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일기
박노해
길고 긴 일주일의 노동 끝에
언 가슴 웅크리며
찬 새벽길 더듬어
방안을 들어서면
아내는 벌써 공장 나가고 없다.
지난 주일의 노동
기인 이별에 한숨 지며
쓴 담배 연기 어지러이 내어뿜으며
바삐 팽개쳐진 아내의 잠옷을 집어들면
혼자서 밤들을 지낸 외로운 아내 내음에
눈물이 난다
깊은 잠 속에 떨어져 주체 못할 피로에 아프게 눈을 뜨면
야간일 끝내고 온 파랗게 언 아내는
가슴 위에 엎으러져 하염없이 쓰다듬고
사랑의 입맞춤에
내 몸은 서서히 생기를 띤다.
밥상을 마주하고
지난 일주일의 밀린 얘기에
소곤소곤 정겨운
우리의 하룻밤이 너무도 짧다
날이 밝으면 또다시 이별인데,
괴로운 노동 속으로 기계 되어 돌아가는
우리의 아침이 두려웁다.
서로의 사랑으로 희망을 품고 돌아서서
일치 속에서 함께 앞을 보는
가난한 우리의 사랑, 우리의 신혼행진곡
(시집 『노동의 새벽』, 1984)
[작품해설]
이 시는 젊은 노동자 부부의 고단하지만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을 구체화하여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신혼 일기’라는 제목이 반어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처럼 노동자 · 농민 문학은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화려한 기교는 다소 부족할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얻은 경험을 그들만의 언어로 형상화함으로써 깊은 감동을 준다.
지식인 문학이든 민중 문학이든 현실과 대면해서 자신의 세계관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는 별로 다를게 없다. 다만 지식인 문학이 관념에서 나온 날카로운 비평 의식을 보여 준다면, 민중 문학은 실제 삶에서 얻은 경험을 극적으로 형상화한다는 차이를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닌, 서로 돕고 보완해 주는 관계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박노해는 1980년대 산업 분야 노동시의 기수이다. 그의 시는 노동자들의 절망과 슬프므 원한과 분노의 정서를 노동 현실의 구체적 체험에 의거하여 가히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담아 내는 한편, 인간다운 삶을 향한 민줃 해방의 정도까지도 탁월하게 보여줌으로써 1980년대 민중시의 한 절정으로 평가된다. 그 결과, 그간 지식인에 의해 창작되던 민중시가 노동자에 의해 창작되는 방향 전환의 계기가 마련되었음은 물론, 좋은 시의 기준으로 여겨 오던 비유 · 상징 · 운율 등의 형식적인 면뿐만 아니라, 내용과 주제도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해 주었다. 또한 그의 활동을 통하여 시가 사회 변혁을 위한 실천 운동의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의 화자는 가난한 노동자로, 어느 날 ‘길고 긴 일주일의 노동 끝에’ ‘찬 새벽길 더듬어’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내는 벌써 공장 나가고 없다’ 그녀 또한 공장에 나가 일을 해야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언 가슴 웅크리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그는 ‘바삐 팽개쳐진 아내의 잠옷을 집어들’고 눈물짓는다. 또 혼자 밤을 보낸 아내의 외로움이 잠옷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 역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를 따뜻하게 맞아 주지 못한다. ‘주체 못할 피로에’ 깊은 잠 속에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파랗게 얼‘어 돌아온 아내를 향해 그는 간신히 아픈 눈을 뜰 뿐이지만, 아내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다가롸 사랑의 입맞춤을 하고 하염없이 그를 쓰다듬는다. 그러면서 부부는 서서히 생기를 회복하게 된다. 그리하여 ’밥상을 마주하고‘ 일주일 동안 밀린 이야기를 소곤소곤 나누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지나가 버리는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날이 밝으면’ ‘괴로운 노동 속으로 기계 되어 돌아가’야 하는 ‘두려운 아침’과 함께 ‘일주일간의 긴 이별이 찾아오겠지만, 이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일주일에 단 하루뿐이지만,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삶은 고통스럽고 이별은 아프지만, ’서로의 사랑으로 희망을 품‘는 이상, ’일치 속에서 함께 앞을 보는‘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화자의 믿음이야말로 그를 현실과 당당히 맞설 수 있게 하는 버팀목이 되는 것이다.
[작가소개]
박노해
본명 : 박기평(朴基平)
1958년 전라남도 함평 출생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
1983년 『시와 경제』에 시 「시다의 꿈」 등을 발표하며 등단
1988년 제1회 노동문학상 수상
19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으로 구속되어 1998년까지 복역
시집 : 『노동의 새벽』(1984), 『머리띠를 묶으며』(1991), 『참된 시작』(1993), 『겨울이 핀다』(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