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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리내 소리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꽁끼
양헌수 梁憲洙
양헌수 梁憲洙
양헌수(梁憲洙 .. 1816~1888) ....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甫), 호는 하거(荷居)이다. 이항노(李恒老)의 문인으로 척화파이었고, 무예를 익혔으며, 1848년에 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이후 철종시절에 참상(參上)으로 승진하였다가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865년(고종 2) 제주목사로 있을 때 관리로서 탐욕을 부린 전판관(前判官) 백기호(白基虎)를 징계하여 島民들로부터 창송을 들었고, 이듬해 정족산성(鼎足山城) 수성장(守城長)으로 부임하였다. 이 해 프랑스 로즈(Rose)제독이 강화도를 침략하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고, 10월3일 로즈가 보낸 해군 대령 올리비에(Ollibier)부대 160명이 침범하자 이들을 맞아 싸웠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그 공으로 한성부윤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좌승지, 황해병사,어영대장,좌포도대장, 금위대장을 거쳐 1875년에는 형조판서에 올랐다.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開港을 반대하는 斥和論을 주장하였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에는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임명되었다가 공조판서에 이른다.
병인양요 丙寅洋擾
병인양요 발생의 배경
1866년 초,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 신자 6천명을 학살하였는데, 이를 병인박해(丙寅迫害) 또는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 한다. 이 때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은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나머지 3명 중 하나인 리델(Ridel)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하여 駐中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에게 박해 사실을 전하면서 보복을 촉구하였다.
프랑스 공사 벨로네(Bellonett)는 " 조선은 사전에 청나라의 승인을 받고 병인박해(丙寅迫害)를 단행하였으므로, 청나라는 병인사옥의 공범자"라고 규탄하면서 조선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함대사령관 로즈(Rose)제독에게 조선에 대한 응징 원정을 명한다.
그러나 淸나라 정부는 조선이 중국의 조공국(朝貢國)이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 독립국가이며, 共犯은 사실무근이라고 하면서 프랑스의 거병(擧兵)을 강력히 항의하지만, 프랑스는 조선과 수교관계가 없다는 점과 조선은 정치적 독립국가라는 점을 들어 본국 프랑수정부의 지시나 개입 없이 현지 사령관의 주재하에 군사적 응징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차 원정
Rose제독의 제1차 원정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한양까지의 수로를 탐색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 원정이었다. 로즈제독은 군함 3척을 이끌고 9월18일부터 10월1일까지 한양의 양화진(陽化津), 서강(西江)까지 올라와서 세밀한 지형 정찰과 水路 탐사를 한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2차 원정
Rose제독은 10월 5일에 한강의 봉쇄를 선언하고,10월11일에 조선 원정길에 올랐다.군함 7척, 함재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그리고 향도 및 水路 안내인으로 리델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崔善一), 최인서(崔仁瑞), 심순여(沈順汝) 등 3명을 대동하고 강화도로 내침하였다.
프랑스軍의 강화부 점령
10월16일에 江華府를 점령하고 "우리는 자비로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의 동포 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우리는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고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강화도 수비에 실패하여 사태가 위급해지자 조선의 조정은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고 그 大將에 이경하(李景夏), 중군에 이용희(李容熙), 천총(千總)에 양헌수(梁憲洙)를 임명하고 출정하게 되었다. 이 때 양헌수는 濟州牧使로 있다가 천총(千總)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통진부(通津府)에 陣을 치고 강화도 수복계획을 구상하였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26일에 문수산성(文殊山城) 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프랑스군의 총포와 화력을 당해 낼 수 없었던 강화도의 관리, 군인, 백성들이 모두 피난갔으므로 강화도는 프랑스군의 독무대가 되었다.
'손돌목 '의 傳說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황급히 강화도로 피난길에 오른 高宗은 "손돌"이라는 뱃사공의 배를 탓는데, 이 곳의 물살이 거세어 배가 몹시 흔들렸다. 그러자 왕과 그 신하들은 손돌을 역적으로 생각하여 그가 왕을 죽이려 한다고 오해를 하고 손돌을 칼로 베어 죽였다.
그러나 손돌은 죽어가는 와중에서도 왕을 살리겠다는 생각에서 마지막 힘을 내어 작은 바가지를 물위에 띄우고 자신이 죽더라도 이 바가지를 따라 배를 저어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손돌"의 墓
결국 무사히 강을 건넌 왕과 그 일행은 경솔함을 후회하고 손돌의 墓를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연유로 이 뱃길목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고 하여 "손돌목"이라 부르게 되었고, 손돌의 기일(忌日 .. 음력 10월20일)이 되면 그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 하여 "손돌바람"이라고 부른다, 이 때 바람과 함께 오는 추위를 "손돌 추위"라고 한다.
양헌수의 손돌목 도하(渡河)작전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키며 강화도를 공격하자, 濟州牧使로 있던 양헌수는 천총(千總..대장)으로 임명받고 金浦에 도착한 양헌수는 근대식 병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에 火力으로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임을 알고, 기병(奇兵)작전을 계획한다. 당시 프랑스軍은 이미 강화도를 점령하고 있었다.
양헌수는 김포 앞바다 부래도(浮來島 .. 德浦 앞)에서 손돌목을 건너 강화도를 공격하기로 한다. 그리고 도하작전을 개시하기 전, 11월5일(음력 9월28일), 손돌묘(孫石의 묘)에 가서 손을 마주 잡고 말하기를 (丙寅日記에 기록되어 있음) ...
손돌님의 영혼이 있다면 충의로 일어나는 분한 마음이 만고에 뻗칠터이니, 이 곳을 지나는 敵船을 복멸(覆滅)되게 하여 주십시요. 그 영험에 의지하여 강화 일보지(一步地)에 신명을 바친다 해도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드린 후, 양헌수는 군선 3척에 군사를 거느리고 강화도의 덕진진에 상륙하였으며, 곧 행군을 개시하여 다음 날이 8일 새벽에 정족산성에 도착하였다. 양헌수는 군사를 정족산성에 매복시켰다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프랑스군을 오후 6시경 격퇴시켰다.
상마망유가 上馬忘有家 말에 오르면 집을 잊고
출성망유신 出城忘有身 성을 벗어나면 내 한몸 잊었노라
손돌목을 도하(渡河)를 하기 위하여 배에 오르면서 양헌수는 위와 같은 비장한 詩를 남겼다.
鼎足山城 전투 .. 梁憲洙의 활약
이 때 양헌수장군은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려면, 기병작전(奇兵作戰)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어융방략(禦戎方略)으로써 강화도를 수복할 작전을 세운다. 이리하여 양헌수의 군대 549명이 德浦에서 프랑스군에 들키지 않고 한밤중에 잠도작전(潛渡作戰)으로 강화해협을 건너 11월7일 정족산성을 점령하고 농성하였다. 양헌수는 정족진(鼎足鎭)을 결성한 뒤, 남문에는 초관(硝官) 김기명(金沂明) 지휘 하에 포수 161명, 동문에는 초관(硝官) 이렴(李濂)의 지휘 하에 京軍 및 향군(鄕軍) 157명을 배치, 매복하게 하고 프랑스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이러한 조선군의 움직임을 보고 받은 Rose제독은 올리비에(Ollibier)대령에게 정족산성의 공격을 명하였다. 11월9일 올리비에는 160명의 분견대를 이끌고 야포없이 輕武裝으로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다.
이에 南門과 東門을 지키던 조선군은 쳐들어 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포격을 가함으로써 격전이 벌어지는데, 이 격전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 포함 6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에불과하였다.
이로써 火力面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은 연전연패하다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에 의하여 근대식 무기로 장비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고, 이로써 프랑스군대는 강화도를 철수하였다. 이 전투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을 격퇴하였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프랑스의 실패와 文化財 약탈
프랑스군은 철수할 때 外奎章閣 도서 345권과 은괴(銀塊) 19상자를 약탈하여 갔다. 프랑스군의 침략은 11월21일 제2차 원정이 끝날 때까지 무려 2개월에 걸친 장기간이었다. 원정을 실패로 끝내고 중국으로 돌아간 Rose제독은 프랑수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적 보복을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주장하였지만, 벨로네공사를 비롯한 북경의 모든 외교관들은 그의 원정이 실패로 끝났다고 간주하였다.
후일 1867년 3월에 미국정부가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신미양요를 일으킬 때, 프랑수정부에게 공동보복 (프랑스는 丙寅迫害로 피해를 입었으므로...)을 제의하였으나, 프랑스는 이미 조선 원정을 통하여 응징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공동 원정을 거부하였다. 즉 프랑스정부는 이 전투를 성공이라고 공식적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양헌수 勝戰碑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
巡撫千總梁公憲洙勝戰碑
이 승전비는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1873년에 건립된 것이다. 프랑스는 1866년 10월, 우리나라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삼아 극동함대 소속 군함 7척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였는데, 당시 순무천총이던 양헌수장군이 정족산성에서 강계포수 500명을 매복시켰다가 야간에 기습하여 격퇴시켰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그리고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남인을 자처했지만, 정조 때 남인들이 지녔던 개방성과는 전혀 다른 노론 벽파식 정치행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인 천주교도의 보호로 겨우 목숨을 건진 리델 신부가 청아라 산동반도의 지부로 탈출하여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제독에게 프랑스 신부 처형 사실을 전하면서 병인양요의 서막이 올랐다. 주청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가 청나라 공친왕(恭親王)에게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호조(護照 .. 여권)발급을 요청하자 청나라의 총리아문은 ' 조선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지만, 일체의 국사를 자주(自主)하고 있다 '고 거부하였다.
그러자 프랑스는 직접 조선 원정을 감행한다. 7척의 함선에 1500여 명 규모의 프랑스 함대는 강화도 갑곶이와 김포의 문수산성을 점령하고, 학살 책임자 처벌과 조선, 프랑스 조약 체결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양헌수가 이끄는 결사대가 그믐밤에 강화도 정족산성을 장악하자 강화도의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 퇴각했다.
같은 해인 1866년 8월, 평양 대동강에서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는 화공(火攻)으로 미국의 제너럴셔먼호를 소각하고, 선원 24명을 몰살시켰다. 고종 8년(1871년. 신미년), 미국의 로저스제독은 5척의 함선에 1200여 명의 군사로 조선을 공격하였다. 이 신미양요도 미국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못하고 돌아갔지만, 강화도 광성보(廣城堡)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은데 비해 조선군은 350여 명이 전사하였다는 사료도 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내용은 조선의 패전이었지만, 형식은 승전이었다. 이때 흥선대원군이 형식상 승전의 여세를 몰아 개국을 단행하였다면 조선은 서구 열강과 평등한 조약을 맺는 최초의 동양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형식상 승전에 고무된 대원군은 그해 8월 '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벅는 것 ....主和賣國 '이란 내용의 척화비(斥和碑)를 전국 각지에 세웠다. 대원군은 군사력으로 쇄국을 유지할 수 잇다는 망상을 품었고, 막대한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환곡제를 부활시켜 자신의 개혁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호포제와 서원 철폐로 양반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은데다 경복궁 중건, 환곡제 부활 등으로 상민들의 지지까지 잃어버렸다.
양헌수장군의 묘소
양헌수의 묘는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덕수리 산 59-3에 위치하고 있다. 묘는 정부인 고성이씨와 합장묘로 묘비 이외에 다른 석물이 없었는데, 최근에 후손들이 세운 듯하다. 묘비는 그의 아들 양주겸(梁柱謙)이 1934년 5월에 건립한 것으로 앞면에는 正憲大夫刑曺判書禁衛大將兼義禁府三軍府訓練院事五衛都摠府都摠官經筵特進官 贈諡忠莊 南原梁公謂憲洙之墓 貞婦人固城李氏左라고 쓰여 있다.
양헌수장군의 遺品들...
상마망유가 上 馬 忘 有 家 말에 오르면 집을 잊고
출성망유신 出 城 忘 有 身 성을 벗어나면 내 한 몸 잊는다.
병인일기 丙寅日記
병인양요는 약 2개월에 걸친 전투이었다. 양헌수는 出戰을 시작한 1866년 음력 9월3일부터 10월26일까지 52일간을 기록한 出征日記를 남겼는데, 병인일기(丙寅日記)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은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남겼고, 양헌수는 병인일기를 남긴 것이다.
그 주요 내용은 ...
日記에는 " 바라옵건데 이 곳을 지나는 敵船을 마치 문수산성에 안개를 피워 우리 군사를 보호하듯 전복시켜 주시기 빕니다 " ..." 敵들은 죽은 戰友를 보고 왼손으로는 그 시신을 이끌고 오른손으로는 총을 쏘아 대는데, 그 절제의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
"우리의 총은 사정거리가 100여步에 불과하였지만, 적의 총알은 500步를 능가하였다 " ... " 지금바다를 건너면 맹세코 살아 돌아오지 않으려니 백동(栢桐) 안산(案山)에 내가 치표(置標) 해 놓은 곳이 있으니 내가 죽은 후에 일은 모두 현령(縣令)에게 부탁하오니 아울러 알아서 해주오 " 등 당시 전쟁상황에 대한 묘사와 장수로서의 고뇌를 기록하였다.그리고 이 일기를 통해 "전격양박도주 (傳檄洋舶都主)"라는 당시 우리나라 조선에서 프랑스 함대의 Rose사령관에게 보낸 외교문서가 양헌수가 직접 쓴 것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하거집 荷居集
양헌수는 평생의 저술을 모아 하거집(荷居集)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관직생활과 관련한 글과 함께 詩, 書, 文, 說 등 문학분야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각종 교지(敎旨)들..
어사화 御賜花
양헌수가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을 때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어사화(御賜花)이다. 오사화(御賜花)란...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하사한 종이꽃이다. 새로운 과거 급제자는 방방의(放傍儀 또는 唱榜儀)를 거행할 때 홍패(紅牌 ..과거 합격증서), 개(蓋) 그리고 주과(酒果)와 더불어 어사화(御賜花)를 하사받았다.
어사화는 참대(竹)에 오리 두마리를 푸른 종이에 감고 꼬아서 군데군데에 靑,紅,黃 등 3色의 가화(假花)를 달아, 한 쪽끝을 복두(복頭)의 뒤에 꽂고, 다른 한쪽 긑을 붉은 명주실로 잡아매어 머리 위로 휘어 넘겨서 입에 물가 3일 유가(游街 ..시가행진)을 하였다.
호패 號牌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닌 패(牌)로 지금의 신분증명서와 같은 것이다. 그 起源은 元나라에서 시작되었으며, 한국은 1354년(고려 공민왕)에 이 제도를 모방하여 수,육군정(水,陸軍丁)에 한하여 실시하였으나 잘 시행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호적법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목적은 호구(戶口)를 명백히 하여 민정(民丁)의 數를 파악하고, 직업,계급을 분명히 하는 한편,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그 중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군역(軍役)과 노역(勞役)의 기준을 밝혀 백성들의 유동과 호적 편성상의 누락,허위를 방지하는데 있었다.
엽전 葉錢
무품안 武稟案
양헌수가 활동하던 당시(철종~고종) 武官의 명단(이름과 관직)을 적은 일종의 명함첩이다.
양헌수의 글씨
정족산 삼랑성 鼎足山 三郞城
강화도 길상면에 있는 삼국시대의 山城이다. 둘레 약 1km이며,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인하여 삼랑성(三郞城)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 한다.
성벽은 거친 할석(割石)으로 축조되었다. 1259년(고종 46) 백승현(白勝賢)의 풍수설에 따라 고종은 王業을 연장하기 위하여 성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마니산(摩尼山)의 사고(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1660년(현종 1) 삼랑성 안에 새로 지은 史庫를 짓고 옮겨 놓았다. 이를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라고 한다.
1739년(영조 15)에 중수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 명명하였다. 1764년 다시금 성을 중수했다. 1866년 양헌수장군이 프랑스軍을 물리친 병인양요의 승첩지로 유명하며, 성 안에는 양헌수의 승전비, 전등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