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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0. 연중 제 8주간 요일. 묵상글(강론글) 예수님의 권한
1차(04:20), 2차(05:00), 3차(09:40)
30일 묵상글, 04시 2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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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30일 토요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예수님의 권한 (마르11,27-33)
제1독서<하느님은 여러분이 흠 없는 사람으로 나서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유다17.20ㄴ-25)
17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고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20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을 바탕으로 성장해 나아가십시오.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21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22 의심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23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
24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당신의 영광 앞에 흠 없는 사람으로 기쁘게 나서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
25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 하느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위엄과 권능과 권세가 창조 이전부터, 그리고 이제와 앞으로 영원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르11,27-33)
그 무렵 예수님과 제자들은 27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31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32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33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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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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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0. 연중 제 8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코 11,27–33
예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다가와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이 질문은 겉으로 보면 정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들의 물음이 진리를 찾는 물음이라기보다
예수님을 옭아매려는 계산된 질문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진실보다 유불리를 계산하고
결국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복음을 읽을 때
사람의 마음이 진실을 향해 열려 있는지,
아니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닫혀 있는지를 중요하게 바라봅니다.
오늘 장면에서 문제는
그들이 질문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정직하게 답할 마음이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리를 이용해 자기 위치를 지키려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은
겉으로는 종교적이지만
실제로는 두려움과 체면, 권력 계산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암브로시오의 시선으로 보면
참된 권위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며 강요하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을 살리고 진실을 드러내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서 옵니다.
곧 권위는 직함이나 자리, 제도적 힘만이 아니라
삶의 진실성과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권위를 설명으로 증명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위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권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반면 종교 지도자들은
권위를 지키려 하지만
정작 하느님의 진실 앞에는 서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하는 방식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모른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척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양심의 회피입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런 회피가 영혼을 어둡게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른다고 고백하는 겸손은 은총의 시작이 될 수 있지만,
책임을 피하려고 모르는 척하는 태도는
회개의 문을 닫아 버릴 수 있습니다.
영성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우리도 하느님께 질문할 때
정말 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습니다.
나는 진실을 원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답만 듣고 싶어 하는가?
나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는가,
아니면 내 입장을 정당화할 근거만 찾고 있는가?
영성은 질문을 없애는 길이 아니라
질문을 정직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내 계산과 체면을 내려놓고
참으로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서는 것,
그것이 영성의 시작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언급하시는 장면은
이미 주어진 빛에 얼마나 정직했는지를 묻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더 큰 진실을 알기 전에
사람은 먼저 자기 앞에 이미 와 있던 작은 빛에 응답해야 합니다.
요한의 외침을 외면한 이들이
예수님의 권위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작은 진실을 무시하는 사람은
더 큰 진실 앞에서도 닫혀 있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영성은
먼 신비만 찾는 길이 아니라
이미 내 앞에 와 있는 작은 진실에 충실해지는 길입니다.
이웃종교 / 생태의 날의 관점에서도
오늘 복음은 깊은 질문을 줍니다.
세계윤리는
누가 더 권위 있는가를 다투는 데서 세워지지 않고
누가 더 진실하고 책임 있게 응답하는가에서 자랍니다.
다른 종교, 다른 문화, 다른 사상 안에서도
진실을 왜곡하지 않고
인간 존엄과 공동의 선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권위를 둘러싼 다툼보다
양심의 정직함을 더 먼저 보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참으로 진실을 원하고 있는가?
아니면 불편한 진실은 피하고 싶어 하는가?
나는 모르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가,
아니면 책임을 피하려고 모르는 척하는가?
나는 내 권위와 체면을 지키려는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 앞에 나를 열어 놓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질문보다 먼저
우리 질문의 마음을 비추십니다.
주님,
제 질문이 계산이 아니라 진실한 갈망이 되게 하소서.
모르는 척하며 책임을 피하지 않게 하시고
불편한 진실 앞에서도
정직하게 서게 하소서.
권위를 붙들기보다
당신 뜻을 붙들게 하시며
작은 빛에도 충실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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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0. 연중 제 8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 중에 바르셀로나에서 성가정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이 성당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의 ‘복음서’와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성당에는 탄생의 문, 고통의 문, 영광의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따라가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마치 하느님의 은총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안에는 한국어로 된 ‘주님의 기도’도 있었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과 열정이 도시 전체를 변화시키고, 전 세계 사람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성당의 지하에는 가우디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곁에서는 지금도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성당이라도 미사가 없다면 그저 건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미사가 봉헌되는 순간, 그곳은 살아 있는 하느님의 집이 됩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차로 한 시간쯤 가면 몬세라트 수도원이 있습니다. 화려한 도시 한가운데 있는 성가정 성당과는 달리, 이 수도원은 깊은 산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약 천 년 전, 목동들이 신비한 빛과 소리를 체험했고, 그곳에서 ‘검은 성모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이후 그 자리에 수도원이 세워졌고, 지금까지 기도와 미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깊은 산속까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영적인 갈증 때문입니다. 세상은 화려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침묵과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성가정 성당이 ‘세상 속의 신앙’을 보여 준다면, 몬세라트 수도원은 ‘하느님 안에 머무는 신앙’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이었습니다. 능력, 재력, 권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전혀 다른 곳에서 나옵니다. 첫째, 예수님은 ‘어린양’이십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분입니다. 힘이 아니라 희생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둘째, ‘고난받는 야훼의 종’이십니다.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분입니다. 셋째,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참된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넷째, ‘말씀’이십니다. 태초부터 계셨고, 만물을 창조하시며, 지금도 우리를 비추시는 빛이십니다. 이 네 가지 모습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권위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권위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권위, 사랑을 통한 권위입니다.
순례의 길에서 저는 두 가지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화려한 성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깊은 산속의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을 하나로 묶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사’와 ‘기도’였습니다. 사제로서 저는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더 크고, 더 화려한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미사를 충실히 봉헌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교우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아무리 크고, 삶이 아무리 풍요로워도 그 안에 기도와 하느님이 없다면 공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삶이라도 하느님이 함께하시면 그 삶은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겸손과 희생, 그리고 사랑의 길입니다. 그 길이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주님,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겸손과 희생으로 사랑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삶이 주님께 드려지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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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0. 연중 제 8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후 성전 뜰을 거닐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마르 11,30)
역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저울’을 들이댑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나의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평소의 나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비겁하고, 진실하거나 솔직하지 못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하는 계산적인 이 말마디가 바로 내가 자주 내뱉는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봅니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자칫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봅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자신의 속셈을 들여다봅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를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게 하소서.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지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가리게 해 하소서.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지 말게 하소서.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자신의 속셈을 들여다보게 하시고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제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저 자신을 올려놓게 하시고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것은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깨우쳐 주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르 11,28)
주님!
타인에 대한 나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지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가리게 하소서.
타인을 저울질하기보다
차라리 제 자신을 올려놓고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숨은 속셈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것은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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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0. 연중 제 8주간 토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르 11,28)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라는 시골 출신으로 아무 직함도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권위에 약합니다.
2007년 1월, 흥미로운 실험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바이올린 연주가 조슈아 벨이 미국 워싱턴 D.C.의 지하철역에서 남루한 차림으로 40분가량 연주하였습니다.
350만 달러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잠시라도 서서 음악을 들은 사람은 일곱 명뿐이었고, 스무 명 남짓만이 동전을 던졌습니다.
며칠 전 그가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 같은 곡을 연주하였고, 표는 매진되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이 실험은 사람들이 음악 자체보다 외부적인 권위에 먼저 이끌림을 보여 줍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을까요? 바로 진리 자체로 하느님을 알아보기를 바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적인 권위가 아닌 말씀, 행위, 사랑 그 자체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시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온 생애로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는 무관심하지 않는지 돌아봅시다.
성경을 집에 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고, 미사에서도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리사이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들으려고 미사에 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자체에 귀 기울입시다. 화려한 포장이 아니라 그 안의 진리를, 외적 권위가 아니라 말씀 자체를 들읍시다. 그 진리의 선율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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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0. 연중 제 8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여러분 마음속에서 성령님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시나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생명력의 성령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
2026년 5월 29일 금요일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은 어떻게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굳세게 하시어, 주님 예수께서 시작하신 일을 계속 수행하도록 도와주시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다면, 우리는 저기 계신 그리스도, 여기 계신 그리스도, 저 밖에 계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재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바로 여기, 우리 안에, 우리 깊은 내면에 현존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또 다른 위로자, 또 다른 스승, 또 다른 길잡이로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과 같으시지만, 모든 이에게, 어디에서나, 언제나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비둘기처럼 주님 위에 내려오셨던 그 성령께서 우리 위에도 내려오시리라고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성경은 성령을 아름답고 생생한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바람, 숨결, 불, 구름, 물, 포도주, 그리고 비둘기. 이러한 역동적인 상징들은 돌로 만든 우상이나 웅장한 성전, 혹은 두터운 신학 서적이 주는 무거운 이미지와는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이런 풍부한 상징을 통해 성경 저자들은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며, 정화하시고, 신비를 품으시며, 움직이고 흐르시고, 기쁨을 일으키시며, 평화를 퍼뜨리시는 분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과 메시지의 중심에는 이런 복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영, 생명을 불어넣는 영, 바람–숨결–불–구름–물–포도주–비둘기의 성령께서, 예수님을 가득 채우셨던 그 성령께서 지금도 세상 안에서 움직이고 계시다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 고집대로 뿌리 박고, 주먹을 움켜쥔 채, 자기 계획만을 위해 살 것인지, 아니면 내려놓고, 맡기고, 오시게 하여… 성령의 흐름 속으로 들어갈 것인지?….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걸으신 지 수천 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종종 "바람"이신 성령을 다루기 쉬운 교리 속에 가두려 했습니다. 성령의 불은 종교적 교만의 얼음으로 바뀌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포도주 같던 성령의 기쁨은 다시 물로 희석되었고, 그 물은 흐르지 못한 채 탁해지고 미지근해졌습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온유한 비둘기는 어느새 제국의 매나 독수리 같은 포식적 이미지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큰 도전들로 가득한 세상, 그리고 우리 시대와 같은 때에… 우리는 오순절의 거센 성령의 바람을 다시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의 불로 우리 마음이 다시금 환히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생수와 새 포도주가 우리 안에 흘러들어, 우리의 마음이 비둘기 같은 평화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머무실 자리를 우리 안에 열어 드리고, 그분께서 그 공간을 채우시도록 허락할 때, 우리는 변화되기 시작하며 변화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을 활짝 엽시다. 성경에서 만나는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움직이시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어,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세계적 영적 운동에 동참하는 일꾼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용기를 가져 봅시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리처드 신부님이 성령을 "우리 삶의 빈틈을 채워 주시는 분"(filling the gaps)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들으며, 약 1년 전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제가 썼던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늘 새롭게 하시는 분,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하느님을 넘어 계신 분. 물처럼 흐르시고, 바람처럼 자유로우시며, 글자 바깥의 가장자리에서 발견되는 분. 구석진 곳에 숨어 계시고, 바라보지 않을 때 보이시며, 부재 속에서도 현존하시는 분,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드러나시는 분….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가 알고 있는 말의 벽을 허물어 주소서. 하느님의 사랑을 새로운 ‘혀’로—새로운 언어로—모든 이에게, 어디에서나 말하게 하소서….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가 어제의 무게에 짓눌린 존재가 아님을 알게 하소서. 오히려 바람이시고, 불이시며, 지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당신과 함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의 자유 속으로 날아오르게 하소서.
—Francis G.
References
Brian D. McLaren, We Make the Road by Walking: A Year-Long Quest for Spiritual Formation, Reorientation, and Activation (Jericho Books, 2014), 203, 204, 205–20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rman Khadangan,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의 불꽃을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불은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영감을 주며,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를 지탱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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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0. 연중 제 8주간 토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밀알이 죽는 현장에 하느님의 현존이 머뭄니다.
프란치스칸의 가난과 겸손 안에서 한 알의 밀알이 죽는 현장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주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고통을 참으라는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생명이 어떻게 깊어지고 확장되는가를 보여주는 존재의 신비입니다. 씨앗은 자기 모습을 끝까지 붙들고 있을 때에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전 속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껍질은 단단히 남아 있지만 생명은 닫혀 있습니다. 하지만 씨앗이 흙 속으로 내려가 자기 형체를 잃어버릴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죽음처럼 보이는 그 순간이 사실은 더 큰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됩니다.
프란치스칸의 가난은 바로 이러한 밀알의 길과 닮아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을 적게 소유하는 삶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칸의 가난은 내려가는 죽음이며 내려놓는 죽음입니다. 더 높아지려는 마음, 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 내 이름과 내 공로를 남기고 싶어 하는 자기중심성이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더 많이 가져야 안전할 것 같고, 더 높이 올라가야 가치 있는 존재가 될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의 길을 보여 줍니다. 생명은 움켜쥠 속에서가 아니라 내어줌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내려간다는 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 가까이 가는 일입니다. 강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은총 또한 늘 낮은 자리로 흐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의 가난은 자신을 비워 하느님의 선이 지나갈 자리를 마련하는 삶입니다. 자기 생각과 자존심, 자기 방식과 자기 확신을 절대화하지 않고, 그것들을 하느님의 손 안에 조용히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죽음이란 결국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오래된 집착이 무너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칸의 겸손은 자신을 억누르거나 비참하게 만드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허용하는 죽음이며 놓아주는 죽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삶 안에서 자유롭게 일하시도록 허용하는 것, 타인이 내 기대와 다르게 살아갈 자유를 허용하는 것, 세상이 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조급함 속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데 있지 않고, 자기 힘으로 세상을 붙들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죽어가는 데 있습니다.
참된 겸손은 부드럽습니다. 억지로 자신을 누르지 않기에 오히려 자유롭고 따뜻합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소유하지 않고, 염려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놓아주는 죽음이란 사람을 내 뜻 안에 가두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그 존재 자체를 존중하며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러한 자유를 몸으로 살아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 했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형제로 만났습니다. 해도 형제였고 바람도 형제였으며 물도 누이였습니다. 소유하지 않았기에 모든 존재와 깊이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세우지 않았기에 세상 전체를 사랑 안에서 품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 또한 바로 이 길을 가리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일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섬김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자아가 죽어가는 자리입니다. 형제를 위해 양보하는 자리, 공동선을 위해 나를 내려놓는 자리, 이해받지 못해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자리, 바로 그곳에 주님께서 먼저 계십니다.
밀알은 홀로 죽지만 홀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던 생명이 죽음을 통과하며 수많은 열매로 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칸의 가난과 겸손도 삶을 파괴하는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단단한 껍질을 깨뜨려 사랑이 흐르게 하는 죽음입니다. 내려가는 죽음과 내려놓는 죽음, 허용하는 죽음과 놓아주는 죽음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붙잡지 않기에 가벼워지고, 소유하지 않기에 충만해지며, 자기를 비웠기에 모든 존재를 형제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안에는 더 이상 나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밀알처럼 흙 속에 스며든 작은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조용히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관계 안에서 죽어가는 밀알의 신비
밀알의 죽음은 추상적인 영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아주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육체의 마지막 순간으로 생각하지만, 복음이 말하는 죽음은 매일의 관계 속에서 자기중심성이 조금씩 무너지는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밀알은 혼자 있을 때는 죽지 않습니다. 관계라는 흙 안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죽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관계는 늘 나의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타인, 내 기대를 채워주지 않는 형제, 내 수고를 몰라주는 공동체, 내 사랑을 오해하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단단히 자기중심적인 존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밀알의 죽음은 먼저 “내가 옳다”는 확신이 흔들리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내 판단으로 먼저 결론 내리려는 마음,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내 입장을 증명하려는 조급함, 내 상처만 크게 여기고 타인의 아픔은 작게 여기는 무의식이 관계 안에서 드러납니다. 밀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죽기 시작합니다. “내가 반드시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내려가는 것,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욕망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 “내 방식이 가장 옳다”는 단단함이 부서지는 것, 그것이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죽음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밀알은 죽습니다. 사랑받고 싶지만 먼저 사랑해야 하는 순간, 이해받고 싶지만 먼저 이해해야 하는 순간, 피곤하고 지쳐 있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어야 하는 순간 속에서 자아는 조금씩 자기 자리를 내어줍니다. 부부 관계 안에서는 상대를 바꾸려는 욕망이 죽어야 사랑이 살아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는 내 기대대로 성장시키려는 통제가 죽어야 한 존재의 고유함이 살아납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비교와 경쟁이 죽어야 형제성이 피어납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이 말하는 가난과 겸손도 결국 이 관계의 죽음을 말합니다. 가난은내 주장과 자존심을 내려놓는 죽음입니다. 언제나 내가 주목받아야 한다는 욕망이 조용히 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죽음입니다. 내 기준에 맞추어 사람을 재단하려는 마음, 내 방식으로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망이 천천히 힘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 안에서의 밀알의 죽음은 대부분 화려하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를 삼키는 일, 억울해도 상대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는 일, 내 공로를 드러내지 않는 일, 상대를 기다려 주는 일,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일, 사과할 줄 아는 일, 먼저 손 내미는 일,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사랑을 멈추지 않는 일 속에서 밀알은 조용히 썩어갑니다. 그러나 바로 그 썩어감 속에서 생명의 열매가 맺힙니다.
한 사람의 인내가 공동체를 살리고, 한 사람의 양보가 관계를 회복시키며, 한 사람의 침묵이 분열을 멈추게 하고, 한 사람의 따뜻함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입니다. 세상은 강한 사람이 관계를 이끈다고 생각하지만, 복음은 죽을 줄 아는 사람이 관계를 살린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며, 끝까지 용서하심으로써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밀알의 죽음은 결국 사랑 때문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 죽음은 자신을 없애버리는 파괴가 아니라 더 큰 생명을 위한 열림입니다. 그래서 참된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위해 죽어가는 자리에서 탄생합니다. 자존심이 죽고, 소유욕이 죽고, 통제하려는 마음이 죽고, 비교와 경쟁이 죽어갈 때 비로소 그 자리에 하느님의 나라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밀알이 죽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변해가는 것임을 경험으로 알아듣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알의 밀알들입니다. 내가 속한 그 곳에서 한알의 밀알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선교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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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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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0. 연중 제 8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30 04:49
- 자비를 받고 자비를 베풀려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
부끄러운 얘기인데 저는 30대 중반까지 몇 가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이라는 말과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과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를라치면 닭살이 돋고 몸이 오글거리고,
불쌍히 여기시라는 말과 자비를 베푸시라는 말을 할라치면
속에서 왜 내가 불쌍해? 자비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세요! 라고 중얼거렸지요.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저를 불쌍히 여겨주기를 바라거나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청하는 것은 여전히 싫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바라고 청하는 정도는 되었으며,
자비야말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청해야 할 것이고
베풀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실 자비를 청할 정도가 되어야 진정 겸손하고,
자비를 베풀 정도가 되어야 진정 사랑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30 중반에야 주님께 자비를 청할 수 있게 되었고
이 나이가 되어서야 오늘 유다서의 말씀처럼 주님의 자비를 기다리다가
겨울에 햇볕 쬐듯이 은총의 창가에서 주님께서 내리시는 자비를 쬡니다.
그래도 자비를 받는 것은 이 정도 되었는데 자비 실천은 어떤가요?
제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처지는 못 되지만
나누는 것은 잘해야 할 텐데 그러고 있을까요?
솔직히 얘기해서 가련한 이가 자신을 낮추며 도와달라고 하면
기꺼이 그리고 우러나서 하느님의 자비를 나눌 마음이 제게 있지만
나쁜 짓 하면서도 잘났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는 제가 겸손하게 청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웃의 죄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가 교만하기에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런 자는 오히려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것이며
그래도 수도자인 내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회개의 자비를 베풀어주십사고 기도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유다서는 이런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의 살이 닿은 것 때문에 속옷까지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두려운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라고 말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
그런데 얼마나 미우면 그의 속옷까지 미워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토록 미운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려면
그 미움보다 큰 사랑이 있어야겠고 오늘 말씀처럼 두려운 마음도 있어야겠지요.
그러면 자비 실천에 있어서 두려운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더 큰 죄 용서받은 내가 더 작은 죄 지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벌 받을 거라는,
받은 자비를 자기만 가지고 이웃과 나누지 않으면 벌 받을 거라는 두려움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드신 바 있습니다.
만 탈렌트를 임금께 빚지고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처넣자 임금이 대노하여 그 신하를 다시 감옥에 처넣은 비유 말입니다.
그러니 겸손해야지만 하느님 자비를 청해 받고,
사랑해야지만 그리고 자비에 대한 두려운 마음도 있어야지만
자비를 나눌 수 있음을 깨닫고 실천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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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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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0. 연중 제 8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에게도 거룩한 분노가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얼굴은 천가지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때로 극심한 고통과 깊은 상처로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세상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의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때로 깊은 좌절감에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일으켜 세우시고 격려하시고 고무하시는 든든한 보호자의 얼굴로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마냥 그러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가지 말아야 할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에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모두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때로 끌어안는 것도 사랑이지만 떼어놓은 것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하느님의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회를 주고 기다렸지만, 끝끝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또한 거룩한 성전이 크게 훼손되고 타락한 모습에 진노하신 예수님께서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까지 불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셨다.”
보십시오, 복음서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는 예수님의 과격한 행동입니다.
강도의 소굴로 타락한 성전 앞에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신 것입니다.
일종의 성전 정화 작업을 하신 예수님의 행동이 과격했던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때로 마냥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음을 예수님께서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이 천박한 배금주의로 타락할 때, 거룩한 분노가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크게 언성을 높여야 마땅합니다.
교회가 고유한 본성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모습으로 변질될 때, 거룩한 분노가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분연히 일어나 반기를 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교회의 보물이요 중심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들러리요 애물단지로 취급받을 때, 거룩한 분노가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등불처럼 불을 밝히고 과감히 일어서서 그 부당함을 외쳐야 마땅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반드시 고통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1 베드 4,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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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0. 연중 제 8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 11,27-33)>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시고, 예수님의 권한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다.” 라는 간접 증언입니다.
동시에,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권한과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면 기다리는 것은 ‘멸망’뿐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5-29).”
무신론자들이나 내세를 안 믿는 자들은 부활, 심판, 구원, 멸망 등에 관한 말씀들을 비웃으면서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그 일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증명할 방법은 없고, “그날이 되면 누구나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를 바라고, 죽음이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그 희망에서 믿음이 시작됩니다.
반대로, 그 희망 없이 현세의 삶에만 만족하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믿음을 가질 필요를 못 느끼니까 안 믿게 됩니다.
<희망 없이 사는 것이 과연 사는 것일까?>
2) 28절의 ‘이런 일’이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과 말씀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좁은 뜻으로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가리킵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일을(마르 11,15-17) 자신들의 권한을 심각하게 침해한 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정화’ 이야기를 보면,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마르 11,18).
그러나 군중이 ‘성전 정화’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권한’ 문제로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언급하신 것은, 답변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나의 권한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요한이 이미 증언했다.” 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라고 증언했습니다(요한 1,29-34).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믿는다면,
그의 증언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와서 시비를 걸고 있는 자들은 요한을 예언자로 안 믿는 자들이었고, 그래서 요한의 증언도 안 믿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는(믿는) 군중에게 돌을 맞게 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군중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만 두려워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느님을 믿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무신론자들처럼 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모르겠소.” 라는 그들의 말은, 대답하기 싫다는 뜻이기도 하고, 관심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지는 요르단 강이었고,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당시 유대교의 제도권 사람들이나 예루살렘의 기득권층 사람들과 충돌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관심 없다는 말은, 요한의 ‘회개 선포’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자신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위, 권력, 재산 등을 잘 지키는 것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받기를 거부한 자들과 같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배척한 자들과 같습니다.
그 거부와 배척은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고, 멸망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나중에라도 회개하고 믿었다면 구원을 받았겠지만, 끝까지 고집 부렸다면 그냥 그렇게 끝났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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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0. 연중 제 8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8:25. 추가.
마르 11,27-33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세상 사람들은 ‘바른 말’ 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지적하는 점을 바로잡아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겠는데, 막상 그들의 잔소리와 지적이 나를 향하면 듣기 싫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지적 당하고 비판 받는건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또한 그로 인해 내가 사회에서 누려온 기득권이나 권위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기면, 그들의 말을 못 들은 체 하거나 무시해 버리려고 들지요. 이처럼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은 존중과 사랑보다는 미움과 원망,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니가 뭔데 쓸 데 없이 내 일에 참견해서 나에게 피해를 주느냐?’라는 옹졸한 마음으로 그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겁니다.
예수님 시대에 수석 사제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대한 권한 일체를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성전세’를 걷는 것은 물론이고, 희생제사 때 제물로 쓸 동물을 파는 상인들과 외국돈을 이스라엘 화폐인 ‘세켈’로 환전해주는 상인들로부터 ‘자릿세’를 두둑히 받고 그들의 뒤를 봐주기도 했지요. 그런데 예수라는 자가 나타나 말 그대로 성전을 뒤집어 엎었으니 성전 상인들로부터 볼멘소리가 터져나왔고, 그들의 ‘사업’에 막대한 피해와 지장이 초래되는 상황을 가만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본인들 사업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자기들이 가진 권위와 힘으로 철저히 깔아뭉개 놓으려고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상인들을 몰아내고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의 행동은 율법에 어긋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전이 지향해야 할 원래의 목적과 기능을 회복하는 ‘올바른’ 일이었기에, 그분의 행위자체는 문제삼지 못하고 그분의 ‘권한’을 문제 삼습니다. ‘대체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말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오히려 역으로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해서 다른 것으로 주제를 돌리시려는 게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려면 그에 합당한 책임과 의무를 다 해야 하지요. 그래야 자신에게 그런 일을 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할 자격이 생기는 겁니다. 그 점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종교 지도자’로서의 권한을 주장하려면,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을 올바르게 식별하고 수용하며 따르는 ‘신앙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했기에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그런 질문을 던지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선포한 회개의 메시지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해 버리면 어찌하여 그가 선포한 하느님 말씀을 믿고 따르지 않았느냐는 비난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요한이 전한 메시지가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부정하게 되면 그를 참 예언자로 믿고 따르는 군중들이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킬 것이고 그러면 자기들이 누리는 기득권 자체를 잃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르겠소”라는, 참으로 무책임하고 비겁한 말로 대충 얼버무리려고 들지요. 우리는 그들처럼 ‘모르겠소’라며 대충 넘어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메시지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되면 온전히 받아들이고 따라야 합니다. 반대로 그것이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 단호하게 배격해야 합니다. 당장 손해나 피해를 보기 싫어서, 당장 귀찮은 일에 엮이거나 입장 난처해지는게 싫어서, 선택을 미루고 책임을 회피하며 ‘모르쇠’로 일관하다가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복된 지위를 잃게될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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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0. 연중 제 8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 18:25. 추가.
숨영성 묵상글
오늘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우리 마음가짐이 어떤 것인지를 물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원로들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곤경에 빠집니다. 만일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왔다고 인정하면, 그들은 스스로 믿지 않았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반대로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하면, 백성들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진리를 찾기보다 침묵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쉽게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적어도 나는 저들과 같지는 않아."라고 하며 안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조용히 거울을 우리 쪽으로 돌려 줍니다.
우리도 얼마나 자주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나요?!
때로는 우리도 불편한 진리를 피합니다. 진리가 우리의 안락함이나 명예, 안전을 흔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 종교 지도자들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보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데 더 마음을 쏟을 때가 있습니다. 용기가 필요한 순간에 침묵할 때도 있습니다. 진정한 진리와 지혜와 사랑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질문할 때도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비극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들의 질문은 이해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담대히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시며, 당시에 익숙한 관행들에 도전장을 던지셨기 때문입니다. 진지한 지도자라면 누구나 그 의미를 알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닫혀 있었고, 참된 겸손과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찾으려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 위협으로 느껴지는 예수님을 침묵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침묵하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과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고자 한다면 하느님은 절대 우리의 이 원의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그분을 전혀 알려고 하지도 않고 깊이 마음에 새겨 보려 하지 않는다면, 또 그분에 대해서 어떤 관심도 가지려 하지 않거나 그분을 추구해보려 하지 않는다면, 게다가 우리 영혼 안에서 그분의 현존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그저 우리의 에고를 위한 추구에 불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께 몇 마디 형식적인 기도를 바치고 나서는 곧바로 우리 마음의 방향을 돌려 그분의 기대치에는 훨씬 못 미치는 목적만을 갈망하면서 우리 에고의 목적에 '내' 마음과 의지를 빼앗긴다면 우리의 믿음은 사실상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느님께 속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께 속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랑이 그분과 그분의 사랑을 향해 방향을 잡지 못하면서 그저 우리의 '에고'가 원하는 것에 방향을 잡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생명으로 하여금 참으로 생명력 있는 영향을 주게 하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느님의 생명력이 '내' 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생명력이 우리 존재 안에서 진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논쟁을 벌이던 유다인들에게 하신 이 말씀, 즉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하신 말씀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온전히 우리 마음의 방향을 잡고자 한다면, 아니 적어도 그렇게 하려는 마음이라도 있다면 주님께서는 진리이신 성령을 통해 우리를 우리 에고의 감옥, 즉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적인 욕망들, 명예와 권력과 재산 등과 같은 갈망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자유로운 사람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라고 초대합니다.
"'나'는 겸손히 사랑과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 찾고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랑과 진리가 '나'를 흔들 때 '나'는 그 사랑과 진리를 외면하고 있는가? '나'는 믿음과 사랑 안에서 질문하는가? 아니면 두려움과 방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질문하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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