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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그 안마 방/정병근
은하수 추천 0 조회 56 19.02.13 20: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그 안마 방/정병근

 

지하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둠이 깊은 우물처럼 출렁이고 거기 한 늙은 여자가 앉아 있습니다 그녀는 집싸게 빨래집게로 커튼의 멱살을 잡아맵니다 무거운 옷을 벗고 전화기와 지갑과 열쇠꾸러미를 꺼내 머리맡에 두고 누우면 그녀의 일이 시작됩니다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발부터 씻기지요 조물락대는 손길이 그지없이 기분 좋아 일찌감치 잠이 옵니다 다리와 팔과 등으로 옯겨 다니며 구김살을 좍좍 펴주는 그 손아귀의 힘은 얼마나 나른하고 아린 슬픔 같은 것인지요 웬 낯선 몸 하나가 내 몸을 주무릅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다가 이 깊은 우물 속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오늘의 만남이 마치 전생의 약속만 같아 자꾸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쳐다봅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이 세상에 살아 죄 많은 한 몸을 주무릅니다 오랜 세월 기다렸던 한 몸이 한 몸을 만난 거지요 어쩌면 나는 오래 전에 그녀를 떠났고 숱한 세월을 돌아 이제야 돌아온 것입니다 때늦은 약속을 지키러 말입니다 천년만의 해후! , 이런 걸 사랑이라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녀가 영비천 하나를 따서 쓱 내밉니다 천연두 앓은 곰보처럼 얼굴을 숙입니다 나도 그녀의 얼굴을 외면합니다 종소리 나는 문을 열고 우물 속을 나옵니다 다시 환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계단 처마 밑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쌩쌩 달리는 차들의 물살 속으로 재빠르게 들어갑니다

 

- 시집 번개를 치다(문학과지성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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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 전에 읽은 이 시가 생각난 것은 지난 이발소 이야기를 풀어가던 중이었다. 한 여성 페친의 “덕분에 남성문화를 조금 알게 되었다”는 댓글에 힘입어 진도를 좀 더 내보기로 했다. 인터넷 검색창에 제목과 시인을 넣었더니 “청소년에게 부적합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본래 안마는 누르고 비빈다는 뜻으로 몸의 근육과 관절을 부드럽게 하여 피로 회복을 돕고 혈액순환 개선, 통증 완화, 스트레스 해소, 숙면 유도등의 효능을 기대하는 시술 수단으로 알려져 있다. 안마는 동서양 모두 오래전부터 행해왔으며, 영어의 '마사지'는 반죽을 다룬다는 의미의 프랑스어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안마가 우리 시대에는 불온한 성적 코드로 자리매김 된 것이다. 현행법으로 안마는 안마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하도록 되어 있고, 그 자격은 시각장애인에게만 주어진다. 이는 맹인의 독점적인 직업으로 보호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때부터 마련된 법적 근거이다. ‘안마방’으로 일컫는 ‘안마시술소’는 원래 안마를 해주는 곳이지만, 지금은 변칙 영업이 주를 이루어 강남과 장안동 일대를 중심으로 성업 중이다. 진짜 맹인안마사에 의해 순수한 안마만 받는 곳은 안마시술소라 그러지 않고 안마원이라고 한다. 사실 1980년 이후 성매매 산업이 확장되고 신종 장르들이 속속 생겨난 것은 전두환의 3S정책의 일환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진짜 맹인안마사의 출장도 왕왕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고인이 되신 구상 시인께서 70년대 대구에 오면 가끔 맹인안마사를 불러 안마를 받곤 했는데, 80년대 이후 그런 호사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고 했다. 숙소에서 안마사를 불러 달라하면 열에 아홉은 배시시 야릇한 웃음을 흘리거나 벗겨진 젊은 여인의 사진이 박힌 명함을 건넨다는 것이다. 출장안마가 성매매 수단으로 악용되다가 2004년 성매매특별법 발효 이후 우후죽순 생겨난 안마방은 남성들의 성 구매 주요 경로로 자리 잡았다. 90년대부터 장안동에 대거 들어선 안마방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코스가 될 만큼 윤락관광의 구심점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들은 맹인안마사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거나 처음부터 스포츠 마사지, 경락마사지, 발 관리실, 피부관리 등으로 허가를 받아 변칙 운영하기도 한다. 아무튼 은밀한 공간에서 이성간의 신체접촉이 이뤄진다는 자체부터 문제가 간단치 않다. 가령 동남아 여행에서 대개 경험하는 간단한 발마사시 조차도 뭔가 은근한 기대를 갖는다든지 야릇한 기분을 자아내게 한다. 오래 전 어머니와 이모님이 중국여행에서 난생처음 발마사지를 받고 당시 67세인 이모는 뭐가 캥겼는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언니, 황서방(이모부)한테는 발마사지 받았다는 얘기 하지 마” “어쩌다 말이 툭 튀어나왔어도 남자가 해줬다는 소린 마" 그랬다는 것이다.


시에 등장하는 안마방의 ‘늙은 여자'는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오랜 룸살롱에서의 술을 견디지 못해 안마방으로 전과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그것은 주관적인 관측일 뿐이다. 까놓고 말하면 ’그녀‘가 누구든 정황으로 미루어봐서 성실하게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했으리라 믿는 남성동족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성적 서비스 옵션을 거부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바디타기‘등의 맛보기는 제공된듯하고 화자는 그 자극에 썩 만족해한다. 남성들이 안마방을 찾는 이유가 그것이다. 연예인들이 가끔 이용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누구 말마따나 ’중소기업 하나 경영하는 것보다 어려운‘ 연애보다 편리하고 일시적인 쾌감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들이 연애할 능력이 없어 그런 곳을 찾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과거 친구들이 해준 이야기를 주워듣기만 했지 한 번도 안마방엔 가보지 못했다. 이실직고하자면 오래전 이발소 경험과 함께 집창촌에도 딱 한번 가본 적 있다. 남자들이 군 입대 전 청량리나 미아리에 동정을 갖다 바친다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기는 아니었으나 참으로 어마어마한 별세계로의 여행이었다. 그녀는 이불 속에 짱 박아둔 양주를 몇 잔이나 내게 부어주면서 어린 딸 이야기를 했다. ‘오랜 세월 기다렸던 한 몸이 한 몸을 만나’ ‘나는 오래 전에 그녀를 떠났고 숱한 세월을 돌아 이제야 돌아온 것’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녀도 나도 이례적이었다.


밤을 꼬박 새고 새벽에 나왔으나 몸은 새털처럼 가벼워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 숙련된 ‘전문가’에게 사랑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마치 전생의 약속만 같아’ 오래 그녀를 기억했지만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한번도 가지 않을 수는 있어도 한번만 가기는 힘들었을 그곳을 다시 찾지는 않았다. 으슥한 곳에 주차만 해도 삐딱하게 보는 세상이다. 아무리 공인이 아닐지라도 성적 이력의 노골적인 발설이 꺼려짐은 당연하다. 까닥하다간 이상한 사랑 취급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이 나에게 부여하신 섭리대로 나는 그 경험을 욕망이 아니라 감히 사랑이라 믿고 싶은 것이다. ‘아, 이런 걸 사랑이라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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