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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의 규례와 드릴 것들
출 35:1-19
1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2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4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5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6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7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8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9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10 무릇 너희 중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
11 곧 성막과 천막과 그 덮개와 그 갈고리와 그 널판과 그 띠와 그 기둥과 그 받침과
12 증거궤와 그 채와 속죄소와 그 가리는 휘장과
13 상과 그 채와 그 모든 기구와 진설병과
14 불 켜는 등잔대와 그 기구와 그 등잔과 등유와
15 분향단과 그 채와 관유와 분향할 향품과 성막 문의 휘장과
16 번제단과 그 놋 그물과 그 채와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17 뜰의 포장과 그 기둥과 그 받침과 뜰 문의 휘장과
18 장막 말뚝과 뜰의 말뚝과 그 줄과
19 성소에서 섬기기 위하여 정교하게 만든 옷 곧 제사 직분을 행할 때에 입는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니라
35:1-19 / [꼭 지켜야 할 안식일] 모세가 이스라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은 뒤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실천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은 이렇다. 2) 엿새 동안은 너희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여라. 이레째 날은 여호와께서도 쉬셨던 날로 너희가 거룩하게 지켜야 할 안식일이다. 따라서 이날에는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날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여야 한다. 3) 이 안식일에는 너희가 살고 있는 곳 어디든지 불도 피워서는 안 된다.' 4) [바쳐야 할 성막 재료] 모세가 이스라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내리신 명령은 이렇다. 5)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여호와께 드릴 헌물을 거두어라. 그러나 마음속에서 드리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오는 사람만 바쳐라. 너희가 바쳐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금과 은과 놋쇠, 6) 자줏빛 털실과 붉은빛 털실과 진홍빛 털실과 고운 베실, 염소털, 7) 분홍물을 들인 숫양 가죽과 돌고래 가죽, 아카시아나무, 8) 등잔 기름과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하여 머리에 붓는 기름을 만드는 데에도 넣고 또 분향하는 향을 만들 때에도 넣는 발삼향, 9) 에봇과 가슴받이를 장식하는 데 물려 넣을 홍옥수를 비롯한 여러 가지 보석류이다. 10) [만들어야 할 여러 물건] 너희 가운데에서 물건을 만드는 솜씨가 좋은 장인들은 다 나아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물건들을 만들어라. 11) 성막과 그 덮개, 쇠갈고리, 널빤지, 가로다지, 기둥과 그 밑받침, 12) 법궤와 거기에 딸린 채, 속죄판, 궤를 가리울 휘장, 13) 상과 거기에 딸린 채와 모든 기구들, 상에 차려 놓을 진설병, 14) 불을 밝혀 놓을 등잔대와 등잔대에 딸려 있는 모든 기구들, 등잔과 등잔 기름, 15) 분향제단과 거기에 딸린 채,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하여 머리에 부을 기름, 좋은 냄새를 풍기게 하려고 분향할 향, 성막 문간을 가리울 휘장, 16) 번제를 올릴 제단과 거기에 딸린 채와 그 제단에 둘러칠 놋쇠 그물과 그 밖에 제단에 딸려 있는 모든 기구, 물두멍과 그 받침대, 17) 울에 쓰일 휘장과 그 기둥과 기둥의 밑받침, 울 정문을 가리울 휘장, 18) 성막을 치는 데 쓰는 말뚝과 울을 세우는 데 쓰는 말뚝, 또 성막과 울을 팽팽하게 하는 데 쓰는 줄, 19)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예식을 올릴 때 입을 옷가지, 즉 대제사장 아론이 입을 거룩한 옷과 아론의 아들들이 제사장 일을 볼 때 입을 옷을 만들어라.'
모세는 금송아지 사건 이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중재하며, 백성들에게 안식일에 관한 것과 성막 건축을 위해 바칠 헌물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거룩한 날 안식일(1-3)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7일 중 마지막 날을 거룩한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살아나신 날이 안식 후 첫날 곧 주일이기 때문이며(요 20:1), 구속 사업의 완성의 날로서 부활하시고 성령께서 임재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행 1:4-5). 그래서 교회의 시작인 초대교회인 드로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는 안식일(토) 대신에 주일을 지켜 왔습니다(행 20:7; 고전 16:2).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은 신약에 와서 주일로 변하여 완성된 것입니다.
성막에 필요한 물품들(4-9)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그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시기 위하여 이에 필요한 것을 백성들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일(출 14:30)과 시내 산 아래에서 행한 범죄를 용서하시고(32:14), 모세를 통하여 성막에 필요한 물품을 드리되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출25:1-7; 고후 9:7). 그리고 성막건축에 필요한 물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애굽 인의 마음을 감동케 하셨고(출 12:35-36), 그들에게서 받은 귀중품으로 그들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무임노동을 한 보답이기도 합니다.
성막 제조를 명하시는 하나님(10-19) 모세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여호와의 명을 받아 성막을 만들라 했습니다. 성막과 그 제조에 필요한 모든 기구에 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출 27장). 성막은 성전을 건축하기 전까지 임시 성전으로서 이동에 편리하도록 천과 나무로 조립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막을 중심으로 생활하였습니다(민 2장). 막, 덮개, 갈고리, 널판, 띠, 기둥 받침, 증거궤, 채, 속죄소, 장, 상, 진설병, 등대, 등잔, 등유, 분향 단, 물두멍, 뜰, 뜰 문, 장막 말뚝, 뜰의 포장, 줄, 제사장의 옷들이 성막의 각각의 위치에서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적용: 구약 시대의 안식일과 신약 시대의 주일은 어떤 공통점과 다른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눠주신 은사는 제각기 다릅니다. 재능에 따라 헌신해야 합니다. 재능 기부하는 일에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을 판단해 볼 수 있는 지표가 되는 것은 말씀입니다. 이것은 마치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처럼 언제나 각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불순종하고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에 의해 우리의 믿음을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말씀 앞에 우리의 믿음을 검증받으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성막을 짓는 이스라엘
출 35:4-19 / 임덕순 목사
여러분,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것을 아시지요? 고대 7대 불가사의는 이집트의 쿠푸왕의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에페소의 아테미스 신전,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파로스 등대 등을 말합니다. 또는 로마의 원형극장, 영국의 스톤헨지,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 중국의 만리장성 등을 7대 불가사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난 2000년에 스위스의 영화제작자 베른하트 베버가 새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 7대 불가사의’를 새로 뽑자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인터넷 투표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가 중국의 만리장성, 페루의 마추픽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의 예수상, 멕시코의 피라미드, 로마의 원형경기장인 꼴로세움, 인도의 왕비의 무덤인 타지마할, 요르단의 바위도시 페트라입니다. 이번에 성지순례 하는 분들은 이 불가사의들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저는 중국의 자금성도 이에 못지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금성은 명나라 제3대 황제인 영락제가 중국의 수도를 난징에서 북경으로 이전하기 위하여 1407년에 짓기 시작해서 14년 동안 건축한 왕궁입니다. 72만 제곱미터의 면적에 9999개의 방을 가진 대단한 건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서 그런 건축물들을 지을까요? 어떤 사람이 자기의 위대함을 만 천하에 알리고 싶어 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마 기념비적인 큰 집을 짓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많고 권세가 있는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큰 건축물을 지어서 자기의 세력을 영구히 과시하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시 하나를 새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러시아의 표트르대왕은 쌍뜨뻬떼르부르그 라는 도시를 완전히 새로 만들었는데, 멀쩡한 땅에 운하를 파서 배로만 다닐 수 있는 특별한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명목은 여호와께 바친다는 것이었지만 자기의 영광 과시용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도시의 이름을 알렉산드리아라고 지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도시를 콘스탄티노플 이라고 지었습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의 위대함을 드러내려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건축물보다 더 대단한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 성전 하나를 짓고서 세계사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원래 솔로몬은 모세나 그의 아버지인 다윗에 비교할 수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열 가지 기적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사람이고, 다윗은 철저한 신앙으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믿음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영화를 누린 사람은 모세나 다윗이 아니라 솔로몬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단순히 크고 화려하기 때문에 성전을 짓는 일이 위대한 일이 아니라 성전의 기능 때문입니다. 건물 크기로 한다면 솔로몬의 성전은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만 못하고,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훨씬 작으며 피라밋에 견줄 수 없이 작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솔로몬의 작은 성전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은 인간의 거대한 공로를 세우고 그것을 주장하고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받아들이고 믿고 순종하는데 구원이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서 지은 다양한 건물들이 있습니다. 밥 먹는 식당이 있고 음식 찌꺼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장소가 있습니다. 요즘은 식당도 너무나 화려하고, 화장실도 너무 깨끗하고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옷을 파는 집도 있고, 머리를 만져주는 집도 있으며, 물건을 파는 가게가 있고, 아이들을 가르쳐주는 학교나 학원이 있어서 아이들이 거기서 배우고 자랍니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서 잊었던 감정을 되살리는 영화관도 있고, 목청을 돋우어 노래를 부르는 노래방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몸을 씻기만 하는 목욕탕이 아니라 친구도 만나고 잠도 자는 찜질방이 유행인데, 찜질방도 얼마나 크고 편리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크고 편리한 곳들이 많다 할지라도 거기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결국 집으로 와야 하고, 집에 돌아와야 마음이 편하고 평안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크고 편리하고 멋진 건물이 있다 할지라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건물은 자기 집이라는 뜻입니다.
식당이나 학교나 회사나 주택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임시적이고 표피적인 것뿐입니다. 몸을 잘 씻었다고 생각과 영혼도 개운해지는 것이 아니며, 음식을 먹었다고 마음에 만족이 오는 것이 아니고, 노래를 실컷 불렀다고 해서 마음속에 잠재된 근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좋은 학교에서 많이 배웠다고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고,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근본적이고 궁극적이며 영구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식당이나 학교나 찜질방에서는 해결 할 수가 없고, 80평 넘는 저택에서 살지라도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이고 죄의 문제이고 영생의 문제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삶의 문제와, 죽음이 얼마나 두려우며 그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느냐는 문제이며, 결국 죽어야 한다면 내가 평생에 지은 죄는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이 죄와 죽음과 사후의 문제는 이 세상에 아무리 잘 지은 관공서에 가도 해결되지 않으며, 아무리 첨단과학을 가르치는 학교에 가도 가르쳐 주지 않으며, 아무리 서비스 좋은 식당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딱 한 곳,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특별한 장소와 건물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성전이었고 오늘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이 세상 풍파 심하고 또 환난 질고 많으나 209장
나 편히 쉬게 될 곳은 주 예비하신 시은소.
그 향기로운 기름을 주 내게 부어주셔서
내 기쁨 더해 주는 곳 주 피로 사신 주의 전
요즘 한국에서는 크고 웅장한 예배당 건물들을 경쟁적으로 짓고 있습니다. 크고 화려한 건물은 사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 하나님의 성전은 아무나 돈만 있으면 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성전을 아무데나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에 딱 하나만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인간의 죄를 해결해 주시려고 작정하신 하나님이 죄를 해결하는 장소인 성전을 기획하시고, 설계하시고, 그것을 모세에게 알려주시면서, ‘이런 저런 자재를 써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만들어라’ 하고 명령하셔서 모세와 이스라엘이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짓는 일은 자기과시가 아니라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요 가장 복된 일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만나 줄테니 나를 만날 집인 성막을 지으라 명하시고, 그 성막 안에 모셔둘 율법을 새긴 돌비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그 돌비를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에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가만 두었더라면 그들은 성막 안에 금송아지를 모셔두었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려 하셨으나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시고 다시 모세를 불러 율법을 돌 판에 율법을 새겨 주시고, 성전을 지어서 돌 판을 담은 법궤를 모셔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광야에서 성막을 짓기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너희의 소유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하나님이 길도 잘 모르고 태양은 뜨겁고 먹을 것이나 마실 물도 없는 광야에서,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 사람들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상당이 무리한 명령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반대가 심했을 것입니다. 성전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생활이 안정된 다음에 견고하게 지어야 하는 게 아니겠느냐, 무엇이 그렇게 급해서 이 상황에서 성전을 지으라고 하시느냐, 이 광야에 어디서 자재를 구할 수 있다고 성전을 지으라고 하시는 거냐, 이 광야에서 성전이나 짓고 있다가 어느 세월에 가나안에 들어가겠느냐, 그런 말들이 많았을 것이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양보하지 않으시고 지금 여기서 성전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행 중이니까 견고한 건축물로가 아니라 이동용으로 텐트로 지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첫성전은 텐트였고 성막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조금 더 편하게 여행하는 것에만 마음을 뺏기고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여행하는 것은 육신적인 문제, 날마다 반복되는 문제이지만, 그 반복되는 문제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하려면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자녀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당장 밥 먹고 잠자는 것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고달픈 여행길의 백성들에게 지금 당장 이 광야에서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쉬운 소리로 부탁하시거나 미안해하면서 부탁하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자재를 뚝뚝 떨어뜨려 주시지도 않고, 너희들이 가진 것을 바쳐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형편을 너무나 몰라주시는 강압적 명령 같아 보였습니다.
현재 그들은 광야 한 가운데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물 한통 구할 수가 없는 곳에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그들에게는 성전을 지을 재료가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치 달 표면에 예배당을 지으라고 하시는 명령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겐 애굽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목재와 가죽제품들이 있었고, 이웃에 사는 애굽 사람들이 가져가라며 안겨준 금은패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을 위해서 맡겨 두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물건들을 모아서 성전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성전의 설계도만 주신 것이 아니라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자재도 미리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명령하시는 무리하고 무책임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왜 넉넉하지도 않은 그들에게 자재를 바쳐서 지으라 하셨을까요? 자기 재물을 드려서 지어야 자기들의 성전이 되고, 그래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집에 다가와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자기 것을 드려서 성전을 지어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기들의 것이라는 그 자재마저도 주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서 투자하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일을 위해서 네가 가진 것을 바치라 하십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마저도 주님이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500년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보면, 솔로몬은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좋은 솔로몬은 백성들에게 힘들게 하지 않고 성전을 짓는 방법을 연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레바논의 백향목을 수입해다 지었고, 이방인들을 시켜서 일을 하게 했으며, ‘히람’ 이라는 어머니는 이스라엘 사람이고 아버지는 이방사람인 사람에게 성전짓는 일을 맡겼습니다. 솔로몬은 일을 수월하게 하려고 외국의 자재와 인력과 기술자를 동원하여 건축했는데, 그렇게 했더니 백성들은 자기들의 것을 드릴 기회가 없었고, 그 성전은 자기들의 땀과 정성이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어서 솔로몬이 죽자 마다 백성들이 이방 신들을 섬기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치명적 실수를 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성전을 짓겠다고 한다면 남의 도움이 아니라 우리가 헌신적으로 헌금을 해서 지으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면서 실수하는 것 중에 하나는 자녀가 부모를 섬기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모두 사양하는 것입니다. 신접살림에 돈이 많이 들어갈텐데 너희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거 사가지고 왔냐면서 다시는 이런거 사오지 말라면서 자식에게 대접받기를 미안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나중에 자식이 아예 부모에 대하여 섬기려는 자세뿐 아니라 고마운 마음까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살기 힘들지라도 부모에게 감사하고 섬기도록 당당하게 요구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광야에 있는 백성들에게 무엇이 있다고, 그들에게 금은보화 바쳐서 성전을 지으라고 하셨을까하고 하나님을 야속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 자손만대에 복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배려에 감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 지어도 될 텐데 왜 그렇게 서두르셨을까 하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간 지 무려 500년이 지난 솔로몬 시대에 가서야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들이 광야에서 살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던 그 시절에 성막을 짓지 않았다면 그들은 제사 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짧은 생각을 앞세워 하나님의 진지한 말씀을 반대하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전 안에 모셔두어야 하는 것은 법궤였고, 그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주신 돌 판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소 앞에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제물로 죽어주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 있었고, 제단을 거쳐 성소에 들어가면 우리 주님의 특성들을 상징하는 떡상과 등대와 향단이 있었습니다. 나를 구원하려고 나대신 찢겨 죽으신 주님의 몸이 우리 생명의 양식이고, 주님만이 세상의 진리의 빛이시며,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시는 주님의 기도만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향이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성전은 크기가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무것이나 많이 가져오라고 하시지 않고 그들이 가져올 목록을 하나하나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하나님은 어떤 용도의 건물을, 어떤 모양으로 지어야 한다는 것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모세에게 알려주셨으며, 그렇게 짓기 위해서는 어떤 재료가 필요하다고 그것을 가져와야 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성전은 규정대로 지어야 했고 신앙생활도 말씀대로 해야 사랑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에 그 집이 하나님의 집이라면, 그 성전이 무지무지하게 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거대한 건물을 지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구조였습니다. 성전을 짓는 목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도 죽지 않고 도리어 영생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죄인을 대신해서 죽어줄 제물을 가지고 가서 제물을 바쳐서 제사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상징하였습니다.
오늘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불행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지은 죄 때문이고, 그래서 죄 사함 받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고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병 낫는 것이나 사업이 잘 되는 것이나 자식이 좋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나 빚이 해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네 죄 문제를 해결하고 내 사랑받는 자식으로 사는 데 있다고 가르쳐 주시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큰 건물을 지어 과시할만한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네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 성전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성전을 짓는 것은 건물을 지어서 그 안에 예수님의 상징들과 그의 말씀을 모시는 것이고, 날마다 그 성전을 구심점 삼아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내 마음 안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내 안에 성전을 짓는 일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참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나, 믿음 하나로 지은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신비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한 성전을 짓는 데는 신비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신비한 자재를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지어준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물건들로 지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목재와 손때 묻은 패물을 바쳐서 짓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을 바쳐서 지은, 웅대하지도 않고 펄럭거리는 텐트 건물이었지만, 하나님은 거기서 죄인들을 만나주셨고 죄를 사하여주셨으며 복을 주셨습니다.
기독교는 신비한 종교이지만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거대한 공을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키신 대로 순종하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7대 불가사의를 건축한 사람들의 동기를 들여다보면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인도의 타지마할은 자기 왕비가 죽은 뒤에 행복한 곳에서 살라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고, 이집트의 피라밋은 죽은 왕이 생명의 태양이 떠오르는 어느 날, 벌떡 일어나 살아 나오시라고 동쪽을 향하여 창을 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활과 영생의 소망 때문에 그런 어마어마한 건축을 한 것입니다. 올림피아의 제우스상이나, 에페소의 아테미스 신전을 거대하게 지은 것은 그들이 신에게 크게 공을 세워서 사죄의 은총을 입으려는 것이었고, 중국에서 발굴된 진시황의 병마총은 죽은 뒤에 자기를 호위할 군사와 말들을 만들어 자기 무덤에 묻은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구원을 갈망하여 그렇게 거대한 건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거대한 건축을 한 사람보다 성전을 지은 솔로몬이 더 큰 사랑을 받았고 영광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공을 세우고 그것을 내세워서 인정받아 보려는 시도를 인정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이 알려주신 방법으로 믿는 사람만 구원하셨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말구유에 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기만 하면 받는 것입니다. 거창한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위대한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삶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날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기적의 도우심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오천 명을 먹이실 때 하늘에서 떡이 내려오게 하신 것이 아니라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기도하심으로 먹이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순종하고 섬기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가진 것으로 성막을 지으라. 그러면 거기서 내가 너희를 만나 복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네게 주신 것들을 헌신하여 주님 말씀 순종하며 살면, 하늘의 신비한 은혜로 너를 인도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날마다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순종으로 사는 사람이 됩시다.
성막 건립에 헌신한 사람들
출 35:4-9, 20-29 / 박덕기 목사
어느덧 벌써 송년 주일이 되었습니다. 일년 열 두 달 중 12월이 가장 빨리 지나간다고 합니다. 모임도 많고 할 일도 많지만 아마 마음이 바빠 그럴 것입니다. 시간은 귀중합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저축도 안 됩니다. 현찰이나 수표는 받지만 시간을 받는 은행이나 우체국은 없습니다. 시간은 자손에게 물려 줄 수도 없습니다. 시간은 택시의 미터기 같아서 타고 있는 사람의 사정과는 아무 관계없이 계속 흐릅니다. 이렇게 빠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금년 한 해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보는 송년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2005년 1월 9일 주일부터 시작한 출애굽기 강해 설교를 오늘 밤 시간 까지 해서 2년 만에 마치려고 합니다. 출 36장부터는 하나님께서 이미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성막의 모든 기구들 제작하는 기사이기 때문에 새로운 내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출애굽기 강해를 마치려고 하면서 생각해보니, 새삼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다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설교 계획을 짜 맞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본문은 성전 건축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 송정 중앙 교회에 참으로 시의 적절한 말씀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본격적인 성막 건축을 위한 준비 작업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먼저 백성들을 향하여 성막 건축을 위해 예물을 드리도록 명령하고, 성막 건축에 필요한 예물의 종류를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어 성막 건축에 참여할 자원자를 모집하고 그들이 만들 품목을 설명하였습니다. 한편 모세로부터 예물 봉헌 명령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종 예물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이 가지고 나왔습니다. 결국 이러한 본문은 성막 건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원하는 동참과 헌신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성전 건축을 앞에 둔 송정 중앙교회 성도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1. 주의 일은 온 교회 성도들이 하나 되어 함께 감당해야 합니다.
4절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상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성막 건축을 위한 헌물에 대하여 고하였습니다. 이는 성막을 건축하는 일에 소수의 유력자들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참여해야 함을 의미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헌신을 통하여 성막이 건축되기를 원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막 건축 일에 이스라엘 온 회중을 참여케 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막이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고, 그들을 만나시는 장소로서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성막을 짓는 일에 한 사람이라도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의 그 바른 원리를 제시해 줍니다. 즉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일부의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온 성도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함께 협력함으로 감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부유한 몇몇 사람들만이 헌금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면 일하기에는 편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어떠한 사업이나 많은 헌금보다도, 온 교회 성도들이 하나 되어 헌신하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교회 건축을 하거나 선교 사업을 하거나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한 사람도 방관자적 자세를 지니지 말고 온 교회 성도들 모두가 다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작은 정성이라도 모든 성도가 하나가 되어 협력할 때에, 주님의 일도 효과적으로 잘 이루어져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고 그 하는 일에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2. 성도는 자신을 드려 하나님의 교회를 지어가야 합니다.
5절부터 9절까지를 보면 모세는 성막 건축을 위하여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종류의 다양한 예물들을 드릴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베실과 염소털, 그리고 조각목 같은 그리 귀하지 않는 물품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막이 구하기 힘든 몇 가지 재료로만 지어진 것이 아니라, 그 특성이 각기 다른 다양한 종류의 재료들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의 성막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하찮은 재료라도 소홀히 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결코 특별한 은사를 지닌 몇몇 사람에 의해서 구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양한 은사를 지닌 각각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역할과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교회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역할을 소홀히 한다면, 교회는 결코 온전한 모습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의 몸에서 손이 자신의 역할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하여, 그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면 혹은 다리나 눈이 그러하다면 어떻게 우리들의 몸이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 우리들의 교회는 결코 정상적인 교회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가 송정 중앙 교회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전을 구성하는 재료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빠지거나 그 역할을 소홀히 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온전히 세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자신의 역할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오직 최선을 다해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3. 헌금은 자원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5절에 보면 모세는 백성들을 향해 성막 건축을 위한 예물을 드림에 있어서,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 건축을 위한 예물을 드림에 있어서, 의무적으로 세금을 내듯이 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자원하는 마음을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헌금의 원리는 어느 시대에나 적용됩니다. 십일조를 제외한 모든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성도의 감사의 표현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강요나 억지에 의해 드려져서는 안 됩니다. 자원하는 마음 없이 강요나 억지로 드려지는 헌금은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헌금을 드릴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되, 인색함으로가 아니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풍성하게 드리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봉사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마음이 감동된 자와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는 데 필요한 모든 예물을 여호와께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감동된 자’와 ‘자원하는 자’는 동일한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서, 마음의 자원함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의 결과로 나타났음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자원하여 성막을 위한 예물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감동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는 것도 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사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신앙심이 있어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마음을 갖도록 은혜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는 모든 것도 나 자신의 공로가 될 수없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인 것입니다. 즉 성도는 모든 봉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봉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아낌없이 자신을 드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듯이, 그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도 아낌이 없을 만큼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 봉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5. 하나님을 제일로 아는 성도는 자신의 귀한 것도 아낌없이 드립니다.
22절에 보면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가슴 핀과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금은 사람들에게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 다투어 금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을 때, 이처럼 귀한 금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막을 아름답게 짓는 일이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인 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아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 중에 제일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립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음으로, 예수님을 제일로 아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가장 가치 있고 귀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기꺼이 드릴 수 있습니까? 우리 또한 마리아와 같이 우리가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실 때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기꺼이 드림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교회의 직분 자들은 헌신에 있어서 다른 성도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27, 28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족장이 일반 백성들보다 더욱 값진 물건들을 하나님 앞에 바쳤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족장들은 백성을 통치하는 지도자들로서 오늘날 교회로 말하면 중직을 맡고 있는 직분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족장들이 일반 백성에 비하여 더욱 많은 헌신을 한 것은, 오늘날 교회의 직분 자들이 어떻게 헌신하여야 하는 가에 대하여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특별히 하나님께로부터 직분자로 세움을 입은 자들은 다른 성도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가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고 하는 것이지만, 앞장서서 일하는 직분 자들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의 직분 자들이 자신은 헌신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성도들에게 헌신할 것을 권면한다면 성도들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 뻔한 일입니다. 우리의 참 지도자 되시는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제자들에게 서로 섬기고 사랑할 것을 교훈하심으로 참된 지도자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 자들은 언제나 솔선수범하여 하나님의 선한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직분 자들이 하나님과 교회 일에 앞장 설 때에, 모든 성도가 하나가 되어 헌신 봉사함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들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7. 성도는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영적인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29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림에 있어서 즐거움이 있었음을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재산을 불리기를 원하고 이를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살아가는 데 충분한 재산을 소유했다고 평가를 받는 사람도,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부유한 자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부동산 투기를 하거나,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사업을 확장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이를 잘 반영해 줍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찌 참된 마음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의 물질로 선한 일을 행함으로 마음의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평생 일해서 모은 재산을 장학 기금으로 내놓는다거나, 불우 이웃을 위해 기부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그러한 즐거움은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드림으로 얻는 즐거움에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누리는 즐거움은 영적인 즐거움이며, 영원한 세계를 향한 소망으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림으로 누리는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에 속한 즐거움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즐거움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물질을 모으거나 자선을 행함으로 누리는 즐거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참된 만족을 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많은 재물을 모으는 것으로 즐거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헌신함으로 누리게 되는 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8.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모든 일이 풍성함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36:3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한 예물을 아침마다 연하여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당시 성막 건축자들은 이미 모세로부터 성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받은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의 헌물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계속해서 예물을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를 위하여 바친 예물은 차고도 넘쳤습니다. 충분한 양의 예물이 드려졌음에도 백성이 계속해서 아침마다 예물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상태가 매우 고조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막을 짓는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격해 있었고, 되도록이면 많은 것을 드리려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결과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모든 것이 풍성한 가운데 모든 일이 성취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건축을 하면서 체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쉬워 보이는 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실패하게 되고, 아무리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만 하면, 우리가 예상치 못한 놀라운 방법으로 풍성함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9. 자원하여 바치는 예물은 하나님의 일에 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36: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짓는 일에 쓰기 위해서 가져온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처럼 성막을 만드는 데 쓰일 재료가 남을 만큼 넉넉하게 된 것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풍요로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어떤 물품도 구할 수 없었던 광야에 있었기 때문에, 생필품이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성막을 짓는 일에 쓰일 재료가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다는 것은, 오직 그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기희생을 감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바쳐지는 예물은 항상 하나님의 일에 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드려진 예물 자체가 아니라, 드리는 자의 마음을 받으시고 그 마음을 인하여 그 드려진 예물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쓰고도 남음이 있도록 풍성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오병 이어의 기적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드린 한 어린 아이의 적은 양식, 곧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받으셔서 이것으로 오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먹이시고 남은 음식을 열두 광주리나 거두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진 예물은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이룹니다. 그 예물이 많든 적든 간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린 예물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넉넉히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얼마를 헌금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그 예물을 바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에 앞서 먼저 마음을 드리는 자들이 됩시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아낌없이 내어드릴 수 있는 자들이 됩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예물은 예물다워질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귀히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온전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귀한 사역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성막 건축을 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은, 교회당 건축을 앞에 둔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에게 헌신의 모범 답안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로부터 예물을 드리라는 명령을 듣고,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그리고 아낌없이 성막 건축에 필요한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자원하여 성막을 위한 예물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드릴 수 있도록 마음을 감동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송정 중앙 교회가 교회당 건축 헌금을 할 때도 하나님께서 꼭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하사 자발적으로 아낌없이 드릴 수 있게 해주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사와 헌신의 표시가 성막을 통하여 나타났다면, 오늘날 구속받은 성도들은 교회를 향해 그 감사와 헌신을 표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피로 값주고 사시어 세우신 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과 물질을 드려 교회를 섬길 때에, 하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영혼 구원의 놀라운 사역을 이루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한없는 축복과 은혜를 베푸사 우리로 영혼이 강건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삶 가운데 형통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진정 우리 모두는 주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아낌없는 헌신과 충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성막 건축을 위해 헌신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받아, 하나님께 향한 참된 헌신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명하시고 전달하고 쓰여지고
출 35:5 / 김우영 목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뜻을 가지시고 역사하시며,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은 땅에서도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출애굽기 35장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만나고 교제하실 성막을 땅 위에 세우시려는 뜻이 있으셨고, 이 뜻을 모세에게 명하셨으며, 이 뜻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 받은 백성들은 감동되어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막을 짖는데 필요한 모든 재료들을 봉헌했으며, 브살렐, 오홀리압, 기능이 특출한 여인들이 쓰임 받았고, 성막은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 아름답게 건축되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은 누구며, 그리스도인의 소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인의 소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룸에 있어 필요한 가짐입니다.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우리나라는 16강의 염원을 넘어 8강, 8강을 넘어 4강에 진출했습니다. 아시아에서 4강 진출은 FIFA 사상 처음입니다. 일년 반 전만 해도 세계 40위 아래 있던 우리나라입니다. 놀라운 역사가 창조 된 것입니다. 히딩크(Hiddink)감독의 실력위주 선수 선발, 끊임없는 고된 체력단련과 훈련, 골인을 만들고자 11명의 선수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함, 세계인들이 경이로워하는 온 국민의 하나된 응원이 함께 이루어 낸 결과입니다. 세계를 놀라게 하고있는 우리나라의 4강 진출은 누구 하나의 단독 작품이 아닌 너와 나, 우리의 합작품입니다. 개인기가 특출함도 중요하지만 여러 재능이 모아져 조화를 이루면 더 귀하고, 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창출해 냅니다. 인간의 노력과 훈련, 합심에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면 세상이 상상치 못한 기적의 사건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선 너와 나, 우리가 말씀 안에서 하나 되어 명령하신 말씀대로 준행해야만 합니다.
첫째 : 명하시고
하나님께선 천지창조의 뜻이 있으셨고, 혼돈, 공허, 어둠에게 뜻을 말씀으로 명령하시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지으셨고, 뜻이 이루어진 상태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명령자의 위치요, 인간의 자리는 명령을 받는 피조물의 위치입니다. 하나님은 유일신이시요,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부족한 것도, 무엇을 충족하실 것도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 66권 속의 모든 명령은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유익을 위한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선 인간들에게 하나님 사랑의 뜻을 알리시길 원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자녀 사랑하는 마음을 알려주려고 하는 것처럼... 광야에서 성막을 지으라 하심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 제작을 명하심은 앞서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그 곳에서 자기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그들과 교제하시려는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수직관계이며, 하나님의 명령은 주종관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은 순종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순종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이행여부는 내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현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 이행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그대로 행하십시오 내게 유익이요 복입니다. 어떤 짓궂은 여자 집사가 목사님을 찾아 갔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하나님을 아세요?" “집사님, 집사님은 하나님을 모르시나요?" “그럼 목사님은 아세요?" “잘 질문하셨습니다. 사실 나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인간인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습니까? 다만 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깜짝 깜짝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명령을 받아 들이고, 하나님께서 행하심을 보며, 체험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둘째 : 전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셨고, 그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노아를 통해 세상 심판을 예언케 하셨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소돔성의 멸망을 알리셨으며,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셨고, 사무엘을 통하여 왕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선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토록 하셨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며, 지금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딤후3:16). 그래서 말씀의 전달자도 성령의 감동으로 전해야 하고, 듣는 자도 성령의 감동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받지 못하면 전달자의 책임이 큽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 전달자로서의 사명을 부여 받은 사람은 단순히 말씀을 귓가에나 닿았다 말게 전해서는 아니 됩니다. 마음 깊이, 심령속까지 닿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합니다. 해서 말씀의 전달자가 먼저 기도하고 성령충만해야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때문에 큰 책임을 갖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말씀이 전해질 때 세상적인 생각이나 사단의 유혹에 잡히지 말고 성령충만하여 말씀을 받아야 하며, 깨달아지고, 감동된 대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는 사람이 됨은 큰 복이요 감격입니다. 우리는 바로 전하고, 바로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 앞에서 물러갔더니(20절)," 이 말씀을 성서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 건축을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로부터 전해 듣고 감동받아 즉각 순종했음을 말한다"라고 해석합니다. 이 해석이 120%맞는 해석임은 20절 이하 말씀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느 젊은 목사의 편도선이 늘 말썽을 부렸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편도선 제거 수술을 권유했고, 수술을 결정했답니다. 수술 날이 되어 병원엘 가는 도중 그에게 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편도선이 떼어 내어도 괜찮은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왜 이 귀찮은 것을 사람의 몸에 만드셨을까?" 그는 자기를 늘 괴롭히는 편도선에 대해 계속 생각했고, 번개 같이 떠오르는 것이 있더랍니다. “일을 너무 과중히 하여 내 몸을 유지치 못할 정도로 피곤할 때 꼭 편도선에 염증이 생긴다? 아하! 편도선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에 달아 놓은 안전 벨이로구나.‘네 몸의 상태가 위험수위에 달했으니 좀 쉬라'고 알려주시는 경종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것을 제거해버리면 쉴 때임을 알 수가 없어 무리에 무리를 계속하게 될 것이고, 그러다가 아예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겠구나" 젊은 목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기뻐하며 발길을 돌려 집으로 왔고, 하나님께 기도, 편도선염이 치료되었습니다. 주일, 그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설교를 했고, 성도들은 큰 은혜를 받았답니다.
셋째 : 쓰여지고
하나님께선 하나님의 뜻을 돌덩이나 짐승들에게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고, 말씀대로 행하라고 명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피조물 가운데 가장 복되고 위대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음이요, 하나님께서 뜻을 알리시고, 전달케 하시며, 뜻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심입니다.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21절)"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털로 실을 낳았으며(26절)" ‘감동되다'라는 히브리어 ‘나사'는 ‘고무하다' ‘분발하다' ‘받아들이다'라는 뜻이며, 이는 스스로의 의지적 움직임이 아니라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심적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마음에 감동받아'라는 히브리어 ‘나사립반'은 ‘마음을 들어 올린다'라는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소유한 것은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착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소유개념은 내가 비록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것을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라는 의식입니다. “모든 족장은 호마노와 및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왔으며(27절)" ‘족장'이라는 히브리어 '나시'는 '두목' ‘치리자', 즉 각 지파를 대표하는 지도자를 뜻하며, 족장들은 솔선수범하여 일반 백성들 보다 더 귀한 보석을 드렸습니다.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금품을 가져왔으며...(22절)", 하나님께 대한 봉헌은 신분의 차이도, 남녀의 구별도 없습니다. “마음이 슬기로운 여인은 손수 실을 낳고...(25절)",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30,31절)",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34절)",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재능을 주셨고, 재능은 각양각색이며, 어떤 분야에 특별히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막을 건축함에 있어 손재주가 있는 여인들은 그 분야에 쓰여졌고,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책임자와 부책임자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대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의자 하나를 만듦에도 나무, 톱, 망치, 대패, 못 등 여러 도구가 사용됩니다. 하나님 뜻이 성취됨은 쓰여지는 각각의 사람 때문입니다. 가장 가치있는 내 소유가 되고, 위대한 내가 됨은 하나님께 쓰임 받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여지는 자에게 원하시는 것은 말씀에 감동됨이요, 믿음이요, 감사입니다. 1981∼2001년까지 우리교회에 전도된 사람은 11,907명입니다. 1년에 평균 592명이 전도된 셈입니다. 위의 사람들이 전도됨은 전도에 쓰여진 사람들 때문이었고, 쓰여진 만큼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십니까? 사랑없이 무엇을 줄 수는 있으나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고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자원하여 드린 예물
출애굽기 35:4-29 / 이상호 목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은혜 중 하나는 하나님의 일에 기쁨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일입니다.
종종 사극을 보면 왕이 밤중에 민간 복장을 하고 시찰을 다니는 경우가 있는데 후에 자기 가정을 방문했던 사람이 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가정은 당 대 뿐만 아니라 후손 대대로 영광된 경험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왕이 우리 가정에 왕림하셨다"
지방마다 좋은 특산품들을 소개하고 그것을 판매하는 일이 지방 자치 시대가 된 이후 더욱 치열한 판촉활동에 시장들도 앞장서고 있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왕에게, 임금님에게 진상하던 것입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요즘 CCM 찬양을 보면 "왕 되신 하나님을 경배하자"는 내용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말 그분이 우리의 왕이시라면, 왕 되신 그분에게 우리가 나아가는 것과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실제로 우리 자신들이 느끼고 체험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왕 되신 하나님,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특징적인 표현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 표현도 부족해서 나중에는 "하나님은 왕 중의 왕입니다"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모습들, 그 왕 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중요한 그들의 삶의 자리는 '성막'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며 특별히 왕 되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여러분은 성전에 오실 때 왕 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감격으로 교회에 발걸음을 옮기시는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왕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가장 크고 복된 은혜를 누리고 사는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늦게나마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모세의 눈물의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실 광야 백성을 포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 백성을 가지고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셨고 하나님은 모세를 보고 "나를 말리지 말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말리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또 다른 하나님의 애정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큰 은혜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성막을 지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귀하고 복된 일을 불순종하고 교만하고 금송아지나 만들어서 춤추고 먹고 마시던 그런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신다고 하는 것은 분에 넘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고 전지하신 분이라면 굳이 그 속썩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한 성막을 지으라고 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부름을 받은 우리가 부름 받은 대로 살지 않고 딴 길로 가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되어진 직분을 빼앗길 때가 있어요. 구약에서 대표적인 경우가 사울 왕입니다. 그는 왕으로 임명받을 당시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준수하고 겸손한 왕이 될 모든 덕목을 내외적으로 갖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왕이 된 이후에 달라지기 시작을 했어요. 많이 변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을 어렵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종의 일을 자기가 함부로 하는 그런 경솔함까지 행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를 버렸노라" 그를 버렸다고 하는 말은 그에게 주셨던 왕의 지위나 지혜와 명철과 부귀와 영화를 거두어 가신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느껴졌던 것들이 여러분의 삶의 자리를 떠나기 시작할 때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갖습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구나. 하나님께서 왜 내게 주신 은혜들을 거두어가실까?"라는 정말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그런 마음은 들지 않으십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지만 그 기회를 선용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면 결국 거두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한 사람을 들라면 제자로 부름을 받았던 가롯인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사실 열두 제자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가롯인 유다였습니다. 가장 많이 배운 사람이고 사회적인, 정치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좋다고 해서 더 헌신적이지 않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더 충성스럽지 않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가롯 유다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는 그 일을 통해서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 하나님의 깊은 의도를 헤아려 보기를 원합니다. 전능한 하나님이라면 복잡하게 일하실 것이 아니라 풍성한 하늘의 것들을 가지고 성막을 지으셔도 될텐데, 더구나 하늘의 천군 천사를 동원해서 하루아침에 기초공사하고 하루아침에 토목공사 끝내고 하루아침에 인테리어 끝나면 될 것을 구차하게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세를 통해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중에 첫 번째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충성할 기회가 주어질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9월이니까 넉달만 지나가면 난 올 해 일은 끝난다고 넉달이 빨리 가기를 기다리는 분이 있다면 참 세월이 아까운 사람입니다. "주님, 내게 주신 이 충성의 기회가 벌써 다 지나가고 넉 달밖에 안 남았는데 이 넉 달을 선용해서 넉 달이 4년보다도 더 보람있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그런 마음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백성의 가장 큰 기쁨은 자기 것으로 왕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음식으로 왕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어요.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여러분의 왕으로 인정한다면 그 왕께 헌신하고, 그 왕을 섬기고, 그 왕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입으로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하면서 실제로 하나님을 대우하는 것을 보면 자기 친구만도 못하게 대우하는 그런 여러분들 아닙니까? 입으로가 아닌 생활에서 하나님을 왕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이란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잘 가르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섬기는 대상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믿어야 할 대상이요, 성령은 받아 체험 신앙을 가지고 주신 능력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섬겨야 하는데 그 섬기는 방법들을 잘 모르는 성도들에게 가르쳐야지요. 쓰던 것을 가지고 오면 "쓰던 것을 드리면 안됩니다" 상한 것을 가지고 오면 "상한 것을 드리면 안됩니다" 그 당시는 좀 기분이 나쁘더라도 바로 가르쳐야지요.
하나님께서 성막을 그들에게 지으라고 하신 두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값어치 있게 쓰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물질을 주셨을 때 그것을 정상적으로 바로 쓰도록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어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됩니다. 혹 어떤 분들은 "십일조만 드리면 나머지는 내가 마음대로 쓰는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것도 잘못된 것이지요. 10의 9도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써야 됩니다. 내가 쓰지만 소용되는 목적들은 부끄럽지 않아야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10의 1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고 10의 9는 죄짓는 데 쓴다고 하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광야에 살면서도 그들은 은과 금과 각종 가죽이나 보석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이 다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인들이 그들에게 준 선물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노예로 부리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귀한 금은보화를 주겠어요. 그런데 모세가 나타나 바로 왕과 대결하면서 10가지 재앙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때 처음에는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대결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 두 손을 들고 바로 왕까지도 "이제는 가라"면서 그냥 보내지 않았고 각종 귀한 보화들을 챙겨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430년 동안 노예살이 한 일종의 퇴직금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광야에서는 쓸 일이 없어요. 광야에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만 있으면 됐지 금은보화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고민합니다. 도대체 광야에서 이것을 어떻게 쓸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큰 금송아지를 순금으로 만드는 것이었지요. 광장 위에 큰 금송아지를 만들려면 금이 얼마나 필요하겠어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든다고 금을 가져오라고 하니까 손가락에 있는 것까지 다 빼서 순식간에 가지고 왔는데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분해 하셨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귀한 것들을 저렇게 잘못 쓰다니... "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성소를 지으라고 말씀하신 깊은 의도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헌신을 기뻐하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너희들이 가진 것으로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내 시간 귀합니다. 내 물질 귀합니다. 내 재능 귀합니다. 밖에 나가서 내 재능 한 시간만 써도 몇 십 만원, 몇 백 만원 받을 수 있는 재능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기쁘게 사용하라는 것이지요. 주님은 그것을 원합니다. 내가 가진 시간으로, 내가 가진 재능으로, 내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 앞에 사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용에는 3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세 가지 기준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몇 번씩 반복해 나오는 말씀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재능을 드리려면 먼저 ‘마음에 감동된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왕 주님 앞에 헌신하려면 자투리 시간을 쓰지마세요. 자기 볼 일 다보고 하나님의 일을 자투리 시간에 하는 건 왕대접이 아닙니다. 시간을 성별하여 해야 받으십니다. 사람들은 결과만 보고서 잘했다고 할 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나면 교사를 한다고 그럽니다. 그러다가 가을이 되면 목사님, 빼 달라고 그럽니다. 헌신이 고무줄 늘어났다 줄었다 하듯이 해선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정말 왕 되신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이 있는가? 아니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가? 우리의 중심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시간으로 헌신하든지, 물질로 헌신하든지, 재능으로 헌신하든지, 어떤 경우든지 그것은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의 감동이 된 상태에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준은 자원하는 것입니다. 올림픽을 하면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지요? 사실 그 자원봉사자의 수고는 눈물겹습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지만 자원봉사자는 기꺼이 합니다. 그러나 봉급을 받고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헌신적으로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봉급에 자신의 의지가 얽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사를 하다보니 사장급과 일력시장에서 온 분들이 다릅니다. 건축하는 일을 소명으로 알고 그 일을 하기 원하여 하는 분과 오직 일당을 위해 일하러 온 분들은 달랐습니다.
세 번째 마음이 슬기로운 자입니다. 마음이 슬기롭다고 하는 것은 IQ가 높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지혜, 그것은 학력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젊음과 나이듦의 문제가 아닙니다. 슬기롭다고 하는 것은 순종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이 오시니까 등불 기름을 준비하고 기다려라" 그러면 그냥 바보같이 기름 넉넉히 준비해서 밤새도록 기다리는 겁니다. 그것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주유소가 가까우니까 아무 때든지 기름 준비할 수 있어. 나는 달리기가 빠르니까 주님이 저기쯤 오시면 그 사이에 가서도 기름 채울 수 있어"라며 혼자 똑똑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다 주님 오실 때 문이 닫혀져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세속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상에서 여러분, 똑똑하다고 신앙생활 잘하는 것 아닙니다. 머리 좋다고 돈 많이 버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셔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음이 감동된 자, 자원하는 자, 그리고 마음이 슬기로운 자들을 선택하셔서 당신이 백성들과 만날 성소를 짓게 하셨습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이 그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