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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역전 이발 / 문태준
은하수 추천 0 조회 31 19.02.09 22: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역전 이발 / 문태준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이 살고 있고

말라 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 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시집 맨발(창작과 비평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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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강호가 주연한 ‘효자동 이발사’란 영화가 있다. 암울했던 5~60년대의 청와대 근처를 배경으로 시대의 굴절된 아픔을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풀어낸 영화다. 이승만 정부의 3·15 부정선거에서부터 4·19혁명, 5·16 쿠데타를 거쳐 박정희 집권시절을 관통하면서 김신조 침투사건도 나오고 10·26사태도 얼핏 비쳐졌으며 마지막엔 청와대의 새 주인으로 대머리 아저씨까지 등장한다. 연출과잉이 엿보이는 대목이 없지 않았으나 영화를 보며 어릴 때의 동네이발관을 떠올리기엔 충분했다. 그렇듯 이 시에서도 같은 추억이 한 움큼 묻어나온다. ‘역전이발’은 아니지만 ‘복지이발관’이든가, 아무튼 명칭도 무슨 공익을 위해 설치된 관공서 이름 같았다.


 하루 분량의 행복을 원하거든 이발을 하라는 서양 속담을 알고 있다. 머리를 단정히 자르고 면도를 한 다음 톡톡 스킨로션을 바르면 화사한 느낌이 얼굴 전체로 번진다. 다시 얼굴을 쓱싹 비비며 거울 한번 쳐다보면 매끄러운 촉감과 함께 온 몸이 다 환해진다. 게다가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속을 긁어내’듯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가며 정성껏 머리가 감길 때면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느라 눈물을 찔끔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머리통에다 깍지 낀 손으로 탁탁 쳐주는 특별한 안마까지 받고나면 신체의 모든 감각기관이 하루치의 행복을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된 양 활짝 열려 실제로 하루를 유쾌하게 보냈다.


 그리고 이 작고 허름한 이발소는 확실히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구석이 있었다. 반드시 한 점 걸려 있어야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로 시작되는 푸시킨의 시, 혹은 밀레의 만종, 나중엔 춘화까지는 아니라도 소주회사에서 배급한 심하게 벗은 여인의 달력,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의 고요한 산수화 한 폭 등의 익숙한 풍경이 모두 ‘말라 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 넣는 한 송이 꽃’이었던 것이다. 한참 나중엔 최소 14인치 컬러TV로 개비되었겠으나 라디오에선 이미자나 배호의 구성진 노랫가락이 흐르고, ‘이발사 아저씨의 콧노래가 따라 흐르고, 몇 개의 표어와 함께 현상수배전단도 한 장 붙어있었다.


 더 거슬러 가면 마징가제트의 팔뚝처럼 생긴 육중한 의자 팔걸이에 널빤지를 깔고 앉아 툭하면 헤헤헤 웃어주는 아저씨가 ‘바리깡’으로 뒤통수 하단을 신작로 내듯 가지런히 밀 때면 껌벅거리는 눈으로 거울 속 자화상을 쳐다보던 어린 나도 있었다. 그런 추억의 이발소들이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은 변질된 퇴폐안마이발소가 창궐하면서부터이고, 한편으론 미장원에서 머리 손질하는 남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70년대 초반 지하철 1호선 공사로 종로3가의 유곽이 철거되면서 윤락여성들이 면도 직업교육을 받고 대거 이발소로 유입된 것이 퇴폐의 원조였다. 배운 게 도둑질인데 곱게 면도만하고 간단한 안마에만 거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일종의 풍선효과라 하겠다.


 무턱대고 아무 이발소에 들어갔다가는 당황스러운 사태를 겪기 십상이다. 나도 일부러 찾은 적은 없지만 얼굴전체가 마시지 팩으로 덥힌 상태에서 안마를 받다가 의사전달이 잘 안되어 어쩌면 ‘자의반타의반’일지도 모르겠으나 ‘당한’ 경험이 있다. 그 후 신중을 기해 이발소를 찾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장원 이용은 내키지 않았다. 딱 한번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몇 년 전부터는 가성비(4천원) 좋고 미약하나마 옛 동네이발관 향수도 자아내고 해서 아주 가끔 서울에 갈 때면 이용하는 곳이 있다. 종로3가 이른바 ‘송해거리’ 이발소밀집지역 역전의 이용사들이 포진한 곳이다. '말라 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 송이 꽃이' 화사한 그곳에서 하루치의 행복을 번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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