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최고위원 태영호 의원이 제주 4.3 사건의 발생을 북한과 연결시켰다. 이때 발생한 민간인 학살 역시 북한 책임으로 돌렸다. 역사적 사실을 뒤튼 '색깔론'이다. 지난 12일 제주 4.3사건 위령탑 앞에서 그는 무릎을 꿇고 향을 올리며 "4.3사건은 명백히 김씨 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라며 "김씨 정권에 몸담다 귀순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희생자들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한다"라고 말했다. 얼핏 들으면 4.3 희생자를 추모하는 발언 같지만, 실상은 4.3을 왜곡하고 피해자들을 모독하는 망언이다.
한반도 분단과 남한 단독 총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의 궐기를 대규모 학살로 진압한 이 사건에서, 진압하는 쪽엔 미군정과 남한 군경과 서북청년단이 있었다. 그리고 진압 당하는 쪽엔 제주도민과 유격대가 있었다. 태영호 의원은 진압당한 피해자 쪽을 김일성과 연결지었다. 그러면서 학살 책임 역시 김일성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제주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 지역 단체들은 "태 의원이 제주 4.3에 대해 '명백히 북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는 등 역사적 진실과 전혀 다른 내용을 유포시켜 경거망동을 일삼았다"며 분노했다. 제주도민들이 외부의 사주를 받은 것처럼 왜곡한 태영호 의원의 발언은 진실을 왜곡하는 동시에 피해자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5.18 북한 개입설을 퍼트려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결시키려는 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4·3 당시 제주 인구 25만 중에서 3만 정도가 희생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정부 측이 인정한 희생자 규모는 1만4000명이다. 목숨을 걸고 분단을 반대한 사람들이 제주도에 그렇게 많았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한국인들을 숙연케 만든다. 그런데도 극우세력은 이 사건을 주저없이 폄훼하고 있다. 김일성 정권의 사주로 일어난 일인 듯이 매도하고 있다. <전광훈 목사의 옥중서신>은 4.3 희생자들을 폄하하는 대목에서 "이들은 김일성을 따르는 박헌영의 남로당 골수분자들로서 해방 후 나라가 세워질 때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제주 반란사건을 일으킨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전광훈 목사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 역시 뒤바꿔 놨다. "그들은 진압군과 경찰들 그리고 그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따르지 않은 제주도민들까지 처참하게 살해한 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진압군과 경찰을 피해자로 둔갑시켜놓은 것이다. 극우적 역사관으로 인해 사퇴 압력을 받는 김광동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 역시 2014년 4월호 <한국논단> 기고문 '제주 4.3폭동은 반한·반미·반유엔 친공 투쟁'에서 학살 책임을 제주도민 유격대로 돌렸다.
그러면서 실제로 학살을 주도한 군경 토벌대를 두둔했다. "물론 군경 토벌대가 계엄령을 과잉 적용한 부분도 없지는 않았다" "적법한 공권력 행사 넘어선 부분도 있었던 건 사실"이라면서 이들을 옹호했다. 최고위원에 출마한 태영호 의원이 이런 주장들에 동조하면서 표를 구하는 것은 국민의힘의 이념적 좌표가 어디를 지향하는지를 의심케 만든다. 제주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이 남한 군경과 극우단체들에 의해 일어났고 이것이 미군정 지휘 아래의 일이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남한뿐 아니라 미국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제주도에서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다.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지낸 안재홍 전 <조선일보> 사장의 원고집인 <안재홍 유고집>에 소개됐듯이, 4.3 당시의 미국 군사고문단장인 윌리엄 로버츠는 남한 군경을 이끄는 조병옥 군정청 경무부장과 송호성 국방경비대사령관에게 "미국은 제주도가 필요하지 제주도민은 필요하지 않다"라며 "제주도민을 다 죽이더라도 제주도는 확보해야 한다"라는 말로 유혈 진압을 지시했다.
태영호 의원은 제주 학살이 '김씨'에 의해 일어났다고 주장했지만, 미 군사고문단장의 지시에서도 나타듯 실제로는 미국 정부와 미군정이 책임져야 할 사안이었다. 1947년 10월 11일 자 <동아일보> 톱기사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재임 1945~1953) 사진이 나오고 "사진은 트씨"라는 설명문이 나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한국인들은 트루먼 대통령을 '트씨'로 불렀다. 4.3 학살의 궁극적 책임은 김씨가 아니라 '트씨'에게 있었다고 해야 정확하다.
이처럼 책임 소재가 명백한데도, 극우세력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당원들이 도민 유격대에 참여한 사실을 이용해 4.3을 북한과 연결하고 있다. 도민들의 자연발생적 민중봉기 속에서 남로당 당원들이 당 지도부와 무관하게 참여했던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남로당의 역량은 남한에서 과대평가돼 있다. 미군정의 탄압을 받은 남로당은 지도자 박헌영을 북쪽에 둔 상태에서 해방공간을 보냈다. 박헌영은 1946년 9월 7일에 나온 미군정 경찰의 체포령을 피해 그달 29일 비밀리에 월북했고, 2개월 뒤인 11월 23일 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조선공산당을 통합해 남로당을 결성했다.
이런 구조로 인해 박헌영을 비롯한 지도부가 남한 당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는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4.3 발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저술가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은 "남로당 지도부는 제주도 무장봉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린 적은 없었다"라며 "김삼룡 등 서울의 남로당 지도부 역시 이번 봉기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다소 충동적인 성향의 김달삼이 상부와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데다, 진압을 위해 파견된 국방경비대 문상길 중위가 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사살하고 부대원들을 이끌고 반군에 가담하면서 더욱 확대된 사건이었다"라고 설명한다.
'박씨'뿐 아니라 '김씨'도 개입하기 힘들었다는 점은 박헌영과 김일성의 라이벌 관계에서도 확인된다. 박헌영과 경쟁하는 김일성이 박헌영을 제치고 제주도 남로당원들을 사주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이용해 박헌영과 남로당원들을 숙청한 사실로도 나타나듯이 김일성과 남로당은 엄밀히 말하면 같은 편이 아니었다.
4.3 사건이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를 무대로 장기간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박씨·김씨' 같은 외부세력의 사주가 아닌 도민들의 자발적 참여 속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도민과 유격대가 제주섬과 더불어 혼연일체가 된 것이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주 출신 역사학자인 양정심의 <제주 4.3항쟁 - 저항과 아픔의 역사>는 도민들이 봉화를 올리고 삐라를 뿌리며 유격대를 지원한 사실 등을 예시하면서 "중산간 마을들에서는 가족들 중 한 사람씩은 이러한 일에 관계를 하지 않은 주민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유격대 지원 활동에는 여중생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등의 사실을 들려준다. "이러한 제주 지역의 마을공동체적 성격은 토벌대에게 효과적인 토벌을 거둘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라고 이 책은 설명한다. 제주도민들이 민족분단을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궐기했고 이 때문에 3만 명이나 희생된 사건을 두고 태영호 의원은 '김씨'의 개입을 운운했다. 제주도민들의 자발적이고 숭고한 희생을 모독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인 지난해 4월 3일 제74주년 제주 4.3희생자 추념식에서 "4.3의 아픔을 치유하고 상흔을 돌보는 것은 4.3을 기억하는 바로 우리의 책임이며 화해와 상생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대한민국의 몫"이라며 "4.3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온전한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정작 집권여당 최고위원에 출마한 후보자가, 대통령의 공언과는 배치되는 언행을 일삼으며 제주 4.3을 모욕하고 있다. 그것도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색깔론을 조장하면서 말이다. 제주 4.3을 대하는 집권여당의 태도에 의구심을 갖기 충분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