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0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루카 13,10-17
그건 설득이 아니라 설교다
누군가 “신부님 강론은 설득이 아니라 설교입니다”라고 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어쩌면 오늘 복음은 강론이 단순한 설교가 아닌 설득이 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려 허리를 조금도 펼 수 없었던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그러자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이것은 회당장의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더욱 설득력 있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자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당하고 군중은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습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회당에서 회당장과 설교로 대결을 벌이는 구도이고 결국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설교는 설득적이었고 회당장의 설교는 말 그대로 설교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무엇이 다를까요?
바로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는 게 다릅니다.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구절을
너무도 쉽게 간과합니다.
그러나 비유가 없으면 그 설교는 설득력을 잃습니다.
제러드 포글은 대학교 3학년 당시 몸무게가 192킬로그램에 달했고 ‘커다란 사람들을 위한
옷가게’ 에서만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이즈인 XXXXXXL의 셔츠를 입었습니다.바지의 허리 치수는 60인치나 되었습니다.
재러드의 아버지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의사였는데, 벌써 몇 년째 아들에게 몸무게에 관해
경고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부종을 앓고 있다는 진단
을 받고는 몸무게를 줄이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서브웨이 샌드위치는 “서브웨이 샌드위치 일곱 개에 함유된 지방은 도합 6그램도
안 됩니다” 라고 홍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러드는 선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다이어트를 해 보기로 합니다.
점심으로는 야채 서브 샌드위치를 먹고, 저녁으로는 6인치짜리 터키 샌드위치를
먹었습니다.
이렇게 ‘서브웨이 다이어트’를 시작한 지 3개월 후, 그는 처음으로 저울 위에 올라섰고
무려 50킬로그램이 빠진 150킬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80킬로그램까지 빠집니다.
이 사실을 알아낸 광고 회사는 ‘지금 우리 손 안에 엄청난 스토리가 굴러들어왔어!’
라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광고 회사 사장의 제안에 본사 마케팅부장은 시큰둥하였습니다.
마케팅부장은 샌드위치는 맛으로 경쟁해야지 몸에 좋다고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견해이었
습니다.
그러나 광고 회사는 공짜로 이 광고를 만들어주겠다는 제안과 샌드위치를 먹는 것이 전부
가 아닌 운동과 의사의 지도가 있어야 한다는 문구를 넣는다는 끈질긴 설득으로 재러드의
사연을 광고로 내기로 합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초대박이었습니다.
『스틱』이라는 책에 소개된 사연입니다.
스토리는 정말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책 『스틱』에는 설득력 있는 표현을 하는 여섯 가지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단순해야 하고 의외성이 있어야 하며 구체적이어야 하고 믿을 수 있어야 하며 감정을
건드려야 하고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 조건을 다 채우는 것이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말씀을 통해 이 여섯 가지
딱 달라붙는 메시지를 전달할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통하지 않고는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누군가와 싸우고 미워하고 한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저는 용서하라기보다는 비유를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바다의 수심에 따라 물고기가 사는 종류가 다른 것을 아시죠? 만약 내가 어떤 물고기와
문제가 있다면 나는 그 수심에 있는 것입니다. 같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부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입니다. 그러면 더는 바다의 물고기들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싸우면 같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이해하였습니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비유를 들어주는 것은 내가 그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비유를 들 수 있다는 말은 다른 수준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셨기에 그것에 대한 설명은 이 지상의 비유로만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단순한 설교가 아닌 설득이 되기 위해 우리도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30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루카 13,10-17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지켜보시며 함께 하십니다!
혹시라도 18년 동안 혹독한 병고에 시달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 시대 당시 평균 수명이 고작 4~50세 였으니, 18년을 병고에 시달렸다면 거의
인생의 절반 가량을 병마와 싸웠다는 말입니다.
병과 관련해서 나름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자부하는 저는 어린 시절 3년여, 젊은 시절
7년여, 한 십년 병치레를 해보니...정말이지 신체는 물론이고 마음이며 정신, 영혼이며
멘탈이 탈탈 털리는 느낌이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에. 이 병원 저 병원 순례를 다녀보지만
차도는 없고... 쌩고생들 하고 계시는 환자들의 그 심정 백이십퍼센트 이해가 갑니다.
18년 세월 동안 병마에 사로 잡혀 허리를 조금도 펴지 못한채 살아왔던 한 여인이 오늘 마치도 기적처럼, 동화의 한 장면처럼 인생 역전을 이룹니다.
이렇게 사는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심정에 세상 울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여인을 예수님께서 눈여겨 보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제쳐놓고 오직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그녀의 아픈 부위에
친히 당신 손을 대십니다.
말씀 한 마디로 그녀의 오랜 질병, 끔찍한 질병을 낫게 하십니다.
여인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면서 감격해합니다.
눈에서는 감사의 눈물이 쉼없이 흘러내립니다.
순식간에 고질병의 치유라는 평생 소원을 이룬 여인의 모습에 예수님도 흐뭇해하십니다.회당내 군중들도 함께 기뻐합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한 사람, 회당 내에서 자칭 가장 거룩한 사람,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 회당장만이 볼멘 목소리로 외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총으로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에게 치유를 선물하고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오랜 고통에시 해방된 이웃의 모습에 함께 기뻐하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눈에 불을 켜고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이웃을 심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모질고 긴 병고에 시달리고 계신 분들, 부디 힘내시길 빕니다.
이 혹독한 고통, 반드시 끝이 있을 것입니다.주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손수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강론>
(2023. 10. 30. 월)(루카 13,10-17)
<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0-14)”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히 십계명에 들어 있는 계명인데, 신명기
를 보면, 일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너의 소와 나귀, 그리고 너의 모든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2-15).”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남을 쉬게 해 주는 날’입니다.
‘내가 일을 안 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안 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들과 딸, 종들, 이방인들에게 일을 안 시키는 날, 심지어 가축들에게도 일을 안 시키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일’은 ‘생계를 위한 노동’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셨다고 해서 회당장이 화를 낸 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병자를 고쳐 주셨다면, 그래서 병자를 고쳐
주신 다음에 치료비를 받았다면, 그것은 안식일을 안 지키신 것이 되고, 회당장이 화를
낸 것은 옳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병자를 고쳐 주신 것도 아니고, 치료비를
받으신 것도 아닙니다.
병자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본래의 정신대로 지키신 것이 됩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왜 예수님께 화를 내지 않고
군중에게 화를 냈을까?
예수님께 직접 화를 낼 용기가 없어서 그랬거나, 치료를 받는 것마저도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의 경우에는 요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중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는 경우라면, 날짜도, 요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만을 갈망하게 됩니다.
만일에 그런 병자에게 가서 주일을 잘 지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랑도 없고 인정도
없는, 글자 그대로 무자비한 율법주의자가 될 뿐입니다.>
안식일은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지 않는 날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일을 못하면 굶어야 하는데, 안식일이라는 날이, ‘일을 못해서 굶주리는 날‘로 되어버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탈출기에서 ‘만나’가 내릴 때의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 엿샛날에는, 그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탈출 16,4-5).”
하느님께서는 아무 대책도 없이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치 ‘만나’를 내려 주시면서 안식일에 일할 필요가 없게 해
주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고 그냥 굶어라.”는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 현실에서, 정말로 먹고살기 위해서 주일에도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 사람들이 주일에 쉬지 못하고,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들 자신들의
탓이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의 책임입니다.
주일에는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에 지장이 없게 해 주는 것은 공동체가 나서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계명에 규정되어 있는 안식일이,
단순히 일을 안 하고 쉬는 날이 아니라 ‘거룩하게’ 지내는 날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아무 일도 안 하는 것만으로 주일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 하루를 온전히 ‘거룩하게’ 지내야 주일을 지킨 것입니다.
<“나는 미사 참례를 했으니 주일을 지켰다.” 라고만 생각하고, 그 나머지 시간은 거룩하지
않게, 즉 세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속된 오락을 하면서 놀았다면, 주일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십계명에서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라는 말씀을 무심코
지나칠 때가 많은데, 이 말씀에서 “네 할 일”이라는 말은, 생계를 위한 노동만을 가리킬
뿐입니다.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일은 ‘네 할 일’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면, 그 엿새도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면서 엿새가 아니라 닷새만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
니다.
“이틀 동안 무엇을 하면서 쉬는가? 그냥 세속 사람들처럼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