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 타대오 축일]
루카 6,12-19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거룩한 교환
전에 ‘주군의 태양’이란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인물 설정은 이렇습니다.
태양은 여자인데 귀신을 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을 보는 것은 너무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이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옥탑 방에서 불쌍하게 살아가던 태양은 우연찮게 주군을 만납니다.
어렸을 때 사랑했던 여자로부터 배신당했던 상처를 안고 있는 주군은 커다란 백화점의 사장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해선 관심이 없고 사람도 돈 때문에만 상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일 싫어하는 것은 누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양이 귀신에게 쫓기다가 주군과 부딪히게 되었는데 쫓아오던 귀신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몰골이 아닌 태양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소름끼칠 정도로 싫어하는 주군은 다시는 태양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지만, 태양은 주군의 몸을 만지거나 손을 잡으면 귀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게 잠도 한 숨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주군의 상처는 차차 태양의 발랄함과 사랑에 의해 치유되는데, 그럴수록 태양은 주군의 품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결국 주군은 태양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이 자신의 오랜 상처로부터 치유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설정은 ‘받아들임’이란 것이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기는 하지만, 내가 풀어내지 못한 상처가 있다면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 상처는 누군가의 사랑을 통해 치유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저희 성당 청년 하나가 희귀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 중환자실로 병자성사를 주러 간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바이러스 감염 환자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온 몸이 부어 있었고 눈두덩이도 부어 있어서 눈을 제대로 깜빡일 수도 없었고 눈은 검은자보다 흰자가 더 많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에게 병자성유를 바르는데 얼핏 바이러스가 옮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살이 닿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유를 바를 수 있겠습니까?
살이 닿는다는 것은 상대의 것이 나에게 옮겨올 수 있다는 것을 감수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주기 위해 필연적으로 상대의 것을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했다고 합니다.
병자가 예수님께 손을 댄다는 것은 물론 그들은 치유의 은총을 얻겠지만 예수님은 부정한 사람이 됨을 감수하시는 것입니다.
12년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아 병이 치유되었는데 이 역시 예수님은 부정한 여인에게 몸을 닿았기 때문에 유다인들의 법으로는 부정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신학에서는 ‘거룩한 교환’이라고 합니다.
내가 지닌 좋은 것을 주고 다른 사람이 지닌 나쁜 것을 대신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뒤집어쓰시고 대신 당신의 거룩한 은총과 생명은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신비가 ‘거룩한 교환’인 것이고 미사 때 가끔 들을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는 병자에게 병자영성체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정신이 없으셔서 성체를 인지하지 못하셨습니다.
오물오물하기는 하는데 넘기지 못하셨고 급기야는 고춧가루와 함께 섞여서
뭉개져버린 성체를 뱉어내셨습니다.
성체이기는 하지만 역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옛 신부님들은 결핵 환자들이 모시다가 뱉은 성체도 그 자리에서 영하셨다는 말씀이 생각나
그것을 제가 모셨습니다.
몇 시간 동안 속이 거북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평화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우리 죄들을 당신 것으로 하실 때는 너무도 역겨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시고 아버지 뜻을 따르셨다는 생각에 마음에서는 평화가 샘솟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교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평화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사촌 형제로 여겨지는 유다 타대오와 독립 운동가였다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시몬의 축일입니다.
여러 전승이 있지만 유다 타대오는 페르시아에서 전쟁용 도끼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시몬은 톱에 몸이 잘려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환을 잇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어야 하는 이들을 위해 그 죽음을 내가 대신 받으며 내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불을 전해주는 것. 내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지키려고 하면서 어떻게 그 좋은 것을 동시에 줄 수 있겠습니까?
선거철에 시장 사람들을 좋아한다며 악수를 하고 다니다가 한 아주머니가 손을 잡으려고 뛰어오니 자신의 손을 뒤로 감추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내가 더럽혀지지 않는다면 내가 손해 보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이웃을 깨끗하게 하고
부유하게 하겠습니까?
우리도 거룩한 교환의 삶을 살아가며 이웃의 더러움과 가난을 나의 것으로 하고, 또 나의 깨끗함과 부유함을 이웃에게 주도록 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 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
-루카 6장 12-19절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우리 모두 거룩함에로의 부르심을>
누군가가 한 단체나 기관의 최고책임자로 임명되고 나면 통상적으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인선’입니다.
새로운 리더가 구상하는 바에 따라 대규모 인사이동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대대적 물갈이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대체로 요직에는 어떤 사람들을 뽑습니까?
그간 리더 편에 서서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 능력이나 경력이 출중해서 잘 보좌해줄 사람, 필요한 분야에 통달한 전문가, 결국 학력이나 가문, 배경을 고려해서 최종적인 낙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인선은 세상의 방식과는 철저하게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들을 뽑기 전에 홀로 산으로 들어가셔서 밤새워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의 인선에 엄청난 정성과 공을 들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딱’ 열어봤더니, 세상 사람들의 인선 기준과는 너무나 달라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제자단에 뽑힌 사람들의 면면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니
학력이나 능력, 가문은 거의 고려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물들 안에는 ‘어떻게 저런 사람을???’하고 의문을 품을 정도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 인선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세상적인 잣대와는 철저하게도 다르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똑똑함’, ‘있어 보임’, ‘대단함’ ‘출중한 능력’ ‘화려한 경력’이 아니라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다른 무엇에 앞서 무상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가장 뚜렷한 표현이 바로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은 어떤 사람이 받는 걸까요?
사제나 수도자에게만 해당되는 특권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에로 초대된 것만 해도 과분한데 우리는 한 번 더 그리스도인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그 위에 각자의 처지에 따른 부르심이 추가되는 것입니다.
농부로, 회사원으로, 가정주부로, 기술자로, 교사로, 사제로, 성직자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말씀에 따르면 여러 다른 종류의 과일 나무들이 각각 다른 열매를 맺는 것처럼 교회 내 각 구성원들은 각자 주어진 신분과 처지에 따라 각기 다른 고유한 신심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주교가 관상수도회 수도자처럼 하루 온 종일 경당 안에서 기도에만 전념한다면 그가 맡고 있는 양떼들은 누가 돌보겠습니까?
가정을 가진 주부가 카푸친회 수도자처럼 금전을 소홀히 한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신심은 참으로 우습고 질서를 뒤집는 신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각자에게 적합한 신심생활을 추구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신심생활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심생활이 군인들의 내무반이나 근로자들의 작업장, 제왕들의 왕궁, 결혼 생활하는 사람들의 가정 안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의 교설입니다.
구약시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사라 레베카 같은 인물들 보십시오.
거친 세상의 한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만을 추구하는 거룩한 신심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성녀 안나, 마르타, 모니카 같은 성녀들을 보십시오.
그녀들은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거룩하였고.
성 고르넬리오, 세바스티아노는 군인이자 대단한 신심가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떤 처지나 환경 속에서 살아가든지 부르심에 합당한 신심생활을 추구해야 하며, 자신의 삶을 통해 복음을 실천해야 하며, 거룩함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2023. 10. 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루카 6,12-19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께서
산에 오르시어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께서
칠흑 같은 어둠을
빛나는 영혼으로 사르시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께서
홀로라도 끝내 가야 할 길을
가슴 깊이 아리게 새기시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께서
가슴 벅찬 길을 함께 걸을
벗들을 마음으로 헤아리시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 곁에
삶과 죽음을 그분과 함께하고픈
그분의 벗들이 함께 하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은 벗들에게 더욱 가까이
그분의 벗들은 그분께 더욱 가까이
갈림 없이 서로를 향하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이내 먼동이 트면
그분과 벗들이 하나 되어
새 길 여는 발걸음 곧게 내딛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