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近代) 한국어(韓國語)·중국어(中國語) 중 단어(單語) 75%가 일본어(日本語)다.
김문학 /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제목을 읽는 순간 많은 독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한국어, 중국어의 근대 단어 중 70%가 일본어라고? 좀 더 분명히 말하면 근대 중국어, 한국어 중의
인문사회(人文社會) 관련 용어의 60-75%가 일본어(日本語)에서 수입해온 것이다.
흔히 우리는 문명 대국 중국이 (조선을 통해) 일본으로 문명을 전달, 전파했다는 인식에만 사로잡혀
서 근대 100여 년 전 문명(文明)의 우열(優劣)이 역전된 점은 망각하기 일쑤다. 사실 근대의 단어, 명
사들은 한자어의 형태로 일본에서 우선 새롭게 완성되고 다시 역으로 중국 대륙과 조선 반도에 수출
됐다.
우리가 현재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는 한자어(漢字語) 단어는 중국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70%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신명사, 신조어(新造語)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고유명사에서 ‘중화’를 빼고 ‘인민(人民)’ ‘공화국(共和國)’도 모두 일본제 한자다.
‘사회주의’의 ‘사회(社會)’ ‘주의(主義)’도, ‘개혁개방’의 ‘개혁(改革)’ ‘개방(開放)’도 모두 일본인이 서양
의 개념을 한자어로 만든 것이다.
왜 이런 단어가 일본에서 만들어졌으며 또 중국과 한국으로 수입됐을까? 백여 년 전 청(靑) 말 시기
일본의 근대 문명, 문화가 중국과 조선에 전파될 무렵 많은 단어들이 줄지어서 홍수같이 밀려들어 정
착됐다. 서양의 근대 문명, 사상, 의식은 일본인이 새롭게 제작한 명사, 단어로 번역됐다. 사상은 단어
라는 매개물을 통해 그 의미가 표현되고 전달되는 법이다.
일본은 에도 시대로부터 메이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한어를 고안해냈다.
이를테면 ‘과학科學’ ‘진화進化’ ‘경제經濟’ ‘자유自由’ ‘철학哲學’ ‘물리物理’ ‘조직組織’ ‘국가國家’ ‘국민
國民’ ‘권리權利’ ‘민주주의民主主義’ ‘공산주의共産主義’ 등 서양 근대 개념과 의식을 담은 신한어다.
청 말 시기 물론 중국(中國)에서도 지식인들이 신조어(新造語)를 고안해냈다. 이를테면 전화를 영어발
음으로 ‘德律風’, ‘진화’를 ‘天演’으로 했으며, 경제학을 ‘資生學’으로 양계초가 번역했고 철학은 ‘智學’으
로, 물리학은 ‘格致學’으로 번역했지만 이런 식의 중국 고전에서 차용한 개념은 서양 의식을 표현하는
데 큰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온 유학생(留學生), 혁명가(革命家), 지식 엘리트들은 일본
인이 고안한 근대 신한어가 더 간단명료하고 원뜻을 잘 표현했기에 이에 대해 애착을 느끼고 그 매력
에 반하게 된다.
19세기 말 양계초가 요코하마에서 출판, 발행한 ‘청의보’ ‘신민총보’도 중국인에게 서양의 신사상, 신
개념을 전파하는데 직접 일본어의 신조어들을 대량적으로 사용했다. 홍수처럼 밀려오는 신사상(新思
想)을 기존의 중국 단어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선한 일제 한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
었다. 서양 신문명을 수용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20만 개의 신식 한어를 만들었다.
영, 독, 불어를 번역하여 신조어를 양산해냈다.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를 ‘신명사’라 칭했다.
당시 조, 중 지식인의 안구를 자극한 단어로 ‘혁명(革命)’ ‘해방(解放)’ ‘투쟁(鬪爭)’ ‘운동(運動)’ ‘민주(民
主)’ ‘민족(民族)’ ‘사상(思想)’ ‘동지(同志)’ ‘이론(理論)’ ‘계급(階級)’ ‘계획(計劃)’ ‘근대화(近代化)’ 등 다수
가 있었다.
손문(孫文)이 ‘혁명(革命)’이란 단어를 알게 된 것은 일본의 신문(新聞)을 통해서였다. 당시 청국(淸國)
에서는 혁명을 흔히 ‘조반(造反)’이라 했는데 손문은 비서를 통해 이 말을 알고는 줄곧 ‘조반’을 집어치
우고 ‘혁명’이란 용어를 썼다.
1911년 ‘보통백과신대사전’의 범례에 ‘우리나라의 신사(용어)는 태반이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현재 중국과 한국 조선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일상용어에서 정치, 경제, 제도,
법률, 자연과학, 의학, 교육, 문화 등 용어에 이르기까지 일본어에서 온 단어가 수없이도 많다.
그것이 다 원래 중국어나 한국어인 줄로만 알고 있다. 일상 사용되고 있는 단어를 열거해 보자.
국제, 학교, 건축, 작용, 경찰, 공업, 의식, 이상, 전통, 영양, 도서관, 현실, 역사, 상식, 체조, 간부, 광장,
화학, 방송, 견습, 시장, 출구, 입구, 시장, 취소, 수속, 견습, 가치, 기차, 자동차, 낭만 등등...
그리고 문학계의 ‘계(界)’, 신형·대형의 ‘형(型)’‘, 가능성·필요성의 ’성(性)‘, 호감·우월감의 ’감(感)‘, 혁명
적·일시적의 ’적(的)‘, 상상력·생산력의 ’력(力)‘도 그렇다. 그리고 표현 중에 ’관하여‘ ’인하여‘ ’인정한다‘
’-보고 있다‘ 등도 일본어 표현이다.
중국사회과학원의 학자 이조충은 “금융, 투자, 추상 등 현대 중국어 중 사회과학에 관한 어휘의 60-70
%는 일본어에서 왔다는 통계가 있다. 이런 일본어가 없었다면 현재 중국어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강렬한 자극이나 영양가가 없어서 근대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근대 한국어도 일본어와 밀착돼 있었다. 근대 한국어(韓國語)는 75% 이상의 단어가 일본어(日本語)에
서 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학, 문법적 유사성, 접근성으로 인해 일본어가 그대로 한국어에 정착되
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한자어 외에도 일본어 그대로 한국어로 돼 있는데, 이를테면 ’벤또‘ ’리어카‘ ’오
야지‘ ’앗싸리‘ 등 많다. 지명도 인명도 일본식이 많은데 여자 이름에 ’자(子)‘가 붙는 것이나 ’웅(雄)‘이
붙는 것도 일본식 이름에서 유래된다.
현대 한국어 속의 한자어가 75-77%가 일본어세 창안한 일본제 한자어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한국어 속에 직접 일본어를 발음 그대로 사용되는 단어도 무척 많다.
예를 들어 보자. 가방, 난닝구, 마후라, 빤스, 에리, 오바, 잠바, 조끼, 곤색, 나베, 고로케, 당고, 돈까스,
모찌, 사라다, 사시미, 샤브샤브, 스시, 아나고, 앙꼬, 우동, 와사비, 짬뽕, 카레, 곳푸, 사라, 오봉, 다마,
도라이바, 밧데리, 카렌다, 아이롱, 구루마, 오토바이, 미싱, 리모컨, 오뎅, 콘센트, 히로뽕, 쓰나미, 가라
오케, 오르골, 오니, 요이, 짱껜뽀, 오시, 시로, 니꾸, 노가다, 나라시, 뼁끼, 아시바, 야마, 와꾸, 인프라,
멕기, 기라성, 꼬붕, 오야붕, 삐끼, 시다바리, 야쿠자, 오야지, 사쿠라, 잉꼬, 맘모스, 미니앨범, 오타쿠,
키모이, 혼모노,오카미, 곤조,가오,간지, 나와바리, 다시, 땡땡이, 데모, 쇼부, 아다라시, 왔다리갔다리,
찌라시, 쿠사리, 빵꾸 등등.
방대한 원어 단어와 일본제 한자어가 현대 한국어 문화어의 77%로 된다는 것은 이미 일본어가 아니라
한국어의 골격과 혈액과 육체로 되었다는 점을 입증해준다.
인류사에서 문명이 전달되는 방식은 전쟁과 유학 그리고 식민 지배 등 다양한 것들이 있었는데, 문명 전
달 방식으로서 선진 문명에서 후진 문명으로의 흐름은 선악의 차원을 넘어선 곳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근대화 지배는 한국인에게는 ’악‘이 아니라 축복(祝福)받은 일이었다
고 해야 한다.
단어가 사상(思想), 의미(意味)를 담은 문화의 가장 중요한 형태로서, 만일 근대 일본(日本) 한자어(漢字
語)의 수용이 없었다면 조선과 중국의 근대화도 없었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언어문화를 풍요롭게 해준 점만 평가하더라도 일본의 한자어는 이미 한국어와 중국어로 용해, 정착되
어 혈육이 되었다. 그것을 알량한 민족심으로 언어순화의 미명 하에 제거한다는 것은 행동 자체가 자기
살을 베어내는 것과 같은 우매한 짓이 아닐까.
한자어는 현대 국민의 교양의 바로미터로서 한자어를 모르고 배척한다면 스스로 우민화를 자초하는 자
살행위다. 근대 국민으로 거듭나려면 한국인은 일본제 한자어를 그대로 한자로 표기하고 사용해야 함이
필수일 것이다. 이 점을 모든 한국인들이 인식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