻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흑면군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에게 일권(一
卷)을 가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허공을 한 바퀴 돌아 세차게
마차에 부딪치고는 땅바닥에 굴러 떨어져버렸다.
그녀는 다시 일어서지를 못 하고 다만 고개를 들어 처연한 시선
으로 강풍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심한 고통을 참느라 호흡을 조
절하며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옥랑(玉郞), 저를 상관하지 마시고 어서 가셔요. 저만 죽는다
면 궁주 자매는 당신을 잘 대해줄 것입니다......."
강풍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울부짖는 음성으로 외쳤
다.
"여보, 죽어서는 아니 되오!"
그는 말과 동시에 그녀의 곁으로 달려갔다.
도(刀), 조(爪), 탁(啄)이 일제히 그를 향해 덮쳐왔으나 옥랑은
전연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몸은 무기들이 발산하는 충격
으로 인하여 피가 솟구치곤 했다. 사력을 다한 그는 겨우 그 공격
망을 뚫고 나가기는 했으나 그녀의 곁까지 완전히 가지 못 하고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여인은 안타까운 비명을 터뜨리며 있는 기력을 다하여 그에게
다가가려 애썼다. 그도 또한 손발을 버둥거리며 필사적으로 그녀
에게 다가가려 했다. 지금의 그들로서는 오직 함께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소망이었다.
그들이 서로 상대방의 손을 잡을 만큼 가까와졌을 즈음 흑면군
은 전신을 날려오면서 그들의 손을 으깨어질 만큼 힘껏 밟아버렸
다.
여인은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외쳤다.
"너 이놈! 참으로 악독하구나!"
"흥! 이제야 비로소 내가 악독하다는 것을 알았느냐?"
강풍은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며 흑면군을 바라보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당신에게 줄 테니 제발 우리를
같이 죽게 해주시오."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 너희들도 나를 괴롭힐 때는 아
마 재미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니 나도 너희들을 그냥 죽이기는
억울해.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고, 죽여도 함께 죽게 하지
는 않다!"
흑면군은 잔인한 웃음을 띠우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여인은
물었다.
"왜?...... 무엇 때문에 무슨 원한이 있어 네가 우리를 이렇게
하는 것이냐?"
"그 이유는..... 내가 어떤 사람에게 너희들을 함께 죽게 하지
는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강풍이 물었다.
"누구요?...... 그 사람이 누구냔 말이오?"
"천천히 생각해 보아라."
이때 그 황의(黃衣)의 계흉이 다가서며 표정없는 얼굴로 차디차
게 한마디를 내뱉았다.
"어린 것들도 살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옳은 말이다."
황의인은 칼을 비껴세우고 마차로 다가가더니 두 어린아기를 향
해 힘껏 내리쳤다.
이것을 본 강풍은 비명을 질렀고 그의 처는 소리마저 내지 못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번개 같은 속도로 내리쳐가던 칼
이 갑자기 '쨍그랑' 하고 허공에서 두 동강으로 끊어져버린 것이
다.
황의인은 깜짝 놀란 나머지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선 후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 누구냐?"
하지만 거기엔 그들과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강풍 내외 이외에
는 아무도 없었다.
흑면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무언가 짐작이 간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게 맡겨라!"
한마디를 내뱉은 그는 강풍의 칼을 주워들었다. 그는 짐승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마차 속을 향하여 번개 같은 속도로 내리쳐갔다.
그의 칼이 반쯤 내려갔을 때 '쨍' 하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
다.
칼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날이 적지않게 무뎌져 있었다.
"과연 암습하는 자가 있군."
홍의인이 스산하게 지껄였다. 흑면군도 더 이상 유유자적할 수
는 없었다.
"이 암기(暗器)는 보이지가 않을 정도니 매우 작은 것이다. 그
런데도 우리들의 칼을 끓을 수 있다니 그 수법과 팔 힘이 얼마나
고 강한가."
악도(惡徒)들은 섬짓하여 망연히 서있었다.
죽음에 직면한 강풍도 놀라움에 두 눈을 휘등그렇게 뜨고 잠시
망연해 있더니 무엇인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 듯 갑자기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 필시 그가 왔을 것이다......."
흑면군이 물었다.
"누구?...... 혹시 연남천(燕南天)이 왔단 말이냐?"
그때 마치 이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
다.
"연남천? 연남천이 뭐 그리 대수로운 놈이냐?"
깜찍하고 활발한 음성이 마치 철들지 않은 천진난만한 어린애의
목소리 같았다. 인기척 없는 황막한 곳에서 문득 이런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 놀라울 뿐이었다.
강풍 부부는 비록 그 얼굴을 보지는 않았지만 누가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흉도들은 호기심과 두려움이 교
차된 표정으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 뒤에는 한길이 넘는 큰 잡초가 바람부는 대로 파도 같이
밀리고 있었다. 그 잡초 속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얼핏얼핏 보였
다.
그것은 한 여인의 모습이 아닌가!
한 차례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먼 곳에 있던 그 인영(人影)이
움직이는 듯 싶더니 어느새 그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모두 그 여자가 십칠팔 세 정도의 아름답고도 깜찍한 소
녀라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지금 나타난 사람은 적어
도 스물 대여섯 살은 됨직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몸에는 비단옷이 걸쳐 있었는데 긴 치마가 땅에 끌릴 정
도였고 치렁치렁한 머리가 어깨를 덮고 있는 모양은 마치 구름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눈동자는 재기에 가득차 있었으나 어
린아이 같은 천진스러움과 함께 고집과 까다로움을 동시에 나타내
고 있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그녀를 한 번만 본다면 곧 그녀가 매우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속마음을 가늠하
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이 절세미인은 애석하게도 천생(天生)불구였다. 그녀의 기다란
옷소매와 치마도 그녀의 왼팔과 왼발의 불구를 가리지는 못 했다.
그녀를 본 흑면군은 존경과 두려움이 동시에 교차했지만 놀라움
과 당황함은 도리어 많이 가시어진 표정이었다. 그는 공손히 물어
보았다.
"혹시 이화궁의 둘째 궁주님이 아니십니까?"
"너는 나를 아느냐?"
"연성궁주(憐星宮主)님의 높으신 존함을 천하에 그 누가 모르겠
습니까!"
"너도 꽤나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구나."
"별말씀 다하십니다."
연성궁주는 눈을 깜박거리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은 모양이지?"
"소인은 단지......"
우물쭈물 하면서 흑면군은 몸을 구부렸다.
"넌 그토록 나쁜 일을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무서워하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구나. 내가 지금 너희들의 생명을 앗
아가고자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게로구나."
흑면군은 이 말을 듣자 얼굴색이 크게 변하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궁주님께선 농담을 하시는 것이겠지요?"
"농담, 너희들이 나의 궁녀(宮女)를 상해(傷害)한 것을 생각하
면 너희들을 그저 죽이는 것도 가볍게 처분하는 것인데 어찌 너희
와 농담을 하겠느냐?"
"하...... 하지만 이것은 요월궁주(逃月宮主)님께서......."
그러나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저 한 차례의 바람소리
가 들렸을 뿐인데 흑면군은 십여장(掌)의 따귀를 맞았다. 이 수법
은 그가 강풍의 부인에게 당한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번 것은 더욱 강했다. 십여장(掌)의 따귀를 맞은 그의 입 안에는
온통 피가 가득차 더 이상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연성궁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옷자락이 바람에 날릴
뿐 의젓한 그녀의 모습은 전혀 움직인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나타났던 웃음은 이미 찾아 볼 길이 없었고 차디찬
음성이 그 웃음을 대신했다.
"너희들이 감히 함부로 언니의 이름을 입에 담는구나."
닭벼슬, 닭가슴, 그리고 닭 꼬리는 모두 놀라서 얼굴색은 새파
랗게 질려 넋을 잃고 서있었다. 그러던 중 닭벼슬이 먼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요......"
그는 '월'자를 채 입밖에 내기도 전에 안면에 똑같이 십여 대의
따귀를 맞았다. 그의 작은 몸집은 그 힘을 감당하지 못 하고 날아
갈 뻔했다.
연성궁주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 내가 너희의 생명을 앗아갈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주
었다. 그래도 믿지 않겠단 말이냐?...... 아이......."
하고 말한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황의인의 거대한 몸
을 한바퀴 돌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저 눈앞이 한 번 번쩍거린
것을 느꼈을 뿐인데 황의인이 땅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어떤 권법
이나 검초를 사용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뼈가 삭은 것처럼 흐물흐
물 쓰러지고 만 것이다.
화의인(花衣人) 중의 한 명이 살며시 그에게 다가가 몸을 숙여
잠시 동안 살펴 보더니 갑자기 울부짖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죽었다. 둘째 형이 죽었다......"
다시 연성궁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믿겠지?"
이 소리를 들은 화의인이 외쳤다.
"너 이년......참으로 악독하구나!"
"그 천박한 놈의 목숨이 뭐 그리 대수롭단 말이냐? 너희들은 악
행과 살인이 적지 않았으니 이제 죽어도 억울할 것은 없을 것이
다."
닭벼슬이란 홍의인의 눈에는 악독한 살기가 가득찼다. 그가 돌
연 손짓을 하자 화의인들은 즉시 연성궁주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
다.
연성궁주의 가냘픈 몸매가 계조엽의 빛 속에서 한 바퀴 돌았다.
순간 세 명의 화의인들이 처참한 비명과 함께 쓰러졌고 나머지 한
명은 재빨리 뒤로 물러 섰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의 손에는
무기가 들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연성궁주가 어떻게 자기의 일격을 피했고 또 어떻게 자기
의 형제들을 쓰러뜨리고 자기의 무기를 빼앗아갔는지 전혀 알 수
가 없었다. 마치 영문도 모를 꿈을 꾸고 막 잠에서 깨어난 것 같
았다.
연성궁주가 긴 옷소매를 뿌리치자 일곱 자루의 계조염이 일제히
땅바닥에 우수수 떨어지는 한편 한 자루는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그녀는 그것을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
다.
"원래 한쌍의 닭발이로구나. 맛이 어떨런지?"
그녀는 조그만 입을 열어 그 계조염을 살짝 물어 뜯었다. 쇠가
빠그라지는 소리가 들리며 그 강철로 만든, 무예계 사람들이 이름
만 들어도 벌벌떠는 외문병기(外門兵器)가 끊어졌다.
흑면군과 홍의 계관은 나이도 별로 많지 않은 이 여인의 공력이
이토록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연성궁주는 머리를 저으며,
"이 닭다리는 영 맛이 없구나!"
하고는 입에 물고있는 칼조각을 가볍게 내뱉었다. 은빛이 반짝
거리자 그 남은 한 명의 화의인이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땅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새빨간 피가 그의 손가락 사이
에서 흘러 나왔다. 잠시 후 그는 몇 번 몸을 꿈틀거리더니 잠잠해
졌다.
그의 손바닥이 스르르 얼굴에서 내려졌다. 저녁노을에 비친 그
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얼굴뼈가 산산조각이 나 바스러진
것이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흑면군은 무릎을 털썩 꿇었다.
"궁주님,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연성궁주는 그에게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도리어 살짝 미소를 띤
얼굴로 닭벼슬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엔 나의 무공이 어떠냐?"
"궁..... 궁주님의 무공은 저...... 아니 소인이 난생 처음으로
본 뛰어난 것입니다....... 소인은 꿈 속에서도 이 세상에 그토록
뛰어난 무공을 지닌 사람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해보지 못 했습니
다."
"그래? 그런데 넌 별로 나의 무공을 무서워하는 것 같지 않구
나,그렇지?"
닭벼슬은 그야말로 난생 처음으로 남에게 이토록 아기달래듯한
심문을 받았다. 그렇지만 지금 그로서는 순순히 대답하는 것 외에
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섭습니다......, 매우 매우 무섭습니다!"
"이상하구나. 그렇다면 왜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를 않지?"
닭벼슬은 이 말이 떨어지자 비로소 자신이 서 있음을 깨닫고는
곧 무릎을 꿇었다.
"궁주님! 살려주십시오......."
연성궁주는 잠시 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살려주는 것은 간단하나 먼저 나를 한 대씩 쳐야한다."
닭벼슬이 입을 열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
흑면군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소인들이 어찌 감히 궁주님에게 무례를 범하겠습니까?"
연성궁주는 두 눈을 부릅떴다.
"너희들이 정녕 죽고 싶단 말이지?"
닭벼슬과 흑면군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이 말을 많이 들어
왔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말에 대해서 대답을 해 본 일이 없었
다. 피를 봄으로 대답을 대신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똑같은 말을 듣고도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묻는 자가 연성궁주인 까닭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소인은 살고 싶습니다."
"살고 싶다면 어서 공격을 해라."
그들은 더 이상 머뭇거릴 수도 없었다. 서로 한번씩 얼굴을 쳐
다보더니 드디어 연성궁주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흠, 그래야지. 너희들은 안심하고 힘껏 손을 써라. 있는 힘을
다해서 말이다. 힘차게 치면 살려줄 것이고 만약 약하게 친다
면......흥!"
닭벼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기가 이렇게 말한 이상 전력을 다해 일격을 가해보자. 만약
성공한다면 다행한 일이고 설사 성공하지 못 한다 하더라도 살려
준다고 했으니 약속은 지키겠지.)
이 생각은 흑면군도 마찬가지였다.
(네 자신이 택한 것이니 나를 탓하지 마라. 네가 설사 강철로
만든 몸이라고 해도 나의 일격을 견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겨우 생긴 살 기회를 놓칠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그들
은 역시 쓰디쓴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네! 그럼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연성궁주는 차갑게 내뱉았다.
"빨리 공격하지 않고 뭘 망설이느냐?"
흑면군은 재빨리 허공에다 몸을 솟구쳐 쌍권을 연거푸 퍼부었
다. 거센 권풍(拳風)은 몇 백근(百斤)이 넘는 그의 몸의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뻗어나갔다.
그의 쌍권은 매우 민첩했고 정신을 흐트러놓을 듯 방향을 종잡
을 수없이 이리저리 진행되더니 마지막에 가서야 연성궁주의 가슴
을 노리며 덮쳐갔다.
이것이 바로 그의 무공의 절정인 신저화상(伸錯化象)이었다. 그
위력 아래서 적지 않은 무예계의 인물들이 죽어갔다.
닭벼슬이란 홍의인도 몸을 허공에 솟구쳐 계취탁을 빗방울 같이
날려 연성궁주의 앞가슴에 위치한 여덟군데 혈도(穴道)를 향하여
점(點)해 나갔다.
이것은 물론 그의 필사적인 일격이었다. 이 일격의 이름은 신계
제성(晨鷄啼星)이라 하고 들리는 말에 위무표국의 팔대표사가 동
시에 이 일격아래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과연 힘을 다하는구나!"
하고 말한 그녀가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나비가 날개짓을 하듯
한번 흔들자 한줄기 바람이 난무하는 계취탁과 권풍 속으로 들어
가 지그시 두사람의 힘을 압도했다. 이렇게 되자 닭벼슬과 흑면군
의 전력을 다한 일격은 갑자기 방향을 잃고 그들의 조종을 듣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사방으로 나르던 계취탁이 말을 꿰뚫었고 흑면군의 권풍
은 마차를 넘어뜨리고 말았다. 먼지가 뽀얗게 이는 가운데 사람과
말의 끔찍스런 비명소리가 벌판을 가로질렀다.
연성궁주는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
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흑면군은 이미 땅바닥에 쓰러졌
고 닭벼슬의 몸은 여덟 자밖에 있는 잡초 속에 굴러떨어져 있었
다.
잡초 속에서 잠시 동안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조금 후엔 그것마
저 사그라들었다.
흑면군의 가슴에는 닭벼슬의 무기인 계취탁이 꽂혀 있었다. 그
는 이를 악물고 그 계취탁을 뽑았다. 그러자 무기가 꽂혔던 자리
에서 붉은 피가 샘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너...... 너......"
"나는 너희들을 해치지 않았다. 아, 친구끼리 무엇하러 치고 박
고 했느냐?"
흑면군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입술을 부
르르 떨며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단 한마디도 새
어 나오지는 못 했다. 수백 명을 잡초를 베듯 해친 그도 결국은
무참히 최후를 마친 것이다.
연성궁주는 나동그라진 시체를 내려다봤다.
"너희들이 만약 나를 죽일 마음만 먹지 않았어도..... 보다 좀
가볍게 손을 썼다면 혹시 살아있을 지도 모르지..... 나는 분명히
너희들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렇지?"
그녀의 이같은 중얼거림에 대한 대답은 조용한 침묵 뿐이었다.
강풍 부부는 필사적으로 마차 안을 향해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손이 막 아기들의 몸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어떤 손이 재빨리 아이들을 나꿔챘다. 손은 백옥같이 희고 기다
란 아름다운 손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긴 하얀 소매가 손등까
지 내려와 있었다. 손은 옷소매보다 더욱 하얗게 보였다.
"아아! 아이들을..... 그 아이들을 나에게 주십시오......."
강풍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여인도 애원했다.
"둘째 궁주님 제발, 부탁이니 그 아이들을 돌려 주십시오."
연성궁주는 웃었다.
"월노(月奴), 네가 이미 강풍의 아이를 낳은 줄은 미처 몰랐구
나."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처량함과 원망스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화월노(花月奴)란 강풍의 아내를 말했다.
"궁주님! 제가 궁주님을 대할 면목이 없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 하지만......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부디 아
이들을 살려주십시오."
연성궁주는 한동안 그 아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이! 귀여운 아이...... 만약 내 아이였다면......"
그녀는 갑자기 강풍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원망과 슬픔이 가득차 있었다. 한참이나 강풍을 바라본 그녀는 드
디어 입을 열었다.
"강풍,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죠?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아무런 별다른 이유가 없소. 굳이 이유가 있다면 내가 이 여인
을 사랑했던 까닭이오."
"저 여자를 사랑한다고..... 나의 언니가 어디로 보아서 저 여
자보다 못 하단 말예요? 당신이 부상을 입고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언니는 당신을 구해왔을 뿐만 아니라 있는 정성을 다하여 당신
을 보살폈어요. 언니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남을 그토록 친절하
게 대해준 적이 없었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정말 지나칠
정도로 잘해 주었는데 당...... 당신은..... 하녀와 도망을 하다
니...... 당신도 사람입니까?"
강풍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응답했다.
"저는 진심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러나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당신 언니는 도대체 살과 피를 가진
사람입니까? 그녀는 한 덩어리 불이고 한 개의 얼음이고 한 자루
의 보검이고 심지어 마귀(廢鬼)나 신(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
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하고 말한 그는 자기의 처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를 향한 그
의 눈길은 부드러워졌고, 천천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따뜻하고 정감있
는.....이 여인은 나에게 잘 대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저의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이 여인만이 나의 속마음을 사랑
하고 나의 영혼을 사랑했습니다. 남들과 같이 나의 얼굴만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연성궁주의 손바닥이 강풍의 따귀를 후려쳤다.
"그만..... 그만!"
"당신은 단지 이 여자가 당신을 이해해주는 것만 알지 내가 당
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몰라요. 당...... 당신이 설사
추남(醜男)이 된다해도 나는 역시...... 역시......."
그녀의 음성이 점점 작아지더니 끝내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
았다.
화월노는 눈을 크게 떴다.
"둘째 궁주님도 이..... 이 사람을......."
"내가 이 사람을 이해해 줄 수가 없단 말이냐?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 된단 말이냐?...... 내가 불구이기 때문에 그를 사
랑하지 말란 법이라도 있느냐?...... 불구자도 사람이다. 불구가
된 여자도 여자란 말이다!"
그녀는 잠깐 사이에 사람이 변한 것 같았다. 조금 전만 하더라
도 그녀는 남의 생사를 쥐고 혼들 수 있는 초인간이었으나 지금은
오직 한 여인에 불과했다. 그것도 연약하고 가련한 여자였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
다.
무예계의 신화(伸話)같이 전해지는 그녀도 따뜻한 인간의 눈물
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풍과 화월노는 그녀의 얼굴에 흐
르는 눈물을 보며 멍하니 한참이나 입을 열줄 몰랐다.
이윽고 화월노는 슬픔에 잠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둘째 궁주님, 저는 이미 살 가망이 없으니 이...... 이 사람은
지금부터 궁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을 구해주십
시오. 궁주님 외에는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연성궁주의 몸은 떨렸다. '지금부터 이 사람은 궁주님의 것입니
다'라는 말이 화살같이 그녀의 마음을 찔렀던 것이다.
강풍은 갑자기 신음과 같은 웃음을 토해냈다. 그 웃음소리는 통
곡하는 것보다도 더욱 처량하고 더욱 비참했다.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화월노를 바라보며 외쳤다.
"나를 살린다고...... 나를 살려서 어쩌겠다고...... 당신이 죽
는다면 내가 어떻게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소! 월노,
당신은 아직도 나를 이해하지 못 하는군요."
화월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이를 악물고 억지로 참고 있었다.
"저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이해하고 말고요. 하지만 당신이 만
약 죽는다면 이 아이들은 누가 보살피겠습니까?...... 누가 보살
핀단 말예요?"
그녀는 울음에 북받친 음성을 강풍의 손을 굳게 꼭 잡으며 억눌
렀다.
"이것은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자식들에게 고생
을 남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죽음으로써 그 의무(義務)를
져버리려 하지 마십시오."
강풍의 비참한 웃음소리는 이미 그쳐 있었으나 그는 이를 악물
고 있었다.
화월노는 떨리는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살아 있는 것에 얼마나 고난(苦難)이 많은가를 알고 때로
는 죽는 것이 위로가 되는 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발 부탁
이니...... 아이들을 위하여 악착같이 살아 주십시오."
강풍의 얼굴은 눈물로 번들거렸다.
"내가 꼭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당신없이...... 마음에
슬픔만을 지닌 채......."
화월노가 말했다.
"둘째 궁주님, 무슨 일이 있다 해도 궁주님은 이 사람을 꼭 살
려주셔야 합니다. 만약 궁주님이 진심으로 이 사람을 사랑한다면
궁주님의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연성궁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나는 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단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별안간 어디선가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틀렸다. 너는 그 자를 살려낼 수 없다. 이 세상에 그를 살려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나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 속에는 차가
움과 무정함이 섞여 있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몸이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한편 또다른 한가닥의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어 포근한 감을 느끼게도 하였기 때문이다.
강풍의 몸은 추풍(秋風)속의 낙엽(落葉)같이 벌벌 떨려왔다. 연
성궁주의 얼굴도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한가닥의 백의 인영(白衣人影)이 거의 스러져가는 석양의 빛을
따라 그들 앞에 났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그녀의 옷자락. 그녀는 마치 바람을 타고 세
상에 온 선녀같았다. 그녀의 백의(白衣)는 함박 쌓인 심산의 눈보
다 더욱 눈이 부셨고 긴 머리카락은 밤을 맞은 장강의 깊은 물처
럼 검게 윤이 났다. 그 살결은 마치 동짓달 만월처럼 투명하고 청
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용모는 실로 선녀(仙女)라고
해도 과분한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더없이 아름다우면서
도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그것은 그녀의 몸에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혼을 빼앗아갈 만한 마력(廢力)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연성궁주는 고개를 숙였다. 앵두 같은 입술을 한참 깨물고 있던
그녀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언니, 언니....... 오셨군요."
요월궁주가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내가 올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단 말이냐?"
연성궁주는 고개를 더욱 낮게 숙였다.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그리 일찍 온 것은 아니야. 하지만 내가 듣지 않았어도 좋을
말들을 이미 모두 다 들어버렸다."
강풍은 문득 무엇인가 생각난 듯 큰소리로 외쳤다.
"당...... 당신은..... 벌써 왔었군요. 그 닭벼슬과 흑면군이
다시 돌아올 용기가 있었던 것은 당신을 만났던 까닭이죠? 당신은
모든 비밀을 그들에게 말했지요, 그렇지요? 당...... 당신은 왜
이렇게 비열해야 하고 왜 이렇게 악독해야만 합니까?"
"나는 악독한 사람을 상대하게 되면 그보다 열 배 이상으로 악
독하게 대해왔다."
이번에는 화월노가 입을 열었다.
"큰궁주님, 이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니 이.......이 분을 탓하
지 마십시오."
요월궁주의 음성이 한 자루의 예리한 칼처럼 변했다.
"너...... 네년이 그래도 말할 용기가 있느냐?"
화월노는 안간힘을 써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 저......."
"이젠 네가 나를 보았으니 죽을 때도 되었구나."
화월노는 두눈을 감은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궁주님,"
강풍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이 년이 당신 보고 죽으라는 데 그래 당신은 이년에게 감사하
다고 한단 말이오?"
화월노의 입가에는 한가닥의 처량한 웃음이 소리없이 떠오를 뿐
이었다.
"제가 먼저 죽는다면 당신과 아이들이 죽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니 고통을 적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이것은 바로 궁주
님이 저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인데 제가 당연히 감사하다고 인사
를 올려야죠."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두 눈을 뜨고 강풍과 두 아기를 잠시 동
안 바라보았다. 그저 한 번 바라보는 것이었지만 그 속의 정(情)
은 바다같이 깊었다.
강풍은 가슴이 메일 듯한 고통을 참아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월노! 죽어서는 안 되오....... "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저승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
다."
그녀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영원히 그 눈을 뜰 수 없게 감았던
것이다.
강풍은 있는 기력을 다했다.
"월노!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나도 당신과 함께 가겠소......."
이렇게 외친 그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갑자기 몸을 날
려 월노를 향해 덮쳐갔다. 그러나 그가 몸을 날리는 순간 한가닥
의 거센 바람이 부딪쳐왔고 그는 다시 그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요월궁주가 말했다.
"얌전하게 누워 있어라!"
"나는 단 한번도 남에게 애원한 적이 없는데 이번 만큼은 당신
에게 애원하겠소. 제발..... 제발...... 제발 부탁이니 저 여인과
함께 죽게 해주십시오!"
"너는 저 여자의 손가락 하나도 만질 생각을 마라!"
강풍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만약 눈초리로 사
람을 죽일 수 있다면 그녀는 벌써 백 번 이상 죽었을 것이다. 그
러나 요월궁주는 그저 조용히 서있었다.
강풍은 갑자기 미친 듯이 껄껄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연성궁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웃음이 나와요? 당신에게 무슨 웃을 만한 일이 있단 말
이오?"
"너희들은 모든 것이 너희 마음대로 된다고 생각하지만 난 죽기
만 하면 곧 월노와 함께 있을 수 있다. 너희들이 어쩔 수 없단 말
이다."
그는 땅바닥에 몸을 몇 번 굴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점점 작아
졌고, 끝내는 완전히 사라졌다.
연성궁주는 가벼운 비명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강풍의 몸을 뒤집
었다. 한 자루의 단도가 그의 가슴에 꽂혀있는 것이 보였다.
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달빛이 조용히 대지에 뿌려지고 있었다.
연성궁주는 그 자리에 꿇어앉아 목석(木石)같이 꼼짝도 하지 않
았다. 여름철의 시원한 밤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죽었어요...... 그는 드디어 자기의 소원대로 죽었습니다. 우
리는 뭐죠?"
그녀는 불쑥 일어나 요월궁주의 앞에 다가서며 울부짖었다.
"우리는...... 우리는 뭐죠? 이들은 모두 자기의 소원대로 됐는
데 우리는 뭐죠?"
요월궁주는 눈앞에 벌어진 일들에도 아무런 감정의 움직임이 없
는 듯 냉정했다.
"입 닥쳐 !"
"닥치지 못 해요. 언니가 이렇게 해서 얻은 것이 뭐죠?
언......언니는 단지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했고 더욱 언니를 원
망하게 했을 뿐이에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에는 불똥이 튀었다.
연성궁주는 뒤로 몇 발걸음을 물러선 후 뺨을 쓰다듬으며 떨었
다.
"언...... 언...이 언니."
"너는 단지 그들이 나에게 지닌 원한만을 알 뿐, 내가 그들에게
얼마만한 원한을 품고 있는 지는 모르고 있다. 아아! 가슴에서 피
가 솟구쳐나오는 것 같구나."
그녀는 갑자기 자기의 옷소매를 걷어을렸다.
"이것을 봐라!"
달빛 아래 그녀의 백옥(白玉)같이 흰 팔이 나타났다. 그 팔에는
빨간 핏자국이 가득차 있었다.
연성궁주는 섬짓하여 물었다.
"이...... 이것은......."
"모두가 바늘로 찌른 자국이다. 그들이 떠난 후 나는 너무나도
한(恨)스러운 나머지 바늘로 내 살을 찔렀다. 매일같이 내 육체에
고통을 주어야 마음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너는 알고 있느냐...... 너는 알고 있느냔 말이다......."
그녀의 차갑고도 얼음 같던 음성이 갑자기 떨리는 소리로 변했
다.
연성궁주는 그녀의 팔목에 아롱진 핏자국을 보고 한참 동안 서
있다가 결국 눈물이 가득찬 얼굴로 언니의 품에 안겼다.
"그럴 줄이야...... 언니도 그토록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줄이
야."
요월궁주는 동생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하늘에 떠있는 달을 바라
보았다.
"나도 사람이다...... 나도 사람이기에 고통을 겪어야 했고 또
한 모든 사람들과 같이 원한을 느끼고 질투해야 했던 것이다."
달빛이 굳게 껴안은 두 자매를 비추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은 그녀들은 무예계를 주름잡고 천하에 이름을 떨
치는 여마두(女廢頭)가 아니고 아프기만 하면서도 지워지지 않는
애정으로 괴로워하는 불쌍하고도 평범한 여인들이었다.
"언니...... 언니...... 나는 이제야 비로소......."
이때 요월궁주는 갑자기 그녀를 밀어 제쳤다. 연성궁주는 몇 자
(尺)밖으로 밀려 나서야 겨우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
나 그녀는 그리 언짢은 표정이 아니었다.
"이십여 년 동안 언니는 처음으로 저를 안았습니다. 언니가 저
를 뿌리쳤지만 저는 이미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요월궁주는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차갑게 내뱉
었다.
"어서 죽여라!"
"죽여요?...... 누구를 죽이라는 말입니까?"
"저 아기들을 죽여라!"
"아기요?...... 그들은 이제야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벌
써.......벌써........."
"나는 그들의 아기를 살려 둘 수 없다! 만약 죽여 없애지 않는
다면 그들이 바로 강풍과 그 못된 년의 아기라고 생각할 때마다
고통을 느낄 것이다. 나는 평생 동안 그런 고통을 느끼며 살아갈
순 없다."
"하지만 저는......."
"왜? 네가 할 수 없단 말이냐? 좋다! 그럼 내가 하겠다."
그녀는 긴 옷소매를 번쩍 들었다. 땅바닥에 놓여있는 긴 칼을
움켜쥔 그녀의 눈에 달빛에 반사된 칼날이 은빛을 번쩍거리며 비
쳐왔다. 칼이 번개 같은 속도로 달게 잠을 자고 있는 두 아기를
향하여 내리쳐졌다.
연성궁주는 급작스레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칼끝은
한 아기의 얼굴을 스쳐지나가 작지 않은 상처를 내었다. 아기는
아픔을 참지 못 하여 자지러지는 듯한 울음을 터뜨렸다.
요월궁주는 동생의 행동에 대노했다.
"네가 감히 나를 막으려는 것이냐!"
"저...... 저는......."
"놓아라! 너는 내가 언제 하고자 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언니, 저는 언니를 막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그들을 죽
이는 것보다 더욱 좋은 방법이 생각났기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요월궁주는 잠시 동안 망설이더니 물었다.
"무슨 방법이냐?"
"언니는 그 못된 년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있죠?"
"흥! 그년에겐 그럴 자격도 없다."
"강풍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
는 이 아기들을 죽인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애들은
지금 무엇이 고통인 줄도 모르고 있는데 말입니다."
요월궁주의 눈에서 빛이 번쩍했다.
"이 애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이 애들을 평생 동안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우
리의 한을 푸는 것이 아니겠어요? 강풍과 그 못된 계집은 이미 죽
었지만 그들을 편안히 잠잘 수 없게 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위로
가 될 것입니다."
요월궁주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왜 갑자기 마음이 변했느냐?"
"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에게 한없는 원한을 품
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심지어 언니보다 더욱 깊게 말입니
다!"
요월궁주는 그녀의 말을 믿었던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좋다! 무슨 방법으로 그들을 평생 동안 고통 속에서 지내게 할
수 있단 말이냐?"
"지금 강풍이 쌍둥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우리
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요월궁주는 그녀가 무슨 까닭에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아기들 자신도 모르고 있어요."
"필요없는 잔소리는 하지 말아라."
"그 천하제일 검객이란 연남천(燕南天)은 강풍의 친한 친구입니
다. 원래 이 길에서 강풍을 마중하기로 약조가 돼 있었죠. 그렇지
않았다면 강풍이 굳이 이 길을 택할 리는 없었습니다."
"너는 어디서 그렇게 많은 소식을 탐지(探知)했단 말이냐, 놀랍
구나?"
"하지만 연남천이 늦었던 것이에요."
"그가 아마 온다해도 한 구의 시체만 더할 뿐이다."
"그는 얼마 있으면 이곳에 올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 두 아
기중 한 명만을 데려가고 나머지 한 명을 이곳에 남겨놓는다면 연
남천은 남겨놓은 아기를 데려갈 것이에요. 그는 당연히 자기 의제
의 아들을 키울 테고 자기 일생 동안 배운 무공을 그 아기에게 전
수(傳授)하겠지요. 그리고 그 아기가 크게 되면 자기의 부모를 위
하여 원수를 갚고자 할 것은 불을 보는 것 같이 뻔한 일입니다."
"옳은 판단이다."
"그리고 복수의 대상은 바로 이화궁이 되는 것이지요."
요월궁주의 눈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옳은 말이다."
"그때쯤은 우리가 데리고 간 아기도 성장할 테고 물론 그도 뛰
어난 무공을 지니게 되겠죠. 그는 만약 적이 우리를 해치려 한다
면 당연히 나서게 될 것이어요. 그들은 서로가 형제인 줄 모를 테
고 세상사람들도 아무도 모르고 있으니 그들은 필사적인 싸움을
하게 되겠죠. 이렇게 되면......"
"그들이 이 세상에 같이 살 수 없는 원수 사이가 된다는 말인
가?"
"바로 그래요. 그땐 동생이 형을 죽이려 하고 형도 물론 동생을
죽이려 할 테니 말입니다."
요월궁주의 얼굴에는 드디어 한가닥의 미소가 나타났다.
"그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겠구나!"
"이 애들을 지금 그냥 죽이는 것보다 더욱 잔인하게 우리 가슴
속의 울분을 풀 수 있어요."
"누가 누구를 죽이든 살아남은 애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면 그의
얼굴에 그려지는 표정이 가관이겠지."
"우리의 회한을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겁니다."
요월궁주의 태도가 갑자기 또다시 변했다.
"하지만 누가 이 비밀을 그들에게 말한다면......."
"세상에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
아요?"
요월궁주는 차디찬 음성으로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너를 제외하고 말이다."
연성궁주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저요? 이 모든 것이 제가 생각해낸 것인데 어찌 제가 그들에게
얘기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언니도...... 아시겠지만 제 마음
은......."
요월궁주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야. 온 천하에 아마 너만이 이런 괴상한 방법을 생각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생각해낸 이상 그들에게 이 비밀을 얘
기하지야 않겠지."
상처입은 아이는 어느덧 울음을 그쳤다. 그는 마치 이같은 뼈에
사무친 원한과 악독하고 놀라운 계책에 놀라 넋을 잃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한쌍의 순진하고 두려움으로 가득찬 눈은 장차의 재
난(災難)과 고통과 일생의 불행을 예측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요월궁주는 고개 숙여 그들을 잠시 동안 쳐다보더니 중얼거렸
다.
"십수 년...... 최소한 십수 년을 기다려야 한단 말이
지......."
"적지 않은 세월이지만 보복만 할 수만 있다면 그 십수 년이 뭐
가 그리 대수롭단 말입니까?"
요월궁주가 장탄식을 했다.
"이 뼈에 사무친 원한 외엔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나를 그토
록 오랜 세월동안 기다리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첫댓글 즐감!!!!!!!
즐감하였습니다.
즐감~!
즐감요
ㅎㅎㅎ
^^
좋아좋아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
요상한 인물이군
감사
감사 합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전설의 고향이네
즐독
잘봅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보고 있습니다~~~
악랄한 수단 이네요 ?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