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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들
출 35:20-29
20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 앞에서 물러갔더니
21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22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
23 무릇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이 있는 자도 가져왔으며
24 은과 놋으로 예물을 삼는 모든 자가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며 섬기는 일에 소용되는 조각목이 있는 모든 자는 가져왔으며
25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빼고 그 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을 가져왔으며
26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 털로 실을 뽑았으며
27 모든 족장은 호마노와 및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왔으며
28 등불과 관유와 분향할 향에 소용되는 기름과 향품을 가져왔으니
29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
출 35:20-29 / [백성이 성막 재료를 바치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듣고 물러갔다. 21) 그런 다음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여호와께 물건을 바쳤다. 곧 성막을 짓는 데 쓰일 여러 재료와 제사장의 옷을 짓는 데 쓰일 갖가지 재료들을 헌물로 가져와 여호와께 바쳤다. 22) 여자와 남자를 막론하고 금단추와 금귀고리와 금가락지와 금목걸이 등 갖가지 금붙이를 여호와께 기꺼이 바쳤다. 이렇게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다. 23) 또 자줏빛 털실과 붉은빛 털실과 진홍빛 털실과 고운 베실과 염소털과 분홍물 들인 숫양 가죽과 돌고래 가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여호와께 예물로 바쳤다. 24) 은과 놋쇠를 헌물로 바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여호와께 바쳤으며 제사 기구를 만들 때 쓰이는 아카시아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여호와께 가져와 바쳤다. 25-26) 길쌈을 하는 일에 재간이 있는 여자들은 자줏빛 털실과 붉은빛 털실과 진홍빛 털실과 고운 베실을 손수 짜서 여호와께 바쳤다. 27) 각 지파 우두머리들은 에봇과 가슴받이를 장식하기 위하여 끼워 물릴 홍옥수를 비롯한 보석류와 28) 등잔 기름과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름과 좋은 냄새를 피우는 데 쓰일 향에도 넣을 발삼향과 기름을 가져와 바쳤다. 29) 이렇듯 속에서 여호와께 바칠 마음이 우러나오는 모든 남녀가 여호와께서 모세를 시켜 명령하신 대로 필요한 물품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갖다 바쳤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 건축을 위하여 자원하여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이에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헌물에 동참합니다.
자원하여 드린 예물(20-24)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성막 건축을 위한 헌물을 마음이 감동된 자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렸으며(21), 원하는 남녀(22)들은 모든 종류의 금 고리와 보석을 가져왔습니다(22). 염소 털과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금, 은, 호마노까지 하나님 앞에 기쁜 마음으로 헌물로 드렸습니다(23-24).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자의 역량에 따라 자신이 갖고 있던 각양의 물건들을 하나님께 바쳤으며,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성막 건축에 필요한 실을 짜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자세는 다른 사람들의 방법을 배척하지 않고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롬 8:28). 출애굽 이후 지금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제일주의로 섬겼던 경우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지금과 같이 하나님 중심주의로 계속 살았다면 선민의 이념과 출애굽의 목적은 성취되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원하여 드리는 예물(25-29)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기 위하여 금품을 바쳤던 것(출 32:24)을 회개하고 자신들의 물품을 성막 건축을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 남녀 빈부의 구별 없이 한 마음으로 헌물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서 하나님의 전을 재건할 때에도 동일한 모습으로 헌물하였습니다(스 2:68-69). 이처럼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께 최선을 다하였으므로 칭찬을 받았지만(요 12:1-8),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을 속인 헌신이었기에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행 5:1-11).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은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신 6:5). 그럴 때만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영육의 풍족한 삶을 영위하게 하실 것입니다(신 6:11).
적용: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헌신은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지 않고, 몸과 마음이 거룩히 구별하여 드려져야 합니다. 당신은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은 정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내 마음을 정하여 삶을 살아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세상의 일, 사람의 일, 자연의 일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확실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 어떤 상황이 닥칠지라도 당황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 설 교 >
지혜로운 마음
출 35:20-29 / 이동휘 목사
1. 모세가 시내산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타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상하다. 어째서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가? 한번 가서 봐야겠다.’ 하고 가까이 가자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하나님께서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신을 벗어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세를 부르신 목적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출3:7-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이 산’, 곧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모세가 애굽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해달라며 민족 해방을 요청합니다.
(출5:1-3)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 하리라.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러나 애굽 왕 바로는 ‘나는 네가 말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보낼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재앙들을 애굽에 내리기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장자 죽음의 재앙을 애굽 전역에 내려 바로 왕의 장자까지 죽음을 당하게 되자 그제서야 모세를 불러 애굽에서 떠나 너희 말대로 가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출 12:31)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이렇게 해서 애굽에서 해방되어 시내 산에 이르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처소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광야생활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풀 한 포기 없고 마실 물 한 모금 없는 광야 사막, 낮에는 폭염이 작렬하는 열사(熱沙)의 광야, 그리고 밤에는 혹한(酷寒)이 감도는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광야 생활에 ‘성막을 지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가장 중요한 증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광야 ‘성막’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 그들과 함께 하시는 증표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광야 여정에 ‘성막’이 구심점이 되어 이동했습니다. ‘성막’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는 예배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삶을 주관하는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막’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설계하시고 모세로 하여금 그 말씀하신대로 짓도록 하셨습니다.
(출39:32)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성막 곧 회막의 모든 역사를 준공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다 행하고
그러므로?성막은?사람의?뜻으로?지은?것이?아니라?하나님의?뜻을?따라?지어졌습니다.?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섬겨야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나님께서 그 ‘성막’을 통해 함께 하시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성막’을 지을 때, “(출35:5)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출35:21)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출35:26)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하신대로 성막 기구들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출35:30-33)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필요한 기술을 고안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여 자원하는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시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시고, 또한 그들에게 성령을 통해 지혜로운 마음을 주시어 ‘성막’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성막’을 짓고자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감동케 하시자 백성들이 너무 많이 가져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출36:3-7)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 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 오는 고로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정지하고 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 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모세가 명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가로되 무론 남녀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정지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
2.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에서 그 삶의 중심이 되었던 ‘성막’은 약속의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는 ‘성전’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더럽혀지자 멸망당했습니다.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새로운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이 ‘성전’을 세우시고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4: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세워질 ‘성전’, 오늘날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마16:15-18)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 고백하자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사망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실 ‘집’, ‘성전’, ‘교회’가 되기 위해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에베소서2:20-22입니다.
(엡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 성령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출35:31)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어 거룩하고 복된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마음’을 주시어 자원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쓰임받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영, 성령이 충만하여 주어지는 “지혜”란 히브리어로 ‘하캄’인데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신앙(믿음)과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선생님이 사과 3개를 두 아이에게 주시고 어떻게 하는지 보셨습니다. 한 아이가 1개 반씩 나누어 먹자고 했습니다. 다른 아이는 두 사람에게 사과 3개를 주신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각각 1개씩을 먹고 나머지 한 개는 선생님께 드리거나 어려운 친구에게 주자고 했습니다. 첫 번째 아아는 소위 “지식형”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이는 “지혜형”의 사람입니다. 만약 서로 각각 1개씩을 먹고 나머지 한 개를 가지고 남에게 팔아서 이윤을 남겨 나누도록 하자고 한다면 그 아이는 “기업형”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두 번째 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많은 사회가 따뜻하고 행복한 사회입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즐겁고 행복합니다.(잠23:15,27:11) 그러므로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의 가정은 즐겁고 행복합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나라의 지도자가 될 때, 나라 백성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칭찬을 받고, 마음이 지혜로운 지도자가 백성의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잠12:8)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그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 입술에 지식을 더하기 때문입니다.(잠16:23)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전10:10) 그러므로 금은보화보다는 지혜를 구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잠8:11,16:16)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무릇 원하는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잠3:13)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욥38:36)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이전에 욥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9:4)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가슴속의 지혜와 총명”은 마음이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지혜를 받지 않고 그 누구라도 형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지혜로운 마음으로 사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지혜로운 사람”은 그 마음이 “오른편”에 있습니다. “오른편”은 하나님의 의와 능력, 보호를 의미하고, “왼편”은 불의와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마음에 맞은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21:5-8)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그 마음이 하나님 우편에 있는 사람은 작렬하는 태양의 열기로부터 피할 곳이 전혀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그늘”, “구름기둥”이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견디기 힘든 밤의 냉기로부터 해를 입지 않도록 삶의 “불기둥”이 되어주십니다. 그의 삶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아 모든 환난을 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으려면, 하나님의 양이 되어야 합니다. 양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사는 사람이 양입니다. 마태복음 25:31-46을 보면,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과 염소를 분별해서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축복하시며 그 축복하시는 이유를 밝혀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이에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 곧 의인들이 “주여, 언제 우리가 주님이 굶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우리가 주님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우리 집으로 맞아들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우리가 주님이 병드신 것을 보고 간호해 드렸으며 갇혔을 때 찾아갔습니까?”(마25:37-39)고 묻자,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양이며, 하나님 오른편에 있는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항상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 마음에 맞는, 하나님 오른편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는 어떤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눅10:30-37)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어 버려졌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 피해 가버렸습니다. 또 한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를 보고 피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 중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상처를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지극 정성을 다해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길을 떠나며 여관 주인에게 가진 돈을 털어주며 강도 만난 사람을 계속해서 치료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만약 치료비가 더 들면 여행에서 돌아와 갚아주겠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율법사에게 물었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식과 분별력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래서 혹시 강도 만난 자가 피를 흘리고 죽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은 시체를 만질 경우 7일 동안 부정(不淨)하다는 율법지식(민19:11,16) 때문에 강도 만난 자를 그냥 피해 지나갔던 것입니다. 이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은 뛰어날지라도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지혜롭지 못한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원하시고 하나님께서 마음에 합한 사람은 바로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식만 갖춘 사람은 절대로 자기 손해 볼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비록 강도 만난 자를 돕는 중 그가 죽어서 율법에 따라 그 시체를 만지게 되어 자신이 부정해진다 해도, 꺼져가는 생명 하나라도 더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불쌍한 사람, 약한 사람, 병든 사람 등에 얼마든지 이웃이 되어줍니다. 그래서 지식이 있는 사람은 똑똑하다는 소리는 들을지 몰라도 존경받지는 못합니다. 인격적으로 덕망있는 사람으로 존경받는 것은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4. 마지막으로,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마음이 깨끗해야만 합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고,(마5:8)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렘17:9) 그래서 잠언4:23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지켜 손을 씻고 음식을 먹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비난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너희 마음 속은 회칠한 무덤과 같으니 겉은 화려하나 속은 죽은 시체 냄새가 가득하다.” 는 말씀으로 책망하셨습니다.(눅11:39-40, 마15:1-20)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을 그릇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그 중에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어떤 것은 천하게도 쓰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그는 주인이 온갖 좋은 일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귀하고 거룩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딤후2:20-21) 삶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이 가장 귀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마음의 그릇이 깨끗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가장 요긴하신 인물, 가장 귀하게 쓰임 받는 행복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금그릇과 은그릇처럼 아무리 학벌 좋고 문벌이 좋을지라도 마음의 그릇이 더러우면 “죽은 파리가 향 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전10:1)과 같습니다. 그러나 값싼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일지라도 깨끗하면, 온갖 좋은 일에 요긴하게 쓰임 받는, 없어서는 안될 귀하고 거룩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담으려고 하면 마음의 그릇이 깨끗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끗한 그릇, 정직한 그릇이 되어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금그릇과 은그릇, 나무그릇과 질그릇 등 모든 그릇을 다 사용하시지만 더러운 그릇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길 원한다면 마음의 그릇을 날마다 닦아야 합니다. 그릇은 닦을수록 깨끗해집니다. 닦을수록 빛이 납니다. 마음이 빛날 때 얼굴이 빛납니다. 마음이 빛날 때 인생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반면에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얼굴이 어둡습니다. 언어가 어둡습니다. 마음이 어두워지면 인생이 어두워집니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마음의 그릇에 좋은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릇과 같고, 마음은 창고와 같습니다. 마음의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그릇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인간의 가치는 마음의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의 그릇에 선을 쌓으면 선한 사람이 되어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계획을 하고, 선한 말을 하고, 선한 일을 도모하게 됩니다. 반면에 마음의 그릇에 악을 쌓으면 악한 사람이 되어 악한 생각을 하고, 악한 계획을 하고, 악한 말을 하고, 악한 일을 도모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5)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마음의 그릇을 깨끗이 해야만 합니다. 마음의 그릇을 깨끗이 하는 길은 오직 예수 믿고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고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죄가 없다며 스스로를 속이면 결코 깨끗함을 받지 못합니다.(요일1:7-9)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하심을 얻을 때,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시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신앙생활로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어 항상 하나님 오른편에 거하는 행복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그릇을 항상 깨끗이 준비하는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어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이 감동딘 자들의 헌신
출 35:20-29 / 이성우 목사
오늘 아침에는 오늘 설교 주제와 연관된 동영상을 잠깐 보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동영상의 내용은 안양에 있는 안양감리교회 임용택 목사님의 몇 주 전 주일설교 내용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영상 보기)
이제 본 동영상은 얼마 전 우리 교회 성전 건축과 관련해서 선교비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여러 교회에 보냈는데,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안양교회 임용택 목사님이 주일 낮 예배 설교 시간에 때마침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시의 적절하게 도착한 우리 교회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는 그 편지의 내용을 설교의 결론 부분에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이 설교를 듣고 나서 안양감리교회 여러 명의 성도들이 성전 건축을 위한 헌금을 모아서 몇 일전 저에게 보내왔는데, 1차로 보내온 헌금이 몇 백만 원입니다. 이 어려운 불경기에 정말 예상 밖의 일이라서 제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더 감동적인 것은 헌금을 하신 분들의 명단과 연락처를 받아서 한 번씩 전화를 드렸는데,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들이 ‘목사님께서 이런 일로 직접전화까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무 부끄럽습니다.’라는 말씀들이었습니다. 적지 않은 헌금을 하시고도 너무 조금밖에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어려운 환경 중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가 한결같이 마음에 감동되어서 귀하게 헌신하신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12월의 첫 번째 주일이기도 하지만, 교회 절기상으로는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성탄절과 관련된 절기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것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대강절은 온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의 현장에 구체적이면서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직접 찾아오시는 절기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강절을 보내는 우리들로서는 죄인 된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고도 놀라운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그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뜨겁게 사랑할 것을 결단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사랑의 모습으로 우리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대속의 사랑을 믿음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그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섬기는 일이 더 중요한 믿음의 행동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아침, 우리들이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눈과 가슴으로 확인하고 그 하나님의 가슴 벅찬 사랑에 대하여 우리들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응답할 것을 결단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출애굽기 35장 20-29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성막 건축과 관련된 이제까지의 모든 지시를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중심으로 해서 성막 건축의 대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그들 마음속에 있는 순종과 헌신의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감동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성막 건축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하나님께 드린 감동적인 이야기를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바로 앞부분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고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1-3절까지는 안식일 준수에 대한 명령을 재차 하시고 있는 내용이며, 4-19절까지는 성막 건축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드릴 것을 명령하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본문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같은 의미로 사용된 중요한 표현 몇 가지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표현은 5절 말씀에도 있습니다만, 본문 말씀 중에는 21절과 22절, 그리고 26절과 29절에 몇 번씩 반복적으로 기록되고 있고 36장 7절까지 계속 그 표현이 이어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같은 의미로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는 표현은 이렇습니다. ‘마음에 원하는 자는’,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 ‘마음에 감동을 받아’, ‘마음에 자원하는’이라는 표현입니다. 결국 이 표현들은 한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말씀들을 종합해서 좀 다른 표현으로 말씀드린다고 하면 ‘하나님의 크고도 놀라운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 그래서 그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열정이 있는 사람들은’ 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35장 1-3절까지에 기록되어 있는 안식일 준수에 대한 명령과 성막 건축을 위한 물품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명령하고 있는 중반부의 말씀, 그리고 그 명령을 따라서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예물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 있는 본문의 말씀, 더 나아가서 성막 건축을 위해 몸을 드려 헌신하게 될 일꾼들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는 본문 바로 뒷부분의 말씀 모두가 하나의 의미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사랑의 언약을 맺은 특별한 관계 가운데 있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신앙 고백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준수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언약 관계를 확인하고 지속적으로 그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안식일 준수를 통해서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서 그 사랑을 규칙적으로 확인하게 되었고, 자신들도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을 결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래서 그 하나님을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감으로써 그 관계 가운데서 얻어지는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그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사랑의 만남이 가능해지도록 하는 공간인 성막을 만드는 일에 필요한 물품을 드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며, 그것을 만드는 일에 자신의 몸과 재주를 드려 헌신하는 것을 자원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과 그 안에 필요한 성물들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린 예물들은 자기들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드려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각기 다른 예물을 드렸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공통점은 ‘마음에 감동이 되어’ 기쁜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 헌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드린 모든 예물들은 사실 예물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신들의 마음을 예물을 드려 표현한 것이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기 예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강절 두 번째 주일 아침,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귀한 시간에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여러분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다함이 없는 그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자신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담아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성막 건축에 필요한 갖가지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러분 각자의 형편과 사정에 맞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능력에 따라서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려 헌신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마음을 가진 사람답게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막짓는 인재와 자재
출 35:30 / 임덕순 목사
출애굽하여 광야를 여행하던 이스라엘이 그 광야에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한때 하나님을 등지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다가 형벌로 멸망할 뻔 했던 이스라엘이 결국 성전을 짓기 시작하는 내용이 본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이렇게 해야겠다고 구상하고 결심할 지라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는 착오가 발생해서, 나중에 완성된 것은 처음 구상하던 것과는 영 다르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집 한 채만 지으려 해도 mm단위까지 상세하게 설계도를 그리고 시작해도 설계 변경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고 상황도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성전을 짓는 일은 하나님이 처음에 명령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말씀만 하시면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반복하셨던 것처럼, 이번 성전건축도 그렇게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대로 진행되었고 완공됩니다. 하나님이 손수 지으셨다면 처음에 계획하신 그대로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모세와 백성들에게 시켜서 죄인이요 노예출신이고 경험도 전혀 없는 이스라엘이 시공했음에도,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 한가운데서 공사했음에도 그들은 하나님이 설계하신 성전을 완벽히 지어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들이 광야에서 성전을 건축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어떤 역할을 하셨을까요? 이 일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교회가 비록 죄 많은 세상 속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신 역사를 얼마나 완벽하게 이룰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이 말씀에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성전을 지을 때 하나님이 해주신 몫이 어떤 것이었나 하는 것과,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설계대로 성전을 건축한 일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느냐는 것입니다.
요즘 뉴타운 열기가 다시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뉴타운은 도시를 다시 짓는 공사입니다. 그런데 뉴타운 사업을 하려면 좋은 시공사를 만나야 합니다. 시공사는 자본력도 갖추고 경험도 갖추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기술이 좋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동네 같은 비탈진 곳에 도시를 다시 건설하려면 상당한 기술력을 가진 시공사가 정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건축기술은 거의 세계 최고입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층의 건물은 한국의 기업들이 지은 것입니다. 두바이에 삼성건설이 짓고 있어서 내년에 완공된다는 버즈두바이라는 건물은 높이가 800미터나 되어서 세계 최고층이고, 현재도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말레시아의 쌍둥이 빌딩도 한국 업체가 지은 것이랍니다.
옛날에는 우리나라가 자동차도 만들지 못했는데 요즘에는 현대에서 만든 자동차가 독일의 벤츠와 비교해 보자고 덤빌 만큼 기술이 발전하였고, 현대에서 만든 엔진을 미국의 클라이슬러나 일본의 자동차 회사에 수출한다고 합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최고층 빌딩을 짓고 세계 최고의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공대를 졸업한 사람이라고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연구와 실험과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본문에는 성전을 짓는데 그 일을 맡을 두 사람의 기술자를 소개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이름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으로 설명해주신 설계도를 현실화시키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규격과 모양대로, 하나님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거룩한 성전을 지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자재를 공급하였습니다.
그들이 자재를 얼마나 많이 가져오는지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았고, 물건을 받아서 쌓아놓는 데에도 일손이 모자랄 정도가 되어서 감독관들이 모세를 찾아와서, 백성들이 물건을 너무 많이 가져오기 때문에 본 공사를 할 수가 없으니, 제발 그만 가져오도록 광고 좀 해달라고 부탁해서 그만 가져오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부러운 이야기입니다.
지도자와 백성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성전의 전체적인 설계를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말로 설명하여 주었고, 백성들은 그들이 무엇이든지 필요한 대로 쓸 수 있도록 얼마든지 물건을 대 주었으며,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활용해서 공사를 진행하되 기술자들을 양성하여, 그들과 함께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전과 기구들을 아름답고 거룩하고 정확하게 만들어 냈습니다.
이 일에서 하나님은 어떤 역할을 맡아서 어디까지 해 주셨을까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전을 지으라는 명령과 설계도를 주시고 일할 사람을 지명해 주신 다음에, 그들에게는 그 일을 해낼 지혜를 주시고, 그뿐 아니라 광야에서도 성전을 짓도록 자재를 이미 맡겨두셨고, 또 바치고 싶은 마음까지 주셔서, 감당할 수없을 만큼 바치고 또 바치는 특이한 현상까지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공사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주시고 다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셨다면, 무책임하게 저 멀찌기 뒷짐 지고 계시면서 어디 잘하나 못하나 보자하고 지켜보시다가, 잘못하면 징벌을 내리고 잘 하는 경우에는 칭찬 한마디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명령에는 그분의 강력한 의지와 손길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왜냐 하면, 성전이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가장 크고 가장 비싼 건물이어서 그 일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비록 규모로는 작을지라도 그 성전이 하는 일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멸망할 죄인을 하나님께 소개시켜 만나게 해주고, 그들의 죄를 어떻게 사함 받고 진노의 대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바뀔 수 있는지를 가르치며, 그 일을 이루실 그리스도와 그가 하실 일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믿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우리 구주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이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얻는 곳이며, 믿는 사람들이 한 몸으로 교제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고 제사하여 사죄 받는 성전을 짓는 일이 구약시대에는 대단히 위대한 일이었고, 신약시대에는 죄인들에게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하고, 그의 마음 안에 예수님을 모셔서 그 사람 자체가 성전이 되게 하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을 모아 하나의 단체로 만들어, 주님의 몸 노릇을 하는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이 그렇게 위대한 일인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성전건축은 예배당 짓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를 믿도록 전도해서 그들 마음 안에 예수님의 영을 모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모아서 이 땅위에서 주님의 몸이라고 일컫는, 주님을 대신하여 일할 교회라는 조직을 만드는 일입니다. 무엇이든지 주님이 시키시면 즉시 이행할 수 있는 활성화된 교회를 만드는 것이, 오늘 우리가 지을 수 있는 성전입니다.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그들의 마음 안에 주님을 모심으로 그가 성전이 되게 하는 일이나, 성도들을 응집력 있는 신앙의 공동체가 되게 하여 목숨 걸고 주님의 일을 하는 교회가 되게 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신약시대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주님의 손과 발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믿는 사람 하나하나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받들어 주님의 몸으로서 일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성전건축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도하는 일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고 이 시대의 성전건축입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예수 모르던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그들로 믿는 사람이 되게 하고, 그들로 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주님의 몸으로서 살아가도록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의 대다수 교회나 선교사들은, 몇 년이 가도 전도는 한 두 명도 못하고서 몇 천만원 들여서 텅 빈 예배당 건물 몇 개 지어놓고는, 교회를 몇 개 세웠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선교사가 철수하고 나면 교회라고 했던 텅 빈 건물은 나중에 무엇이 될지도 모를 주인 없는 건물을 덜렁 지은 것일 뿐입니다. 이 시대의 성전건축은 사람을 전도해서 그의 마음안에 성전을 짓게 하는 전도입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우리 한가람 성도들은 전도에 최선을 다합시다.
사람을 지명하여 주심
모세는 성전을 지으라는 명령과 성전의 설계도를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에 그의 머릿속에는 “아, 이런 건물을 이렇게 지으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구체화 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건축학에 대한 기본지식은 배운 것이 있었겠지만 그의 직업이 목수나 건축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구체화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솔로몬처럼 외국에서 기술자를 구해 올 수 있는 처지도 못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광야 한가운데 있었고, 거기서는 돌과 모래는 얼마든지 있지만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은 어디서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설명해주신 그 건물을 지을 줄을 모르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여기서는 아무리 돈이 많다 할지라도 기술자를 구할 수도 없고 또 돈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 특별한 건물을 짓는 기술자를 구한단 말인가? 고민했을 것입니다.
마치 수 만 명의 사람들이 먼 들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하루 종일 듣다가 해가 저물어서, 그들에게 무엇인가는 먹여야 했을 때,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말씀하셔서 황당했던 그런 상황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주님께 이렇게 항변하듯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이 사람들을 먹이려면 500데나리온 이라는 돈으로도 모자라겠고, 지금 우리에겐 돈도 없을 뿐 아니라, 돈이 있다고 해도 여기는 빈들이라 구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그때의 상황과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고민하고 있던 모세에게 하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내가 내 영을 부어주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주어 그 일을 하게 하였으니 그들을 찾아서 그 일을 맡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그 말씀을 전해줍니다. “볼지어다. 유다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며,... 또 그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 35장 30-35절의 말씀입니다. 36장 1절에도 나옵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심을 입은 자들은 여호와의 무릇 명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라는 말씀이나, “할 줄 알게 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기술을 주입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가서 외국에서 특수 기술자들을 불러 오게 하신 것이 아니라 광야에 함께 머물고 있는 그 백성들 중에서 사람을 지명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영과 재능과 지혜를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기술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오게 하시거나, 그들을 부를 수 있도록 피라밋 등 건축경험이 있는 기술자들이 많이 있는 애굽 근처에서 그런 명령을 하시지 않고, 기술자를 아예 구할 수없는 광야 한가운데서 그 정교한 일을 하라고 하셨을까요? 그리고 왜 경험 없는 사람들을 지명하고 그들에게 지혜와 영을 부어주시어 해보지 않은 일을 하게 하셨을까요?
애굽에서 불러온 최고의 기술자라면 애굽은 우상숭배의 나라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우상의 신전을 지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모세가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성전의 설계도를 설명해주면, 그들의 머릿속에는 당연히 애굽에서 지어보았던 신전과 그 건축 방식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가진 생각대로 해석해서 애굽의 신전과 비슷한 건물을 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동원할 수 없도록 광야 한가운데서 성전을 짓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의 설계도를 친히 말씀해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성전은 세상의 신전과는 다르게 지어야 합니다. 성전은 인간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것인데,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에게 선행이나 공로를 세워서 그것을 디딤돌 삼아 신에게 가라고 가르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근본이 악함을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어 대신 죽게 하시고 그를 믿어야만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아이디어로 만든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의 종교와는 영 다릅니다. 그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자기의 경험을 내세우고 습관대로 해서는 안 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세상 경험이 많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도 잘 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경험이 없더라도, 나 같은 사람이 일을 잘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과, 한 말씀도 놓치지 않고 순종하려는 조심스런 자세로 해야만 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성전을 지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지만, “이 거룩한 일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일을 잘못하면 어쩌나.”하는 순수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사람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주님,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데 도대체 무엇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어요? 오백 데나리온의 돈이 있다고 해도 여기서는 살 곳도 없어요.”라고 하던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셨지요? 그래서 “도대체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야.” 하면서 찾아보니까, 거기 오병이어를 도시락에 담아온 아이가 있었지요?
안드레가 그것을 주님께 가지고와서 “이것은 너무 적은가요?” 라고 물었지요? 그때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들을 50명씩 100명씩 둘러앉게 해라.” 하시고 그 보리떡을 들고 기도하신 후에, “이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먹게 하라.”하시자, 그때 기적이 일어나서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다 배부르게 먹고도 남았지요?
하나님은 언제나, 밖에서 무엇을 가져오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다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찾게 하시고 “이런 게 내게 있었구나. 이 때 쓰라고 이것을 내게 주신 것이었구나.” 하고 바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적을지라도 바치면, 나머지 부족한 것은 주님이 다 채우셨습니다.
사람의 능력도 그렇습니다. “아, 나 같은 것을 이때에 이 교회를 섬기라고 여기에 보내셨구나. 아, 내 사명이 성전을 건축하듯이 이 시대의 성전인 사람들을 구원하고 교회를 잘 섬기라는 것이구나. 주님 제게 이런 것이 있었네요. 그게 주님이 주신 것이네요. 지금 이것이 필요하신가요? 하나님이 주셔서 제게 있는 것, 이것을 드릴게요.” 이렇게 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이미 다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것과, 사는데 필요한 것은 이미 다 주셨습니다. 성전을 지을 자재들도 다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찾아보면 다 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진흙을 이겨본 경험뿐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니까 정교하게 성전을 짓는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몸도, 사람의 재능도, 지혜도, 바칠 물건도, 그것을 바치고 싶은 헌신의 마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하신다면, “하나님, 저는 경험도 없고 능력도 없고 돈도 없는데요.” 라고 대답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찾는 눈이 어두웠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부요하심을 바라보는 믿음이 부족했어요.” 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찾는 자세와, 순종하는 자세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주신 사명과 재능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발견하려 하지도 않고 불평이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면 안 됩니다. 나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왜 주셨는지, 찾고 물으며 경험이 없어도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지혜와 세상일을 하는 지혜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은행원이라고 해서 교회재정을 다 맡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일의 성격이 다릅니다. 세상의 일은 예산이 있어야만 일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일이 꼭 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면 예산이 없더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물질을 채워주십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재정은 합리적인 계산으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관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행에서 실력을 기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없고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교회의 재정을 맡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없고 계산만 잘하는 은행원이 교회재정을 주관한다면 목사님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사사건건 가로막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세상의 경험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성령 충만을 받으면 아주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없고 생명을 부지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광야 한 가운데서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하셨는데,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감당할 수없는 버거운 명령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책임한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명령을 순종할 모든 것을 이미 주셨습니다. 자재는 물론이고 그 자재를 바치고 싶은 마음도 주셨고, 기술을 가진 사람도 주셨습니다. 물론 그 성전의 설계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유와 그것의 계획까지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은 100% 하나님의 작품이었고 사람들은 믿음으로 순종만 했더니 그 광야에서 멋진 성전이 건축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도 몸도 시간도 재능도 살아가는 환경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의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처절하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고 교회로 모아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이 주도하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그분의 뜻대로 오늘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선하신 일이 내게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고 순종하며 따르는 삶을 우리가 오늘 여기서 충실하게 살아갑시다.
216장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 버리신 그 사랑 고마워라
내 머리 숙여서 주님께 비는 말 /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이런 결심으로 날마다 한 걸음 한 걸음 주님께 순종하며 헌신하며 살아갑시다. 이것이 가장 보람 있는 삶이요 행복이요 능력이 될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
출 35:30-36:7 / 곽창대 목사
요 약
시내산으로 올라간 모세가 아무 소식이 없자, 모세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존재가치가 상실된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성막 제작을 앞두고 그들은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하였을까요?
첫째, 상황이 변화를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변화를 자극하는 기회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장소는 시내 광야였습니다. 광야는 우리의 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믿음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함께 걷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물론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성막을 지으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한 백성 공동체가 되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이처럼 광야는 놀라운 변화가 가능한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도피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함께 걸어야 합니다.
공동체가 변하려면 기다림도 필요합니다. 기다리며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강림의 약속을 믿고 함께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모였던 곳은 배척과 고난의 현장, 광야였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오순절에 약속대로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집중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이 분명하기에 믿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기다리는 시간 가운데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응축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기대하고 기도하고 기다릴 때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합니다.
둘째, 같은 목표로 공동사역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사역이나 과업 없이는 성숙이 불가능합니다. 사역을 통하여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도 바르게 형성되고 성숙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과제는 성막 건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러한 공동사역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함께 일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은사와 재능에 따라 효율적으로 배치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역에 배치된 일꾼이 그 분야에서 맡은 일을 잘하려면 자질과 능력이 계속 배양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세우려면 말씀의 사역자들이 성도들을 바르게 양육해야 합니다(엡 4:11~12). 또한 하나님께서 맡기신 공동사역을 하려면 반드시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질서를 무시하면 공동체가 깨어집니다. 교회의 조직이나 질서는 방해거리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들을 하나로 엮는 좋은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장로교회는 당회가 지도력을 발휘하는 집단지도체제입니다. 당회는 교회의 모든 사역이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진행되도록 세밀하게 살피고 지도하는 일을 합니다. 당회원은 그 직무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부서들은 당회를 존중하고 중요한 사안들을 당회에 제출하여 협력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며 그로써 공동체가 성숙하게 됩니다. 질서는 공동체 건설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사역과 조직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창의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셋째, 공동사역을 완수했기 때문입니다. 7개월 동안의 수고와 협력으로 성막이 광야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가운데 공동체도 그만큼 성숙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새로워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은 근원적인 힘과 놀라운 변화의 동력은 성령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럴 때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과 백성들의 뜨거운 헌신이 뒤따랐습니다.
7개월의 공동사역으로 성막이 완공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충만했습니다(출 40:34~35). 바로 이런 교회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최고 소원은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영광스러운 삼위 하나님을 반영하는 가족과 같은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엡 5:27). 이것이 우리교회가 영구적으로 품어야 할 비전입니다.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서 경험한 그 놀라운 변화를 우리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셔서 가정과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하나님의 성숙한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전 문
오늘의 본문은 성막을 건축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준비하고 헌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성막 건축을 위해 하나님께서 몇몇 사람들을 특별히 뽑으셨는데 그들은 전심전력하여 헌신했습니다. 백성들은 성막에 필요한 재료들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너무 풍족하여 그만 가져오라고 모세가 명령했습니다. 이처럼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에 한 마음이 되었고 한 몸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참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40년간 광야생활을 했는데 그 광야생활을 다루고 있는 책이 출애굽기와 민수기입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살펴보면 지금 이때만큼 성숙하고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로 구약성경 가운데 최초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0-50일 전만해도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간 모세는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리다가 지쳤고 여기저기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생겼을 것이 분명합니다. 백성들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사기를 높이는 방안을 속히 만들어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에 애굽에서 보았던 이교도의 축제가 생각났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제사를 드린 후에 먹고 마시고 춤추고 문란한 성행위까지 이어지는 광란의 축제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와 비슷한 축제를 벌이면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즉시 시행했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향해 자기들을 애굽에서 구출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인도할 신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게 화가 나셨습니다. 이들을 진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존재가치가 상실된 공동체였습니다. 망해야 할 공동체였습니다.
이런 백성들이었는데 40-50일 후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성막 제작을 앞두고 그들은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하였을까요? 크게 세 가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변화와 상황의 관계
변화와 사역(과업)의 관계
외적 변화와 내적 변화의 관계
1. 변화와 상황의 관계
먼저 변화와 상황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시공간적 배경이나 상황은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변화의 필요성을 자극하는 기회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장소는 시내 광야였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존의 위협을 주는 장소요 미래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키는 장소였습니다.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하나는 자구책을 강구했습니다. 좀 전에 얘기했듯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백성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믿음의 반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발견한 진리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만이 광야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며 그리할 때 광야는 하나님의 축복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아주 좋은 장소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광야는 우리의 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믿음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의 임재와 신비를 경험하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를 만날 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광야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믿음의 걸음을 걸을 때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경험합니다. 그러하기에 성도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도피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광야를 당당히 걸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광야에서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게 됩니다. 이것이 광야에서 체험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18세기 중엽의 훌륭한 신학자요 미국의 부흥운동의 기수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영적 성장을 위한 광야체험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를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시기 전에 그를 광야로 내몰아 그곳에서 자신의 영적인 빈곤과 헐벗음, 무력함과 비참함, 곤고함과 어두움을 발견하게 하고 자신 안에 은폐되어 있는 사악한 죄성을 드러내신다.”
광야는 우리의 교만과 정욕과 야심이 죽어 묻히는 땅입니다. 또한 광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발휘할 때 부활을 경험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함께 길가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자신은 물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를 걷게 하신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시고 그들을 당신의 한 백성 공동체로 세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놀라운 변화는 문제 많은 이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고통이 가중되는 광야일수록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맞닥뜨리고 있는 광야 같은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놀라운 변화를 기대하십시오!
믿음으로 반응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성막건축이었습니다. 광야에서 튼튼하고 아름다운 성막이 세워진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것을 미리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같은 기적이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손으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만든 것 이상으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한 백성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 변화야말로 획기적인 변화입니다. 그 놀라운 변화가 광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광야는 놀라운 변화가 가능한 장소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광야야말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야 할 장소입니다. 놀라운 변화가 없이는 그 누구도 광야에서 생존할 수 없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생존하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배척과 고난의 현장이었습니다. 광야였습니다. 그러하기에 그곳에 먼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 변화의 원동력이 바로 성령님의 강림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 강림의 장소가 광야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광야 없이 신앙성장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들로 연단하시기 위해 자주 광야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도 적극적으로 광야로 들어서는 믿음의 모험이 필요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신앙성장을 위해 광야체험을 추천합니다. 가끔은 일상의 편안함에서 벗어나 불편이 예상되는 곳으로 혼자서 혹은 가족이나 목장식구들과 함께 떠나보십시오. 안전을 추구하기 보다는 모험과 도전의 기회를 만들어보세요. 그럴 때 믿음이 한 단계 새로운 차원으로 성장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데에는 타이밍도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놀라운 변화에는 40일간의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온 기간이 40일이었습니다. 모세가 첫 번째 시내산에 올랐을 때도 그들은 같은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같은 40일이었지만 그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일간 모세를 기다리면서 무엇을 했을까요? 성경은 침묵하지만 쉽게 상상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자욱한 시내산을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기를 학수고대했을 것입니다. 일상의 삶을 살면서도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번에 제자들에게 성령강림을 약속하셨습니다.
(행 1:4-5) 『[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제자들은 이 약속을 믿고 함께 모여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그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시내 광야에서 모세를 기다렸습니다. 40일이 되었을 때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써주신 십계명 두 돌판을 가지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은 하나님의 광채로 빛났습니다. 40일간의 기다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지도력에 온전히 순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후 7개월 동안 시내 광야에 더 머물면서 성막을 제작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공동체의 놀라운 변화에는 기다림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다림의 시간에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이 분명하기에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 기다림은 믿음의 기다림이요 의미 있는 기다림입니다. 그 기다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기다림이 아니라 일어날 일을 믿음으로 기대하고 기도하는 기다림입니다. 그렇게 기다릴 때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응축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기대하고 기도하고 기다릴 때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변화와 상황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상황은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변화를 자극하는 기회요인이 될 수 있음을 말씀 드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광야 같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대신 믿음으로 그 광애를 돌파하시기 바랍니다.
2. 변화와 사역의 관계
역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놀라운 변화는 같은 목표를 갖고 공동사역에 참여할 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역(과업)은 변화를 일으키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밭을 일구려면 쟁기가 필요합니다. 쟁기 없이 밭을 일구기는 아주 힘듭니다. 변화를 효과적으로 일으키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역이나 과업은 우리의 성숙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사역이나 과업이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역이나 과업이 없이는 성숙이 불가능합니다. 사역을 통하여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도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과제는 성막 건축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막 건축을 통해서 달성된 더 중요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성숙입니다. 성막 건축은 하나님 백성 공동체 건설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7개월간 성막을 만들게 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성막을 만드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에서 내려오게 하셨다면 훨씬 더 신비롭고 간단하고 완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짓게 하셨습니다. 설계도면만 주시고 백성들의 손으로 짓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건축 과정에 참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공동체 경험을 하도록 성막 제작의 공동과업을 주셨고 그 과업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도록 조직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성막 제작의 조직표>
하나님: 성막의 설계자, 성막을 제작하는 일꾼들에게 은사와 재능을 주시는 분
모세: 성막 건축의 총감독
브살렐: 성막 건축의 기술 책임자
오흘리압: 성막 건축의 기술 부책임자
마음이 지혜로운 자들: 성막 건축의 기술자들
모든 백성들: 성막 건축의 자재 공급자들
여기서 우리는 공동사역에 있어서 몇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네 가지만 생각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
우리가 동역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일해야 하기 때문에 효율적인 조직도 필요합니다. 효율적인 조직은 사람들을 은사와 재능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할 때 형성됩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교회사역에 기쁘게 참여하신 교우들께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교회사역에 자원하여 섬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지신의 믿음도 성숙해지고 한밭교회도 건강한 공동체로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주고받아야 한다(35:34).
지도자가 맡은 일 가운데 하나는 가르치는 일입니다. 사역에 배치된 일꾼이 맡은 일을 잘하려면 자질과 능력이 계속 배양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누군가가 그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일을 맡은 자가 지도자들입니다.
(엡 4:11-12)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위 말씀에서 바울은 말씀의 사역자들이 교우들을 가르칠 때 가져야 할 세 가지 목적을 말씀합니다. 그 세 가지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성도를 성숙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우들에게 사역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사역의 정신까지 가르쳐야 합니다. 사역의 목적과 가치관의 전수가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훈련입니다. 제자훈련의 최종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말씀의 사역자들이 성도들을 바르게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제저훈련의 한 방편으로 삶 공부 과정을 봄가을에 개설합니다. 삶 공부 과정을 통해 교우들을 건강한 사역자로 훈련합니다. 새해에도 삶 공부에 열심히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공동사역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한다.
조직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질서를 무시하면 공동체가 깨어집니다. 교회의 조직이나 질서는 방해거리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들을 하나로 엮는 좋은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장로교회입니다. 장료교회는 당회의 책무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당회는 교회의 모든 사역이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진행되도록 세밀하게 살피고 지도하는 일을 합니다. 당회원은 그 직무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우들은 당회를 존중하고 중요한 사안들을 당회에 제출하여 협력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며 그로써 공동체가 성숙하게 됩니다. 질서는 공동체 건설의 본질입니다.
사역을 맡은 지도자나 일꾼들이 사역을 잘 하기 위해 연구해야 한다(35:32, 35).
지도자들은 사역과 조직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깊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사역을 맡은 일꾼들도 연구 없이 자기가 맡은 일을 잘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역에는 창의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맡은 일은 여러분의 성장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복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성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맡겨진 과업이나 사역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신에 개인은 물론 동역자들과 함께 연합하여 열정을 다해 수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3. 외적 변화와 내적 변화의 관계
외적인 변화는 공동사역을 완수함으로써 생기는 결과입니다. 7개월 동안의 수고와 협력으로 성막이 광야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가운데 더 큰 변화는 내적인 변화입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그만큼 성숙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막의 완성과 공동체의 성숙을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 (35:31)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심
* (35:34) 감동시키심
* (35:35, 36:1-2) 지혜로운 마음을 충만하게 하심
* (36:3) 백성들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갖고 왔는데 이는 그들의 마음이 성령으로 새롭게 되었음을 함의합니다.
그러므로 시내광야에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의 근본 동인(추진력)은 마음의 변화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은 근원적인 힘과 놀라운 변화의 동력(추진력)은 성령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럴 때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과 뜨거운 헌신이 뒤따랐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통해 내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그 결과로 성막이 완성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7개월의 공동사역으로 성막이 완공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막에 충만했습니다.
(출 40:34-35)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임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로에 늘 함께 했습니다.
엡 5:27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최고 소원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엡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예수님)의 최고 소원은 영광스러운 교회 건설입니다. 영광스런 교회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반영하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보여줄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영광스러운 삼위 하나님을 반영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광스런 교회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놀라운 변화”입니다. 무엇이 놀라운 변화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시고자 하시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교회가 영구적으로 품어야 할 비전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성도와 교회를 향한 우리 주님의 최고 소원은 영광스러운 교회건설입니다. 영광스러운 교회건설 안에 행복한 가정과 세상의 회복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영광스러운 교회건설을 위해 헌신하신 모든 교우들을 축복합니다. 새해에도 변함없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도 영광스러운 교회건설입니다. 영광스러운 교회건설을 위해 함께 힘을 다해 헌신합시다. 이것보다 더 소중한 일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광스러운 교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요?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도와 교회가 항상 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충만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서 경험한 그 놀라운 변화를 우리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셔서 가정과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하나님의 성숙한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출 35:30-35 / 이상호 목사
인생은 한때의 흥분이나 분주한 기분으로 아무렇게나 살아가야 할 한 해도 아니며 살아갈 인생도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바람직한 인간형은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은혜와 복음을 전하는 메시야 같은 존재입니까? 아니면 혼란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소영웅주의자가 아닌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설계대로 성막을 건축하기 위하여 부살렐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면서 오흘리압을 보조자로 택하여 그 일을 협조하게 하였습니다. 성막건축을 맡은 브살렐은 본시부터 흠할 데 없는 인물이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지명한 후 하나님의 신이 충만하고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중대한 일을 맡기에는 부족하지만 가장으로서, 새해를 맞아 맡은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이어야 하나'를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1. 지혜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식과 지혜는 차원이 다르고 가치가 틀립니다. 세상에는 지식 있는 사람은 많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현대인은 옛날 사람보다 지식은 많지만 반드시 지혜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지혜는 인생의 안내자요, 처세의 지침이요, 행동의 길잡이입니다.
그러면 지혜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얻는 신앙이라고 했습니다(고전1:18-2:16). 스데반은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행6:3).
(1) 인생의 방향감각을 바르게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내가 맡은 일을 어디로 이끌고 나갈지를 바르게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개인이든 단체이든 추구해야 할 방향이 있고 설정해야 할 진로가 있습니다. 그 방향과 그 진로를 바로 정하는 것이 신앙이며 지혜인 것입니다. 모든 일에 바른길이 있고 그릇된 길이 있는데 지혜란 일의 바른길을 찾아가는 감각이요 센스입니다.
(2) 가치판단을 바르게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무슨 일이나 가치의 크고 작고 경하고 중한 차이가 있으며,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르게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을 중요하다고 알고, 가치 있는 것을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이 지혜입니다. 중요한 것을 소홀히 여기고 가치 있는 것을 가치 없다고 판단하면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바로 판단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나라 일을 맡으면서 부귀나 장수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한 것은 지혜가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잠16:16)라고 하였습니다.
2. 총명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와 총명의 신이라(사11:2) 했고, 솔로몬은 명철과 총명이 있는 임금이라고 평하였습니다(대하2:12). 총명한 사람이란 명민한 사람, 영리한 사람, 재간 있는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아는 사람이 명민한 사람이요, 자기 분수를 지키는 사람이 영리한 사람이요,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하는 사람이 재간 있는 사람입니다.
(1) 자기를 안다는 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옛날 희랍인들은 델포이 신전 대리석 벽에 '네 자신을 알라'는 인생의 금언을 조각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인생의 금언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고 하셨으니 회개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운동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르게 아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요, 실패의 원인입니다.
(2) 자기 분수를 지키는 사람이 영리한 사람입니다. 분수를 지킨다는 것은 자기 몫을 한다는 것이요, 지나친 욕심도 내지 않고 허세도 부리지 않고 사리에 맞게 행동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거짓과 사치는 버려야 했습니다. 허영도 버려야 했습니다. 중국의 옛날 성인은 네 분수를 지키어 만족한 줄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고 하였습니다.
나의 사명이 무엇이며, 나의 설자리가 어디이며, 나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일체의 허영을 버리고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확실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분수를 지키고 분수에 맞게 산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본분입니다.
(3)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하는 것이 총명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마9:17)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신과 생명력이 가득한 교훈을 낡은 부대 같은 옛 정신상태에 가두어 두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되고,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 것이 나타난다고(고후5:17 공동번역)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엡4:22-23공동번역). 새해가 되었다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야 총명의 사람입니다.
3. 지식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지식 체계는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사실을 아는 지식이요, 둘째는 방법을 아는 지식이요, 셋째는 방향을 아는 지식입니다.
(1) 맡은 일을 사실 그대로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아는 지식이 귀합니다. 사실 그대로의 지식이 힘이요, 정의요,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 이익이나 지위를 위해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있지 않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거기에 거짓이 있고 위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고백하는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2) 어떤 일에 성공하려면 그 일을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방법이 좋지 않으면 성공할 일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할 때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겠느냐"(눅14:28 새번역)고 한 것은 성공시킬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방향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상과 행동의 올바른 방향을 아는 지식을 우리는 비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실을 아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비전과 목표가 더 중요합니다. 비전이 없이 사실만 아는 지식이나 방법만 아는 지식은 맹목적인 지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합니다. 갈릴리에서 시작한 복음이 세계로 확산된 것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3)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를 향한 복음의 꿈이 실현된 것은 최초의 선교사 바울과 최초의 선교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혜, 총명, 지식의 사람이 되며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브살렐이 맡은 일을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첫째, 자신이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힘쓰는 자에게 침략을 당합니다. 노력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도와 주십니다.
둘째, 충직한 일꾼 오흘리압과 협력했다는 것입니다. 오홀리압은 모든 일을 멋지게 해낼 뿐 아니라 고안 솜씨도 좋았다고 합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더불어 일하고 함께 일하는 협력이 필요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신이 같이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신이 같이하사 신통한 생각을 가득 채워 온갖 일을 멋지게 해내는 지체와 재간과 지식을 갖추게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나는 새해에 어떤 일을 맡고 어떤 지위에 있느냐에 관심을 두기보다 '어떤 사람이어야 하나'에 관심을 더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이 같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