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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묵상글(강론글) 아들을 통한 구원
1차(04:40), 2차(05:10, 05:30), 3차(15:35)
31일. 묵상글, 04시 4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을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 곳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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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31일 일요일
[삼위일체 대축일] 아들을 통한 구원 (요한3,16-18)
제1독서<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탈출34,4ㄱㄷ-6.8-9)
4 모세는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아침 일찍 일어나 돌판 두 개를 손에 들고 시나이 산으로 올라갔다.
5 그때 주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함께 그곳에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
6 주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셨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
8 모세는 얼른 땅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아뢰었다.
9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2독서<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2코린13,11-13)
11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12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복음<하느님께서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6-18)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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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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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3,16–18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
그리하여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 한 구절은
복음 전체를 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지가
이 짧은 말씀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성 예로니모는
성경의 말씀을 사랑했고
말씀의 한 구절 한 구절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깊이 붙들려 했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 복음의 중심은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내어 주는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보내시고 내어 주실 만큼
하느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이 먼저 하느님께 닿아 올라간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내려오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줍니다.
세상은 자주
하느님을 두려운 심판자로만 상상하려 합니다.
실수하면 버리시고
넘어지면 외면하시는 분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이 말씀은 우리 마음을 크게 열어 줍니다.
하느님의 첫 마음은 단죄가 아니라 구원이고,
배제가 아니라 구원의 길을 여는 사랑입니다.
성 예로니모의 관점에서 보면
“믿는다”는 것도
단지 교리를 아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이 진실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나는 멀리서 심판만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머리의 동의만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신뢰입니다.
두려움과 자기단죄에 갇히기보다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용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는 이가 전혀 잘못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삶의 근본 방향이
이미 빛을 향해 돌아서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어떤 내용을 모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사랑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판은
하느님이 먼저 쳐 내시는 형벌이라기보다
사람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할 때
스스로 그 안에 머무르게 되는 비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 성찰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성찰의 기준이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볼 때
쉽게 부족함과 실패만 세어 보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먼저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를 들려줍니다.
하느님은 나를 없애려 하시는 분이 아니라
살리려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찰은
자기혐오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내 삶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는 시간입니다.
나는 빛 쪽으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숨고 싶은 어둠 쪽으로 물러나고 있는가를 묻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성체의 날이기도 합니다.
성체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단지 문장으로만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실제로 자신을 내어 주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양식이 되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일은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진실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며,
동시에 “나도 내어 주는 삶을 살겠다”는 응답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정말 믿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심판만을 먼저 떠올리며
그 사랑을 의심하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을 사랑의 빛 안에 놓고 있는가,
아니면 숨어 버리고 싶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심판하기 위해서보다
살리기 위해 왔다.”
주님,
당신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하시고
하느님께서 저를 먼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이게 하소서.
심판의 두려움보다
구원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시며
저도 성체 안에서 받은 사랑을
작게나마 내어 주는 삶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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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본당에는 이번 5월에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5월 2일에는 ‘성모의 밤’이 있었습니다. 성모님께 우리의 사랑과 존경을 드렸습니다.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본당 공동체가 영적으로 풍성해질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5월 3일에는 ‘제2회 생활 성가 대회’가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웨스트플래이노 구역이 ‘나는 꽃이야’라는 노래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올해는 울림 중창단의 ‘인생’이라는 노래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5월 10일에는 ‘Mother’s Day’가 있었습니다. 작년처럼 올해도 ‘어머니 은혜’를 함께 불렀습니다. 5월 5일은 아버님의 15번째 기일이기도 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사시도록 기도했습니다. 5월 16일에는 ‘다문화 미사’가 성 안나 성당에서 있었습니다. 본당에서도 ‘사물놀이’ 팀과 ‘K Pop’ 팀이 참가했습니다. 5월 17일에는 ‘제8회 청소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꿈과 재능을 보는 것은 기쁨입니다. 5월 24일에는 ‘견진성사’가 있었습니다. 5월 29일에는 주일학교 여름 캠프가 시작되었고 오늘 돌아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함께한 5월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수고해 주신 사목회와 봉사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사제는 미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과 함께” 그러면 교우 여러분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무엇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일까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무엇이 하느님 나라입니까?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복음입니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말씀과 표징이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땅에 묻히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들 부활의 확증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사랑일까요?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으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감성과 이성 그리고 오성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문화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제8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 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 49, 15)” 그리고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한 까닭에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무엇이 성령의 친교입니까? 사도행전은 성령의 친교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성령의 친교는 여러 은사로 나타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은사가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 각 사람에게 다르게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이는 믿음에 맞게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봉사하는 은사를, 또 어떤 이는 가르치는 은사와 권고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또한 나누어 주는 이는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이는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이는 기쁜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처럼 바오로 사도는 다양한 은사가 있지만 모두가 공동체를 살리고 세우기 위해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을 강조하며, 각자가 받은 은사를 충실히 실천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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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 이성으로는 완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요한 3,16).
외아들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는 하나뿐인 아들을 뜻합니다. 그 외아들을 주신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아드님께서는 아버지 뜻대로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내어놓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시고, 하느님의 영께서는 세례로 우리를 하느님의 품으로 이끄십니다.
서로 자신을 내어놓고 받아들이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는 분이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는 수학 공식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홀로 계시지 않고 늘 함께 계시며, 서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하여 작은 것이라도 기꺼이 내어놓을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아 갑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큰 선물인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십니다.
이 사랑의 선물을 받고, 우리도 서로에게 사랑의 선물로 자신을 내어 놓읍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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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신비입니다. 알아듣기에는 어려워도 참으로 벅찬 사랑의 신비입니다. 너무 깊어 헤아려지지 않아도, 오히려 다 헤아려지지 않기에 더 깊이 매료당합니다. 다 이해되지는 않아도, 그 사랑은 충분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 신비의 내용을 알아듣는 데는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 신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라는 이 용어가 생겨난 역사적 배경은 3세기~5세기입니다. 이때, 교회에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하느님이 ‘실제 하느님과 다르고’ 또 ‘성령과 하느님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이런 주장들 앞에서 신앙인들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삼위일체”란 이 용어를 통하여 신앙인들이 고백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알아듣는 하느님은 실제의 하느님이고, 또 신앙인들 안에 숨결로 일하시는 성령도 실제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빕니다.”(2코린 13,13)
이는 사랑의 하느님과 은총의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의 성령께서는 같은 하느님이심을 말해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삼위일체”에 대한 의미를 잘 드러내줍니다. 곧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가운데 나타났는지’를 드러내주며,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따라서 이 신비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축복을 깨우쳐줍니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함께 그곳에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탈출 34,5)
“주님,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 34,9)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2코린 13,1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빕니다.”(2코린 13,13)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네 인간들과 함께 사시기를 원하셔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인간의 동행자로 삼으시고 벗이 되어 “함께 있게” 하시고 당신의 생명으로 이끌게 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느님의 ‘참 사랑’입니다. 곧 아들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이 ‘참 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함께 있음”이며, “함께 한다”는 것의 복음적 의미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있음”이 사랑입니다. 이 “함께 있음”이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따로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아니하고,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귐으로 친교를 이루며, 상호 교제하고 상호 교환하며, 상호 내재(내주)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내어주어 타자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자신 안에서 타자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와 연대의 관계 맺음이요, 우애와 형제애로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함께 있고, 서로 속해 있고, 서로의 것이 되는 참으로 아름다운 결합의 일치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사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밀접하게 관계 맺고 계시는 지를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 안에서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은혜롭고, 그리고 얼마나 깊게 일하시는 지를 드러내주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며,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우리와 동행 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삼위로 함께 계시기에 사랑이십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이렇게 “함께 있음”이 바로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 이 수도가정에서, 이 성당에서 “함께” 만나 한 분이신 주님을 찬미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는 거룩한 일. 그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성 안으로 쏙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은 이토록,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 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2코린 13,1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면서도
죽기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죽기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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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학생을 대상으로 인터넷 게임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수용될 때와 배제될 때 기능적자기공명영상(fMRI)을 촬영하여 뇌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되는지를 보았습니다. 게임에서 자기를 따돌리는 배제를 경험하면 스트레스가 일어나며, 뇌에서도 내측 대상 피질과 전성엽이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이 부위는 신체적 통증이 있을 때 활성화되는 곳입니다.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누군가에게 거절당하거나 집단에서 소외를 경험하는 것을 뇌에서는 신체적으로 몸이 아픈 것과 똑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절이나 소외로 심한 스트레스를 느낄 때, 진통제인 타이레놀 먹는 것도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한다는 것 자체로 매우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체적 통증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편하다, 귀찮다’ 등의 이유를 붙여서 혼자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경우를 봅니다. 오히려 함께함으로 얻는 스트레스가 크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삶은 함께함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홀로’에서는 자기 몸에 계속 통증을 주게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함께하시길 원하십니다. 통증 없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하나를 이루는 신비를 직접 보여주시면서, 우리 역시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삼위일체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요한 3,16)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 자체로 성부, 성자, 성령의 완전한 사랑의 친교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사랑에 머물지 않고, 이 세상을 향해 흘러넘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을 내어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당신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온전히 내어주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자는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세상에 오십니다. 성부와 성자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구원의 역사 속에서 성자는 파견되는 자로서의 역할을 취하십니다. 죄 많은 세상이 심판받아 마땅해 보이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목적은 치유와 회복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즉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은 성부 성자 성령이 나누는 신적 사랑의 사귐 안으로 우리가 초대받아 그 사랑을 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함께하는 기쁨 안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머물면서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은 더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다(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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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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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31 05:05
- 총력으로 사랑하시는
저는 올해 삼위일체 대축일을 성부 성자 성령께서
총력으로 우리는 사랑하심을 기리는 축일이라는 면에서 보고자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총력으로 사랑하셨음에
무한 감동하고 무한 감사드리는 축일이 되어야겠지요.
제 생각에 삼위일체 대축일은 두 가지 신비를 기념합니다.
삼위의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신 신비를 기념하고,
삼위의 하느님께서 합작으로 우릴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신비를 기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축일을 지내며 두 가지 신비를 기념하지만,
이 두 신비는 서로 아주 밀접합니다.
삼위 간의 내적인 사랑과 일치로 우리가 창조되고 구원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부부간의 내적인 사랑이 자녀를 생산하고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이 없다면 자녀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부부간의 사랑이 끊어지면 자녀를 함께 키우지 않겠지요.
이런 면에서 자녀의 행불행은 부모의 사랑과 밀접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며 자녀도 같이 사랑하면 자녀도 계속 행복합니다.
그런데 부부간에 사랑이 식어 헤어진 다음 자녀를 각기 사랑하면
자녀의 행복은 그만큼 많이 불완전해질 텐데 그러나 이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만일 부부간의 사랑이 깨져 자녀에 대한 사랑도 깨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받지 못해 불행할 뿐만 아니라 사랑을 배우지 못해 사랑할 수 없게 되겠지요.
이런 부부간의 사랑과 비교했을 때
성삼위 사이의 완전한 사랑은 삼위 간의 일치일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창조된 우리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고 우리 행복의 원천입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은 서로 간에 완전한 일치를 이룰 뿐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 있어서도 일치를 이룰 것이고
합력하게 할 것이며 총력적으로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을 받아 자녀도 사랑을 지니고,
부모의 사랑을 보고 자녀가 사랑을 배우듯
삼위일체의 합작 사랑은 우리 사랑을 풍요케 하고,
그 사랑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와 같아지는 육화의 사랑이고,
다 내려놓는 비하(卑下) 또는 비허(卑虛)의 사랑이고,
십자가 위에서 다 내어주는 무화(無化)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또한 성령의 사랑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인도하는 사랑이고,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여 풍요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진정 사랑하고픈 사람들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너무나 불행하기에
성자처럼 성령처럼 사랑하고픈 사람들입니다.
사랑만 해도 부족한 짧은 인생,
먼저 하느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웃도 사랑하는 삶을 살다가 한 생을 마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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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남은 나의 생애라도
이제 남은 나의 생애라도
찬미예수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도 주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드립니다.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말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세상은 이름이나 직함으로 사람의 참된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Luke"라고 적는다고 해서 의사가 되는 것이 아니듯, 누군가 스스로를 정직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며, 누군가 신앙인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참된 신앙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삶이고, 말보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며,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지혜이고, 신앙이라는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천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 마태오 복음
주님,
제가 사람의 말보다 그 열매를 바라보게 하시고, 겉모습보다 그 마음을 보게 하시며, 판단하기보다 먼저 이해하고, 비난하기보다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세상에는 때때로 진실보다 포장이 앞서고, 실력보다 명성이 앞서며, 정직보다 이익이 앞서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주님의 빛 앞에서 드러나며, 진실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음을 믿습니다.
주님,
혹시 제 안에도 이름만 남고 실천이 부족한 모습이 있었다면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입술만 가진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손과 발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주님,
이제 남은 나의 생애라도 헛된 자랑이나 교만을 좇지 않게 하시고,
누군가를 아프게 하기보다 위로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며,
미움보다 사랑을, 분노보다 자비를, 불평보다 감사를 선택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이제 남은 나의 생애라도 주님께서 제게 허락하신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게 하시고,
이제 남은 나의 생애라도 주님의 평화를 전하는 작은 도구가 되게 하소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복음
주님,
제가 마지막 순간에 뒤를 돌아보며 "주님, 부족했지만 주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리고 제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사랑이 메말라 가는 곳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주님의 자비가 머무는 곳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의 전구를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Whatever Years Remain in My Life
Lord God, Heavenly Father,
Today I come before You with a humble heart.
As the years pass, I have learned that a name alone does not define a person.
Just as writing the name "Luke" does not make someone a physician, merely calling oneself good does not make one good, and calling oneself a believer does not make one faithful.
What matters is not the title we carry, but the life we live; not the words we speak, but the truth we practice; not appearances, but the fruits we bear.
"By their fruits you will know them." (Matthew 7:16)
Lord,
Help me seek truth rather than appearances, humility rather than pride, and love rather than judgment.
Forgive me for the times when my actions failed to reflect the faith I professed.
May I never be a believer in name only, but a disciple whose life bears witness to Your love.
And Lord,
Whatever years remain in my life,
let me spend them pursuing kindness rather than vanity, bringing comfort rather than hurt, choosing mercy over anger, gratitude over complaint, and love over resentment.
Whatever years remain in my life, may I cherish each day as a gift from You.
Whatever years remain in my life, may I become a small instrument of Your peace in this worl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John 14:6)
When my earthly journey comes to an end, may I be able to say:
"Lord,
I was imperfect, but I sincerely tried to love You and follow Your ways."
May the world in which I live never become a place where love dries up, but a place where compassion, truth, and mercy continue to flourish.
Through the intercess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and all the saints, I offer this prayer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ur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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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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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 머무는 신앙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 머무는 신앙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심판보다 구원을 원하시며, 율법의 형식보다 사랑의 완성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신비 역시 머리로 이해하는 교리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주회를 하다 보면 여러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중 가끔은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나는 20년 동안 주회를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물론 꾸준함과 충실함은 존중받아야 할 덕목입니다. 그러나 그 말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우월감이나 자기 의로움이 드러난다면, 우리는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어떤 사람은 성지순례를 위해, 또 어떤 사람은 특별한 사정으로 주회를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마치 신앙의 부족함으로 판단하거나, 자신은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신앙의 훈장처럼 내세운다면, 그것이 과연 성화의 열매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5)
주회를 빠지지 않는 기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라나는 사랑과 겸손이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끕니다.
반대로 주회 단장이나 간부들이 어떻게든 단원들의 성화를 위해 주회를 열고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도 있습니다. 때로는 힘들고 부담스러워도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며, 자신 역시 성화의 길을 걷고자 노력합니다. 그것은 남을 통제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고자 하는 사랑의 수고일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는 몇 년 동안 빠지지 않았다”가 아니라, “나는 주회를 통해 얼마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주회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 충실함은 껍데기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족함이 많고 때로는 빠질 때가 있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 길 역시 성화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사랑의 친교 안에 계십니다. 우리 역시 신앙생활의 횟수나 기록을 자랑하기보다, 그 사랑 안에서 더 겸손하고 더 너그럽고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 가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거룩한 주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단순한 출석의 완벽함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을 닮아 가는 삶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우리의 생애 동안에도, 신앙의 형식보다 사랑의 본질을 먼저 바라보며 영원한 생명을 향해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신앙의 기록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Living in the Love of the Holy Trinity
“For God did not send his Son into the world to condemn the world, but that the world might be saved through him.”
(John 3:17)
In today’s Gospel, Jesus reveals the depth of God’s love for the world. God desires salvation rather than condemnation, and love rather than mere external observance. The mystery of the Holy Trinity is therefore not simply a doctrine to be understood by the mind, but a mystery of self-giving love.
While attending Legion of Mary meetings, we encounter many different expressions of faith. Occasionally, we hear statements such as:
“I have never missed a single meeting in twenty years.”
Certainly, perseverance and faithfulness are virtues worthy of respect. Yet if such a statement is accompanied by a sense of superiority or self-righteousness, it may be wise to pause and reflect.
Some members may occasionally miss a meeting because of a family commitment, a pilgrimage, a vacation, or unavoidable circumstances. If we begin to judge others as less faithful simply because they were absent, or if we wear our perfect attendance as a badge of spiritual achievement, we should ask ourselves whether this truly reflects the fruits of holiness.
Jesus said:
“This is how all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have love for one another.” (John 13:35)
It is not a perfect attendance record that brings us closer to God, but the love, humility, and charity that grow within us through our faith.
On the other hand, there are presidents and officers of praesidia who sincerely strive to keep meetings going for the spiritual growth of all members. Despite personal sacrifices and challenges, they continue their service out of love for the community and a desire to grow in holiness themselves. Such efforts are not about control or recognition, but about helping one another walk toward Christ.
The real question is not, “How many years have I never missed a meeting?” but rather, “Have I become a more loving person because of my participation?”
A person may never miss a meeting and yet fail to grow in charity. Another may occasionally be absent but sincerely strive to love God and neighbor; such a person may be walking the path of holiness more faithfully than appearances suggest.
The Holy Trinity is a perfect communion of love. As Christians, we are called not to boast about our religious records, but to ask whether we are becoming more humble, more compassionate, more forgiving, and more loving.
On this blessed Sunday, may we remember that God desires more than flawless attendance. He desires hearts transformed by the love of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And may the rest of our lives be spent seeking not merely the appearance of faithfulness, but the genuine love that leads to eternal life.
“Lord, help me not to take pride in my religious accomplishments, but to bear the fruits of love. May my faith draw me closer to You and to other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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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굿뉴스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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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돈에 대한 질문의 묵상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 신자들보다 더 잘산다는 말은 정말 사실일까?!
신앙과 돈에 대한 질문의 묵상
오랫동안 마음 한편에 생각하게 만드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최근 우연히 접한 매거진 동아의 한 글을 읽으며, 그 의문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글에서 제기된 내용과 함께, 신앙과 삶에 대해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을 나누고자 합니다.
최성락 경영학 박사의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 신자보다 더 잘사는 이유」(매거진 동아, 2026.5.23)라는 글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스위스 경제연구소의 연구를 소개하며, 개신교 문화가 근면·절약·자기 책임을 강조하고 이러한 가치관이 경제적 성과와 연결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연구에 따르면 스위스의 개신교 지역은 가톨릭 지역보다 평균소득이 다소 높게 나타났고, 노동시간 단축이나 정부의 재분배 정책에 대한 찬성 비율도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며 문득 이런 질문이 생겼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더 사랑하실까요?!
사도 바오로는 말씀합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2테살로니카 3,10)
근면과 성실은 분명 성경적 가치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목적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맡은 책임과 소명을 충실히 살아가라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노동의 목적은 부자가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느님께 받은 소명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화려한 삶보다 사랑과 섬김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도들 역시 대부분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교회 역사 속 수많은 성인들은 세상의 성공보다 하느님의 뜻을 우선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또 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재산을 보실까요, 아니면 나의 마음을 보실까요?!
가톨릭 교회는 부 자체를 죄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일하고, 가족을 책임지며,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재물이 사랑과 나눔을 위해 사용되기를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오 6,33)
결국 중요한 것은 개신교가 더 잘사는지, 가톨릭이 더 잘사는지가 아닐 것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께서 맡기신 삶을 얼마나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가?"
경제적 성공은 삶의 한 결과일 수는 있지만 신앙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많은 재산보다도 사랑과 성실함으로 살아가는 충실한 삶일 것입니다.
출처
최성락,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 신자보다 더 잘사는 이유」, 매거진 동아, 2026.5.23.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스위스 경제연구소(KOF) 연구 및 크리스토프 바스텐 연구팀 소개
성경: 2테살로니카 3,10 / 마태오 6,33
Is It Really True That Protestants Are Wealthier Than Catholics?!
A Reflection on Faith, Work, and Wealth
For a long time, I have carried a question in my heart—one that occasionally returns and invites deeper reflection. Recently, I happened to read an article that brought this question back to mind. I would like to share these thoughts, not as a conclusion, but as a reflection for all of us to consider together.
The article, "Why Protestants Are Wealthier Than Catholics" by Dr. Choi Seong-rak (Magazine Donga, May 23, 2026), discusses the ideas of sociologist Max Weber in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and research conducted in Switzerland. The article suggests that Protestant culture has traditionally emphasized diligence, thrift, personal responsibility, and hard work, and that these values may be connected to economic success.
According to the study, Protestant regions in Switzerland showed slightly higher average incomes than Catholic regions and were generally less supportive of shorter working hours, wealth redistribution, and greater government intervention.
As I read, a question came to mind:
Does God truly love those who are economically successful more than others?!
Saint Paul wrote:
"Anyone unwilling to work should not eat." (2 Thessalonians 3:10)
Hard work and responsibility are certainly biblical values. Yet the purpose of this teaching is not simply to accumulate wealth, but to faithfully fulfill the responsibilities and vocation entrusted to each of us.
This leads to another question:
Is the purpose of work to become wealthy, or to faithfully live out the vocation God has given us?
Jesus Himself did not live a life of worldly luxury. His life was marked by love, service, and sacrifice. Most of the Apostles were not wealthy people. Throughout history, countless saints chose God's will over worldly success.
So we may ask:
Does God look first at our possessions, or at our hearts?!
The Catholic Church does not teach that wealth itself is evil. Honest work, caring for one's family, and contributing to society are noble pursuits. At the same time, the Church teaches that material blessings should be used with generosity, compassion, and a concern for others.
Jesus said: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besides." (Matthew 6:33)
In the end, the most important question is not whether Protestants or Catholics are wealthier.
The more important question is:
"How faithfully am I living the life that God has entrusted to me?"
Economic success may be one outcome of a life well lived, but it is not the ultimate purpose of faith. What God desires most is not the size of our wealth, but a life marked by faithfulness, love, humility, and service.
Reflection:
"The true measure of a faithful life is not how much wealth we accumulate, but how faithfully we use God's gifts in love and service."
"신앙의 참된 기준은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았는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얼마나 사랑과 봉사 안에서 사용했는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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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차 : 05:30 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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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성령에서 태어남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바람(성령)은 불고 싶은 데로 붑니다. 부디 제게도 당신의 숨결을 불어주소서.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생명력의 성령
성령에서 태어남!
2026년 5월 30일 토요일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 요한 3,8
영적 스승 크리스틴 발터스 페인트너(Christine Valters Paintner)는 창조와 새 생명의 성령께 이 기도를 바칩니다:
창조의 성령이시여,
태초에 당신께서는 물 위를 부드럽게 감돌며
바다 깊은 곳에서 땅을 일으켜 세우시고,
모든 피조물이 저마다의 날개로 솟아오르도록 이끄셨나이다.
새 생명의 성령이시여,
저의 첫 순간부터 당신의 숨결을 제 안에 불어넣으셨으니,
지금도 당신의 생기와 새로움으로 저를 다시 일깨워 주소서.
제 안에 넉넉히 숨 쉬시어
제 삶 안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새로운 비전을 열어 주소서.
불편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저를 일깨우시기 위해
쉼이 없으신 성령이시여,
저를 옭아매고 머물게 하는 모든 자리에서 부드럽게 해방시켜 주시고,
당신께서 이끄시는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소서.
거대한 바람의 성령이시여,
제 삶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도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삶의 폭풍 속에서 흔들릴지라도
당신을 신뢰하며 굳건히 머물 수 있는 용기를 제게 주소서.
바람의 축복이 제 위에 머물게 하소서.
제 돛이 넓게 펼쳐지게 하시고,
당신께서 주시는 영감의 숨결을 깊이 들이마시게 하소서.
저를 부활의 자리로 실어 나르시고,
마침내 온전히 자유롭게 하소서.
References
Excerpted from Water, Wind, Earth, and Fire: The Christian Practice of Praying with the Elements, 42–43, copyright © 2010 by Christine Valters Paintner. Used with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orin Books®, an imprint of Ave Maria Press®, Inc., P.O. Box 428, Notre Dame, IN 46556. www.avemariapress.com.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rman Khadangan,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의 불꽃을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불은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영감을 주며,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를 지탱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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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
예전에는 세례성사를 받기 전에 까다로운 교리문답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교리문답을 하면서 지금으론 상상할 수 없는 에피소드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본당 신부님이 세례성사를 베풀기 전에 예비자인 할머니에게 몇 가지 교리, 특히 삼위일체에 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몇 분이십니까?”, “한 분이십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좋습니다. 그럼 한 분이신 하느님은 몇 개의 위격이십니까?”, 한참 생각하던 할머니는 거침없이 이내 대답하였습니다. “두 개의 위격입니다.” 당황한 신부님에게 할머니는 씩씩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가끔 성당에 들어갔었는데, 그때 벽에 걸려 있는 하느님 그림을 봤거든요. 거기에 긴 흰 수염이 있는 할아버지(=성부)가 젊은 청년 예수님(=성자)을 안고 있고, 가운데 비둘기 모습(=성령)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나도 나이를 먹어서 죽을 때가 되었는데 어렸을 때 본 그 할아버지가 여태 살아 있을 리가 없잖아요.”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령강림 대축일 후, 이어지는 삼위일체 대축일은 성령을 받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누리게 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밝혀 줍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하느님을 막연한 신비로 알아듣는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는 방식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찾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사랑함으로써만 배울 수 있습니다. 수영을 배우려면 물에 들어가야 하듯이, 사랑을 배우려면 사랑의 삶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은 체험으로써만 깨닫게 되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됩니다. 「나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라고 고백한 류시화 시인의 『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라는 노랫말처럼 사랑은 서로를 하나로 묶어주는 신비스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비, 그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결코 혼자서 하는 독자적인 행위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과 함께 나누는 관계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 ‘너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 안에서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의 완성은 관계의 일치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삼위일체인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관계의 일치, 친교의 일치가 바로 구원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의 완성을 통하여 이제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은총을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 8,14-15)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느님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이십니다.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즉,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때가 차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이신 당신을 내어주신”(3,16참조) 아버지십니다. 이 아버지께서 또한 한량없는 사랑으로 우리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도록 당신의 거룩한 영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을 볼 수 있고 성령을 통해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나누시는 온전한 사랑에 참여하도록 우리가 초대받았다는 확신에서 선포된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분명 삼위일체인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 안에서 그분들의 모습을 닮아 창조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그 오묘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더욱 알 수 없습니다.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조차도 이 삼위일체의 신비에는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위대한 하느님 신비를 헤아려 깨닫고 알 수는 없지만 실천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관계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하느님 사랑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신비를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랑의 일치에 우리는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명령하신 것,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가르치라 하신 것도 바로 이 사랑과 일치의 신비를 닮은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모든 권한을 물려받았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일은 사랑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며 실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모든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미약한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는 우리의 욕심에 사로잡혀 있지만 작은 나눔을 통해서라도 사랑의 기쁨이 무엇인지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죄책감으로 말미암아 주춤거리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사랑의 손길을 내밀 때 얻게 되는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이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주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의 길을 따라 걷노라면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나누시는 사랑의 일치에 도달하게 되리라 믿으며 오늘도 사랑에 빠져 봅시다! 사랑하면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감사송에서 이렇게 삼위일체인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의 계시로 저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은, 아드님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오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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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삼위일체 하느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이렇게 살아 있다는 자체가 은총이자 선물이요 축복이자 행복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은총이요 하느님 사랑의 선물입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찬미와 감사의 응답입니다. 지난 주일은 성령강림대축일이었고 어제는 저희 요셉수도원 제20주년 성전봉헌대축이었으며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로 계속되는 경사들이요, 이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아름다운 대축일로 표현됩니다. 그러니 결국 모든 축일은 하느님 사랑의 축일 하나로 수렴됩니다. 아침성무일도 초대송 후렴도 찬미가도 방금 부른 복음 환호송을 통한 삼위일체 하느님 고백도 우리의 고귀한 품위를 드높이듯 참 아름답고 고무적이었습니다.
“삼위에 일체이시고 일체에 삼위이신 참된 하느님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영원한 천상낙원 천사성인들 성부와 말씀이신 독생성자와
거룩한 순결이신 성령삼위를 한분의 주님으로 고백하도다
성삼의 그신비는 깊고도깊어 누구도 알아들을 길이없으나
하늘의 시민들은 성삼뵈옵고 드높이 노래하며 기뻐하도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은 영광받으소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전례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입니다. 이는 하느님 자신의 내적신비이므로, 다른 모든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역사는 바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참되고 유일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역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애당초 감동은 수도형제들의 사랑의 울력 공동노동의 기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엊그제에 이어 어제도 저는 참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복음을 나누는 마음으로 참 많은 이들에게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주신 <자리 탓하지 말자>라는 자작 시화 선물을 나눴습니다. 제 생애 이렇게 많이 사랑의 선물 나누기는 처음이었고 뜨거운 반응도 처음이었습니다.
“자리 탓하지 말자
꽃이 웃었다
그 작고 예쁜 꽃이 나를 보고 웃었다
집무실 앞
낮고 척박한 빛도 들지 않는 가난한 땅
피어난
그 작고
예쁜 꽃이 나를 보고 웃었다
기쁨을 선물했다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주님 계신 꽃자리다
자리 탓하지 말자”<2026.5.28.>
저에게도 참 많은 위로와 기쁨을 준 자작시요, 문득 나누고 싶은 마음에 사랑의 복음을 나누듯 참 많이 나눈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이어 어제는 49년전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 넷이 방문하여 제 집무실에서 조그만 동요음악회를 열어줬습니다. 당시 13세 나이였는데 지금은 62세 환갑을 넘은 제자들이지만 여전히 순수한 동심의 어린이들입니다. 매해 5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기 10년째 되는 한결같은 사랑의 제자들입니다.
이 제자들이 스승의 노래, 어린이날 노래, 과수원길 등 노래를 기타반주에 맞춰 흥겹게 불러줬고 저도 함께 했습니다. <스승의 노래> 부를 때는 최고의 유일무이한 스승이자 주님이요 영원한 길벗 도반이신 성자 예수님을 연상했습니다. 이 모두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이었음을 후에야 소스라치게 깨달았습니다. 굴지의 신학자, 신비가들의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각별했습니다.
“모든 것에 앞서 이 훌륭한 이 훌륭한 유산을 간직하십시오. 이를 위하여 나는 살아 싸우고 있으며, 이 유산과 더불어 죽기를 원합니다. 이 선물은 나에게 모든 악을 견디고 모든 즐거움을 하찮게 여기게 합니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오, 흠숭하올 삼위일체의 하느님, 제 자신을 완전히 잊고 마치 제 영혼이 이미 영원 안에 있듯이, 흔들림 없이 평온하게 당신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소서.”<성삼의 복자 엘리사벳>
오늘 말씀에서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정체를 은혜로이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오늘 복음 중 짧은 한마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셨다.”로 <성자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환히 보여줍니다. 하느님 사랑의 거울 같은 성자 예수님입니다.
탈출기에서는 하느님의 사람이자 하느님의 벗인 모세가 <성부 하느님> 체험을 생생히 소개합니다. 주님은 모세 앞을 지나시며 선포하십니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 바로 이런 성부 하느님의 사랑을 그대로 반영하는 성자 예수님입니다. 제2독서 코린토 2서 말씀은 <성령의 사도> 바오로가 성령에 감도되어 주시는,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여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어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라”는 말에서 유래되는 미사 영성체 예식중 빵나눔전 <평화의 인사>입니다. 사랑은 개방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누구나 당신을 체험할 수 있도록 오늘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자신을 활짝 개방하셨습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 대축일이자 청소년주일입니다. <영원한 청춘>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이 각별히 사랑하는 청소년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끝으로 참 좋은 두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마지막 바칠 기도는 자비송 하나뿐입니다. 또 하나는 가장 짧은 기도, 삼위일체 하느님 고백의 성호경입니다. <나 더하기 하느님>은 텅 빈 충만의 삶이요, <나 빼기 하느님> 텅 빈 허무의 삶입니다. 그러니 <나 더하기 하느님> 텅 빈 충만의 삶과 더불어 내 존재의 방패가 되는 성호경 기도로 다함께 삼위일체 하느님을 마음 깊이 각인하도록 합시다.
“성부와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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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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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사랑은 우리를 더욱 깊은 결속, 더 긴밀한 일치, 더욱 활발한 친교로 이끌어 줍니다!
또 다시 우리 신부님들이 곤경을 치러야 하는 삼위일체 대축일이 돌아왔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소개하려로 나름 이런저런 비유나 예화를 들면서 강론을 전개하지만, 강론하는 우리 사제들부터 긴기민가 합니다.
자칫 잘못 강론하면 이단으로 빠진다거나, 교우들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고 갈 수 있으니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그저 두리뭉실하게 강론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존경하는 언어의 마술사 전경린 작가께서 사랑하는 대상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묘사하면서 기가 막히게 ‘사랑’을 정의했습니다.
“새로운 풍경을 볼 때 마다 내 머릿속에는 늘 그가 떠올랐습니다.
그가 없으니 내가 앉은 의자 옆으로 무의미한 시간들이 듬성듬성 흘러갑니다.
그와 헤어져 있는 동안에도 난 언제나 그를 옆구리에 끼고 살았습니다.”
참으로 공감가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져보니 참사랑은 우리를 더욱 깊은 결속, 더 긴밀한 일치, 더욱 활발한 친교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가장 완벽한 일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된 친교가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느님께서는 서로 간에 오고 가는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던지 철저하게
한 몸이 되셨습니다.
아무리 기를 써도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딱’ 붙어 계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견고하고 튼튼한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계십니다.
결국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한 가지입니다.
미움의 사슬을 끊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분열의 고리를 끊고 서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단절의 벽을 넘어 서로 활발히 소통하는 것입니다.
성역(聖域)이란 말이 있습니다.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구역’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의 두드러진 경향 가운데 하나는 성역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것입니다.
호기심 많은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 호기심을 해소하고자 기를 씁니다.
모든 것이 다 파헤쳐지고, 낱낱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해서는 예외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라고 해도, 아무리 난다긴다 하는 대과학자라고 해도 아직도 명확하게 하느님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합니다.
호기심을 안고, 정복욕을 지니고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분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십니다.
결국 그냥 우러러 보기만 해도 행복한 분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너무나 큰 산이기에 겸손하게 그 앞에 승복해야 될 분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십니다.
그저 겸손하게 그분 앞에 서서 찬미와 영광, 무조건적 믿음으로 사랑을 드려야 할 분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연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경탄의 대상이십니다.
하느님은 호기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믿음의 대상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등장인물 가운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 앞에 그저 열심히 경배와 감사와 찬미를 드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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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6-18).”
1) 성모님의 예수님 잉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성모님의 예수님 잉태는,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과 예수님이 분명히 구분되어 있어서, 각각의 일을 하신 일로 보이지만, 사실 그 일은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메시아 강생이라는 하나의 일을 함께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서 그것을 온 삶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일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드러냅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1-22)”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와 성령이 함께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류 구원 활동은 예수님 혼자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이 함께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일에 참여하는 생활입니다.
<그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니 ‘나의 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3-16).”
신앙생활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누구나, 의식을 하지 않더라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와 사랑에 동참하고 있고, 성부, 성자, 성령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모든 신앙인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고, 자신의 삶으로 그 신비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일러둡니다.
하느님의 영에 힘입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할 수 없고,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3-7).”
바오로 사도가 성령, 주님, 하느님으로 구분해서 말한 것은 삼위일체를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도우심과 예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모른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당신을 삼위일체이신 분으로
계시하셨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사랑하니까.”입니다.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보살피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 안에서 항상 살아 계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의 사랑이, 셋으로 구분되면서도 하나인 사랑이라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성체성사처럼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이 말에서 ‘알다.’는, ‘일치를 이루다.’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묵상할 때, ‘삼위’보다는 ‘일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은 삼위일체의 ‘사랑의 일치’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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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3,16-18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수록, 그들 사이의 사랑이 깊을수록 성격이나 습관 뿐만 아니라 얼굴 모습까지 닮아간다는 뜻이지요. 이는 단순한 ‘속설’이 아니라 심리학, 생물학적 연구를 통해 입증된 ‘사실’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과 일치하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 함께 웃고 우는 감정의 교류를 통해 인상이 비슷해지고, 함께 있을 때 호흡과 심박 수가 같아지며, 식성이나 취향은 물론 심지어 면역체계까지 서로를 닮아가는 겁니다. 유한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끼리 이처럼 서로를 닮아간다면, 무한하고 완전한 사랑을 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은 어떨까요? 단순히 닮는 정도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를 이루고 계시지 않을까요? 오늘은 그런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이루고 계시는 일치는 서로의 존재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말하듯,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자유롭게 해주어 서로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고유한 위격을 온전히 간직하신 상태에서 하나로 일치해 계십니다. 즉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이루고 계시지요. 그리고 외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그 사랑의 일치 안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오늘의 전례독서에서는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구체적 특성들을 하나씩 살펴보게 됩니다. 먼저 제1독서인 탈출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구름에 싸여 시나이산으로 내려오셔서 모세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누구신지 그 ‘이름’과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그 ‘본성’을 알려주시지요.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삼위일체 사랑의 첫번째 특성은 ‘함께 있음’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와 함께 있고 싶은 것이 당연한 마음이지요. 하느님은 모세를 사랑하셨기에 그와 함께 있기 위해 시나이산으로 내려오셨고, 모세 또한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자기와 함께 있어 달라고 그분께 청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함께 있으면서 친교를 맺고, 그 친교가 깊어져서 내 안에 그가 그 안에 내가 살아가며, 마침내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완전한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과정인 겁니다.
하지만 서로 완전히 ‘하나’가 된다고 해서, 그 하나가 되기 위해 나라는 존재가 무시되거나 사라지는게 아니지요. 상대방과 내가 서로 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는 와중에도, 나와 상대방은 서로 분명히 구분되며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상태로 존재하는 겁니다. 이런 어찌보면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두가지 상태가 어떻게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가톨릭 교회에서는 ‘본체’(Substance)와 ‘위격’(Persona)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본체란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신적 존재를 가리키고, 위격은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 드러나는 세가지 서로 다른 지위, 즉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키지요. 성부, 즉 창조주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모든 것의 근원이시자 시작이며 마침이신 분입니다. 또한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당신 뜻대로 섭리하시는 분입니다. 성자, 즉 구세주께서는 성부의 뜻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분입니다. 또한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끄시기 위해 직접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분입니다. 성령, 즉 성화주께서는 우리가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 즉 사랑과 순명의 관계 속에 머물도록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 뜻에 맞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식별하고 따라가도록 곁에서 함께 하시며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대충 뭉뚱그려 사랑하시지 않고, 성부께서는 사랑으로 성자께서는 은총으로 성령께서는 친교로 우리와 함께 하시어 우리가 그 다채롭고 충만한 사랑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신다는 걸 알려주지요.
삼위일체 사랑의 세번째 특성은 더 친밀한 관계일수록 그 사랑이 주는 행복이 더 커진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면 그에게 나의 소중한 것을 내어주어야 하지요. 나에게 정말 소중한 것을, 얼마나 내어주느냐에 따라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진심’이 드러나고, 상대방이 그 진심을 알아보고 나를 온전히 신뢰하여 마음을 열게 되면 그와 나 사이의 사랑이 더 깊어지게 되는 겁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것을, 당신께서 친구로 여기시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 헌신적 사랑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보고 느끼며 깨달음으로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더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뢰와 사랑이 깊어지면 우리는 삶이 주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충만하게 누릴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느님 나라에서 언제까지 그분과 함께 하게 되지요.
그러니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즉 삼위일체라는 사랑의 신비를 이 세상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사랑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그러니 성령께서 이끄시는대로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와 사랑의 친교를 맺음으로써 평화를 이루어야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을 나 혼자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 하느님 뜻에 맞게 사용함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큰 사랑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기쁘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내가 사는 세상을 행복과 평화가 가득한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가야겠습니다. 그것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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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무한한 사랑
부활 시기가 끝난 뒤, 교회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 축일을 지내며 연중 시기를 시작합니다. 이 신비는 모든 신비의 근원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인류의 역사와 우리 각자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모든 신비의 근원입니다.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었고, 마침내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행복에 이르며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완전한 사랑 안에서 서로를 내어 주시고 받아들이십니다. 끝없는 사랑의 흐름 속에서 그 사랑은 더욱 풍성해져 모든 피조물에게 흘러갑니다.
인간은 죄를 짓지만 하느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인간은 배반하지만 하느님은 끝까지 신실하십니다. 한 번 약속하신 것은 영원히 지키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첫 번째 계약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더욱 크고 귀한 두 번째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첫 번째 계약이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계약이었다면, 두 번째 계약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계약입니다. 첫 번째 계약은 짐승의 피로 맺어졌지만, 두 번째 계약은 하느님 아드님의 거룩한 피로 맺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이성으로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면 하느님은 인간을 찾아 나서고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버리면 하느님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십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고통을 드리지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복을 주십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죽음으로 몰아가지만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복음 15,13)
수천 년이 지나도록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외아들을 내어 주심으로써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을 깨닫고 응답하여 참된 행복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따라 살고,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삶이며,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친교를 이루는 삶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완전함을 추구하고, 서로 격려하며, 한마음으로 평화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돌아가고, 인간 삶의 궁극적 목적에 도달하게 됩니다. 곧 생명에 이르고, 사랑에 이르며, 영원한 행복에 이르게 됩니다.
오, 지극히 높으신 삼위일체의 신비여!
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이여!
생명과 사랑과 행복의 원천이신 주님께 영원한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완전한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루셨습니다. 나 또한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 지 돌아보십시오.
2. 우리의 삶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어 결국 하느님께로 돌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지금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길은 정말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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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의 생명은 이미 우리 것이며, 앞으로 더욱 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위 그림은 안드레이 루블료프(1360–1430)의 그 유명한 "삼위일체" 이콘 그림입니다!
이 이콘을 보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세 위격께서 조화롭고 평화롭게 한 식탁에 둘러앉아 계시는데, 성화의 선들이 세 위격의 일치와 서로를 향한 현존의 방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원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인 식탁에는 잔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상징과 암시가 놀라울 만큼 아름답게 사용된 모습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면 깊숙하게 존재하는 지극히 거룩한 사랑의 나눔(주고받음)을 암시하는 모습입니다.
이 이콘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이듯 너희도 서로 하나가 되어라."(요한 17,21) 하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이 식탁에는 빈자리가 하나 남겨져 있는데 이는 이러한 초대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 주일은 성령 강림 대축일로서 부활 시기의 전례가 마무리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인 오늘 우리는 세 위격을 모두 모시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고, 이 바라봄 안에서 그리스도교 계시의 깊이를 헤아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 범위는 헤아릴 수 없이 광대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놓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방향을 향하든 위로는 성부, 우리 곁에는 성자 예수님, 우리 안에서는 성령께서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그 광대한 현존 안에 감싸여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에서 바다를 찾는 물고기처럼 말입니다. 바다는 위에도 있고, 둘레에도 있고, 그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지닌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종교를 무시하거나 멸시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들을 분별하라"(1코린 12,10)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하느님에게서 오는지를 식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영은 세상만큼 넓고—세상보다 더 넓습니다. 달리 말해, 우리의 믿음은 모든 것을 포용하며 삼위로 일체를 이루시는 완전한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시 주님 안에서 삼위일체의 내적 생명 안으로 초대되고 이끌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식탁에 있는 그 빈자리에 앉도록 부름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부께서는 목적지이시고, 예수님은 그 길이시며, 성령은 그 길을 따라 나아가도록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는 내적 충동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 하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5세기에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말씀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그분은 '이끌다'가 아니라 '끌어당기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강권'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 가해지는 것입니다…. 믿으면 오는 것이고, 사랑하면 끌어당겨지는 것입니다. 거칠고 불편한 폭력을 떠올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부드럽고 달콤합니다. 바로 그 달콤함이 여러분을 끌어당깁니다. 굶주린 양에게 신선한 풀밭을 보여주면 그 양이 당연히 끌려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양이 억지로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욕구에 이끌려 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께 옵니다. 먼 길을 상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믿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오고 그 자리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어디에나 계신 분께는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는 것입니다."
삼위일체께서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는 삼위일체 안에 살아갑니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경험하는 방식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결코 이 진리를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생명은 이미 우리 것이며, 앞으로 더욱 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시는 분은 바로 당신 내면 안에서 완전한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계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요한 14,10)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도 역시 그분의 몸이기에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라고요....
세상살이는 여전히 고되고 험난합니다. 하지만 이 험난하고 고된 여정에 언제나, 영원히 함께해 주시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생명 안으로 초대해 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우리와 더불어 계시기에 우리는 여전히, 아니 영원히 안전합니다!
성녀 클라라가 죽음을 앞두고 자기 영혼에게 한 말을 함께 나누며 오늘 복음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동정녀는 조용히 자기 영혼에게 말했다. '불안스러워 말고 떠나거라, 너의 여행길에 좋은 호위원이 있다.' 이어서 타일렀다. '떠나거라, 너를 만드신 분이 너를 거룩하게 하셨다. 어머니가 자기 아이에게 늘 그랬듯이 그분은 너를 감싸시면서 너를 온화하게 사랑해 주셨다.' 그리고 말했다. '오! 주님, 당신께 축복이 있으소서! 저에게 생명을 주신 당신이시여!'"(첼라노의 토마스에 의한 성녀 클라라의 전기 4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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