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곡골로 산꽃을 보러 가다
김동정
며칠 전, 아내와 함께 금산을 찾았다. 금산 땅 외곽의 보곡골에 산꽃이 한창이라는 뉴스를 듣고 망설임 없이 짐을 챙겼다. 재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찾아가는 금산은 어떤 모습일까, 몹시 궁금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고속국도를 빠져나와 금산 읍내에서 보곡골로 향했다. 대지에 가득한 봄색이 산뜻했다. 햇살은 눈부셨고 바람결은 부드러웠으며 은빛으로 부서지는 강물이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하늘과 맞닿은 산자락은 장쾌하고 생동감이 넘쳤으며 농부의 꿈이 담긴 들판은 넉넉해 보였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맑은 공기와 풀꽃들이 내뿜는 풋풋한 향기를 맡으며 20여 분을 달렸을까. 보곡골을 알리는 팻말이 보였다.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우고 멍때리는 시간. 여기도 꽃 저기도 꽃, 온통 꽃세상이다. 연둣빛 산허리마다, 풀숲마다 색실을 풀어놓은 듯 하얀 꽃, 노란 꽃, 자주 꽃, 빨간 꽃, 연분홍 꽃들이 은은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연초록 바탕 위에 피어난 꽃들의 향연! 그건 하늘땅이 주신 선물이요 축복이었다. 꽃이 긴 여행의 피로를 씻어주었다. 저 어디쯤에서 종달새 소리도 들려왔다. 고요함을 깨우는 저 소리는? 아, 매일 아침 창밖에서 나를 부르던 직박구리다. 이따금 참새와 까치 소리도 껴들어 두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역시 산은 새들의 놀이터였다.
아내가 가방에서 과일을 꺼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일찍 출발한 탓인지 허기가 몰려왔다. 들과 산에 어우러진 꽃나무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먹는 과일 맛, 꿀맛이다. 여행이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좁은 언덕길을 따라 더 올라갔다. 꽃의 행렬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꿈결 같은 황홀한 모습에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였다면 믿을까. 잠시 차를 세우고 눈앞에 펼쳐진 황홀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 멀리 삿갓 닮은 산들이 겹겹으로 포개어 있고 그 아래로 들판과 마을이 평화롭게 누워 있었다.
삼거리에서 샛길로 들어섰다.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마을 이름이 ‘자진뱅이’다. 어떤 사연이 있나 알아보니 먼 옛날, 마을에 전씨 성을 가진 사람이 들어와 살면서 자전리自全里로 부르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자진뱅이로 변했다고 한다.
동네가 물속처럼 고요했다. 햇볕 괸 조붓한 마을 길을 걸었다. 이끼 낀 흙담의 고풍스러움, 남향의 집들 옆으로 난 고샅길과 나무 울타리, 씨를 뿌린 텃밭, 찔레꽃 라일락 철쭉 연산홍 어우러진 꽃동산, 끊임없이 들려오는 고운 새소리가 고향의 봄을 떠올리게 했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고, 담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이 있었으며.
넓은 뜰이 있고 굴뚝이 있는 아담한 고가古家 한 채. 사무치도록 그리운 시골 고향 집을 닮아 마음이 편안했다. 문득 눈물이 나려고 했다. 고향에 대한 애틋함 때문일까. 차곡차곡 쌓인 사십 년 저편의 기억들이 실타래 풀리듯 떠올랐다.
마을 한가운데에 들어선 절집에도 가보았다. 세월의 더께가 느껴지는 전각 앞마당에 커다란 벚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꽃 진 자리에 푸릇푸릇 새잎이 돋아나 바람에 팔랑거리고 있었다. 뜨락에 앉아 벚나무와 전각의 어울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눈인사하고 절집을 나서는 길, 마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산자락이 내려와 아늑한 그림자를 만든 마을을 뒤로하고 국사봉 아래로 열린 이른바 ‘산꽃 술래길’을 걸었다. 자진뱅이마을에서 시작하는 길은 산을 굽이돌아 저 아랫마을까지 이어졌다. 햇살 미끄러지는 산 둘레로 산벚꽃이 폭죽 터지듯 피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물방울 같은 꽃들이 하느작하느작 날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꽃, 착하디착한 산골 처녀 같은 꽃이었다. 꽃과 나무, 하늘과 햇살을 안고 걷는 상쾌한 기분을 뉘 알 것인가. 싱싱한 산숲 향기에 아침이슬 같은 맑은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구부정하게 열린 길은 내 사는 동네 앞산 솔숲 길처럼 편안하고 호젓했다. 어릴 적 가방을 둘러메고 학교로 가던 고향집 앞 그 길처럼 아련함과 그리움이 몰려오는 길이었다. 저만큼 보따리를 이고 걸어오는 어머니가 보이는 듯했다. 멀리 돈 벌러 간 누이가 선물을 들고 웃으며 바삐 걸어오는 듯했다.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고향. 마음의 고향이 거기 있었다.
흙길이 주는 부드러움에 오래 걸어도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고운 풍치를 벗 삼아 30분 남짓 걸었을까. 등허리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4월인데 한낮으로 20도를 훌쩍 넘는 기온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치맛자락 같은 산천 풍경이 마음을 한없이 설레게 했다. 산벚꽃 사이사이로 복사꽃과 조팝꽃이 피어 있는가 하면 시샘하듯 생강꽃, 찔레꽃, 병꽃, 싸리꽃, 자목련, 산철쭉이 환한 산꽃 세상을 열어놓고 있었다. 꽃들도 사람처럼 서로 잘났다고 뽐내고 질투하고 경쟁하고 끼리끼리 어울리고 있었다. 집 앞 공원과 산숲에서 비바람에 뚝뚝 떨어지는 봄꽃을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봤던 게 얼마 전이었는데 이곳 산꽃은 늦도록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으랴.
진경산수화가 따로 없었다. 무릉도원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싶었다. 꽃, 나무, 풀밭, 오솔길, 산개울이 있고 새소리, 바람 소리가 악기처럼 들려오고, 다람쥐와 참새가 동심을 일깨우는, 어릴 적 뛰놀던 뒷동산 같은 모습에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바탕 바람이 지나가자, 눈꽃 같은 벚꽃이 하롱하롱 흩날렸다. 길에 무더기로 떨어진 하얀 꽃이 첫눈 같았다. 그 꽃길을 아내의 발걸음에 맞춰 느릿느릿 걸었다.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이어졌다. S자로 굽어있는가 하면 ㄷ자로 꺾어지다가 느닷없이 Z자로 이어져 걷는 재미가 있었다. 곡선의 흙길이 주는 편안함, 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무들과 한 뼘씩 자란 풀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힐긋힐긋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저기 붓으로 점을 찍듯 피어난 진달래는 아직 꽃을 달고 있었다. 역시 늦도록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꽃이다. 철쭉도 드문드문 보이고 물감을 엎질러놓은 것 같은 복사꽃이며 살구꽃, 조팝꽃, 이팝꽃이 나 좀 봐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꽃 피울 때를 알고 유유히 세상에 나온 저 갸륵한 꽃나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뭘까를 생각했다. 매번 아름답고 놀랍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지구의 보배 앞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설 것인가.
길 양쪽으로 나무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소나무, 아카시아, 수양버들, 엄나무, 참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벚나무와 함께 숲을 싱그럽게 가꿔주는 나무들이다. 새들이 날아들 수 있게, 곤충들이 모여들 수 있게, 햇볕과 달빛이 고루 스며들 수 있게, 안개와 바람이 드나들 수 있게, 뱀과 두꺼비가 와서 쉴 수 있게, 고양이가 와서 둥지를 틀 수 있게, 오소리가 와서 등을 비빌 수 있게, 별빛이 내려와 속삭일 수 있게 서로서로 손을 잡고 어우러져 있었다. 나는 산에 와서 조화, 협력, 균형, 양보, 정성, 겸손, 용서, 배려, 나눔, 평화, 상생의 현장을 보고 있었다. 자연은 저렇듯 한없이 순결하고 고요한데 인간 세상은 한시도 조용할 틈이 없으니, 침묵으로 말하는 숲의 가르침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자연에 파묻히면 마음에 엉겨 붙은 쓸데없는 욕심, 불평불만, 집착을 떼어버릴 수 있어 좋다. 나 자신을 내려놓고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다. 산을 마음 치료제라고 한 어떤 이의 말은 백번 옳다.
산벚나무 옆 마른 풀숲에 피어난 새푸른 풀꽃들도 영롱하기 그지없었다. 양지꽃, 민들레, 애기똥풀, 제비꽃, 토끼풀, 별꽃, 솜방망이꽃, 쑥부쟁이, 패랭이, 할미꽃, 꽃다지, 봄맞이꽃…. 저기 저만큼 풀숲에 얌전히 피어 있는, 아기 손 같은 제비꽃을 그림인 듯 바라보았다. 문득 조동진이 부른 ‘제비꽃’이란 노래가 떠올랐다. 마음이 울적할 때, 저 노래를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가슴을 울리는 4월의 노래였다.
저 꽃들을 찾아 나비가 날아오고 꿀벌이 날아올 때도 되었다. 4, 5월은 바야흐로 나비들의 세상이 아닌가. 아, 저기 얼룩점이 있는 나비 한 마리. 꽃술에 내려앉아 꽃과 입맞춤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자 나풀나풀 날아가 냉이꽃에 내려앉는다. 저 풀꽃들은 어떤 운명을 타고났기에 향기로 세상 사람들과 만나는가. 저 깜찍하고 귀여운 나비는 또 어디서 날아왔으며 어떻게 태어난 생명인가.
연녹색이 숲을 휘감듯 에워싸고 있었다. 숲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래 사느라 바빠서…. 잘 지냈지?”.
“그럼요. 지난 주말엔 무척 바빴어요. 어찌나 사람이 많이 몰려오든지 정신이 없었어요.”
“그랬구나.”
숲 그늘에 앉아 다리쉼을 하는 사람들 곁에서 눈이 귀여운 산새 한 마리가 포롱포롱 날아올랐다. 새들은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며 소란을 피웠다. 새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동안 잘 지냈지?”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왜 이제야 오셨어요?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그래 미안하다. 시간을 낼 수 없었어.”
나의 산 찾기는 늘 이렇다. 꽃, 나무, 산새, 꿀벌, 나비, 풀벌레와 인사를 나누고 하늘을 바라보며 그 싱그러움에 감탄하고, 햇살 한 움큼의 고마움과 파도처럼 출렁이는 능선에 탄복하며, 둥실둥실 떠다니는 구름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이담에 죽어서 나무와 꽃으로, 구름 한 점으로, 물 한 방울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뭘 더 바라겠는가. 평평한 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사색에 잠기고, 우렁찬 계곡 물소리에 때 묻은 영혼을 적시며,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뉘우치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한다.
사방에서 달큰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왔다. 아무리 맡아도 싫지 않은 꽃 냄새, 풀 냄새, 바람 냄새, 흙냄새였다.
크레파스로 곱게 색칠한 듯, 순수무구한 꽃나무들의 생기 넘치는 모습에 마음이 촉촉해진 하루였다.
거기에 아름다운 동화 한 편이 있었다. 태초의 자연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