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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8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사도행전 8,26-40 요한 6,44-51
알고 싶지 않으면 사랑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대화’는 대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군가와 만나면 어색해지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걱정합니다.
저도 그랬기에 대화의 기술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나름대로 방법도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다.
대화의 기술 5가지를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1.말하는 것보다 들어라 – 입은 하나, 귀는 두 개. 내가 말하는 것보다 두 배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잘 들어주기만 해도 “오늘 좋은 대화였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2.상대의 말에 관심을 가져라 – 보통 말을 할 때 상대의 눈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의 정서이고 우리는 인중 쪽을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의 말에 호응을 해주고 장단을 맞춰줘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가 신나게 말할 수 있습니다.
3.상대를 긍정하라 – 옳고 그름은 사실 말하는 사람이 더 잘 압니다.
그것을 바로잡아 주려다가는 상대가 가진 나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됩니다.
상대는 지금 상담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4.질문하라 –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화에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 있고 그 대화가 계속 흐르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화를 흐르게 하려면 나의 대화 다음에 반드시 상대의 대답이 나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5.상대가 관심있는 것을 질문하라 – 질문이 취조가 되면 안 됩니다.
상대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을 질문하면 상대는 신이 나서 말하게 됩니다.
그런 주제를 질문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를 말했지만 사실 대화의 기술의 핵심은 하나입니다.
‘상대를 사랑하라!’입니다.
사랑하면 알고 싶어지고 알고 싶어지면 내 말보다는 상대의 말을 듣고 싶어서 질문을 많이 하게 됩니다.
상대는 자신을 알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알고 싶은 마음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하나입니다.
몇 년을 함께 지내도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나 자녀라면 그것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처지에 있다는 것은 어쩌면 나도 다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알고 싶고 그래서 질문을 많이 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묻는 것이 없다면 하느님도 침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체의 신비에 대한 믿음까지 오지 못하는 이들이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알려고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나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과 친교를 맺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요즘은 하늘나라 신비에 대해 알려고만 하면 그 정보를 아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성경공부나 교리공부를 따로 하지 않더라도 SNS나 유튜브만 봐도 수많은 정보와 가르침들이 흘러넘칩니다.
그런데도 표징만을 요구하며 배우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참 구원과 진리에 무관심해지는 것일까요?
다른 것에 더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2007년, 어느 추운 겨울 아침,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워싱턴 D.C의 기차역에 서서
여섯 곡의 바흐 작품을 연주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도 바이올린도 절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인 조슈아 벨로였습니다.
조슈아가 바쁜 직장인들로 가득한 기차역에서 350만 달러짜리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동안
2,000여 명이 그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는 45분간 계속해서 연주했습니다.
단 6명이 잠시 걸음을 멈춰 서서 그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20명가량이 돈을 냈지만 이내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연주를 마쳤을 때 기차가 내는 소음 외에는 정적이 흐를 뿐이었습니다.
박수갈채도, 군중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가 진행한 이 실험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고도 불편한 진실을 증명하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가마저도 치열한 경쟁에 휩쓸리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 자신에 관한 관심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주님에 관한 관심이 없어집니다.
구원에 이르려면 먼저 그 구원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집에 뒹굴고 있는 우주에 관한 그림책을 보며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알려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더 많이 알수록 더 친밀해집니다.
더 많이 알고 싶을수록 더 많이 질문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다면 지금 하느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체 안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 뵈옵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알기 위해 어떠한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시도하셨습니까?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18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 6,44-51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야 하겠습니다!
한 형제가 아침 식탁에서 특별한 숫자를 자주 셉니다.
“8,000!”“7,999!” 아직 남아있는 살아갈 날의 숫자를 세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영적으로 좋은 노력입니다.
남아있는 날수를 헤아리며, 죽음을 묵상하고, 하루하루가 소중하기에 더욱 충만한 하루를 살고자 하는 짧은 피정입니다.
저도 작년 종합건강 검진 후에 기대 수명 몇 살이라는 판정을 받았는데, 그래서 헤아려 보니,
남은 날은 이제 겨우 7000일 남짓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뜨뜨미지근하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야 하겠구나, 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어떤 날 하루를 돌아보고 나면 참으로 기가 막힌 날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빈둥빈둥한 날입니다.
이제 남은 날도 그리 많지 않은 나이인데, 이걸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생깁니다.
그보다 더한 하루는 하루를 완전히 망쳐버린 날입니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좌충우돌 이웃들과 부딪치고, 나나 상대방이나 크게 상처 입은
마이너스의 날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쁨과 보람으로 충만한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은 주로 사랑을 만난 날입니다.
크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날입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 사랑에 몸 바친 날입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하루를 살아도 영양가 있는 삶을 산다는 것, 하루를 1년같이,
하루를 영원처럼 산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을 먹는 우리는 언젠가 맞이하게 될 마지막 순간, 지상에서의 모든 순례 여정을 내려놓고 드디어 하느님을 뵙는 결정적 순간의 영원한 삶도 중요하겠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내 헌신과 내 사랑의 실천으로 이웃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차는 순간, 우리는 순간적이나마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는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야만 합니다.
미사 중에 우리는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파스카 신비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성체 순간,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죄인인 우리 인간이 합일하는 너무나 은혜롭고 행복한 순간, 결정적 구원을 미리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머나먼 훗날, 젊음이 지나가고,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인생의 9부 능선을 넘은 후에야 맛보기보다는, 지금부터 맛보기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구원의 성체,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살게 하는 생명의 성체를 모신 우리가
이 지상에서 최고의 행복을 느끼며, 그 행복을 동반자들과 나누며 만끽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벌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3주간 목요일 강론>
(2024. 4. 18. 목)(요한 6,44-51)
<생명의 빵>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4-51).”
1)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마태 18,14), 구원을 받으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요한 6,37).
따라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다.”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마지막 날의 다시 살아남’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또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려고 당신이 세상에 오셨음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충실한 신앙인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요한 6,40).
2)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이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고,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나에게 온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누구든지 ‘나에게만’ 와야 한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바오로 사도는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1코린 8,6).
만일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메시아(구세주)라는 뜻입니다.
뒤의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도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3)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씀은 이미 여러 번 강조된 말씀인데, 당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라는 뜻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곧 생명이다.” 라는 선언이고,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계시’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당신만이 주실 수 있고, 그 생명력은 당신에게서만 나온다는 선언이고 계시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라는 말씀은, ‘만나’가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양식이긴 해도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양식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나’를 언급하신 것은 사람들이 먼저
‘만나’를 언급하면서 ‘만나’처럼 평생 날마다 먹을 수 있는 빵을 달라고 예수님께 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날마다 배불리 먹는 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4)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일’을 ‘먹는 일’로 표현하시는데, 이것은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만 믿음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47절)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과(50절)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말은(51절), 뜻은 같은데, 표현을 점점 더 강하게 하신 것입니다.>
음식을 먹고, 그 음식이 내 몸 안에서 소화가 되고 흡수되어서 내 몸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될 때 비로소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생명력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온전히 받아먹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태아가 엄마 배 속에서 엄마의 몸이 제공하는 생명력을 받아먹으면서 사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먹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주는 생명력을 태아가 받아먹는 것은, 엄마를 먹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먹는 일을,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살아 있는 빵’이라는 말은, 당신이 곧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도 하고,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력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일과
예수님을 먹는 일이, 또 예수님의 살을 먹는 일이
같은 일이고 큰 은총이라는 것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