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을 찾아서]-봉선사 회주 밀운 스님
8월의 어느 날, 작열하는 뙤약볕이 대지를 달군다. 그 열기는 대지가 품은 한방울의 수분마저도 뿌옇게 토해내게 할 만큼 뜨겁다.
서울에서 남양주 봉선사를 가는 길, 의정부를 지나 축석고개를 넘었다.
축석령(祝石嶺). 조선시대 효심 깊은 아들이 아버지를 치료하려 산삼을 구하러 나섰다. 밤은 깊고 길까지 잃은 아들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에게 밤새 살려 달라 고 빌었는데, 알고 보니 호랑이는 바위였고 그 밑에는 산삼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43번 국도가 되어 6차선 도로로 변해버린 축석고개. 효자에게 산삼을 준 바위는 축석 검문소 앞 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자동차마다 네비게이션까지 있으니 길 잃을 염려도 없다. 산삼을 구하고 목숨을 애걸하던 그때 그 효자처럼 우리는 무엇을 간절히 구해본 적이 있던가.
축석고개를 넘어 광릉내 길로 들어섰다. 구불구불 운치 있는 길이 한참을 이어진다. 광릉수목원 즈음을 지날 무렵, 하늘에서 굵은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름 볕의 폭정에 힘없이 대지를 떠난 수분이 꾸역꾸역 하늘에 갇혀 구름으로 해를 가리고, 급기야 성난 적란운이 되어 양동이로 퍼붓듯 굵은 물줄기를 퍼붓는 것이리라. 쏟아지는 빗 속을 자동차 와이퍼만 물색 모르는 어린애가 손 흔드는 마냥 움직여댄다.
봉선사에 도착해 밀운 스님(봉선사 회주ㆍ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이 계신 곳을 찾았다.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른다. 스님이 계신 곳은 ‘피우정(避雨亭)’. 비를 피하는 곳이다.
#어리석음 벗고 여실지견 갖춰야
밀운 스님의 거처에는 행초서로 적힌 액자가 여럿 있다. 선교를 두루 겸수하며 박학(博學)하기로 소문한 스님이 손수 지은 선시(禪詩)다. 스님에게 삼배의 예를 올린 객이 그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부목사시기피우정(負木捨柴寄避雨亭) 불관풍뢰개안수면(不關風雷開眼睡眠)이라. ‘부목이 땔나무를 버리고, 이 정자에서 비를 피하려네. 태풍과 뇌성벽력도 상관하지 않고, 눈을 뜨고 잠에 들리라’라는 뜻입니다.”
밀운 스님이 피우정에서 칩거를 시작할 때 지은 시다. 부목은 절에서 땔나무 등을 하는 일꾼을 말한다. ‘종단의 부목’을 자처하는 스님은 크고 작은 수많은 일을 해왔다. 서울 봉은사 땅 2만여 평을 찾아 삼보정재를 지켜냈고, 총무원 부원장 소임 때는 경승단과 승가대학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 외에도 50여 년 수행자로 살며 굵직굵직한 불사를 척척 해낸 장본인이다.
당시 봉은사 주지였던 영암 스님은 총무 소임을 살던 밀운 스님이 불가능해보였던 옛 봉은사 터를 되찾는 것을 보고 “허공에 논을 칠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런 스님(부목)이 땔감을 버렸다니.
밀운 스님은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번 생 자체가 피우정”이라며 “(부목이 땔나무를 버렸다는 것은) 마음 가운데 어리석음을 다 버리고, 사람 사람의 번뇌와 시시비비 따위에 물들지 않고, 그대로 중생과 세상을 훤히 꿰뚫어 보는 지혜와 광명을 찾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스님(부목)이 버린 것은 땔감이 아니라 번뇌였다. ‘피우정’은 밀운 스님이 몸담은 작은 전각이지만 중생의 견지에서 보면 우주 전체가 곧 피우정이다. 바람과 태풍은 대중들의 분노와 질시다. 스님은 1980년대 말 모든 공직을 놓으며, 그 시시비비를 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었다. 눈을 뜨고 잠에 들겠다는 말은 항상 깨어있으되 평정을 잃지 않겠다는 서원이었다.
‘피우정’은 단지 비를 피하는 곳이 아니라, 어리석은 상(相)의 껍질(皮愚)을 벗어내는 깨침의 공간이었다.
#중생 망상과 부처 본성은 하나
스님은 “무량공안불조망어(無量供案佛祖妄語) 중생망상불조본성(衆生妄想佛祖本性)이라. 부처와 조사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요, 중생이 일으킨 망상이 바로 부처와 조사의 본성이라는 뜻”이라고 소개했다.
알 것 같다. 부처와 조사의 모습이 상(相)인데, 하물며 말이라고 다를까. 하지만 중생의 망상이 부처의 본성과 같다는 스님의 설명에는 뭔가 의심이 남는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연꽃을 들어 보인 그 모습에 속아서는 안 되고, 가섭 존자가 그 꽃을 보고 웃었는데 그 웃음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이 왜 연꽃을 들었는지를 알아야 하고, 가섭존자가 왜 웃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피우정에 들어 비를 피하기는 했는데, 오기까지 비를 너무 많이 많았나보다. 객이 스님의 말씀에 중얼중얼 토를 단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려고 합니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지만 망상 일으키는 그 마음자리가 바로 부처와 조사의 본성이에요. 본래 우리 본성은 청정한데 오염된 한 생각을 일으켜 망상이 된 것이라. 우리 마음이 본래는 청정한데 번뇌 망상에 가려져 있다고들 말하지만 본래 가려진 것도 없습니다. 번뇌 망상도 다 청정한 그곳에서 나오는 것이에요. 중생이 망상을 일으키기 전 그것이 바로 ‘나’이고 이것이 바로 불성(佛性)이고 자성(自性)입니다.”
그렇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었다.
#불심 깊은 집안서 4대독자로 태어나
밀운 스님은 1934년 황해도 연백에서 4대 독자로 출생했다. 4대독자가 출가한다면 보통 집안에서는 어림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스님은 불심 깊은 부모덕에 출가할 수 있었다. 집근처 망해사에서 기도 끝에 스님을 낳은 이유도 있었다.
밀운 스님은 “태어날 때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남달랐다”면서 “어릴 적 방학이면 망해사 스님에게 한문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때였다. 스님은 1ㆍ4후퇴 이후 고향 황해를 떠나 강화로 피난을 나왔다. 친척을 따라 서울 노량진에서 살던 밀운 스님은 은사 대오 스님이 “스님이나 한번 해봐라”하는 말에 출가를 했다. 법명은 부림(部林). 스님 나이 열아홉살 때였다.
영주 초암사에서 행자 생활을 했다. 은사스님은 행자였던 밀운 스님에게 밥상까지 손수 들어다주며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을 만큼 정성을 쏟았다.
대오 스님은 검소함을 강조하던 선방 수좌였다.
밀운 스님은 “은사스님은 늘 참선과 욕심 없는 삶을 강조했다”며 “입적했을 때 가위, 돋보기, 실타래, 손톱 깎기가 전부였을 정도로 올곧은 수행자였다”고 회고했다.
이후 스님은 봉선사 운허 스님에게 건당했다. 건당은 계를 준 은사가 아닌 다른 스님의 제자로 입적하는 것. 운허 스님은 일생을 팔만대장경 한글 번역에 매진했던 근현대의 대강백이다. 현재 봉선사 조실인 사형 월운 스님이 스승에게 밀운 스님을 추천하면서 건당제자가 됐다. 운허 스님이 지어준 ‘밀운(密耘)’이란 법명은 평소 스님이 남모르는(密) 수행정진(耘) 때문이었다.
#“사람이면 사람답게 살아야”
1954년, 밀운 스님은 군에 입대했다. 의무병이었던 스님은 군에서도 스님은 계를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했다. 저녁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참선을 했다. 어느 날 은사스님과 후일 총무원장을 지낸 동암 스님이 면회를 왔다. 다음날 포천 동화사 법당에 다녀오면서 동암 스님이 “부처님이 시원찮아”라는 말을 했다.
밀운 스님은 “부처 중에도 시원찮은 부처가 따로 있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의문을 붙잡고 정진했다. 그 의문이 화두가 됐던 것이다.
스님은 “1700공안, 큰스님에게 받는 화두만이 전부가 아니다. 내가 의심을 가진 화두가 돼야 진짜 화두가 되고, 오매일여가 된다”고 강조했다.
보름쯤 지났을까? 스님은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한 생각을 얻었다. ‘부처행을 하면 모두가 부처(佛行佛)’였다. 스님은 그 길로 외출증을 끊어 서울 적조암 녹야원으로 동암 스님을 찾아갔다.
밀운 스님의 이야기를 들은 동암 스님은 껄껄 웃었다. 동암 스님은 “동화사 불상 조성이 시원치 않다고 말한 것을 밀운 스님이 잘못 알아들었다”며 “그래도 불행불이란 답을 얻어낸 진전은 대단하다”고 말했다.
이후 밀운 스님의 생각은 ‘스님이면 계를 지키며 살아야 스님이고, 사람이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僧行僧 人行人)’으로 이어졌다.
스님은 “그때의 일이 평생 공부에 도움이 됐다”며 “세속의 공부도 머리로만 외운 것은 실(實)이 없다. 직접 부딪혀 깨달은 생각이 있어야 철학이 되고, 사상이 된다”고 강조했다.
“요즘 ‘너도 부처, 나도 부처’라면서 ‘개도 부처’ ‘소도 부처’라는데 나는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깨닫지 못했으면 다 중생이에요. 단 불성은 누구나 갖고 있고, 누구나 다 부처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산천초목과 바다 속 어류에도 불성이 있고, 그 불성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품은 같을지 몰라도 수행을 하고 깨달아야 부처입니다.”
“스님은 스님답게, 사람은 사람답게 살며 쉬지 말고 정진하라.” 밀운 스님의 가르침은 간단했다.
#만년 부목, 실천행으로 귀감 돼
원로 밀운 스님은 지금도 부목을 자처한다. 스님이 화장실 청소까지 도맡아 했을 때는 칭송보다 ‘흉물떤다’는 손가락질이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비밀리에 수행 정진하는 밀운 스님의 행은 그칠 줄 몰랐다.
사중 일을 내 일처럼 하다 보니 스님에게는 취득한 특허가 5개나 되는 특이한 이력도 생겼다. 하수구용 배수전, 칫솔, 촛대의 받침반 구조, 연등의 프레임 결합구 등. 일을 하다 불편하면 궁리를 했고 그것은 바로 아이디어로 이어졌다.
“일하는 것이 좋다”는 스님은 지금도 꼼꼼한 손놀림에다 부지런함과 절대 함부로 보고 넘기지 않는 성격까지 더해져 최고의 ‘부목’이 되었다.
지난달 여름밤 산사를 연꽃과 선율로 수놓았던 ‘봉선사 연꽃축제’를 있게 한 봉선사 연꽃밭도 밀운 스님이 원력으로 일군 것이다.
종단에서는 원로회의 부의장으로 사중에서는 회주로서 부목 소임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스님은 수행자의 본분 역시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밀운 스님은 지난 40여 년 아침 예불과 108배, 울력, 참선을 빠뜨린 적이 없다.
스님은 “108참회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한 것이 40여 년을 하게 됐다. 매일 108배를 하니 하는 일마다 술술 풀리고 건강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1985년 성수ㆍ고산ㆍ원담ㆍ정무 스님 등과 스리랑카 불치탑 순례를 갔을 때도 스님은 108배를 쉬지 않았다.
“108배를 마치고 참선을 하는데 불현듯 ‘무원근(無遠近)’이 떠올랐습니다. 멀고 가까운 것이 없는 것,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그런 경지. 환희심이 일어납디다.”
만년 부목, 밀운 스님의 원동력은 108배였다.
#산과 물 같은 자비심 길러야
“산은 모든 짐승을 가족으로 안아 들이고, 물은 어해(물고기와 어패류)들을 어루만져준다(山抱禽獸族 水摩魚蟹?).”
스님은 한 켠의 액자를 가리키며 “산은 짐승이든 나무든 말없이 모두 품어주고, 물은 드러내지 않고 물 속에 사는 모든 것을 어루만져 준다”며 “산과 같고 물과 같은 마음이 자비”라고 강조했다. 또 “양보하고 용서하면 싸울 일이 없다. 자비, 존경, 양보, 용서를 지키는 것이 성현을 닮고, 성현이 되는 삶”이라고 말했다.
“꽃은 벌떼를 불러 모으고, 벌은 꽃향기를 좋아하니, 꽃과 벌은 서로 돕기에,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서로 나빠질 일이 없다(花召群蜂 蜂樂花香 花蜂相助 終古不變).”
밀운 스님은 “부처의 마음을 일으키는 놈이나 중생의 망상을 일으키는 놈 모두 같은 나 자신”이라며 “진흙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청정한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스스로 생각을 돌이켜 심성을 정화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객이 피우정을 나설 때는 하늘이 말갛게 개어있었다. 태양의 폭압에 대지를 떠났던 물기도 초목의 생명수로 제자리를 찾은 듯 했다. 축석검문소 앞 공원 한켠의 축석도 그대로였다. 우리는 무엇을 원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