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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묵상글(강론글)
1차(260531. 22:10), 2차(04:20)
6월 1일 묵상글, 31일 22시 1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오늘, 도보 순례를 아침부터 오후까지 하고 행사에 참여할 계획이여서
3차분은 오후 늦은 시간에 공유를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 04:45 -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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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1일 월요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포도밭 소작인 비유 (마르12,1-12)
제1독서<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1,2-7)
사랑하는 여러분, 2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5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6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7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복음<소작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르12,1-12)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에게 1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2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3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4 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5 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6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7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8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9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10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11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12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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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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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코 12,1–12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포도 확을 파고
망대를 세운 다음
소작인들에게 세를 주고 떠납니다.
때가 되어 주인은 열매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을 때리고 내쫓고 죽입니다.
마침내 주인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존중하겠지” 하며 아들을 보내지만
그들은 그 상속자를 죽여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합니다.
이 비유는 매우 무겁습니다.
포도원은 본래 주인의 것인데
소작인들이 마치 자기 것처럼 붙잡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포도원이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이미 주어졌는데
그 주어짐의 은총을 잊고
소유의 욕망으로 뒤틀린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공동체를, 삶을 우리에게 맡기셨지만
우리는 자주 맡겨진 것을 받은 선물로 살기보다
내 것처럼 움켜쥐고 싶어 합니다.
오리게네스는
복음의 비유를 읽을 때
표면의 이야기 뒤에 있는 영적 구조를 깊이 보려 했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포도원은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맡기신 삶 자체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내 몸, 내 시간, 내 관계, 내 소명,
내가 속한 공동체와 교회는
모두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맡겨진 포도원입니다.
그러므로 성찰은
“나는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보다
“나는 맡겨진 것을 주님 뜻대로 살고 있는가?”를 묻는 데서 시작됩니다.
비유 안에서 소작인들은
종들을 거부할 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아들까지 죽입니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부분적으로 거부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마침내 하느님 자신마저 밀어내려는 깊은 완고함을 보여 줍니다.
오리게네스는 이런 완고함을
영혼이 진리를 두려워할 때 생기는 어둠으로도 보았습니다.
사람은 회개하면 살 수 있지만
자기 자리를 잃을까 두려워 진실을 거부하면
더 깊이 닫히게 됩니다.
죄는 단지 나쁜 행동 몇 가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보다 자기 소유와 자기 통제를 더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특히 두려운 말씀은
그들이 아들을 보고
“자, 저자가 상속자다. 그를 죽이자” 하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무지가 아니라 계산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왔다는 사실이
회개의 계기가 되지 않고
더 큰 소유 욕망을 부추기는 계기가 됩니다.
인간의 죄는 때로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집착 때문에 더 깊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다가와도
그 사랑 앞에 무릎 꿇기보다
여전히 내 중심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리게네스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나 이 비유는 심판의 경고만이 아닙니다.
동시에 은총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아들이 보내졌다는 사실 자체가
하느님께서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열매를 기대하시고,
돌아오기를 바라시고,
마침내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실 만큼
우리 삶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너는 왜 이렇게까지 어두워졌느냐?”는 질책과 함께
“아직도 돌아올 수 있다”는 초대를 품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버려진 아들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머릿돌이 되신다는 선언입니다.
인간의 거부와 폭력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버려진 돌을 통해 새로운 집을 세우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성찰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어긋났는지를 아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머릿돌이신 그리스도께 다시 삶을 맞추는 데로 나아갑니다.
영적 성찰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내 삶의 포도원을 누구의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 묻게 합니다.
나는 맡겨진 시간과 관계,
내 재능과 권한,
내가 돌보는 사람들을
정말 하느님의 것으로 여기며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내 뜻과 내 체면, 내 유익을 위해 붙들고 있는가?
성찰은 바로 이 자리에서 정직해지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릴 열매가 있는가를 묻는 일입니다.
오늘 거룩한 독서의 날에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내가 주님의 종을 외면한 자리는 어디인가?
내 삶에서 하느님이 들어오시기 싫은 영역은 무엇인가?
나는 포도원의 청지기인가, 소유자인 척하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삶의 문 앞에 오셔서
열매를 찾으시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
맡겨진 삶을 제 것처럼 움켜쥐지 않게 하시고
당신 포도원의 청지기로 살게 하소서.
제 안의 탐욕과 완고함을 비추어 주시고
머릿돌이신 당신께 다시 저를 맞추게 하소서.
열매 없는 말보다
사랑과 정의, 책임과 순종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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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6년도 어느덧 절반이 지나갑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가지가 없다면, 나뭇잎이 없다면 바람은 불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지가 많고, 그 가지에 나뭇잎이 많다면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풀잎에 부는 바람은 느끼기 어렵지만, 큰 나무에 부는 바람은 큰 소리가 나기 마련입니다. 2026년은 미국이라는 큰 나무가 바람을 거세게 일으키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해서 미국의 법정에 세웠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가지고 싶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자신감이 생긴 미국은 이란을 공격했습니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를 비롯한 참모들이 제거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란은 수천 년 문명을 지켜온 민족입니다. 베네수엘라와는 차원이 다른 국가였습니다. 이란은 결사 항전으로 저항하였고,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서 국제유가의 급등이라는 큰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욕망과 욕심의 바람이 수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왔고, 국제사회의 질서가 흔들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슷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소작인은 포도원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소작인은 마치 주인처럼 행동하였습니다. 소출을 받아오라는 주인의 종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마침내 주인이 보낸 아들마저 죽이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소작인을 모두 쫓아내고 새로운 소작인을 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화를 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마치 자신들에게 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율법과 계명이라는 포도원을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말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아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은 잘 지키지 않는 율법과 계명을 사람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분은 등대 같은 분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위로와 힘이 되어주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분은 꽃과 같은 분입니다. 지나간 자리는 늘 향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 옆에 있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어떤 분들은 바위 같습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으면 삶의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별에 잠시 있다가 가는 존재입니다. 이 지구는 우리만 사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지구가 우리의 소유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환경을 훼손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을 힘들게 합니다. 본당 신부님들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본당 신부님들은 착한 소작인처럼 지내고 떠나갑니다. 하지만 일부 본당 신부님들은 마치 본당이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면서 살다 갑니다. 떠난 자리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신부님이 계시고, 떠난 자리가 냄새가 나는 분들도 계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과연 착한 소작인인지, 못된 소작인인지 돌아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포도밭을 잘 가꾸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충실할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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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작인에게 경고합니다. 소작인들은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도조를 받으러 온 종들을 때리고, 모욕하고, 상처 입히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맡겨진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여 버렸습니다.
여기에서, ‘소작인’이란 직접적으로는 유대인 지도자들이겠지만, 넓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요, 바로 우리들 자신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원’을 맡기셨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포도원’, 교회라는 ‘포도원’, 우리 자신이라는 ‘포도원’을 맡겼습니다. 사실, 내 몸마저도 내 것이 아니건만, 나 자신이 마치 ‘나의 것’인 양 꼭 붙들고 있기가 다반사입니다.
마치 비유 속의 소작인처럼, 주인에게 속해있는 존재이면서도 속해 있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주인을 반역할 때가 많습니다. 주인을 주님으로 모시기보다,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주님의 것인 줄을 알면서도 차마 주님께 돌려드리지 못하고, 저기자신에 대한 애착으로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기가 일수입니다.
참으로 딱한 우리 자신입니다. 더군다나 수도승인 우리는 ‘항상 자기 머리 위에 누군가를 두고 사는 사람’들인데도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우리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이러한 반역을 멈추라는 메시지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건네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자신 밖에 모르는 우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맡기신 ‘포도밭’을 돌보라는 신뢰에 가득 찬 사랑의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자비를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계속해서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자비입니다. 그것은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르 12,11)
조용히 눈을 감아 봅니다. 반역을 일삼는 나를 온갖 사랑으로 끌어안고 돌보시는 당신을 봅니다. 아직도 여전히 나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고, 나에 대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기다리시고 계시는 당신을 봅니다. 내가 이렇게 아직도 사랑받고 있다는 이 놀라움, 당신께서 하신 사랑의 놀라움, 그 사랑, 이 모든 신비를 봅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하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놀랍기만 하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르 12,11)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꽁꽁 묶으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고
감춰둔 당신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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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 대상은 군중이 아니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입니다.
한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두르고 즙 짜는 틀과 망대까지 마련합니다.
이 포도밭은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이사 5,2 참조).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맡기시고 떠나신다는 설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의 시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인간이 자유롭게 충실하거나 자유롭게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을 열어 놓습니다.
때가 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 열매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종을 때리고 모욕하며,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마침내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마르 12,6)을 보냅니다.
이 아들은 단순한 사자가 아니라 주인의 마음이며,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이 걸었던 고통의 길 한가운데에서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를 상속자로 여겨 말합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12,7).
그들의 말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을 죽이려 하였던 요셉의 형제들이 한 말과 비슷합니다(37,20 참조).
질투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합니다. 소작인들은 결국 ‘사랑하는 아들’마저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사건을 미리 보여 줍니다.
결국 주인은 그들을 심판하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포도밭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라지지 않고, 그곳을 맡은 이들이 바뀔 뿐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마르 12,10).
인간의 교만과 욕심으로 내치고 버린 존재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서 중심이 됩니다.
십자가는 버림받음이지만, 그 버림받은 자리에서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12,11).
그 놀라움은 눈부신 승리라기보다, 상처 난 자리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생명처럼 우리 안에 흔적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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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여정!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수행해야 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양극적 사고를 넘어서는 길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여정
2026년 5월 31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열린 마음, 곧 "초심(初心)의 마음"을 길러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합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 모두가 교육받아 온 방식입니다. 그 사고방식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구분과 판단을 가능하게 해 주며,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결정하도록 도와줍니다. 과학혁명, 산업혁명, 그리고 오늘의 기술혁명에 이르기까지 이분법적 사고는 필수적인 역할을 해 왔고, 우리는 그 점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자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분법적 사고만으로는 사랑, 죽음, 고통, 하느님, 무한, 그리고 "은총"이라는 가장 큰 신비들을 다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이분법적 사고에 의존하는 현실을 균형 있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을 열린 들판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사고의 방식을 의식적으로 연습해야 합니다.
저는 이를 "비이분법적 정신", 혹은 "관상적 정신"이라고 부릅니다.
이 마음의 자리에서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어떤 것을 성급히 옳지 않다고 단정하거나 배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비롭거나, 부정적이거나, 고통스럽거나, 문제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억지로 제거하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관상적 마음을 지닐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마음의 들판을 열어 둘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려놓음"의 큰 훈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려움, 방어심, 기대를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래서 많은 이들이 묵상, 매일의 관상, 침묵의 시간을 꾸준히 이어 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침에 20분, 그리고 하루 중 다시 20분을 앉아 관상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 시간은 마치 20분 동안 죽는 것 같고, 20분 동안 지루함을 견디는 것 같고, 20분 동안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시간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그때마다 강박적이고 집착적이며 부정적인 생각들이 마음속으로 밀려와 제 주의를 끌어당기려 합니다.
관상의 초기 단계는, 하느님 안에 놓여 있는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토대— 곧 "내적 증인(Inner Witness)"이라 부를 수 있는 자리—에서 살아가고 바라보는 연습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부정적이고, 피해망상적이며, 대립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인 생각들에 얼마나 쉽게 끌리는지를 기꺼이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 생각은 어디서 온 것인가?" "나는 왜 이런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연약하고 제한된 인간의 마음으로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을까? 어떻게 인간 삶에 스며드는 큰 사랑과 큰 고통을 이해하거나 담아낼 수 있을까?"
이분법적 사고는 늘 결론을 향해 서둘러 움직이기 때문에, 그저 다음 생각으로 뛰어넘어 버립니다. 그 마음은 닫힘을 좋아하고, 판단으로 급히 달려갑니다.
그래서 모든 위대한 영적 스승들이 한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판단하지 마라."
교육을 잘 받은 이분법적 사고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태도가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판단을 내려야 하지 않나요?"라고 말하고 싶어지지요.
물론 판단은 필요합니다. 특히 정의와 연대의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 어떤 사람, 어떤 상황을 받아들일 때 우리가 처음 사용하는 "렌즈"는 비이분법적이어야 합니다.
나는 현실의 모든 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이해한다고 생각하여 ‘좋다’고 여기는 부분도, 아직 이해하지 못해 ‘나쁘다’고 단정해 버리는 부분도 함께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단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곧잘 ‘"틀렸다, 위험하다, 죄스럽다, 이단적이다, 제거해야 한다." 하고 성급히 판단해 버립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가 40년 동안 법조인으로 일하는 동안, 아주 보수적인 종교적 환경에서 배워 온 ‘확실성’이 삶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법학 교육과 소송 업무는 제가 익숙해져 있던 이분법적 사고를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인간 경험의 무한한 변수를 흑백의 논리로 판단하려는 시도는 결국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검은색과 흰색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회색의 스펙트럼에 마음을 열었을 때, 하느님의 신비로 들어오라는 초대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경험하는 현실을 바라보는 데 이 다양한 회색의 결(shades of gray)이 관점을 열어 준다는 사실에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Larry B.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Art of Letting Go: Living the Wisdom of Saint Francis (MacMillan Audio, 201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eth Macdonald,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강의 하구(河口)는 땅도 물도 아닌, 그 둘을 모두 넘어서는 세계를 드러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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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0923 2026.05.31 08:15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적 요소와 프란치스칸 신학의 영적인 통찰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
존재의 본질은 ‘관계’이며, 사랑은 흐름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는 ‘삼위일체’라는 신비가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이면서도 한 분이신 하느님입니다. 삼위일체는 단순히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적 공식이 아니라,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가장 깊은 대답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은 하느님이 고립된 절대 권력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내어주고 받아들이시는 사랑의 관계라는 데 있습니다. 성부는 자신을 온전히 성자에게 내어주시고, 성자는 자신을 온전히 성부께 돌려드리며, 성령은 그 둘 사이를 흐르는 살아 있는 사랑과 기쁨의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정지된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관계이며,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사랑의 동사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는 누구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 위격은 철저히 타자를 향해 열려 있으며, 그 내어줌 속에서 오히려 완전한 충만에 이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입니다.
‘하나’보다 더 완전한 ‘셋’의 신비
삼위일체는 단순히 숫자 3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완전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홀로 있는 존재는 선할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둘이 되면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셋이 될 때 사랑은 비로소 닫힌 관계를 넘어 기쁨과 나눔과 환대의 공동체가 됩니다. 부모가 함께 아이를 바라보며 기뻐하듯, 사랑은 함께 기뻐할 때 가장 충만해집니다. 그래서 성령은 단순한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가 함께 나누는 사랑의 기쁨이며 생명의 넘쳐흐름입니다. 삼위일체는 결국 “존재의 완성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 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인간은 삼위일체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인간 역시 관계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함께 기뻐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참된 자기 자신이 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앙은 단지 머리로 믿는 교리가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관계, 자기중심성을 내려놓는 삶, 내 것을 움켜쥐기보다 흘려보내는 태도, 경쟁보다 공동선을 향하는 마음, 지배보다 환대와 공존을 선택하는 삶, 이 모든 것이 삼위일체적 삶입니다.
프란치스칸 신학의 핵심 통찰,
작음과 가난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아름다움 프란치스칸 영성은 삼위일체 신앙을 가장 따뜻하고 아름답게 삶으로 번역해 낸 전통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권력과 위엄으로만 보지 않고, 낮아지시고 가난해지시는 사랑으로 보았습니다. 프란치스칸 신학의 핵심은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스스로 작아지신다”는 데 있습니다.
‘내려감’의 신비, 하느님의 겸손,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를 깊이 묵상했습니다. 무한하신 하느님께서 연약한 아기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 그리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힘으로 군림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랑 때문에 자신을 비우는 데 있다는 것을. 그래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높아짐’보다 ‘낮아짐’을, ‘소유’보다 ‘비움’을, ‘지배’보다 ‘형제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만물을 형제자매로 바라보는 시선,
프란치스칸 신학의 또 하나의 핵심은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보는 것입니다. 태양은 ‘해 형제’, 물은 ‘물 누이’, 바람은 ‘바람 형제’, 불은 ‘불 형제’가 됩니다. 이는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같은 사랑의 근원에서 왔기에 우리는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자연을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형제로 바라봅니다. 이 시선 안에서는 생태적 감수성과 영적 감수성이 하나가 됩니다.
‘작음’의 영성,
선의 흐름을 허용하는 삶, 프란치스칸 신학은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삶보다 하느님의 선이 흘러가도록 자신을 비우는 삶을 강조합니다.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내려 하지 않고, 좋은 일이 내 이름으로 기억되지 않아도 괜찮으며,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 조용한 도구가 되는 것. 이것이 프란치스칸적 가난의 핵심입니다. 가난은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의 가난은 우울하거나 비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볍고 기쁜 자유입니다. 비워진 자리로 하느님의 사랑과 타인의 고통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와 프란치스칸 영성의 만남,
삼위일체 신학과 프란치스칸 영성은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합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존재 방식”을 보여주고, 프란치스칸 영성은 “그 존재 방식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삼위일체가 서로를 내어주는 사랑의 흐름이라면, 프란치스칸 영성은 그 흐름을 막지 않고 삶 안에서 통과시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성은 자기 완성의 기술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사랑이 흐르게 하는 허용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
오늘의 세계는 끊임없이 더 높아지라고 말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경쟁하고, 더 중심이 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와 프란치스칸 영성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길, 지배가 아니라 상호 내어줌의 길, 소유보다 나눔의 길, 경쟁보다 형제애의 길, 힘보다 부드러움의 길, 자기확장보다 자기비움의 길,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지고, 세상은 비로소 하느님 나라를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결국 삼위일체의 신비는 멀리 있는 천상의 교리가 아니라, 우리 일상의 관계 안에서 사랑이 흐를 때 이미 시작되는 살아 있는 현실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와 우리 삶의 방향 전환
서로를 향해 흐르는 하느님
삼위일체는 설명하기 어려운 교리가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경험되는 ‘사랑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느님을 홀로 완전하신 절대 권력자로 상상해 왔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스스로 완결된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자신을 내어주고 받아들이며 기쁨 속에 순환하시는 영원한 관계의 신비이십니다. 성부는 자신을 성자에게 내어주시고, 성자는 자신을 다시 아버지께 돌려드리며, 성령은 그 둘 사이를 흐르는 사랑의 숨결처럼 끊임없이 순환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멈춰 있는 명사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사랑하시는 분, 내어주시는 분, 흐르시는 분, 머무르시는 분입니다. 마치 산골짜기의 샘물이 스스로를 위해 머물지 않고 흘러넘쳐 강을 이루듯, 삼위일체의 생명은 끊임없는 자기 비움과 받아들임 속에서 더 풍성해집니다. 우리는 흔히 강함을 독립과 자기 충족에서 찾습니다. 남에게 기대지 않는 사람, 흔들리지 않는 사람, 아무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을 강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정반대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홀로 완결된 자아가 아니라 철저히 서로에게 열려 있는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아들 없이 아버지일 수 없고, 아들은 아버지 없이 존재하지 않으며, 성령은 그 둘 사이의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분들의 완전함은 독립에 있지 않고 상호 내재에 있습니다. 서로 안에 머물고, 서로를 받아들이며, 자기를 내어주어 타자가 살아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약함’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은 점점 더 강해지는 길이라기보다 점점 더 열리는 길입니다. 혼자 버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서로 기대는 사람이 되는 것, 상처받지 않기 위해 벽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문을 여는 것, 움켜쥐는 손이 아니라 내어주는 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수많은 고통은 사실 사랑의 흐름이 막힐 때 시작됩니다. 관계 안에서 상처받았기에 우리는 자신을 숨깁니다. 거절당할까 두려워 마음을 닫습니다. 빼앗길까 불안하여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통제하지 못하면 무너질 것 같아 사람과 상황을 움켜쥡니다. 그러나 움켜쥔 손에는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에게 반대 방향을 가르칩니다. 비워야 채워지고, 내어주어야 흐르며, 열어야 사랑이 들어온다는 것을.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리듬처럼 삶도 사랑의 순환 안에서만 살아 있습니다. 내어줌이 멈추면 영혼은 고여 버립니다. 흐르지 않는 물이 썩듯 사랑도 흐르지 않으면 생명을 잃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교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의 흐름 안으로 들어가는 용기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를 멀리서 바라보는 군주가 아니라 그 사랑의 순환 안으로 초대하시는 분입니다. 마치 부모가 아이의 웃음을 함께 바라보며 더 큰 기쁨을 나누듯, 하느님은 당신들의 기쁨 속에 우리까지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바깥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흐름 안으로 불려 들어간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완성은 하느님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 안에 머물고, 서로의 짐을 져 주며, 타인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누군가의 아픔 안으로 들어가며, 자신의 삶을 벽이 아니라 다리로 내어놓는 것. 그것이 삼위일체를 믿는 삶입니다.
삼위일체는 멀리 하늘 위의 신비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식탁에서, 공동체의 눈물 속에서, 용서와 화해의 순간에서, 자연의 숨결과 피조물의 노래 안에서 계속 드러나는 살아 있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흐름 안으로 자신을 허용한 사람은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행복은 홀로 완벽해지는 데 있지 않고, 서로를 살리는 사랑 안에서 함께 기뻐하는 데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아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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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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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01 03:47
-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할 줄 아는
오늘 베드로 사도는 더하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뒤집어 얘기하면 빼는 삶을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빼지 말아야 할 것을 빼진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빼는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왜 그럽니까?
빼야 할 것이 뭔지 몰라서 그럽니까?
몰라서 빼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알고서 빼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빼는 것이 나은 경우가 있습니다.
나쁜 것은 빼는 것이 맞습니다.
예를 들어 독소는 빼야 하고
교만으로 들어가 있는 힘 같은 것은 빼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빼는 사람은 잔디밭의 잡초처럼
곧 뽑아내야 할 나쁜 것으로 그것을 보는 것이고,
빼야 할 것을 빼는 사람은 지혜롭고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그렇게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것을 다 나쁘게 보는 것이고
모든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이 나쁜 것일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뺄 것을 빼고 더할 것을 더할 줄 알아야
지혜롭고 성숙한 데다 거룩하기까지 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권고처럼 그리고 오늘 베드로 사도의 말처럼
악습/악덕은 몰아내야 하지만, 덕은 더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한 가지 덕을 갖고 있으면 다른 덕이 그 위에 쌓이게 되고,
특히 겸손의 덕이 밑받침되면 모든 덕이 그 위에 쌓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 알고 있는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나의 덕을 가지고 있고 다른 덕들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모든 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의 덕을 거스르는 사람은
하나도 갖지 못하고 모든 덕을 거스르게 됩니다.”(덕들에게 바치는 인사 6-7)
프란치스코는 덕과 악습에 관해 다른 권고도 했는데
오늘은 바쁜 일정 때문에 이 권고를 소개하는 것으로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동요도 없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인색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걱정도 방황도 없습니다.
자기 집을 지킴에 주님의 두려움이 있는 곳에 원수가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자비와 신중함이 있는 곳에 지나침도 완고함도 없습니다.(악습을 몰아내는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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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쉼터
잘 산다는 것은?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9&id=2132994&menu=4770
굿뉴스 게시판 -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김중애 [ji5321] 2026-05-31 ㅣNo.189878
잘 산다는 것은?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참 잘 산다”
싶은 사람이 있다.
가진게 많아서가 아니다.
삶의 태도와 마음의 방향이
남 다르기 때문이다.
잘 산다는 건 화려하게 사는 게 아니라
단단하고 품격 있게 사는 일이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균형을 지키는 사람,
그가 진짜 잘 사는 사람이다.
1. 하루를 의미 있게 보낸다.
잘 사는 사람은 하루를
흘려보내지 않는다.
잠깐의 산책, 따뜻한 차 한 잔,
짧은 독서 같은 사소한 일에도
의미를 담는다. 하루의 질이
곧 인생의 질이기 때문이다.
2. 인간관계를 필요 이상으로
붙잡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고,
억지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진심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보내고 마음이 편한
관계에 집중한다.
관계를 양이 아니라
깊이로 관리하는 사람이
인생을 단단하게 만든다.
3.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에게 집중한다.
잘 사는 사람은 남의 삶을
부러워하기 보다 자신의
속도와 방향을 믿는다.
비교는 불행의 시작이고,
감사는 행복의 근원이다.
자신에게 집중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삶의 주인이다.
4. 감정을 다스릴 줄 안다.
화가 나도 함부로 말하지 않고,
불안해도 조급해하지 않는다.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은
주변을 편하게 만들고
스스로도 평온하다.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야말로
품격 있는 인생을 산다.
잘 산다는 것은 마음이 평온한 것으로
말이 많지 않으며 세상과 경쟁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걷는 사람,
흔들림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짜 인생의 부자다.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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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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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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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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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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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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