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하지 말라[구제]
[마 6:1-4]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5장에서 왜곡된 신앙을 말하고, 6장에서는 형식적인 경건에 대해서 말을 하고있는데
왜곡된 신앙인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를 본문에서 말하고 있다.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것이 외식하지 않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
*외식 5273 uJpokrithv" 휘포크리테스
5271에서 유래; 맡겨진 인물에 따라 연기하는‘배우’(‘무대 연기자’), 즉(상징적으로)‘위선자’, 외식하는 자 <마 6:2>남명. a hypocrite;
@삶을 연기자처럼 사는 것이 외식이다.
마음은 전혀 아닌 자인데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천사와 같이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 만나러 갈 때 외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자기 모습 그대로 나가?
지금 화가 났다고 만나는 사람에게 막 화를 내?
사람 만나러 갈 때는 당연히 좋은 것으로 바꾸어 입고 냄새 나지 않게 해야 하며
내가 화가 났어도 괜한 사람에게 화를 내어서는 안되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말하지 않고 선한 일을 할 때를 말하고 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처럼 구제할 때를 말하고 잇다.
1절에 “너희 의를” 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알렌드판 사본에 이렇게 나오는 것이고
다수 사본인 스테판 사본에는“자선” 이라고 나오는데
이 단어가 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구제할 때에”라고 하는 “구제”라는 단어가 된다.
1절은 ‘너희 구제가’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구제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제를 하는 것은 더 어렵다.
왜?
인간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자기를 알아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은밀히 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잇는가? 같은 지체인데?
마 25장의 양처럼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염소는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서 알고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자들이 되며
양은 자기들이 한 일을 기억하지 않고 있는 자들이다.
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의 의로 하지 않고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의로 하기 때문이다
[행 3:6]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은과 금은 육적 구제가 되며, 내게 있는 것은 영적 구제가 된다.
육적 구제는 눈에 보이는 변화가 되며 , 영적 구제는 보이지 않는 변화이기에
은밀히 주시는 하나님과 자신만 아는 변화가 된다.
*이렇게 은밀히 하면 아버지가 갚아주신다
4절에 갚아주신다고 하는데 어떻게 갚아주신 다는 것인가?
알렌드 판은 그것이 자세하게 나오지 않았지만 스테판은 자세하게 나와 있다.
“네게 나타나심으로 ”갚아주신다고 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내 주신다면 얼마가 감사하고 감격할 일인가!!!
욥은 귀로만 듣다가 눈으로 보옵니다 하며 감격한 자인데
우리에게도 나타나 보여주신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가 변화되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보고 미친 자가 되어 세상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된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 죄 없는 세상으로 살고 싶은 자이다.
하나님을 귀로만 듣지 말고 눈으로 보옵니다 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요 14: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세상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알게 됩니다.
안다는 것이 본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면 나와 함께 거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기 원한다면 바리새인인 것이다.
주님은 ‘나는 나다; 라고 하신 분이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특징이 있기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사람과 비교하며 살지 말아야 하는데 아직도 그것이 안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기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오는 것은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서 나팔 불려고 하는 것이다.
참고 있다가 어느 순간 내가 나가서 자랑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하늘 의식 속에서 내가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에게 상을 얻으려면 선을 행할 때는 은밀하게 하며 죄를 지었을때는 모든 사람에게 창피를 사게 해서 그것이 부끄러워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죄는 드러내고 선을 숨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구제는 선한 것인데 주님은 이것을 가지고 지적하시는 것은 ?
그것도 1절 처음에 “주의하라”는 단어를 대문자로 쓰면서 강조를 하시는 것일까?
구제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수고한 것이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속성이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주의하며 나를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앞선 믿음의 선진들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인정받기 까지는 고난의 길을 가며 자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인정받기 원한다면 나를 포기함이 되어져야 한다.
바울과 같이 세상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자가 되어져야 한다.
그런 고난의 길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인정이 있는 것이다.
고난도 없이 죽으면 천국 간다는 얄팍한 생각은 버리고 세상에서 내가 평안을 누리고 살고 있는 가를 생각해보며 나의 생각이 지금 하늘의 것에 가치를 두고 잇는 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댓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들 하시고 행복한 하루되세요
좋은글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