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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사 안수집사 피택자 훈련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고전 9:15-19)
교회가 직분 맡을 자를 세우는 일은 축복스런 일이다. 그것은 교회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이요,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교회가 확장됨에 따라 사도가 해야 할 일과 집사가 해야 할 일을 각각 분담해야 했다(행 6:1-7). 또한 안디옥 교회도 크게 성장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해외선교사로 파송하는 일에 대하여 금식하며 기도한 후 두 사람을 안수하여 파송했다.
교회 직분의 소중함
사도 바울은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 강한 의지를 표현했고, 생명 바쳐 감당하였다(행 20:24). 기독교인 직업의식은 청지기 직분과 일맥상통한다. 세계2차 대전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진주만을 폭격한 비행단들을 보라. 이처럼 국가의 명령도 생명 바쳐 감당하거늘 하늘이 내리는 직분이야 얼마나 황송하고 귀한 것입니가? 그래서 바울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라며 감사하였다.
사모해야 할 직분
어떤 분은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을 소홀히 여기고 직분을 감당치 않으려고 내놓는 것을 큰 양보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디모데전서 3장 1절을 보면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간절히 바란다면 그것은 좋은 욕망이다”(새번역)라고 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 일에 “나를 보내주소서”라고 외쳤다(사 6:8). 하나님이 허락하신 직분으로서의 좋은 권사님, 안수집사님이 되시기를 사모하시고 기도하시며 가장 모범적인 권사님, 안수집사님의 모델이 되신다면 이 모든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소명감의 회복: 어떻게 하여야 직분을 갱신할 수 있을까? 먼저 하나님께서 주셨던 소명의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권사님들이나 안수집사님들이 안수 받고 일어나셨을 그때의 감회는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감회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세워주셨다’는 소명감으로 가득 찼을 때가 그 때였을 것이다. 그래서 에드워드 루이즈라는 사람은 “권찰로 임명받을 때 집사로서, 권사로서, 장로로서 처음 취임 받을 때의 소명감을 회복하는 것만이 직분을 갱신할 수 있는 방법이다”라고 하였다.
처음 감격의 유지: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은 많은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에 있었다. 처음 직분 맡을 때는 감격과 두려움으로 가득차지만 얼마쯤 지나면 그런 처음의 감격이 사라진다. 직분이 시들해 보이고, 직분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며, 무감각해진다. 신학자 레오날드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골방 기도만이 이 첫 감격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지적하였다.
자기 훈련: 어떤 그릇이든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자신을 갈고 닦는 자기훈련을 말한다. 남에게는 지도하고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는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 오래된 직분자가 범하기 쉬운 약점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롬 2:21)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고 먼저 자기를 책망하고 훈련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한다.
내 몸을 쳐 복종하는 삶: 사도 바울은 “내 몸을 쳐 복종케 한다”라고 하였다. 항상 자기를 쳐서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일은 경건하게 살려는 성도의 마땅한 본분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 일을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아름다운교회의 믿음과 사랑과 기도의 어머니 또는 형님으로서의 권사와 안수집사의 직분을 항상 새롭게 하여 주님께 복종하는 일은 항존직분자로서 마땅히 노력해야 할 일인 것이다.
비록 사람들 간의 갈등과 불협화음으로 집사제도를 도입하게 되었지만(행6장)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교회의 체질을 더 강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는 창조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때로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일을 하면서 난관에 부딪치면서 그 일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난다. "왜 사서 고생하나?" 그러나 어려움이 있어도 교회를 향한 선한 손길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앞으로 우리에게도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똑같은 문제들, 즉 편애 문제, 소외감 문제, 섭섭한 문제 등 각종 문제들이 일어날 수 있다.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문제, 그런 소외감이 없을 수는 없다. 그때 너무 실망하지 말고, 선한 방법을 찾아 선한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
흔히 교회에서 생기는 갈등과 소외감을 극복하는 두 가지 좋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소외감을 느낄 때 더욱 교회 일에 뛰어들어 말없이 충성하는 방법이다. 말없이 충성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 싫어하는 공동체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또 하나는 범사에 감사하며 자숙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방법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갈등과 소외감을 극복하는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결국 사도들이 제자들을 부르고 일곱 집사를 세우도록 했다. 그때 사도들이 집사들을 임명하지 않고, 선택할 사람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 후 일곱 집사를 세우는 것은 제자들이 알아서 하도록 맡겼다(3절).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높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제단에서는 겸손하게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인정해 주어 중요한 직분을 맡기면 감사히 받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맡기지 않으면 조금 더 기다리며 충성하면 된다. 그런 후에 그 공동체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중요한 일꾼으로 선택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분 자신도 그 직분을 소중히 여기며 교회를 사랑하게 된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항상 다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의 사역은 그것이 말씀의 봉사이든 공궤이든 모두 거룩한 사역이기 때문에 교회를 위한 봉사의 문 앞에서는 항상 겸허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겸허한 사람들이 결국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된다. 실질적으로 초대교회에서 선택된 일곱 집사들은 소매를 걷어 부치고 교회의 영적 성숙에 대한 모범적인 길을 앞서 행했고, 그리고 교회와 이웃을 돕는 강한 열정을 가지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교회의 중요한 일꾼으로 선택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 일꾼에는 두 종류의 일꾼이 있다.
일을 만드는 일꾼이 있고, 일을 하는 일꾼이 있다. 충성하라는 말은 일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일을 하는 자가 되라는 말이다. 교회 일을 하면서 어떤 경우에도 일을 하다가 일을 만드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충성스런 일꾼이 되기 위해서 더욱 중요한 것은 말이다. 맡겨진 일을 헌신적으로 잘하는 사람도 충성스런 일꾼이지만 말을 소금으로 고르게 함과 같이 지혜롭게 하는 것이 더 충성된 모습이다. 생명관계로 맺어진 교회생활에서 충성은 일보다 말과 더욱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그리스도의 일꾼이란 '판단 받지도 않고 판단하지도 않는 자'를 말한다.: 먼저 그리스도의 일꾼은 판단 받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상습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에 의해서 판단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판단에 쉽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보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사도 바울은 판단 받을 때 그 일을 큰 일로 여기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삶의 지혜이다. 살다 보면 때로 이상한 판단이 귀에 들려오는 경우가 있다. 그때 너무 지나치게 울분을 가지지 마십시오. 가볍게 생각하십시오. 정말 참기 힘든 경우에는 주님이 당하셨던 멸시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가복음 6장 3절을 보니까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말한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판단 받고 멸시받는 것은 더 참기 힘든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관하지 않고 위대한 길을 가셨다.
판단을 듣고 주저앉아 버리면 안된다. 판단을 듣고도 겸손히 반성하면서도 전진하면 넉넉하고 위대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고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 누구든지 성공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 벽을 곡 깨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은 판단 받지 않는 자세보다 판단하지 않는 자세이다. 신앙의 성공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바로 이 판단하는 태도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기본 원리가 판단이 아니라 은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판단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데, 우리가 판단하는 모습을 보이면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러므로 항상 판단하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살펴야 한다. 누구는 판단 못해서 안하는 것인가? 서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고, 그렇게 판단할수록 문제는 더욱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다.
성경 민수기 12장을 보면 미리암이 문둥병 걸린 사건이 나온다. 왜 문둥병에 걸렸는가?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구스 여인이 검둥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때 모세가 온유하게 대처하니까 하나님이 대신 그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미리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너는 얼굴이 흰 것이 자랑이냐? 더 하얗게 만들어 주겠다. 아예 꽃도 그려 주지." 우리는 판단하는 태도보다는 항상 긍휼히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하고, 사람의 실수에 대해 관대하고, 관용하고, 은혜를 앞세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일꾼이 되려면 그런 태도가 꼭 필요하다. 사람을 잡아당기는 것보다 밀어 주는 것을 잘 하는 분들이 되라.
그리스도의 일꾼이란 '주께서 오실 날을 바라보고 사는 자'이다. : 본문 5절 말씀을 보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때에..."라는 말은 정말 의미심장한 말이고 기대가 되는 말입니다. 바로 '그 때'를 바라보고 사는 자가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두 부류의 신자가 있다:
1) 첫째는 오늘을 바라보고 사는 신자입니다. 보상을 생각하다가 보상이 없고 고난이 있으면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2) 둘째는 그 날을 바라보고 사는 신자입니다. 신랑 앞에서는 그 날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어떤 고난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오늘만 바라보고 사는 자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이 땅의 순례자이며 자신의 참된 지위가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일꾼이 되라. 그리스도의 일꾼은 믿는 자라면 마땅히 되어야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일꾼이 되어 십자가의 복음을 잘 전하고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고 판단 받지도 않고 판단하지도 않는 성도가 되어 보라. 그리고 그 날에 하나님의 영광스런 칭찬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항존직분자의 신앙생활수칙 및 지침
[1] 제직의 서약
1. 모든 예배와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한다.
2. 맡겨진 직책과 분담에 대하여 충실히 이행한다.
3. 십일조와 시간적 봉사에 있어서 일반 교우들의 본이 된다.
4. 병든 자와 슬픔을 당한 자를 돌아보기를 힘쓴다.
5. 모든 성도들에게 친절과 사랑으로 대하고 인내와 성실과 양보로 덕을 세운다.
6. 교회와 성도간의 친교를 위하여 조력하며 새로 믿는 형제들을 돌아보고 성도들의 유기적인 단결을 힘쓴다.
7. 절대로 낙심이나 불평을 일으킬만한 말을 삼가고 성도간의 믿음과 소망이 넘치도록 항상 서로 격려한다.
8. 제직은 모든 사업에 지혜와 노력을 기울여 직접 참여하고 언제나 목표가 달성되기까지 흔들리지 않는다.
9. 자기의 맡은 일 뿐만 아니라 남의 일도 돌아보고 모든 직분에서 항상 협조하기를 힘쓴다.
10. 성경 애독과 기도 전도하는 일에 앞장서도록 한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 4:2)
[2] 제직의 자세
1. 청지기로서의 자세 -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주인의 것을 위임 맡은 대리자이기에 주인의 뜻대로 맡은 것을 사용해야 하며 주인에게 유익 되도록 해야 한다.
2. 주인으로서의 자세 - 주인정신으로 내 책임을 다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3. 제직과 가정생활 -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
4. 제직의 사회생활 - 진실한 생활, 책임 질 줄 아는 생활, 신앙과 생활의 모범
5. 제직의 경제생활 - 이자를 받기 위해 돈놀이를 하지 말아야 한다. 금전거래는 분명해야 하고 보증을 함부로 서서는 안 된다.
6. 제직과 직업관계 - 직업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신앙 중심으로 직업 선택
7. 제직의 언어생활 - 아름다운 말씨훈련, 이간, 험담, 거짓말, 불평해서는 안 됨
8. 제직과 심방 - 부모의 심정으로 교인을 돌보고, 친구의 심정으로 돌보아야 한다.
[3] 항존직분자의 정의
1. 하인(요2:5): 예수님이 가나 혼인잔치에 초대 받았을 때 음식을 나르는 자를 가리켜 사용했다. 그러므로 하인은 음식의 공급자이다. 제직 은 신령적 사업을 위해서 무엇을 공급할까? 항상 준비하였다가 필요로 하는 때에 요청이 있는 곳에 거절하지 않고 공급한다.
2. 사환 (마22:13): 사환이 갖는 그 뜻은 심부름 하는 자라고 하겠다. 제직 직분자는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수종 드는 자이다. (요12:26)
3. 섬기는 자(고전16:15, 10:35-45): 섬기는 자는 섬기기로 작정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이외의 사람은 다 상전이다.
4. 종 또는 일군(고후6:4,살전3:2): 종 또는 일군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일군(종) 제직 일군(골1:25)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교회이 모든 직분은 제직 일군(머슴, 노동자)으로 선한 일군(딤전4:6), 신실한 일군(골1:7,4:7) 등으로 어떻게 봉사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5. 사역자(고전3:5): 직분자는 제직 사역자로서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선을 이루어야 한다.(롬13:4)
[4] 교회 항존직분자의 자격 (딤전3:1-13, 딛1:5-9)
1. 선한 일을 사모하는 자(약4:17): 어느 인간이 갖는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일이다.
2. 책망할 것이 없는 자: 교인으로서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도덕적인 면에서나 법률 적인 면에서 흠이 없어야 한다.
3. 한 아내의 남편 또는 한 남편의 아내: 정당한 혼인관계에 있는 자 성경은 음행하는 자를 배격하고 있다.
4. 절제하는 자: 절제는 사람이 자기감정대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행동으로 시간. 의식주. 금전. 말. 부부생활에 이르기까지의 것을 뜻한다.
5. 근신해야 한다: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니 말과 행동, 생각 등을 삼가 조심하는 것이다.
6. 아담해야 한다: 근신이 내면적인 면을 취급했고 아담한 것은 외적인 자격기준으로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풍겨나야 한다.
7. 나그네 대접: 자애스러운 마음가짐과 친절한 덕으로 겸손한 자세로 신앙적인 나그네를 섬기는 일이다.
8. 가르치기를 잘하는 자: 가르침에는 성경적 지식이 있어야 하고 표현능력이 따른다. 언어적 표현은 물론 문자적으로도 표현해야 하고 가르쳐 본 자라야 되며 가르치고 있는 자라야 한다.
9. 술과 흡연을 금하는 자: 술로 세상의 유행과 향락에 빠지는 것을 금하며 쾌락주의를 배격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움으로 사는 것과는 다르다.
10. 구타하지 않는 자: 구타는 감정표현으로 손으로 손에 쥔 것으로 말로나 글로 타인을 공격하는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공격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도 금한다.
11. 관용하는 자: 이것은 무조건적 용서가 아니다. 구타하지 않는 일의 상대적 해석으로 타인의 숨겨져 있는 약점. 비밀을 찾아 보복하는 일이 아니다. 이해와 사랑으로 바른 길로 인도하는 행위이다.
12. 다투지 아니하는 자: 분쟁의 계속이 이해의 부족으로 온다. 양보하지 않을 때 일어나고 시기할 때 생긴다.
13. 돈을 사랑하는 자: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만족하지 않고 물질을 추종하는 상태를 말한다. 정당하지 못한 재물을 주고받으며 탈법적인 치부나 정당한 분수 이외의 요구나 매점 매석 행위나 불량품을 생산하는 행위나 판매를 금한다.
14. 자기 고집대로 행하지 않는 자: 고집은 완고한 자기 의사만을 주장하는 것이다. 공의로운 결의를 따르지 아니하고 정당한 의사를 억압하는 행위로 순종할 줄 모르는 것을 뜻한다.
15 의로운 자: 믿음의 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서 법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정당함을 뜻한다.
16. 거룩한 자: 인간의 행동, 도덕적 수양에서 얻어지는 외모적인 엄숙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성화상태를 뜻하며 세상에서 구별된 진실의 속성을 갖춘 자.
17. 외인에게서 선한 증거가 있는 자: 의로운 자. 거룩한 자의 종합적인 면에 불신자에게서도 칭송을 받을만한 자라야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이 일치함을 뜻한다.
18 말씀을 지키는 자: 진리의 수호자로 가르칠 뿐만 아니라 이단집단에 참석하는 일, 이단집단에 있는 자를 초청 설교하게 하는 일, 인위적인 집단을 구성하는 일, 이단집단에 헌금하는 일, 교인이 이단집단이나 그 집회에 가는 것을 막지 아니하는 일, 맡은 부서의 일을 충실하게 아니하는 일. 교회에서 안 가르치는 일, 말씀을 증거하지 아니하는 일을 잘 살펴서 실천해야 한다.
19. 신앙 년조가 깊은 자: 신앙적으로 스스로 자기를 살필 줄 알아야한다. 그리고 경계할 줄도 알아야 하고 타인의 조롱거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 ( 행20:28-31)
[5] 교회 봉사자의 태도
1. 자원하므로: 교인의 직분은 스스로 맡는 것이 아니라 조직기능(당회) 을 통해서 임직하므로 자원은 임직자가 그 직을 수행하는데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하는 것을 가리킨다.
2.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제직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한 부분이다. 열성이 어떤 인간의 방법에 치우치는 것을 금하고 공의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3. 더러운 이를 위해서 아니한다: 제직 모든 직은 근본적으로 봉사직이다. 교역자와 관리직원을 제외한 어떤 직분도 금전을 요구하는 봉사자가 될 수 없다. 제직을 빙자하여 교회나 사회에서 이권을 얻을 수 없다.
4. 즐거움으로 한다: 자원하는 태도에서 봉사의 즐거움을 갖게 된다. 보수를 받지 않아도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주의할 것은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 봉사해서는 아니 된다. 제직 일을 해야 즐거워지니까 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5. 주장하는 자세로 아니한다: 성경에는 [다스린다]는 말의 뜻이 두 가지로 구분된다. 일반적인 다스림은 권세를 가리키고 교회를 향한 다스림은 [앞장선다]는 말이다. 교회 직분자는 봉사하는 일이니 전도하는 일, 가르치는 일에 앞장서서 자기의 주장대로 남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회가 수임한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6. 본이 되므로 봉사한다.: 신앙생활에서 본이 된다. (집회참석, 봉사시간, 재정, 전도 등) 사회생활에서 본이 된다. (가정, 생업) 행동 (몸가짐, 언어)
[6] 직분자가 명심해야할 몇 가지
1. 직분자도 교인이다. 2. 직분은 계급이 아니다.
3. 직분자는 봉사자이다.
4. 내가 한 일이라 해도 곧 교회가 한 일이므로 자기를 내세우지 아니한다.
5.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6. 다른 봉사자와 같이 일하며 다른 사람도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7〕항존직분자의 자격과 직무
①불평하는 말 대신에 남을 칭찬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②남을 저주하는 말 대신에 축복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③이간질하는 말 대신에 화해의 다리를 놓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④실망을 안겨 주는 말 대신에 용기를 주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⑤속된 말을 지나치게 하지 말고 신앙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
▣ 거룩한 직분자로서의 훈련
1)언어 훈련
언어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교통(Communication)의 수단으로 쓰인다. 촬리 쿨리(Charles Cooley)는 말하기를 “커뮤니케이션이란 인간관계가 존재하고 발전하는 메카니즘, 즉 정신의 모든 상징과 의미를 공간적으로 전달하고 시간적으로 보존하는 일체의 수단을 뜻한다”고 했다.
언어의 종류는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태도나 몸짓으로 전달하는 비언어(非言語)인데 학자들은 대개 비언어를 활용하는 비율을 65%로 보고 있다.
둘째, 음성으로 전달하는 언어인데 이것을 활용하는 비율을 대개 35%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언어는 단순히 소리의 전달만이 아니고 그 사람의 마음의 표현이다.
때문에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아서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남을 설득하고 신앙적으로 권면하는 직임을 맡은 권사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내용의 언어에 대한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다.
2)태도(Attitude)의 훈련
논어에 보면 “유덕(有德)한 인품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 세 가지 영향을 끼친다”고 되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하고 위엄 있게 보이고, 가까이서 바라보면 부드럽고 따스하게 느껴지며, 그가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 늠름하고 준엄하다.” 그 사람의 태도는 그 사람의 인품을 나타낸다. 특별히 신앙 인격을 가진 권사는 남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태도훈련을 받아야 한다.
①직분자의 태도는 항상 진실해야 한다.
②직분자의 태도는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
③직분자의 태도는 품위가 있어야 한다.
④직분자의 태도는 신앙적이어야 한다.
⑤직분자의 태도는 남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
3)사고의 훈련
신앙인은 언제나 생각할 때 믿음의 사고를 하도록 훈련되야 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믿음의 사고를 하는 사람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을 역사 속에서 성취하셨음을 알 수 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열두 지파의 대표를 선택하여 가나안 땅을 탐지하도록 파견하였을 때 40일간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그들 중 열 지파의 대표들은 부정적인 면에서 악평을 하였다. 결과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못들어갔다.
4)용서에 대한 훈련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아픔을 통하여 자기의 사랑을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다. 사도 요한은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9-11).
세상을 살다보면 나에게 손해를 주고, 아픔을 주고, 나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중상모략하고,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는 정말 감정을 억제할 수 없고 분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증오심과 미움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침내 정신적인 질환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1-22)고 하셨다.
그리고 산상보훈의 말씀에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용서하는 넓은 인격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화해의 사귐을 갖도록 해야 한다. 갈등 속에 있는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직임과 사명을 갖고 있는 권사들은 특별히 먼저 용서의 훈련을 통함으로 자아의 인격을 성숙케 하고 화해자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직분자는 교회 안에서 결코 명예직이 아님을 밝혀 둔다. 그 사명이 얼마나 막중하고 귀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영국의 어느 정신병원에서 연구한 논문에 의하면 정신질환자의 95%가 “용서”에 대한 훈련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내가 남을 용서할 수 없을 때 증오심과 미움이 생기고, 내가 남의 용서를 받지 못할 때 불안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직분자의 올바른 자세
교회에서 직분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신앙적으로, 또는 인격적으로 올바른 자세를 갖는 것이다.
사람이 신앙적으로 올바른 변화를 가져오려면 지식(Knowledge)의 변화, 태도(Attitude)의 변화, 그리고 행동(Action)의 변화가 따라야 한다. 여기서는 몇 가지 직분자로서 지녀야 할 올바른 자세를 설명하고자 한다.
1. 신앙적인 자세: 권사와 안수집사는 바나바와 같이 믿음이 뛰어나고 성령충만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신앙적 자세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1)주일성수 하는 신앙적인 자세: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철저히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통을 통하여 그의 삶을 새롭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주일을 성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업, 직장, 애경상조 등으로 주일예배에 참석을 못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취미생활인 등산, 낚시, 스포츠 관람 등을 즐기기 위해 교회에 출석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권사와 안수집사의 거룩한 직임을 받은 사람은 이러한 이유를 극복해야 한다. 주일을 철저히 지키는 신앙적인 자세가 없이 어떻게 남을 설득력 있게 신앙으로 지도할 수 있겠는가? 주일성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적인 기본 자세이다.
2)기도하는 신앙적인 자세: 기도는 성령을 받는 통로이며, 영적인 권위와 능력을 얻는 길이다. 시편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편145:18)라고 되어 있다.
3)물질 봉사의 신앙적인 자세: 바나바는 본래 본명이 요셉이었지만 바나바로 부름 받았을 때 자기가 가졌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바쳤다(행4:36-37). 사실상 누구든지 자기의 소유를 팔아 헌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엔 어떤 의미와 가치가 주어져야 하고 개인적인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교회에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헌금하는 생활이다.
성서적으로 의무화되어 있는 십일조 헌금은 물론 감사헌금과 절기헌금을 함으로 다른 사람을 권하고 지도하는 입장에서 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찬양대원이나 교회학교 교사들을 사랑으로 대접하고 그들을 격려하는 일도 힘써 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 물질의 희생을 통한 봉사도 신앙적인 자세 가운데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4)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신앙적인 자세: 성경공부는 우리의 일생을 다 바쳐 해도 모자란다.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지도자가 되려 하면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몰라서는 안 된다. 특별히 권사의 직임을 받은 사람은 구역에서 책임을 맡고 남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공부하는 자세를 확립해야 한다.
2.인격적인 자세/권사와 안수집사는 남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직임을 가졌다는 점에서 자신의 인격이 성숙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아훈련에 힘쓰고 인격적으로 남에게 존경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네 가지 면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첫째, 통일된 인격으로 자신이 자신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고,
둘째, 사랑과 존경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며,
셋째,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고,
넷째, 시험과 유혹을 물리침으로 마귀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
특히 권사의 직임은 성숙된 신앙 인격을 가지고 남을 권면하고, 위로하며, 격려하고, 화해자로서 전도인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연약한 자를 돌보고, 믿음이 약한 자를 권면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어야 할 사명을 가진 권사는 언제나 그 생각을 믿음의 생각으로 바꾸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함으로 맡은 바 사명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모범적인 직분자 모델로서의 바나바
바나바는 구브로(Cyprus)에서 출생한 레위인으로서 원래 이름은 요셉이며 예수를 영접한 후 사도 바울과 함께 이방인 전도의 개척자로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의 뜻은 “위로의 아들”(Son of Consolation), 또는 “권위자”(勸慰者), 그리고 희랍어로는 “권면”, “격려”라는 뜻을 가졌다(참조, 행4:36, 13:15, 9:31). 그의 이름에서 나타나는 대로 그는 성서에 나타난 권사의 모델로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데 여기에서는 성서를 중심으로 그의 신앙과 미덕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1.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다(행11:24).
바나바는 그의 성품이 착할 뿐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도 성령 충만한 신앙을 가졌고 믿음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어 저들을 권면하게 하니 많은 사람들이 바나바의 권면하는 말을 듣고 큰 무리가 주께 더했다고 했다.
그 후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사울(바울)을 만나고 함께 안디옥에 와서 교회에 일 년간 머무르며 큰 무리를 가르치니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권사는 신앙적인 면에서 남을 권할 만큼 능력을 가져야 하며, 가르치고 권면하는 직무를 감당하기 위하여 먼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를 많이 하여 성령충만한 신앙 인격을 구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멸시받지 않고 존경받도록 바나바와 같이 착한 성품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권위가 생기는 법이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합심하여 열심히 기도하였을 때 성령을 받았고, 그 능력에 의하여 전도하고 초대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바나바도 성령이 충만했었기(행11:24) 때문에 성공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이 영적인 권위나 능력이 없다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은 세속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권사와 안수집사의 사명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무릎꿇고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그래야 신앙적인 권위와 능력을 부여받아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고 권면할 때 영향력 있게 할 수 있게 된다.
바나바가 바울과 함께 이방인 선교 센터로서 안디옥 교회를 세웠을 때 먼저 성경을 가르쳤다고 했다(행11:26). 그는 성경을 가르칠 만큼 성경에 관한 지식이 있었던 것이다.
훌륭한 직분자가 되려면 성경에 관한 깊은 이해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기 위하여 권면하고 위로할 때 성경 말씀보다 더 권위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2. 바나바는 헌신적인 봉사의 모범자이다(행4:37).
바나바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예루살렘이나 또는 그 부근에 있던 토지를 팔아 사도들 앞에 바쳤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할 때 노동하면서 전도하는 일에 봉사한 사람으로 나타나 있다(고전9:6). 가진 재산을 헌납한 신앙심이라든지 친히 노동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전도한 행위는 바나바가 헌신적인 봉사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권사와 안수집사의 직임 가운데는 교회가 필요로 할 때 헌금이나 구제활동, 봉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사명이 있다. 왜냐하면 직분자는 남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직책이기 때문이다.
3. 바나바는 중재인으로서 화해하는 일에 힘쓴 사람이다(행9:27).
사울이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후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귐을 가지려고 하였을 때 제자들은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평소에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고,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까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갔던 사람이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를 두려워하였고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했던 일, 즉 그가 어떻게 주님을 만나고, 주의 음성을 듣고, 다메섹에서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설명해줌으로써 사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에서 잠시 머무르며 제자들과 사귀도록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바나바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반목 상태에 있었던 사울과 주의 제자들 사이에서 중재자로 화해의 사역을 잘 했던 것이다. 바나바는 실로 지혜, 사랑, 관용의 덕을 가지고 화해자로서 살았던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특별히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음으로 수 많은 성도들이 더해갔지만 교권을 잡으려고 했다든지 자기를 영웅시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바나바는 화해자로서 아름다운 삶을 산 사람이었을 뿐 만 아니라 겸손한 주의 종이었다.
특히 권사의 직무 가운데 중요한 것은 “권위자(勸慰者)로서 남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이다. 어떤 형제자매가 잘못된 생각을 한다든지, 잘못 이해함으로써 오해하는 일이 있다든지, 다른 사람과 갈등 속에 있을 때 권사는 그들을 찾아가 잘 이해시키고, 설득하고, 권면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마음에 상처받은 사람들, 또는 병든 자를 찾아가 위로하는 일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또한 믿음의 낙심자들을 찾아가 권면하여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새롭게 해 주어야 할 사명도 있다.
4. 바나바는 교회의 심부름도 열심히 잘하였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헬레니스트 유대인들과 논쟁하다가 마침내 미움을 사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을 때 바나바는 그를 가이사랴로 호위하여 가서 선편으로 다소에 보내는 일을 도왔다(행9:29). 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파견해서 가게 했다. 이는 당시 안디옥에서 유대인 이외의 사람들이 신앙에 들어섰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져 유대인 간에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 사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바나바를 보낸 것이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많은 교인들이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다소로 가서 사울(바울)을 데려다가 함께 사역을 하면서 안디옥 교회의 기초를 놓게 되었다(행11:22-26).
바나바는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황제 때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들자 사울과 함께 교회가 보내는 보조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안디옥으로 돌아올 때 조카인 마가 요한(마리아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행12:25). 교회는 선교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심부름할 일꾼이 필요하다. 봉사의 직무와 전도의 사명,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교역자 외에 많은 평신도 자원 봉사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사와 안수집사의 직임을 받은 사람들은 바나바와 같이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는 주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5. 바나바는 전도에도 힘썼다(행13-14장).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는 물론 안디옥에서도 전도를 많이 했다. 특별히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여 구브로에 보냈을 때 전도자로서 활약했고, 또다시 소아시아의 고원지방 갈라디아 지역에 전도하러 보냈을 때도 전도자로서 바울과 함께 사역을 했다. 이 때에 바나바는 연장자로서 설득력 있고 부드럽게 청중들에게 전도하였는데, 바울은 세찬 논쟁으로서 전도를 한 것 같다. 그래서 항상 핍박자들이 돌을 들어 칠 때에는 바나바를 노리지 않고 바울을 표적으로 삼았다(행14:19).
바나바가 초대교회에 큰 공적을 남긴 것은 바울을 찾아내 함께 동행하면서 이방인의 전도에 힘쓴 결과이다. 바나바가 사울(바울)을 만나 그를 돕지 않았다면 초대교회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런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나바가 성서적으로 권사의 모델이라면 권사는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일에 교역자를 도와 교회를 견고케 하는 자들이라고 하겠다. 각 교회는 권사의 직임을 받은 사람을 구역지도자로 세워 일하게 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전도의 사명을 효율적으로 감당케 하기 위하여 권사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바나바는 그에게 주어진 신앙 이름대로 권사의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생각된다. 권사의 어원에서 지적한 대로 희랍어 “파라클레시스”는 ‘권면’(exhortation)이란 뜻을 가졌는데, 바로 바나바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로서 헌신적인 봉사의 모범자였고, 남을 권면하고 회해시키며, 교회 심부름을 기쁨으로 했고, 전도에 힘써서 초대교회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은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우리가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법이다.
교회란 말의 뜻
교회는 "엑크레시아"라는 히랍어로서 성경에서 14회나 사용되었으며 "피조 된 인간이 그들이 소속된 사회에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성령님에 의해 거듭나서(요 3:-6)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목적으로 성령님에 의하여 예배, 교육, 친교, 전도, 진리수호를 위하여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을 의미한다(행 19:39, 행7:38, 19:32, 5:11, 8:3, 고전 3:17, 계2: ). 간단히 말한다면 '거듭난 성도들의 모임'으로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5대 기능을 원활히 수행하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교회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상이다.
왜냐하면 우리 몸의 특성을 이해함으로 교회의 특성도 쉽게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은 여러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음의 세 가지 대표적인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1) 다양성(diversity)
"몸은 한 지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14절).
우리의 몸은 하나이지만 우리 몸에는 눈, 코, 입, 손, 팔, 다리, 발과 같은 다양한 지체들이 각각 독특한 기능을 가지고 다양하게 활동한다. 이 다양한 기능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멈추게 되면 몸은 당장 이상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지체가 위치와 모습과 기능은 서로 달라도 그들의 존재가치는 몸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교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성령을 통해 각각 다양한 은사(恩賜: Spiritual Gift)를 부어 주셨다.
어떤 이에게는 눈의 기능을, 다른 이에게는 입의 기능을 또 어떤 이에게는 손과 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교회 안의 모든 지체들에게 다양한 재능을 부어 주셨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생존하고 정상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지체인 교인들이 각자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자신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해야 한다. 다양한 은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의 대내외적 활동, 즉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개혁해 나가는 사명과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
다양성에서 중요한 것은 타인의 독특성과 개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성과 기능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는 그 다양성의 넓이와 깊이만큼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적인 사회는 다양하게 발전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지니는 다양성은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2) 조화성(harmony)
"하나님께서는...몸의 조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몸 안에 분열이 없이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24-25절).
몸이 지녀야 하는 다른 중요한 특성은 조화 또는 상호성이다. 몸의 지체들이 독특하고 훌륭해도 그 지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 몸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병들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로 인한 불화와 다툼, 대화의 단절과 같은 일들이 자주 발생하여 지체사이의 원활한 흐름이 막히게 되면 교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모든 지체의 상호 필요성이 존중되고, 지체사이에 활발한 교제가 이루어져야 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돌보는 정신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 교회의 이러한 조화성은 우리 사회에도 필요하다.
사회의 다양한 제도, 신분, 직업, 계층에 대한 상호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존중, 그리고 이들 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사회는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직업이나 신분사이에 편견이나 불화로 인해 상호 교류가 막혀 버리면 그 사회는 사회 구조가 불균형하게 발달함으로 조화가 깨지고 불안정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3) 연합성(unity)
"지체는 많아도 몸은 하나입니다"(고린전서 12장 20절).
인간의 몸은 따로 따로 떨어진 조각들의 모임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기능적인 지체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몸이다. 이 연합이 없이는 인간의 몸은 기능하지 못함은 물론 존재할 수조차 없다. 우리 몸 중에서 눈이 손에게 '너는 내게 필요 없다'고 하거나 머리가 발에게 '너는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들을 잘라 버리면 그 지체들은 죽어 버리고 그 몸은 불구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립과 분열은 몸을 죽이는 독소이며 연합은 몸을 살리는 본질적인 힘이다. 연합을 통해서 몸의 다양한 지체들은 그들의 기능과 역량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교인간의 친밀한 협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나눔이 이루어지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교인들의 연합이 이루어 질 수 있다. 이러한 교회의 특성은 인간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 사회에 아무리 유능하고 특출한 인물이 많을지라도 그러한 특출한 능력들이 사회적 기능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기 위해서는 사회 안의 다양한 요소와 계층들을 연합시키는 사회적 기능이 발달되어야 한다.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위해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국민들의 자유로운 사회 참여를 위해 다양한 대중문화가 개발되어 자유로운 만남의 기회가 마련되어야 하며 종교, 정치, 사회, 문화의 다양한 분야들 간의 협력관계가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사회의 모든 요소들이 원활한 교류를 통해 조화와 연합을 이루어 기능이 극대화되며 안정된 사회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이렇게 교회는 하나의 작은 이상사회(理想社會)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교회가 존재하는 곳에 이상적인 사회가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류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천여 년 동안 기독교 정신의 영향을 받아온 서양사회에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안정된 사회가 실현될 수 있었던 사실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없다.
4)성령의 성전(The Temple of the Holy Spirit)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모르십니까?"(고린도전서 3장 16절). 기독교의 교회가 다른 사회단체와 구별되는 가장 독특한 점은 성령의 존재와 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발생은 이천 여 년 전 예루살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대교의 큰 명절중 하나인 오순절 백이십여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성령(聖靈)이 그들 위에 강림하였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그들은 새로운 능력을 부여받았고 그 능력에 의해 그날 삼천 명의 새로운 신자들을 얻게 되었다(사도행전 1:12-2:13). 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곧 기독교의 교회가 탄생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교회는 이렇게 성령에 의해 세상에 태어났고 그 성령은 계속해서 교회 안에 또한 모든 교인들 안에 존재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진정한 평가기준은 외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성경이 제시하는 내적인 기준들, 즉 성령의 열매가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적인 삶을 통해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질과 가치를 높이는 일에 기여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의식하여야 할 것이다.
2. 교회의 목회적 기능은 무엇인가?
2.1. 복음전도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장 19절).
어느 바닷가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마을 인근의 바다에는 험한 암초들이 솟아 있어서 지나다니는 배들이 난파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나곤 했다. 언덕 위에 등대가 하나 있었지만 악천후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어느 날 마을의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초라하지만 해난 구조소를 세우고 구조작업을 펼쳤다. 이 마을의 해난 구조대에 관한 소문은 곧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많은 기금과 자원 봉사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해난 구조소는 늘어나는 자원 봉사자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가 없어 적립된 기금으로 새로운 해난 구조소를 신축하고 대원들을 위한 오락시설도 마련하였다. 회원들이 더욱 늘어나면서 회원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사교행사가 빈번하게 개최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들의 본연의 업무인 인명구조에 대한 관심은 점점 시들어 가기 시작했고 해난 구조대는 서서히 회원들의 사교클럽으로 모습이 바뀌어 갔다. 그렇게 되자 몇몇 의식 있는 회원들이 사교클럽으로 변질된 그 해난 구조대를 탈퇴하고 그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바닷가에 다시 새로운 해난 구조단을 세웠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명령은 "가서 모든 민족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구원사역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누군가가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 일이다. 그 일을 예수님이 대신 하셨으므로 인간들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죄의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구원사역의 두 번째 요소는 세상에 나아가 이 기쁜 복음의 소식을 널리 선포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사역이 바로 예수께서 교회에게 맡긴 사명이다. 예수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행전 1:8)라고 말씀 하셨다. 교회의 복음전도는 자신의 안방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국경을 넘어 땅 끝까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이다. 현재의 기독교는 이천년 기독교의 헌신적인 선교의 결과이다. 한국 기독교의 눈부신 발전은 100년 전 서양교회들의 헌신적인 선교가 밑거름이 되었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이며 또한 목적이다.
2.2. 교육과 훈련/ 교회의 두 번째 중요한 기능은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교인들을 신앙적으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일이다. 교회의 교인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이 교육받고 훈련되지 못하면 그들은 다만 냉동실 안의 냉동된 자산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 안의 모든 교인들이 신앙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그들의 가슴속에 기독교의 고상한 가치관을 확립하게 될 때 그들의 삶이 바뀌고 그들이 속한 사회가 변화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
어린 아기들의 모습은 모두 아름답고 귀엽다. 그러나 그들이 성장하면서 어떠한 가치관을 따라 사느냐에 따라 히틀러도 될 수 있고 테레사 수녀도 될 수 있다.
가치관은 삶의 방향과 질을 결정해주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가치관을 가져야 하느냐는 문제는 인간에게 너무도 중요한 과제이며 그러므로 교회 교육과 훈련의 영원한 화두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지녀야할 가장 고상한 가치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장 13절). 교회의 교육과 훈련은 이 가치관이 궁극적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1)믿음(faith)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히틀러는 자신의 신념대로 육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으며 테레사 수녀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인도의 캘커타 빈민굴에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다가 그의 삶을 마쳤다. 신념은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신념은 상대적이고 변화하며 잘못되어질 수도 있다. 세속적인 것을 절대가치화 할 때 인간은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 인간의 영혼과 사회적 삶의 부패와 죽음을 막아주는 생명력 그 자체이다.
2)소망(hope) 단테의 신곡에 보면 단테를 안내하던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에 이르러 그곳은 죽을 수 있는 희망조차 없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소망이 없는 현실의 삶은 지옥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에겐 본능적으로 미래를 바라는 소망이 있다. 인간에게 있어 소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며 역경을 견디고 이기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대와 소망은 종종 실망과 좌절을 가져온다. 그 기대와 소망이 세상적인 조건이나 약속 같은 것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조건과 약속은 항상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확실하고 변치 않는 소망은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해야만 한다. 그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꿈과 비전과 소망이 있을 때 인간은 오늘의 장애를 넘어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 수 있다.
3)사랑(love) 위를 바라보는 믿음과 앞을 바라보는 소망은 우리의 삶을 고상하게 해주는 귀중한 가치들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만으로는 우리의 삶이 아직 이기적이요 자기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다. 믿음과 소망의 가치가 진정으로 고상한 가치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 사랑의 대상이 부모, 자녀일 수도 있고 친구 혹은 이성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사랑은 대부분이 "때문에"(because of)의 사랑이다. 부모이기 때문에, 친구이기 때문에, 마음에 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사랑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despite)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상대방의 어떠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자기희생적 사랑이다. 이 사랑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며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이다. "불구하고"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비로소 흘러나올 수 있다. 테레사 수녀의 사랑이 바로 그러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랑의 사명이 주어져 있다. 교회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교인들을 사랑의 제자들로 만들어야 한다. 사랑과 평화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2.3. 예배 교회의 다른 기능은 예배이다. 교육과 훈련이 교인들의 삶의 질에 초점을 두는데 비해 예배는 그들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게 초점을 두는 것이다. 기독교에 있어 예배란 신앙의 불가결한 표현이다. 그것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배는 예배자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기독교에 있어서 예배는 또한 인간의 삶 그 자체이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의 예배가 수평적인 관계 즉, 나와 너의 역동적인 만남의 관계로 표출되어져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예배는 삶과 분리되어질 수 없는 전인적인 드림을 의미한다. 교회가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그들의 삶 전체가 드림의 예배가 될 때 교회는 진정한 진리의 등대가 될 수 있다.
3. 교회의 사회적 기능/ 기독교의 신앙은 삶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신앙은 곧 삶이요 삶은 곧 신앙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적 삶은 사회적 삶과 분리되어 질 수 없다. 여기에 바로 교회의 사회적 기능의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교회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살펴보자.
3.1. 샬롬(평화)사상 /"그리스도의 평안이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평안을 위해 여러분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골로새서 3:15). 예수 그리스도는 땅위에 계시는 동안 이 샬롬을 전하셨고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남아있는 제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세워 이 샬롬의 사역을 계속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평안을 주고 간다.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내 평안이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요한복음 14:27)고 말씀 하셨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늘어나고 있지만 교회의 사회적 기능인 샬롬의 확장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는 그러므로 복음전파를 통한 개인의 영적 구원과 내적평안은 물론 사회적 안전과 번영, 복지와 건강, 이웃과의 화평을 위해 그 사회적 기능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할 것이다.
3.2. 소자(小者)사상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요...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마태복음 25:40, 45).
소자사상은 곧 "작은 자 생각"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특권과 영광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33년간의 그의 삶을 죄인들과 병들고 굶주리며 소외당하는 작은 자들과 함께 사셨다. 예수님의 소자사상에 의하면 우리의 이웃은 모두 작은 예수들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취하는 관심과 행동이 곧 예수님에게 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은 또한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마가복음 10:43). 오늘날 자기중심적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예수님의 소자사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복지사회 구현을 위한 기초석이 되어야 하며 교회는 이 예수님의 소자사상을 실천하는 신앙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3.3. 빛과 소금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런데 그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마태복음 5:13-16) 교회에게 주어진 또 다른 중요한 사회적 기능은 빛과 소금의 역할이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며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빛은 어둠을 밝히고 모든 사물을 올바로 볼 수 있게 한다.
기독교인 각자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정의롭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곧 불의와 죄악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빛과 소금의 역할은, 죄를 짓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과 불의를 방지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이다. 교회의 어원인 '에클레시아'는 바로 세상에서 불러 모여진 자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거룩한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도의 교제라고 불리는 것이다. 즉 교회는 세상에서 부름 받아 모인 거룩한 백성이다. 이런 모이는 교회가 해야 하는 사명은 예배와 찬양, 설교, 교육, 신학, 목회상담 및 친교이다(6개).
그리고 모이는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흩어지지 위해서이다. 교회는 결국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신학자 본회퍼도 "교회는 남들을 위해 존재할 때에만 교회일 수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남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바깥을 향해 존재한다. 교회가 남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기능에는 기도, 전도, 선교, 봉사, 모범적인 생활 및 예언자적 행동이 있다(6개).
▣ 교회의 존재이유(1) 예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요한복음 4: 24)
1) 예배란 무엇인가
- 예배의 뜻: 하나님께 경건한 마음으로 존경과 경배, 찬양, 영광을 드리는 것=>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모든 행위를 이르기도 함-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
2) 예배 의식
- 예배 의식의 여러 가지 순서: 신앙적인 뜻이 담겨 있음
·예배에의 부름: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초청하는 순서
·찬송과 찬양: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그 분을 높이는 순서
·참회의 기도: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참회하는 순서
·신앙고백: 하나님께 우리가 믿는 있는 것을 고백하는 시간으로 주로 사도신경을 암송한다.
·대표기도: 예배드리는 모든 사람을 대표하고 대신해서 기도하는 순서
·성경봉독과 설교: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
·헌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시간
·축복기도: 하나님이 주신 권위로 목사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함께하기를 기도하는 것
3) 예배드리는 생활
- 예배를 드리는 이유·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믿는 이의 당연한 의무이므로 ·믿음의 성장을 위하여
- 예배드리는 자세·진지한 마음 ·깨끗한 마음 ·진지한 마음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는 마음
- 예배의 종류·정기적으로 드리는 예배: 주일예배, 찬양예배, 수요예배, 구역단위로 드리는 예배, 절기, 행사를 위한 예배
- 생활로 드리는 예배: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가 되어야 함
※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활이 예배적인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로마서 12 ;1-2)
예배와 예배의 대상 (사도행전 17:24-25)
예배란 마땅히 드릴 자에게 드려야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배자는 자신의 예배의 대상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면 알수록 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 그때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 깨달아지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될 때 자기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고 그때 비로소 진정한 예배의 모습을 스스로 갖추게 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경외와 봉사와 생의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예배를 받으셔야 할 분으로 계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먼저 나의 예배와 섬김을 받으실 분으로 계신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나이다'고 하였다. 우리 인생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예배할 자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의의라는 것이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그 지으신 분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배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예배를 받으셔야 할 분이시라는 사실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어떤 목적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대 아테네 지역을 돌아다닐 때 수많은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말하기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집)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4-25)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조성자시요, 주인이시요,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예배를 받으셔야 하는 것이고 우상을 섬기듯이 그런 방식으로 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가르친다. 예배는 오직 천지의 주재자만 받으셔야 할 것이며 그는 분명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며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권능을 가지시고 통치하시며 그의 나라를 이 땅에 두시고 그의 백성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는 존귀하신 어른이심을 보여준다. 이 하나님 앞에 인간들은 다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보듯이 그들의 예배는 바알 숭배와 같은 위복사상의 제식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부터 출발되는 예배하고 일반종교의 기복주의적인 의식행위와는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지혜자도 될 수 있는 반면에 피조물을 섬기는 우매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의 하나님/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2). 인간은 타락한 이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그 생각도 허망하여지고 마음도 어두워져 버렸다. 그 결과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들 가운데서 특별히 정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이 땅에 두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영혼들은 하나님을 섬기고자하는 소원과 열망을 가지게 된다. 무엇보다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앞에 예배를 올리게 된다.
예배는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 되기 때문에 거기에는 귀찮은 것이나 형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인간의 공리적 심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그리고 예배자의 관심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는 자들은 얼마나 될까요?
구원의 확신은 말하여도 예배의 기쁨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는 아닌지?
우리의 예배생활을 회복하여야 한다. 우리의 예배 속에는 반드시 감사와 기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의 예배생활 속에 감사와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나의 신앙생활의 위기이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 지어다"(시 100:1). "그에게 가며 그 이름을 송축할 지어다"(시 100:4). 하나님의 구원은 예배자의 무한한 기쁨이 되며 심적 동기가 된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 19:1하).
?영이신 하나님/ 우리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만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역(창조, 보존, 구원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앞서 보았으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존재형식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존재하시느냐에 따라 우리의 예배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이나 그의 존재하심, 또한 사역들을 알고 전심으로 그 앞에 엎드릴 때 예배는 바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신자들의 제일로 큰 문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인격적이신 분으로 대우해 드리지 못하는 것 같다. 신약시대의 예배는 상당한 제한적 현상적 요소를 탈피하고 그 영적 요소를 강화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가 바른 영적 예배가 되기 위하여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을 전제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다른 존재나 사물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지신 분이심을 지적하는 말이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영이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삶 전부가 하나의 거룩한 예배가 될 수 있을까?(성도의 삶과 직업은 어떤 것이든 헌신과 예배가 될 수 있다)(골3:22-24)
교회의 존재 이유(2) 훈련
자기 훈련을 통한 성과 거두기/ 성취력이 높은 사람은 대개 자기훈련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성공하는 사람은 기꺼이 일을 하고자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마지못해 어쩔 수 없어서 일을 한다. 성공한 사람들은 다음의 6가지 중요한 방법으로 자기 훈련의 모습을 보여준다.
1. 성공한 사람은 단지 자신의 기분을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땅히 할 바를 행한다. 감정에 좌지우지되어 기분 따라 일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중요한 일은 비록 그 일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닐지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옳은 일을 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성취되었다. "자기의 기분을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이 무너져 성벽이 없는 것과 같다." (잠언 25장28절)
2.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을 주의한다. 그들은 자신의 입을 열기 전에 생각을 점검해본다.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한다." (잠언 13장3절)
3.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반응을 자제한다. 흥분하기 직전에 몇 번이나 자제력을 발휘하는가? 이미 반응한 다음에 후회한 경험은 없는가?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은 그의 영광이다." (잠언 19장11절)
4.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스케줄을 주도하며 산다. 만약 시간을 어떻게 쓸지를 당신이 결정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이 당신의 스케줄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조심하여,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처럼 하십시오.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에베소서 5장15-16절)
5.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재정을 잘 관리한다. 그들은 벌어들이는 돈 보다 적은 것으로 사는 법을 안다. 재정의 가치는 많은 돈을 가지고 내가 쓰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쓰는데 있다기 보다는 사용하기 원하는 곳에 돈이 쓰여질 때 있는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미래를 위해 저축해 놓지만, 미련한 사람은 그것을 모두 탕진하여 버린다." (잠언 21장20절)
6.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유지한다. 건강을 유지할 때 좀 더 성취할 수 있고 자신이 성취한 것을 누릴 수 있다. "각 사람은 자신의 몸을 잘 다스려셔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4절) 오늘의 훈련은 바로 내일의 성공을 결정해줄 것이다. 그러나 자기절제를 위해서는 의지력 그 이상이 필요하다. 여러분 자신의 힘보다 더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한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7절) 하나님께 내 인생을 주관하시게 내어드리면 하나님은 나에게 자기절제의 힘을 부여해 주실 것이다,
교회의 존재이유(3): 증거
교회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특별히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할 때 교회의 존재 의미가 있다. 세상으로 보냄 받은 소명자로서의 교회가 왜 보냄을 받았는가를 재발견하는 자리에서 교회관의 새로운 정립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만일 세상을 위해 교회가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면 지상에서 교회는 벌써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소명 받은 제자로서의 교회는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교회는 세상 안에서 그 존재를 좀 더 크고 강하게 부각시켜야 한다. 작은 겨자씨 한 알로만 남아서는 안된다. 빨리 사방을 덮는 나무로 그 모습을 나타내어야 한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1. 성령을 모시면 누구나 세계를 가슴에 품고 선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성령을 모신 자라면 누구나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된다. 그 증거의 영역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땅 끝까지 임을 주목하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세계를 가슴에 품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다. 본문에서는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 받으면 증인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증인'이란? 구약에서는 법정에서 범죄의 성립여부에 대해 확언해 주는 자를 의미한다(신19:15). 신약에서는 예수님에 관해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자를 가리킨다.
2. 세계 선교는 점진적으로 단계별로 시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선교의 영역이 점진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와 친척, 이웃부터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말고 선교의 시야를 넓혀야 한다.
세계를 가슴에 품은 그리스도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는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예루살렘을 완전하게 복음화 한 뒤에 유대와 사마리아로 선교의 영역을 확장해 나간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과 동시에 땅 끝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증인으로의 부르심이 어떤 선별된 집단에 국한되지 않는다.
선교는 우리 자신의 교회를 섬기는 일이나 어떤 전문적인 사역으로 국한시킬 수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부터 땅 끝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3. 지금 현재 자신의 예루살렘과 땅 끝은 어디라고 할 수 있는가?
?예루살렘: 자신이 살고 있는 가까운 영역
?온 유대: 동일한 문화권에 있는 영역
?사마리아: 적대적인 문화권을 형성하는 영역
?땅 끝: 복음을 전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영역
자신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하기 가장 쉽다고 생각되는 영역과 가장 힘들게 여겨지는 영역에 대해서도 나누어 보라.
4. 왜 주님은 예루살렘의 복음화만으로 만족하지 못 하시는 것일까? 주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한 영혼이다. 아직도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영혼이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다면 주님은 이쯤에서 만족하실 수 없다.
5. 전도나 선교를 너무 좁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우리나라 복음화에는 열을 올리면서 바다 건너 있는 나라에는 관심을 못 가지는 것과 같은 일이다. 당신은 가족구원과 이웃전도에만 국한해서 전도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세계선교를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세계선교는 말하면서 가까운 친척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
1)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는 선교단체는 무엇인가? 훈련생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선교단체에 대해서 들어보는 시간을 잠시 가지고 교회에서 전략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선교단체에 대해서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라.
2) 기도와 헌금으로 지원하고 있는 선교사가 있는가? 각자가 교사를 후원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경험을 나누어보자. 선교사를 후원할 때 얻는 유익과 도전에 대해서도 나누어보자.
3)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다면 자신의 은사를 살려서 세계 어디든 가서 자비량 선교사로 헌신해 보고 싶지 않은가?
그 동안 훈련을 통해 받은 축복과 결실들을 이제는 남을 위해 헌신해야 할 때이다. 복음의 추수기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세상으로 보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복음의 증인으로서 사도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신의 직업과 은사를 총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성육신적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때이다. 세계선교를 위해서 어떻게 헌신하기 원하는지 각자의 결심을 나누어보고 이 헌신이 식어지지 않고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라.
결론 : 당신은 왕 같은 제사장이다
거룩한 제사장에로의 초대
현대는 '다수의 원리'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 중요성이나 진정성의 문제보다는 다수의 동의에 무게를 둠으로 일반적인 가치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진리는 반드시 다수의 동의를 구하거나, 인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수에 의해서 찬동되고, 지켜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반적이라기보다는 독특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이 시대에 어떤 존재로 서 있는가? 무엇을 위해 이 세대에 보내졌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에 대해 출 19:4-6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모든 열방이 하나님께 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소유'이며, 또한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선택된 민족으로서 독특성을 갖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구별된 나라이다. 그것이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인 것이다.
제사장은 첫째로, 일반 백성과 구별되어 특별히 하나님과 가까이하며 섬기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의 본질은 성결함에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열방에 대하여 성결하고 거룩한 나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둘째로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축복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이다.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로 부른 것은 세상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중보자적인 나라로 세운 것이다. 이스라엘은 세상 한 복판에 있으며, 길목에 있으므로 열방이 이스라엘을 주목하고 있다. 이들의 순종의 삶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이러하다고 하는 강력한 선전이며, 이방인의 빛이 되었다. 제사장의 나라로 이스라엘을 부른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성결케 함이고,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베드로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존재 의미(출19:5-6)를 신약의 교회와 신자들 개개인에게 적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리스도인은 땅에서 하늘을 사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것은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시대의 논리와 목적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 우리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는가, 그리스도의 냄새가 풍기는가를….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입에서 기독교적인 용어가 고상하게 나와야만 되는 것도 아니며, 기독교 단체를 만들어 사회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주일에 성경을 가슴에 안고 회당에 출석하는 것만도, 성경공부에 열심인 것만도, 식사 때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도, 개업식에 돼지머리 대신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그리스도인의 순수한 정체성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오히려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가장 소극적인 것 같으면서 가장 영향력 있고 적극적인 것으로 말씀을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거룩이며 이 자체가 세상 나라에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의 전(whole) 삶은 제사장의 삶이며, 거룩에로 초대받은 삶인 것이다. 그러함에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른 교리와 율법의 중요성과 이에 대한 순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왕 같은 제사장
원래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셨을 때 왕 같은 제사장으로 지으셨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직분이다. 아담은 죄가 없었기 때문에 죄를 위한 제사는 드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드리고 감사드리며 찬미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기 때문에 모든 생물의 왕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반역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제사장의 직분도 왕의 직분도 다 빼앗겨 버리고 오직 죄와 사망과 마귀의 종이 되고 말았다.
2천 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구주로 이 땅에 오셔서 30세에 천국 사역에 임하셨을 때도 예수님은 참으로 왕이요 제사장이심을 우리 사람들에게 밝히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과 예배와 제사를 드렸으며 마귀와 질병과 자연 환경을 단호하게 다스리시는 왕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우리들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제사장의 삶
모든 제사는 장차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우리의 제물이 되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찬미하는 직분을 뜻하는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제물이 되셨음으로 더 이상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히브리서 10장 11-14절은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한 번 제물을 드렸지만 주의 제물은 영원한 제물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온전케 만들어 주시는 놀라운 제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매일같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야 된다. 이 제물은 바로 우리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리며 예배와 찬양을 드린다.
우리는 매일같이 예수님께서 속죄제물이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원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것을 감사하고 그 보혈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미하는 것이 우리 제사장의 직분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시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게 하셨다.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는 화목케 해주신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미하며 화목제물을 드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또 조석으로 우리의 번제물이 되셨으니 주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헌신하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바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며 예배드리는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13장 15절은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우리가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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