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가 뭐죠, 마시는 건가요? / 박정훈
‘연차가 뭐죠, 마시는 건가요?’
농담 같지만, 모 인터넷카페에 올라온 실제 질문이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거나, 중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연차라는 단어 자체를 듣지 못한다. 연차의 뜻을 알더라도 ‘마시는 건가’라는 자조 섞인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데 연차가 있어도 쓸 수 없는 노동자가 많기 때문이다. 회사에 일이 많으니 쓰지 말라 했다가 회사에 일이 없으니 사용하라고 하는가 하면 퇴사 때 연차수당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정부가 나서 해결해야 할 불법이지만 되레 엉뚱한 일만 하고 있다. 최근 정부는 주 69시간 근로가 가능한 근로시간제도 개편안을 발표했다. 정부와 재계는 요즘 젊은이들이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는 걸 좋아한다며, 69시간 일하고 제주도 ‘한 달 살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주 69시간 일 시키는 기업이 연차는 주겠냐는 질문이 나왔는데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자신 있게 답했다. “MZ세대는 기성세대와 달리 부회장 나와라, 회장 나와라, 성과급이 무슨 근거로 이렇게 됐냐 (말할 정도로) 권리의식이 굉장히 뛰어나다. 적극적인 권리의식이 법을 실효성 있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MZ세대가 아니라 장관 정도의 권력자가 되면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것 같다. 적극적 권리의식으로 법을 실효성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존재가 있긴 하다. 노조다. 그러나 69시간 제도가 도입될 사업장엔 노조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노조 없는 회사에서는 ‘회장 나와’라고 외치는 MZ세대 노동자보다 ‘요즘 애들 왜 이래’ ‘바쁜데 휴가를 왜!’라고 외치는 상사를 만날 확률이 더 높다.
주말에 사촌동생으로부터 취업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순간 ‘5인 미만 기업이라 연차가 없네’라는 동생의 카톡이 먼저 도착했다. 타이밍을 못 맞춘 축하인사 덕분에 머쓱해졌다. 연매출 200억원 규모의 무역회사라는 말에 곧 5인 이상 사업장이 될 수 있을 거라며 세상 물정 모르는 위로를 건넸다.
동생은 사장이 5인 이상 사업장이 되면 골치 아프다며 추가 채용 대신 소수 직원을 쥐어짠다고 답했다. 5인 미만 기업에 연차가 보장되지 않는 건 차별이라며 법 개정이 됐으면 좋겠다고 열변을 토하던 동생은 ‘의원들은 자기들이랑 상관없어서 손놓고 있는 듯’이라며 힘없이 말을 줄였다. 노동부 장관이 ‘연차는 마시는 게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입니다’라고 말하는 사회였다면 동생에게 ‘잘될 거야’라는 답장을 보냈을 거다. 나는 어떤 위로도 하지 못했다.
2014년 4월9일 한국노총 사무처장 이정식은 국회에서 열린 ‘근로시간 단축에 관한 공청회’에서 ‘노사합의에 의한 연장근로 한도 확대,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 확대를 허용할 경우 상시적인 장시간 노동 문제를 개선하려는 효과가 상실되며, 임금삭감 및 합의 주체인 노사 간 힘의 대등성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5인 미만 사업장에도 근로기준법을 적용해 노동시간을 단축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그가 젊은 세대와 잘 소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연차조차 쓰지 못하는 노동자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장관 옷을 입은 이정식이 노조조끼를 입었던 이정식의 주장을 경청해야 하는 이유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입력: 2023. 03. 14. 03:00 수정: 2023. 03. 14. 03:04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3140300085
첫댓글 노동부는 노동자를 못살게 굴고, 환경부는 환경을 파괴하는 데 앞장선다. 대통령은 국민을 하찮게 여기고. 이게 나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