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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6a 울산강의-창세기47장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창세기 47장 할 차례인데 46장 29절에 보면, 드디어 야곱이 요셉을 만나서 목을 어긋맞고 같이 끌어안고 울지요. 30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가지 살아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여한이 없다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난 뒤에 47장에 들어가면 요셉이 자기 아버지와 식구들을 바로한테 소개하는 대목이 창세기 47장입니다.
이걸 글씨를 쓴다면 [만남]이죠. 신앙의 세계와 불신앙의 세계, 불신의 세계의 만남이 47장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불신의 세계에서 바로 왕이 대표가 되겠고, 신앙의 세계는 야곱이 대표로 만나지요. 창세기 47장에 불신의 세계, 인간세계와 그리고 신앙의 세계가 만난다는 것은 어렵게 말해서 뭐냐 하면, 역사 속에 하나님의 묵시, 하나님의 계시가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반짝하면서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불신의 세계에 지내왔고 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불신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잘 알고 있지요. 불신의 세계는 모든 것을 성취욕에 의해서 유지되는 그런 세계가 불신의 세계입니다. 누구의 성취욕이냐 하면, ‘나’, 내 욕망을 성취하겠다는 것이 불신의 세계죠. 자기가 과거에 생각했던 그 야망과 포부, 이런 것을 신에게 빌든지 또는 신의 기적을 해석하든지 간에 ‘야,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었다’ 그런 쪽에서 세상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사람들이 오늘날, 울산에도 교회가 많은데 교회에 왜 오느냐? 자기 영역, 자기 소망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정복하고 그걸 차지하기 위해서,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성취해보려고 교회 오는 거죠. 그래서 교회 와서 만약에 자기가 뭔가 성취했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는 교회 안 나오죠.
이게 뭐냐? 불신의 세계는 자기 자신을 꾸준히 믿는 세계입니다. 불신의 세계는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고 나를 믿어요. 나의 욕심, 나의 희망, 나의 기대 이런 게 불신의 세계입니다. 제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의 ‘죄’라 하는 게 뭐냐 하면, 기대/기대감 뭔가 은근히 의도하는 것,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기대하는 게 없으면 실망이 없는데 자꾸 기대를 하다보니까 제때, 제때 안 이뤄지니까 자꾸 자기 인생에 대해서 성취되지 못했다고 실망을 하고 있는 겁니다. 기대감이 죄니까 기대감이 나온다는 자체가 죄에서 나오니까 우리는 죄 아닌 경우가 없지요. 늘 죄를 짓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 뜨면 뭐 또 하나 기대하잖아요. 그걸 자기가 생각한 기대한 걸 염두에 두고 세상 돌아가는 걸 다 거기다 선별해서 그것만 찾는데 그게 바로 현재 바로의 세계, 불신의 세계입니다.
여기에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야곱이 이끄는 신앙의 세계와 만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면 제일 궁금한 게 뭐냐 하면, 과연 의사소통이 될까? 안 되지요. 왜냐하면 불신의 세계에서 노리는 것과 신앙의 세계에서 제고하는 것이 서로 틀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을 바로 불신의 세계와 신앙의 세계가 오늘날 우리 몸을 통해서 매일같이 만나고 있다는 걸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불신의 세계에서는 보통 신을 안 믿는다 하지만 신을 안 믿는 게 아니고 신을 인정하지만 신이라 하는 것, 하나님이라 하는 게 내가 눈이 밝아서 눈 뜨면 신을 생각하지만 내가 눈을 감아버리면 내가 눈 감는 그 순간 신도 내 앞에서 없는 존재가 되죠. 없어지죠. 여러분 모든 007 영화 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장면이 뭡니까? 007이 가다가 휙 돌아보고 총 쏘면 눈동자가 피 흘리면 접히는 게 있죠. 접혀버리면 007은 더 이상 안 보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신앙생활 하지만 내가 눈 감아버리면 동시에 나의 신도 사라져버린다면 결국은 불신의 세계, 나만 남는 거죠. 그러니까 불신의 세계는 안 믿는 세계가 아니고 누굴 믿는 세계다? 나를 믿는 거예요. 나에서 신이 나왔고, 나에서 축복이 나왔고, 나에서 행복이 나오고, 나에게 어떤 저주가 끊어지고 항상 나에서 기쁨이 나오고, 신도 하나님도 나에게서 나오고. 그래서 내가 눈 감고 죽어버리면 나의 신도, 나의 하나님도 같이 없어져버리는 겁니다.
새순교회 있더라. 분명히 있지요. 그래서 같이 점심도 하고 재미있는데, 내가 만약에 어느 날 갑자기 새순교회 가기 싫다. 안 간다. 그러면 새순교회는 울산 있으나마나 의미 없는 겁니다. 왜? 내가 안 가니까 새순교회는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불신의 세계, 불신앙의 세계를 성경에서 신앙의 세계와 만나게 해주는 이유가 뭐냐 하면, 흔히 우리가 ‘믿습니다’, ‘믿는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과연 우리가 불신앙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냐, 신앙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냐? 야곱과 바로의 만남을 통해서 늘 점검을 해보라 이 말입니다.
약간 늦은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지금 바로 왕과 야곱이 만나는 대목이 창세기 47장 그 이야기 대목에 접어들었습니다. 드디어 만납니다. 그런데 바로 왕을 왜 만나느냐? 우리 생각에는 ‘야곱, 너희들 구원받아라’ 이렇게 하면 될 텐데 ‘야곱, 너희는 요셉 만났느냐?’ ‘예. 만났습니다.’ ‘그럼 천국 가거라.’ 이러면 될 텐데 왜 하나님께서 야곱의 일당을 바로의 나라와 만나게 해주느냐?
오늘 제목이 [만남]인데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하듯 만남인데 왜 이렇게 만나게 해주느냐 하면, 이 불신의 세계가 우리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불신의 세계를 조사를 분석을 해보면, 이건 나를 믿는 세계에요. 나를 믿는다는 말은 내 안에서 신이 나오고, 그 하나님은 누굴 위하여? 나를 위한 하나님이 될 때 이게 불신앙의 세계라는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죠. 이걸 처음에 뭐라 했든가요? 이 불신앙의 세계가 노리는 게 자기의 성취욕.
‘요새 집사님은 교회 안 나오네요?’ ‘아이고, 바빠서.’ 문제는 간단해요. 바빠서인데 ‘바쁘다’는 말이 뭡니까? 나는 따로 나를 위하여 성취할 게 많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취할 게 많아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신앙의 세계의 성취는 뭡니까? 내가 기대한 것을 내가 얻는 것, 차지하는 것 그러면 그들은 ‘아이고, 좋은 하나님이고 훌륭한 예수님이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지금 야곱의 세계를 이야기 안 하고 있는데, 자꾸 이름을 불신앙의 세계라고 해서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데 가만 들어보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죠. 불신앙의 세계가 ‘나’가 여기 있고, 나를 위한 하나님이고, 내가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내가 은근히 기대했던 것이 내가 믿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게 달성이 될 때 그때 ‘나는 행복하여라. 교회 다녀서 행복하다’ 나름대로 자기가 성취할 게 있을 경우에 이게 바로 바로의 세계입니다.
증거가 뭐냐? 증거는 바로에 있어서 요셉의 의미가 뭡니까? 요셉이 없었으면 바로의 나라 완전히 부도났어요. 옛날은 농경시대기 때문에 농사 안 되면 부도나는 겁니다. 이 요셉 때문에 뭔가 신이 임했든지 누가 했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하나님이 임해서 침투시킨 그 요셉으로 인하여 바로 왕은 자기의 왕 자리가 공고하게 되고 자기가 기대했던 대제국을 이루었고, 그리고 애굽 나라에서 제일 큰 부자가 누굽니까? 바로 자신이 됐어요.
모든 토지와 그전에는 왕 소유가 아닌데 일곱 풍년, 일곱 흉년으로 말미암아 모든 땅의 소유가 바로 왕에게 넘어와서 무려 20%의 임대료를 받잖아요. 성경 전에 봤지요. 모든 토지가 바로의 소유가 됐으니까 바로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바로는 교회 가서 큰 기쁨을 얻은 사람입니다. 교회 다녀서.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한테 혜택을 입었는데 나온 것은, 하나님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나의 성취욕이 나왔기 때문에 이게 바로 불신앙의 세계라는 겁니다. 이 불신앙의 세계와 이제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야곱을 앞장세운 신앙의 세계가 드디어 애굽에서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 만나게 되는 장면이 창세기 47장입니다.
바로 왕은 너무 기분이 좋아서 요셉 때문에 부자가 되어서 전 나라가 자기 것이 되었기 때문에 요셉이 한 은덕을 생각해서 아버지 야곱에게 아주 특별대우를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만나서 야곱이 바로에게 무슨 소리하느냐 하면 여기 9절에 보면,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었나이다”
신앙의 세계에 속한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을 하면서 ‘나는 백삼십 년을 살면서 험악한 세월을 보냈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는 지금 입이 째졌어요. 기분이 좋아서. ‘아이고, 참 귀한 자식 줘서 당신의 자식이 하나님이 함께 있으니 이 세상, 애굽 나라가 부자가 되었으니 내가 얼마나 기분 좋은지 그저 우리나라에서 마음 놓고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토지를 다 주겠습니다’라고 46장 끝에 보면 나옵니다. 원하는 대로 갖고 싶은 땅 다 가지시고 고센 땅인데 원하는 대로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큰 혜택을 베푸는데 야곱은 말하기를 ‘나의 인생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험악한 인생과 그리고 한껏 자기 것을 많이 차지했다는 것, 성취했다는 것 때문에 기뻐하는 이 세계, 낯선 두 세계의 만남에서, 불신앙의 세계와 신앙의 세계, 그리고 인간 역사의 세계와 하나님의 계시가 담긴 인생은 어떤 차이가 나느냐를 우리가 지금부터 살펴봐야 돼요.
지금부터 제가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글로 쓰겠습니다. 첫 번째는 [만남]이란 글을 썼지요. 만남 의미를 알겠지요. 다시 할까요? 신앙의 세계와 불신앙의 세계를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줬다. ‘어이, 요셉아. 우리끼리 살자.’ 이게 아닙니다. 그냥 만나야 돼요. 불신앙의 세계와 만나야 됩니다.
두 번째는 뭐냐? [새로 시작]. 신앙에서 본질 되는 부분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매일같이 교회는 새로 시작해야 된다는 것. 우리교회가 설립한지 몇 년 됐느냐, 새순교회가 설립한지 몇 년 됐느냐? 그걸 묻지 마시고 새로 시작해야 돼요. 왜냐하면 아까 제가 애굽 세계가 뭐라고 했습니까? 역사의 세계. 신앙 세계는 하나님의 계시라 했지요. 역사는 과거가 있는 반면에 계시는 새로 시작해야 돼요.
우리가 야곱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역사라는 것은 항상 부정 돼야 되고, 항상 새로 시작해야 돼요. 첫 사랑을 잊지 말아야 돼요. 계속해서 새로 시작해야 됩니다. 인간에게 새로 시작하는 방법이 뭐냐? 그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죽음’입니다. 죽음 위에서 새로 시작해야 되지 죽지 않고 새로 시작하는 법은 없습니다.
지금부터 2500년 전에 공자의 철학 중에 하나가 공자의 철학은 바닥 철학입니다. 바닥을 치면 모든 지혜를 안다. 공자가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사람은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면 비로소 인생이 보인다. 이게 공자 철학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바닥을 뭐로 보느냐 하면, 죽음으로 보거든요. 여기서 세상적인 역사에서 죽음은 그냥 죽는 거예요. 내가 없어요.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서 말하는 죽음은 내 죄를 말하는 겁니다. ‘내 죄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이러면 돼요. 제가 오늘 강의 어렵다 했는데 너무 쉽네.
사람이 자기 죄를 항상 매일같이 기쁜 마음으로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너무 착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 날이 걱정돼요. 그 다음 날 힘들어서 못 합니다. 왜? 어제 너무 착했기 때문에 분명히 착한 보상이 오늘 있어야 되는데 아무리 봐도 깜깜 무소식이거든.
‘하나님이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젠 너무 고생했는데 오늘은 어떤 혜택이 있어야 되는데 혜택이 없으니까 내가 무슨 재미로 삽니까?’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 뭐가 생겨버려요? 갑자기 역사가 생겨요. 역사는 뭐냐? 계속 이뤄나갈 임무와 책임을 본인이 짊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계시, 말씀에 의하면 말씀 자체가 항상 우리를 역사가 없는 곳으로 데려갑니다. 그게 뭡니까? 우리의 죽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죄. 우리의 죄의 자리에 데려가서 죄성에도 불구하고 ‘네가 지금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고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 식으로 움직이는 동네가 바로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불신의 세계는, ‘내가 과거에 이 정도 됐는데 오늘은 더 잘 돼야 돼야지’ 역사를 포기 못하는 이 세계가 바로 불신의 세계인데, 문제는 47장부터 계속 이어지는 것은 뭐냐 하면, 이런 역사의 세계 속에 신앙의 세계가 들어가서 새로 시작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상당히 어려워요.
어려우니까 시편 105편을 봅시다. 시편 105편을 가지고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마디 이야기할게요. 그 죄에 들어갔다가 다시 새로 시작해야 되는데 이 죄가 뭐냐 하면, 이 죄가 역사에요. 역사에서는 뭐가 있다? 기대감, 성취욕 이런 것들, 그러니까 이게 바로의 세계 아닙니까. 애굽이죠. 애굽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늘 새로 시작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은 애굽의 세계에 들어가야 돼요.
시편 105편 17절에 보면, 한 사람을 앞서 보냈죠. 앞서 보낸 사람은 주인공입니까, 주인공 아닙니까? 이건 주인공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지, 요셉의 하나님은 아니거든요. 한 사람을 앞서 보낸다는 말은, 주인공은 어디 있다? 뒤에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이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에요. 여기 이스라엘, 야곱 용어가 번갈아 나오는데
23절에 봅시다.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중간에 있는 것을 생략하면 17절에 한 사람은 앞서 보냈다? 요셉이죠. ‘그 뒤에 낱말은 당신들이 지어내 적어보세요’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더러운 세상 애굽에 보냈으니까 그 뒤에는 야곱이 요셉을 이끌고 다시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오겠다. 그게 분명히 나온다 이 말이죠. 애굽에 살 건 아니니까. 약속의 땅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은 애굽이 아니고 가나안 땅 아닙니까. 시편 105편 17절에 보니까 한 사람을 앞서 보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뒤에 아브라함의 자손을 애굽을 거쳐서 나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따지자는 것은 왜 애굽을 거쳐서 되느냐 그 문제를 따지는 거예요. 애굽은 불신앙의 세계거든요. 죄악 된 세계 아닙니까. 역사를 쥐고 있는 세계거든요. 이거는 계시 없는 곳이잖아요. 계시 없는 곳이면 우리 같으면 상대도 안 하고 그냥 떠나면 그만인데 왜 계시 없는 곳, 신앙이 없는 곳에서 숙성이 되어 나오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애굽을 거치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신이 불신앙 출신자가 천당 가는 것밖에 안 돼요. 그러면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라는 이름의 가짜 천국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가려면 반드시 지옥을 거쳐야 됩니다. 오랜만에 좋은 말 했어요. 천국을 가려면 지옥을 알아야 갑니다. 그래야 구원이라는 것이 지옥에서 건짐이라는 걸 알지요. 죄에서 구원 아닙니까. 죄도 모르고 뭘 구원받아요.
죄를 알기 위해서는 애굽을 거쳐서 나와야 되는데 거기에 먼저 요셉을 보내서 요셉이 야곱을 유인하는 셈이 됐습니다. 유인해서 야곱 이름이 이스라엘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시편 105편에 보면, 야곱이 함 땅에서 객이 되었잖아요. 그리고 난 뒤에 36절에 보면, 그들이 애굽 땅에 있을 때 작살난 벌 받을 때 이야기가 나온다 이 말이죠. 그리고 42절에 보면, 아브라함을 기억하신 걸 통해서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기로 했다 이렇게 돼있거든요.
이건 함 땅이라 하는데 함이라는 것은 셈과 대비되는 저주받은 땅이 함 땅이죠. 왜 저주 받은 땅에 그들이 들어가야 하는가? 그걸 말로 하면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동굴로. 여기는 저주받은 함 땅, 애굽. 여기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이게 참 중요합니다.
들어갔다가 나올 때 이 나오는 A라는 지점에서 그 다음 B라는 지점, C라는 지점, D라는 지점 나올 때 어느 한 발자국도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는 못 나오게 돼있습니다. 저는 교인들이 교회 나오는 것은 자기 인간의 힘으로 된다고 봐요. 그러나 교회에 다닌 사람이 천국 가는 것은 한 발자국도 자기 힘으로 안 됩니다. 성경 공부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기도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교회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갈 수 있지만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게 A 지점에서 B 지점, 세례 받았다, 그 다음에 집사 됐다. 그건 할 수 있어요. 매일 매일을 더 깊숙이 들어가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빠져 나오는 데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이 부분이에요.
그 빠져 나오는 능력이 어디서 오는가? 바로 한 사람 앞서 보내진 요셉이 당했던 모든 것을 A에서 B, B에서 C로 빠져 나올 때 이스라엘에게 다시 한번 반복해서 재현되어야만 그들은 애굽 땅에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못 빠져 나옵니다.
요셉은 죽을 뻔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요셉은 지하 감옥에서 죽을 뻔했습니다. 하나님의 꿈 아니었으면 빼도 박도 못해요. 죽어요. 요셉은 계시 아닙니까. 그리고 요셉이 계시에 의해서 국무총리가 되고, 애굽 나라 전체가 꿈의 일부로 포함돼요. 꿈을 요셉이 꿨는데 이 중에 하나가 애굽 나라에요. 애굽 나라 입장에서는 애굽 나라 전체 중에서 하나님 믿는 야곱 족속, 70명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지지요. 울산 시내 사람이 백만이 있고, 울산에 교회가 몇 천 군데 되지만 그 중에 하나 새순교회지만(이러면 목양교회 빠진다) 계시 입장에선 뭐냐 하면, 바로 복음을 아는 복음 전체가 복음에 의해서 울산에 있고, 하나님 말씀 때문에 존재하는 울산이 되는 겁니다. 아예 다르지요.
요셉이 국무총리가 됐을 때 팔짱을 끼고 창가에서 봅니다. ‘이 애굽 나라 전부다 내 꿈대로 됐구먼.’ 바로 왕은 ‘내 나라 중에서 하나님 믿는 몇 명 있네. 70명 왔구먼.’ 이렇게 보는 거예요. 한쪽은 자기가 전체로 보고, 한쪽은 남을 부분으로 보고, 이쪽은 자기가 전체로 보고, 부분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울산 전체가 하나님의 예수님을 위한 말씀을 위한 공간이라는 걸 이해한다면 외롭거나 서럽거나 낙담하거나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런 안목을 이 야곱이 요셉을 만났을 때 이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에 할지 오늘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 있지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새로 세례를 줘버리죠. 너는 애굽의 태생이 아니고 나, 야곱이 우리 아버지에게 받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반드시 나와야 될 자식이 나온 거예요. 야곱이 그런 안목으로 완전히 바뀐 거예요.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계시 입장에서 보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성취하기 위해서 있는 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불신의 세계에서는 누가 주체입니까? ‘나’. 내가 주체가 되어서 세상 모두는 이유도 없이 무조건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있어야 돼요. 내가 투자한 아파트만 값 오르고 나머지는 다 떨어져야 돼요. 내가 응원하는 우리나라 wbc 팀은 일회에 6점내야 돼. 하지만 대만은 박살나야 돼. ‘신이시여, 뭐 하십니까? 날 안 도와주고.’
이게 애굽 나라를 거쳐야 ‘나’라는 인간이나 애굽 사람이나 똑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아야 이 애굽에서 빠져 나온다는 자체가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거예요. 왜 안 되는 줄 압니까? 빠져 나오기가 싫어요. 그리고 빠져 나온다는 의미를 몰라요. ‘여기서 목회해서 부흥하면 그만이지 뭘 빠져 나와. 큰 교회 있는데 왜 빠져 나와.’ 목사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나 좋아하는 사람 많고, 내 교회 교인 이천 명 된다. 그런데 내가 왜 빠져 나와야 되는데. 내가 성취할 것 성취했는데 왜 빠져 나오는데.’
자기가 기대한 걸 성취해버리면 그 다음부터 교회 나오고 신앙생활하고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나와서 구원받은 사람이냐 하면, 내가 기대한 것 말고 다른 걸 따로 주께서 챙겨서 우리에게 공짜로 주심을 그걸 생각하면서 설교 듣고 봉사하고 이래야 성도지, ‘내가 세상일 안 되는데 주여 들어주시면 안 됩니까’ 이건 아니지요. ‘애 둘이 장가를 안 갔는데 어떻게 장가를 보내야 되는데’ 이건 자기 성취지 주님의 말씀, 뜻이 아니다 이 말이죠.
우리 딸도 슬슬 결혼할 때가 되서 막상 내 딸이 결혼 적령 나이가 되니까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결혼한다는 것, 이게 꼭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유는 뭐냐 하면, 그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가 애쓴다고 될 것 같으면 하겠는데. 대학원 가는 건 되거든요. 대학원과 결혼할 건 아니잖아요. 누구하고 결혼한다는 것은, 지가 하고 싶어서 되는 게 아니고 서로가 오해해야 가능하거든요. 어떤 오해냐 하면, 리플에 그런 글 달았습니다만 ‘당신, 나, 사랑해.’ ‘사랑해.’
사랑이란 말을 애굽 나라에선 못 씁니다. 왜냐하면 애굽 나라의 특징이 뭐냐? 나의 성취욕이 지배하는 나라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사랑이 안 나오게 돼있어요. 사랑이 안 나오는데 사기를 치는 기라. ‘난 자기를 사랑해.’ 나중에 보니까 사랑이 아니었어요. 요한일서 4장 7절에 보니까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다” 하나님만 사랑이지 다른 사람은 사랑이 아니었는데 어릴 때 그걸 몰랐지. 모르니까 속은 거예요. 속으니까 마음에 상처를 입은 거예요. 양쪽 다 상처 입은 거예요. 손미나란 아나운서는 결혼한 지 일 년 만에 이혼해버리고. 여행한다고 돌아다니고.
사랑을 원해서 갔는데 사랑이 없는 거예요. 방법이 뭐냐?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 이것 얼마나 좋아요. 부담도 안 주고. ‘우리 친하게 지내자.’ 부담 없이. 서로 상처를 안 주고. 오늘 복음 들었지요. 집에 가서 실천에 옮기시기 바랍니다. 친하게 지내면 돼요. 괜히 욕심내지 마시고.
애굽 땅에 들어가면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다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사람이고, 교회 다니면서 부르짖는 하나님은 내 성취욕이나 들어주는 가짜 하나님이지 원래 하나님은 내가 있는 한 모르게 돼있어요. 그래서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빠져 나오는 것도 모르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몰랐습니다. 내가 왜 지하 감옥에 갇혀야 되는지, 내가 왜 남한테 잘 베풀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점점 더 일이 꼬이는지. 이유를 몰랐어요.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꿈은 내가 뭔가 잘 되는 건데. 그러니까 처음에 철없는 요셉은 꿈을 가지고 자기가 성취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자기의 꿈을 성취하는 것은 누구 몫이냐 하면, 바로의 몫이었습니다.
바로는 요셉 아버지한테 너무너무 잘해주지요. 왜 잘해주는가? 자기가 기대했던 온 나라가 왕 자기 소유가 돼버렸으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아이고, 고맙다. 너희 아버지 오셨다고? 잘해드려야지. 좋은 땅 드려서 마음껏 살라 해라. 받은 것만 생각해도 얼마나 좋은데.’ 바로는 좋다 해요. 네가 믿는 하나님 때문에 내가 큰 축복 받아서 좋다 했습니다. 그거 저주입니다.
왜 저주냐 하면, 자기 성취, 자기로부터 못 벗어났으니까 그건 죽음이란 말이죠. 바로가 애굽을 포기 못하듯이 애굽 땅에 살았던 이스라엘 후손들도 절대로 애굽 땅을 안 빠져 나오려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모세와 아론이 왔을 때 ‘신이시여, 저 두 인간. 헛소리하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선 이걸 누르지요. 이 애굽 땅을 눌러버려요. 누르니까 애굽 땅에 모든 재앙과 모든 어려움은 누굴 위한 겁니까? 빠져 나가야 될 사람인데 안 빠져 나가고 있는 이스라엘, 야곱의 후손들은 겨냥해서 압박이 오지요. 그렇다면 지금 울산경제 어렵다. 이거 누구한테 압박가하는 겁니까? 바로 새순교회 교인 여러분한테 압박 가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천국이 아니라는 거예요. 울산전체가 뭐 때문에 있다?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그런데 울산사람들은 뭘 봅니까? 자기의 기대하는 것, 경제적인 축복을 기대해서 울산이여, 번영하라. 그거는 바로의 생각이고, 이 안에 들어있는 진짜 성도들은 경제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뭔가 이것은 압박을 가해서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B 지점에서 C 지점으로 점점 더 이쪽 세계가 더 크게 보이는, 나중에는 이쪽 동굴까지 합해서 몽땅 말씀이 적용 안 되는 대목이 없다는 것, 전체가 바로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금 한 이야기를 좀더 늘여봅시다. 이 애굽이란 동굴에 누가 들어 사는가? 여기에 야곱의 후손들이 같이 삽니다. 하나님 뜻은 뭐냐 하면, 바로에게 큰 물질적인 혜택을 준 것은 바로 혼자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야곱의 후손들이 여기서 대 번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시편 105편에 나오지요. 크게 번성했어요. 번성하니까 이 사람들이 애굽을 자기 고향처럼 여겨서 빠져 나올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빠져 나올 생각이 없는 사람을 어떤 식으로 빠져 나오게 하느냐?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그러니까 빠져 나오기는 나와야 되는데 안 빠집니다. 이것하고 ‘야 나가기는 나가야 되는데 이 세상이 너무 좋아’ 이걸 말하는 게 아니고, ‘나오기는 왜 나가는데. 여기가 더 좋은데’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다? 바로 야곱의 후손들, 이스라엘이란 말이죠. 아예 나간다는 생각을 못해요.
그렇다면 나온다는 생각을 못하는 사람에게 제가 방금 무능력, 자기 능력으로 안 된다는 이 말은, 구원받기는 받아야 되는데 내 힘으론 안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구원의 의미를 다른 의미로 사용해서 ‘지금 나는 구원됐잖아’라고 편안하게 상당히 안심 놓고 있는 그런 상황에 있다 이 말이에요. 제 말 뜻을 아시겠지요.
‘이만하면 됐지. 애 공부 잘하지. 예수 믿고 구원받았지. 교회 편안하지. 뭘 부족해.’ 이런 생각이 있지 ‘이것저것 다 아니야’란 생각을 감히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나올 리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축복이란 의미를, 빠져 나오게 해봅시다. 오늘 본문 47장 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여기서 야곱을 뭐로 봅니까? ‘나그네’로 보지요. 이것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같은 의미 쓰였는데, 그때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왔는데 그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세 명이 공통점이 뭐냐? 전부다 이 땅에서는 객이었고 나그네였단 말이죠.
지금 야곱은 자기를 나그네 인생, 백 삼십 년 인생이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나그네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돌아갈 곳이 이 땅 같으면 괜찮은데 이 땅이 아니고 돌아갈 고향이 따로 있죠. 따로 있다는 게 어딥니까? 자기가 돌아갈 수 있는 곳입니까? 못 돌아가요. 자기 힘으로. 왜? 자기는 계속 뺑뺑이 도는 겁니다. 계속 나그네 인생을 사는 겁니다.
그런데 돌아갈 자리는 누가 만들어 준 거예요?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곳이잖아요. 자, 그 말 들어보면 더욱 더 불가능해지요. 보세요. 지금 아래층에서 인생은 나그네처럼 뺑뺑이 돌고 있습니다. 백삼십 년 동안. 아무리 돈다 해도 계단식으로 해서 서른 살 때, 사십 살 때 올라가면 되겠는데, 그게 아니고 계단 없어요.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이 친히 마련한 뭐가 있다? 하나님의 새로운 본향이 있다. 또는 새 예루살렘 성이 있다 이것 아닙니까.
여기서 뺑뺑이 돌고 있는 야곱이, 돌아갈 고향을 하나님이 마련해줬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폴짝 뛰어서 올라갈 수가 없어요. 계속 이 밑에서 맴돌고 있는 거예요. ‘하여튼 이곳은 아니야.’ 이러면 말이죠. 그렇다면 문제는 뭐냐 하면, 분명히 하나님이 친히 장만한 장막이 보기는 봤고, 나그네인데 어떻게 들어가는데?
여기서 야곱이 발견한 것은 바로 요셉을 본 겁니다. 자기 후손. 자기는 자기 힘으로 하나님이 친히 만든 장막집에 못 들어갑니다. 요셉이 누구 아들입니까? 야곱의 아들이잖아요. 요셉은 어떤 인물입니까? 죽었잖아요. 짐승한테 물려서 죽었죠. 없는 인간이죠. ‘없음’이라 했다가 갑자기 살아있었죠. ‘있음’ 됐죠. 그렇다면 없음에서 있음의 능력 속에 야곱 자기를 거기다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야곱은 뭘 알았느냐 하면, 여기 있음 가운데서 요셉뿐만 아니고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있죠. 므낫세와 에브람은 야곱 없이 태어났죠.
여기서 어려운데 지금 하나님께서 누구한테 약속했습니까? 하나님이 야곱하고 축복을 약속할 때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자기가 주도적인 역할 한다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너는 나가 놀아라’ 완전히 축복은 주면서도 나가 놀고, 자기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뭐냐 하면, 요셉의 후손 낳는 거예요. 열두 아들. 열두 아들 속에 므낫세, 에브라임을 집어넣어버리잖아요. 그래서 열세 지파 되잖아요.
자기는 완전히 배제해버린 채 하나님께서 이미 죽었다고 여긴 요셉을 통해서 두 아들을 얻게 되었으니까. 손자지만 어디까지나 아들 반열이에요. 그렇다면 이 아들은 누구 아들입니까? 나의 아들이 아니고 말씀의 아들이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새로운 본향, 새로운 장막에 넣어주기 위해서 나 없이 일을 하시고, 그 일한 결과 속에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야곱과 후손은 어디에 들어가야 하느냐 하면, ‘없음’에서 ‘있음’ 이 자리에 들어가야 되죠. 그러니까 묵시의 세계에 바로 들어가는 게 아니고, 묵시와 역사가 만나는 이 지상에서 어떤 걸 찾아야 되느냐 하면, 없음에서 있고, 죽은 데서 살아난 그 계시의 흔적에 내가 참여하면 거기에 실려서 나그네 인생이지만 천국 가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야곱이 자기 지팡이에 의지해서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 21절.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보통 죽으면 자기 포기인데 자기는 죽으면서 내가 먼저 가 있겠다는 거예요. 선배라고.
그러니까 보통 죽으면 ‘아이고, 나 인생 끝났다’ 이게 아니고 영원히 사는 거예요. 그리고 누굴 걱정하느냐 하면, 자길 걱정하는 게 아니고 아직도 나그네 길을 살아야 될 자기 후배들 걱정하는 거예요. ‘자슥아. 아이고, 하나님이여. 축복 좀 해주이소. 고생할 생각하니 기가 찬다. 너희들 보니. 아이고, 세환아. 나는 허리 아파 먼저 가지만 기가 찬다.’
이게 바로 믿음은 보이질 않는 걸 믿는 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야곱이나 이삭이나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아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뭘 합니까? 완전히 야곱을 빼돌린다니까요. 인간취급도 안 해버리는 거예요. 그게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사람을 사람취급도 안 해요.
‘기도했나? 웃기고 있네. 성공했나? 나, 너하고 안 논다.’ 우리를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하나님, 이것 좀 성취해 주시옵소서.’ ‘나, 네 기도 안 들어. 너하고 상대 안 해.’ 기대한 것 아나도 안 되고, 모든 게 망해버리고 없고 뭐 이런 험악한 인생을 사는데. 가만 보니까 빼돌리기 위해서 험악한 인생을 살아버리고. 그 와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없는데서 있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서 없는 자식까지 새롭게 생기는 여기가, 이 작용이 하나님께서 그냥 나한테 입혀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한테 축복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받은 축복은 내가 기대한 거다, 기대하지 않은 거다? 내가 기대하지 않은 걸 축복이라 합니다. 내가 기대한 걸 하면 바로 왕 돼버려요. ‘나는 이 세상이 좋습니다’ 되는 거예요. ‘야 기도한 대로 착착 이뤄지니까 이 땅에 더 살래.’ 이건 나그네 인생 아닙니다. 험악한 인생 아닙니다. 완전히 빼돌려버려요. ‘나가 놀아라. 저리 가 있어. 저 멀리 가 있어.’
그것을 여기 히브리서 11장 내용에 그 대목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14절에.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을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 성은 우리가 험악한 세월을 안 보내고 만날 이 땅에서 우리 기대만 생각한다면 눈에 안 보이는 거예요. 돌아갈 필요도 없고 우리는 이 땅이 좋다고 우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바로 왕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어디 가야 되겠다는 생각보다도 여기가 어떤데?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위에 내가 기대하는 것, 내가 희망하는 것이 하나하나 뭉개지고 그것이 내 소원대로, 내 뜻대로 안 이뤄질 때 비로소 내가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도 아니고 말씀도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 뜻과 약속은 어디 있느냐? 이렇게 성경에 잘 나와 있는 걸 우리는 평소에 성경 보면서 만날 오해하기를 성경 하나 보고 내 기대와 내 소망을 여기가 결합을 시키려 하는 거예요. 자꾸 연결시키려 하는데 이게 엄청난 오해잖아요. 그것이 바로 바로 왕 식이잖아요. ‘하나님이여,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주께서 빼돌린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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