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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치의 희망버스, 새로운 노동자정당을 꿈꾸며
7월 10일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이 “국민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대통령선거 출마 선언을 했다. 그녀의 출마 선언문에 ‘꿈’이라는 단어가 18번이나 나왔다.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는 박근혜의 뒤편에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빨간 슬로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린 시절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간호사 언니가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네 명의 동생을 포함해 일곱 가족이 방 한 칸에 짐짝처럼 뒤엉켜 살던 시절, 앉은뱅이 책상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게 내 꿈이었고, 방이 두 개 있는 집에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소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서민으로 살아보지 못한 박근혜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지지리도 가난했던 집안의 맏딸이었던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서 대학을 가고 싶다는 작은 꿈마저도 포기하고, 실업계 학교를 선택해야 했다.
박근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나의 꿈
가난 때문에 선택한 상고였지만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은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름대로 대학을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가난한 아이들이 모여 공부하는 학교는 수업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이들을 방송국에 동원해 돈을 버는 등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1987년 6월 민주화 투쟁의 물결 속에 우리 학교도 재단비리 척결을 외치며 싸움이 벌어졌다. 소위 ‘사립학교 민주화 투쟁’ 당시 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일부 선생님들과 전교생이 나서서 싸웠지만 결국 비리재단은 물러나지 않았고 교장만 몇 번 바뀌는 것으로 싸움은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주체가 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직선제 학생회를 건설하게 되었다. 우리는 다양한 소모임을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했다. 뭐가 되고 싶다는 꿈은,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우리 하나 하나가 주체로 존중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나도 모르게 바뀌어버렸다.
가난한 학생들과 비리 학교의 경험
줄줄이 동생들이 있어서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에 처해 있었던 나는 1992년 구로공단에 왔다. 8년 정도 일을 했고, 노동조합 활동도 했다. 하지만 회사의 파산으로 새로운 일터를 찾게 되었고, 2002년 위성라디오를 만드는 유망한 중소기업이었던 기륭전자에 입사하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시절, 공고를 나온 학생들은 삼성이나 현대 등 대기업에 취직했고, 상고를 나온 학생들은 은행이나 증권회사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조차도 생소했었다. 월급이 많지는 않았지만 취직하면 당연히 정규직이었다.
하지만 1998년 IMF 구제금융사태가 벌어지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정리해고법과 파견법이 만들어지면서 세상은 달라져버렸다. 유망한 중소기업이었던 기륭전자도 정규직을 뽑지 않았고 나는 파견노동자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2005년 10월 17일 노무현 정권 당시 기륭전자 공장에서 불법파견 철폐를 요구하며 농성하다
경찰에 연행 되는 기륭전자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의 꿈
기륭전자에는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이 있었다. 정규직은 고용이 안정되어 있고, 임금 수준도 괜찮았다. 직접고용 계약직은 상여금 400%를 받았다. 그러나 생산직 노동자의 대부분인 파견직은 상여금도 없었고, 법정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나는 다행히 운이 좋아서(?) 3개월 만에 직접고용 계약직으로 전환되었지만, 다른 언니들과 동생들은 파견노동자로 최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일을 해야 했다. 파견노동자들은 정규직은 꿈도 꾸지 못하고 계약직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일했다.
파견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해고와 저임금, 무시와 모멸감 등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됐고, 노동부로부터 근로자파견법을 위반한 불법파견이라는 판정도 받았다. 그래서 우린 ‘이제 해고당하지 않고 일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조를 만들자마자 자본의 무자비한 해고는 이어졌고, 비정규 노동자들에 대한 법적 보호는 전혀 없었다.
불법을 회사가 했지만 그 불법을 시정하라는 노동자들은 해고되고 구속되었다. 수백 명을 노예 노동을 한 인신매매가 벌금 500만원으로 죄 값을 다 치루는 세상에서 불법파견 정규직화는 불가능했다. 법이 보호하지 못하는 투쟁을 통해 우리가 승리를 한다는 것은 다들 불가능하다고 했다. 회사의 요구에 순종해 노예노동을 감수하는 것 외에 개인이 현실 속에서 꿈을 이룰 길은 없었다.
정규직이 꿈이라니
우리가 믿은 것은 우리의 억울함 그 자체였다. 우리의 고통과 분노를 돌보지 못하는 국가나 법 그리고 사회가 도대체 우리에게 왜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때 만난 구호가 우리가 주문처럼 외우고 다닌 ‘혼자 꾸는 꿈은 그냥 꿈이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꾸는 꿈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쫓겨난 나의 일터로 돌아가는 것, 더 이상 소모품 취급 받지 않고 사람으로 대접을 받고 싶다는 것, 일터가 나의 보람과 가치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참 소박한 꿈인데 왜 이게 어려울까? 사람 사는 세상에서 말이다.
지금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의 꿈도 다 소박하다. 사용자들이 탐욕만 버린다면 단박에 이뤄질 꿈이다. 하지만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 노동자들의 소박한 꿈은 여전히 꿈으로만 존재한다. 대법원에서 이긴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포함해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꿈을 단 하루도 노동자로 살아보지 않은 박근혜가 알 수 있을까?
진보정당에 대한 꿈
소박한 노동자들의 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꿈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쌍용차 22명의 죽음을 부른 정리해고법과 900만 비정규직의 절망을 불러온 파견법 제정이었고, 노무현 정권의 비정규직법이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민주노동당을 만들었고 2004년 10명의 진보정당 국회의원을 탄생시켰다. 지금도 나는 그날의 설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2004년 노동절 전야제 때 우리의 후보들이 당당히 국회의원이 되어서 우리 노동자들 앞에 섰었다. ‘아, 우리도 할 수 있구나!’ 뿌듯한 마음이 가득했었다.
우리는 지역에서 돈 내고 몸 대면서 열심히 뛰어다녔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휴가내고, 주말 반납하고 밤마다 민주노동당 이름을 입이 부르트도록 알리며,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가능하다고 외쳤다. 정리해고 없는 세상을 만들자며 정말 발에 땀나도록 뛰어 다녔다. 그 결과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고 믿는다. 우리의 땀과 노력으로. 그리고 지역구 국회의원, 지자체 일꾼들을 대거 배출하는 당이 되었다.
온 몸을 던져 만든 민주노동당 10명의 국회의원
하지만 날이 갈수록 투쟁하는 정당의 모습이 사라졌다. 당원들의 발품 손품을 믿고 나서는 당풍이 약해졌다. 노동자 서민을 위해 의석수를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들릴 뿐 원외에서의 투쟁에 대해서는 점차 무뎌지고 있었다. 분당으로 인해 당뿐만 아니라 많은 노동자들이 아픔을 겪어야 했다. 많은 대중들에게 ‘너희도 기성 정당과 똑 같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논의가 대두됐다. 마치 갑자기 회사의 관리자인 상무 전무와 노조를 통합하자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참혹스러웠고 거의 절망적인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든 진보진영 전체를 아우르는 당이 건설되어야 하는데, 황당하게도 민주당 정권 10년을 계승하겠다는 국참당과의 통합에만 집중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국참당이 계승하겠다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10년은 우리 노동자 민중들에겐 그야말로 절망이었다.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시켰을 때 들불처럼 일어나 싸웠지만 1997년 IMF가 오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 것은 노동법을 먼저 개악했다는 사실을. 그로부터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개시되었다는 것을. 김영삼 정권의 날치기 통과를 총파업 투쟁으로 막았던 그 노동법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밀어부쳐 통과시켰고, 정리해고법, 파견법, 비정규직법 등 3대 악법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절박하게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농민들을, 대추리를, 대우자동차 노동자를 공권력으로 짓밟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는 것을...
출처: 자료사진
잊을 수 없는 민주당 정권 10년의 악몽
그래서 함께 투쟁했던 이들과 국민참여당 통합을 반대하며,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고 대의원대회에서 피켓을 들고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도부는 그동안 치열한 투쟁과 발품을 판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직 국참당과의 통합을 통해 최소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해야 힘 있는 진보정당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만 되 뇌일 뿐이었다. 당원 수로 보다 뭘로 보나 기존의 민주노동당이 국참당을 충분히 견인할 수 있다고 큰소리 쳤다. 결국 지난 10년 넘게 나의 당 우리 노동자들의 당이라고 생각했던 민주노동당을 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민주노동당을 탈당하면서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그동안 우리는 무상의료, 무상교육,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쳐왔고 그 과정에서 무상급식이 관철되었다. 많은 대중들이 그게 가능하냐고 했고 기성 정당들도 비웃었다. 하지만 뚝심 있게 밀고 온 결과 아직 부족하지만 무상급식은 실현되었다. 바로 이러한 길, 우리의 주장이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쉼 없이 더욱 세상을 급진화, 근본적 혁파로 나가는 정치만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진보의 중심은 계급이라는 말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진보는 반미 반제의 과제를 직접적으로 품고 있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은 거리에서 저들이 쳐 둔 선을 넘고 법을 넘어 나가는 것이다. 평등과 자주와 평화통일, 그리고 인간이 모든 억압과 차별에서 해방된 세상을 위해 ‘아스팔트 농사를 짓는다’는 정광훈 전 전농 의장님의 말을 정치로 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과연 이 길을 걷고 있는가. 바리게이트 저편에서 권력을 휘두르다 실추한 이들의 디딤돌이 되는 것이 과연 진보라는 말로 가능한 것인가. 왜 우리가 진보정당을 보수정당과 분리하여 설립했는지 첫 마음을 살피자. ‘죽 쒀 개주는 꼴 그만 보고 당당하게 정치와 사회의 자주적 주체로 서자’는 그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하다
10년 이상을 함께 해온 당을 탈당하고 난 후 솔직히 나는 무력감이 들었다. 정치라는 말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총선을 보면서 노동자 도시의 통진당 패배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활동하면서 제일 한가한 총선 기간을 보냈다. 나 뿐 아니라 주변의 많은 이들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투표하러 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나의, 우리 노동자들의 후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비단 나뿐이었겠는가.
이런 무력감에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지 고민이 들었다. 계속 이 상태로 가는 것은 우리 노동자들에게 끔찍한 재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최근 정세는 장기 대공황으로 치닫고 있고 여기저기 고통에 신음하는 노동자, 민중들이 있다. 이 때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결속하고 희망을 제시하며 투쟁해 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렇다면 누가 나서서 중심에 서서 해야 하는가. 2011년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버스’는 정말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최근 쌍용차 투쟁에서도 함께 하는 이들을 보며 ‘희망’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함께 발품을 파는 이들, 치열하게 투쟁하는 이들이 함께 한다면 그간의 어려움을 딛고 다시 한 번 ‘비정규직 없는 세상’, ‘정리해고 없는 세상’, ‘돈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러한 고민을 함께 했던 현장의 노동자들이 모여 토론회를 했다. 그곳에 모였던 노조 간부들의 고민이 나와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많은 노동자들의 마음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토론회에서 주요하게 나왔던 이야기중 하나가 “현장 조합원들이 이제 우린 누구를 찍어야 하냐”는 질문에 너무도 곤혹스러웠다는 것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것이 꼭 누굴 찍는 것만은 아니지만 대중적 활동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누굴 찍는다는 것은 어떤 내용을 가진 사람을 찍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우리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나의 이야기를 하는, 우리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이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우리가 가진 생각을 현실화하기 위한 실천을 함께 조직해야 하지 않겠는가. 죽 쒀 개주지 말고 투쟁을 통해 만들어진 힘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나가야 한다.
현장의 간부들을 만나 토론하다
언론에서 연일 대선주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우리 노동자들의 요구를 전면에 걸고 나온 후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정리해고로 22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이 목숨을 잃었는데, 살인법인 정리해고법을 없애야 한다고 하는 후보가 없다.
비정규직으로 고통 받으며 최저임금에 신음하며 살고 있는 노동자들, 대법까지 이겨도 불법을 저지른 사람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채 불법을 시정하라고 요구하는 노동자들만 구속되고 해고되는 이 기이한 상황에 대하여 파견법을 폐지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하는 이도 없다. 민주노총조차 아직도 통합진보당에 미련을 남긴 채 어떻게 고쳐 쓸 것인가만 고민하고 있는 상태다.
아무리 둘러보고 살펴보아도 현실 정치판에서 우리 노동자 민중의 썩어 가는 마음에 새살을 돋게 하는 정치가 없다.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점박이 고양이들이 지배하는 마우스 랜드의 사회다. 절망도 사치가 되는 지경이다. 그러니 정말 필요한 우리들의 투쟁, 우리들의 정치, 우리들의 희망을 다시 찾아야 한다.
나는 이 희망을 찾는데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밑으로부터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우리 노동자들, 그들이 하루하루 흘리는 피눈물의 전선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출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륭투쟁, 함께 투쟁했던 많은 투쟁사업장 동지들의 모습 속에서, 희망버스 투쟁을 통해, 쌍용차 22명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한문 분향소 투쟁을 통해 많은 이들의 연대의 마음을 통해 얻은 결과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노동자 계급이, 노동자 계급의 선봉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노동자 민중의 정치가 무엇인지를 옹골차게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만큼 실의에 빠진 노동자 빈민 전체 민중의 희망으로 ‘진보 정치’를 다시 세워야 한다.
우리는 이미 이런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 냈다. 희망버스의 경험이 그것이다. 비정규직 정리해고 없는 세상을 향한 우리의 투쟁이 희망버스에 함께 탑승한 전국에서 온 모든 이들의 희망찬 연대가 되었듯이, 바로 그런 위력과 감동이 있는 정치적 희망버스를 출발시키는 것이 시급한 우리의 과제다.
노동자가 민중이 정치적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이 되는 정치를 위해, 저들이 그어 놓은 선을 넘어, 기존 정치인들처럼 세련되진 못하지만 진정성을 가진 투박함으로 ‘세상을 바꾸는 정치’로 나갔으면 좋겠다.
우리는 재벌과 부자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박근혜의 나라가 아니라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박근혜의 민생법안 1호 사내하도급법을 막아내기 위해,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위해 오늘 이 시간에도 온 몸을 다해 싸우고 있다.
7월 14일 민주노총 대전본부에서 열리는 ‘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2차 토론회’에 더 많은 이들이 모여 정치의 희망버스를 만들어냈으면 좋겠다.
7월 21~22일 현대차 울산공장에 모여 현대차 사내하청은 정규직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조차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있는 정몽구 회장의 탐욕에 맞서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1박2일 연대의 밤을 함께 보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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