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목소리 읽기 윤희수
. . . 가려진 목소리들, 그래서 나는 베일을 벗긴다, <휘트먼> 1. 사물은 제 나름의 목소리를 지닌다. 나는 사물에 둘러 쌓여 있다. 사물은 제 나름의 향기를 지니고 제 이름의 의미를 소리낸다. 장자莊子는 이 목소리를 지뢰地 와 천뢰天 라 했다. 대지가 내뿜는 숨결 즉 바람으로 술렁대는 산림山林 속,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에는 수 없는 구멍이 있다. 그 구멍의 모양도 코를 닮은 것, 입과 같은 것, 귀 비슷한 것, 옥로같은 것, 술잔 모양의 것, 절구처럼 생긴 것, 움푹한 것, 도랑 비슷한 것 등 가지각색이다. 그 발하는 소리도 격류의 울림과 같은 것, 활시위소리를 내는 것, 꾸짖는 소리를 닮은 것, 숨을 들이쉬는 듯한 것, 외침소리를 연상시키는 것, 울부짖는 것, 깊고 희미한 것, 애처로운 울림을 가진 것 등 여러 가지이다. 앞선 자가 '윙'하고 부르면 이에 따르는 자가 '웅' 하고 대답한다. 그러다가 심한 바람이 멎으면 모든 구멍은 호젓하니 조용해진다. 그 뒤에는 다만 나무들의 가지가 소리 없이 흐늘거리고 살랑거리는 것, 이것이 지뢰地 다. 즉 지상에 생기는 온갖 소리의 총칭이다. 그리고 바람이 온갖 다른 것에 불어 그 온갖 물건이 저마다의 특유한 소리를 자신의 내부로부터 일으키게 하는 것, 그것이 천뢰天 라 한다. 만물이 발하는 온갖 소리를 만물이 스스로 골라잡은 것이다. 나는 사물이 틈새 사이로 내보이는 섬세한 흔들림과 그 흔들림이 보여주는 반향反響의 미묘한 낌새를 알아채려고 항상 더듬이를 곤두세운다. 언어의 육감에 와 닿는 사물들의 독특한 냄새와 사물들이 풍기는 정령들의 체취를 감지하려고 한다. 그 때 나는 친근한 눈길로 나를 맞이하는 사물들을 만나고, 사물이 소리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사물로 들어갈 수 있다. 사소한 것을 사랑하려는 감각의 돌기와 하찮다고 버려 둔 것들이 내보이는 섬세한 냄새를 찾으려는 정서의 민감함.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세계를 넘나들게 하는 징검다리이다. 나는 목소리를 가리고 있는 베일을 벗기려 한다. 도시적인 것이든 농촌스러운 것이든 주변의 사물을 거닐고, 나아가 사물과 함께 거닐어 보는 데에서 사물의 속내는 그 진실을 드러낸다. 사물을 바라보는 사랑과 껴안음은 인간이 이룩한 이성과 감성을 넘나드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신선한 충격이 될 것이라는 어떤 현자의 지적에 동감한다. 존재의 발견은 크고 엄청난 것에서가 아니라, 한없이 작고 가벼운 것에서 얻어진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가려져 있다. 목소리들이 가려져 말이 없는 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 똥덩어리들을 굴리는 말똥구리들은 사소하다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한다. 새벽 안개에 가린 갈대 숲에 가린 물새의 미세한 움직임은 바쁜 일상 속에 끼어 들기 어렵기 때문에 무시된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욕망의 찌꺼기는 감추진 욕망이 강하게 의식되기 때문에 오히려 의식적으로 억압되기도 한다. 이러한 존재의 자기표현을 가리는 베일은 어떤 존재가 사소하다고 한다거나 익히 알고 있는 존재만을 이야기하거나 알면서도 말하지 않을 뿐더러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모두 존재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통한다. 따라서 가려진다는 것은 고정관념 속에 갇힌다는 것이며 베일을 벗긴다는 것은 일정한 방향으로 고정된 사물을 관념의 속박에서 풀어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로, 베일을 벗긴다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의미를 지니며,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사물 하나 하나의 고정되지 않는 고유한 존재를 열어놓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한마디로,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사물 하나 하나를 열린 개체로 지각함을 의미한다. 사물을 일체의 고정된 관념에 따라 보지 않고 전적으로 새롭게 보자는 것, 즉 베일을 벗긴다는 것은 베일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베일에 가려지기 전의 사물을 처음부터 지각하는 데 있다. 가려진 목소리들을 의식하는 것은 그 자체가 침묵의 소리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시인이 소리 없는 것의 목소리를 의식한다는 것은 좀더 엄밀하게 볼 때 시인이 침묵 자체를 소리 없는 것의 자기표현으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화자) 자신이 침묵하는 가운데, 세상의 가려진 목소리들 혹은 침묵의 소리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 즉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의미이다. 시인이 베일을 벗긴다는 것은 탈창조(decreation)로써 개념적으로 구체화되어 드러난다. 이것은 관념을 부정하는 정신이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으려는 형이상학적 행위이며, 사물에 대한 관념들이 아닌 사물 자체를 지향하는 행위는 사물을 열려있는 존재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2.
먼저 김민정의 [가시연꽃]을 읽는다.
300년 후쯤이면 우포늪은 뭍으로 변한다고 쪽배를 저으며 그는 물의 계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티벳으로 떠났다는 그의 풍문에 나는 늪의 수면 끝까지 동심원을 그려대는 실잠자리의 날개짓 따라 잠을 기댄다 1억4천 년의 해가 뜨고 달이 뜨고 1억4천 년의 해가 지고 달이 지고 어둠과 빛이 망설이며 뒤섞이며 곰삭아 내린 물의 밑바닥이 밀어 올리는 내 얼굴, 흔들리며 부서지며 수면 끝까지 끝까지...... 박물관에서였던가 청동의 거울을 오래 들여다 본 적이 있었다 잔무늬 물결 새겨진 동경 속에서 내 얼굴 환히 떠오르기를, 푸르스름한 녹이 더께 앉은 물결을 헤집고 언제쯤 내 얼굴, 더 오를까? 그 텅 빈 기다림을 응시한 적이 있었다. 한 척의 쪽배로 그는 물을 건너갔다. 노를 젓던 그의 두 손이 열어보이는 풀숲에는 일곱 개의 희고 둥근 흰뺨검둥오리의 알들 벽감 속에 모셔진 성체를 눈을 감고 혀끝으로 받아 삼키듯 내가, 가만히. 들여다본다 얼마나 긴 잠을 잤을까 활처럼 휘어지며 제 몸을 엮어 가던 달과 해를 가두고 자기의 깊은 곳 하나씩 하나씩 온몸의 숨구멍을 가시 돋친 열망으로 부풀리며 과녁처럼 버티고 선 몸 한가운데를 물어뜯어며 생피 흘리며 불쑥, 꽃대를 밀어 올리는 뿌리의 잠, 잇몸 속의 이빨처럼 가지런히 희고 붉은 것일까? 옴마니파드메훔옴마니파드메훔......붉은 이빨처럼 동굴 속에 파고 드는 진언의 상형문자를 그가, 가만히. 들여다보겠다. 그가 젓는 쪽배의 물소리를 내며 팽팽히 어두운 이마를 가로지르는 실눈 뜬 긴 잠의 촉수 끝에 아득히
무너져 내리는, 텅 빈
붉은 꽃자리! 내가 비교적 긴 시를 인용한 이유는 지금 여기 내 앞에 펼쳐진 우포늪의 형상, 또는 그곳에서 만난 <가시연꽃>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사물과 존재를 지각하는 체험이 시간에 응축되어 일어나고 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드러남>이 뜻하는 존재 자체의 <시간성>(temporality)을 주목하였듯이 이 시는 우포를 구성하고 있는 사물들의 존재, <실잠자리의 날개짓>이나, <일곱 개의 / 희고 둥근 흰뺨검둥오리의 알들>에게서 <어둠과 빛이 망설이며 뒤섞이며 곰삭아 내린 물의 밑바닥이/ 밀어 올리는 내 얼굴, 흔들리며 / 부서지며 수면 끝까지 끝까지> 떠오는 느낌, 또는 <벽감 속에 모셔진 성체를 눈을 감고 혀끝으로 / 받아 삼키듯 내가, 가만히. /들여다보>는 정서적 전이가 상당기간 지속되며 뚜렷이 환기될수록, <가시연꽃>이라는 사물에 내재한 시간의 지평에서 일어난 존재 체험이 더욱 생생한 것으로 환기된다. 사물의 고유한 존재가 스스로의 시간성에 의해 언제든 동적으로 출현할 수 있음을 <물의 계보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티벳으로 떠났다는 그의 풍문>이 존재 이해의 지평으로서의 시간적 의미를 감지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여기서 <잔무늬 물결 새겨진 동경 속에서 내 얼굴>이 <환히 떠오르기를> 화자는 기대하면서, <푸르스름한 녹이 더께 앉은 물결을 헤집고 / 언제쯤 떠 오를> <내 얼굴>을 <텅 빈 기다림>으로 치환한다. 그리고 그것을 <응시한다>. 이 <응시한다>로 표현된 존재는 이 세상이 불안과 소외감을 안겨 주는 한, 우리는 불현듯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영원한 세계로 떠나기를 갈망한다. 시시각각 밀려드는 죽음에의 불안, 세계의 변방에 던져진 실존의 비극은 필연적으로 어떤 초월 의지를 갖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승 의지는 어둠의 너울을 잠시 벗어나는 일회용의 몸짓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간절한 염원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젓는 쪽배의 물소리>와 <어두운 이마>는 서로 가로지르는 팽팽하고, 화자는 <실눈 뜬 긴 잠의 촉수 끝에 아득히 / 무너져 내리는, 텅 빈 // 붉은 꽃자리!>를 인식한다. 여기서 <그>는 초월세계를 지향하는 존재론적 개념이다. 삶의 허무가 깊어갈수록 인간은 빛으로 가득찬 생명으로 돌아가기를 강렬히 꿈꾼다. 하이데거가 상기시켰듯이 시인이란 존재의 근원으로 끝없이 귀향하는 자(Der Beruf des Dichters ist die Heimkunft,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활처럼 휘어지며 제 몸을 엮어 가던 달과 해를 가두고 / 자기의 깊은 곳 하나씩 하나씩 / 온몸의 숨구멍을 가시 돋친 열망으로 부풀리며 과녁처럼 / 버티고 선 몸 한가운데를 물어뜯어며 생피 흘리며> <꽃대를 밀어 올리는 강인하고 한결같은> 진언을 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 속의 생명이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생명이 아니라, <가시연꽃>의 내재적 형상기억과 밀착하여 사물형상 근저에 존재 혹은 생명이 있다는 형상과 생명이 일체됨을 읽어내고 있다. 3. 한편, 문인수의 <산 보는 집>에서는 앞 시와 다른 사물의 목소리를 읽어낸다.
산을 먹는 구름, 구름 마시는 산, 흐렸다 다시 갠다. 생각이 복잡하다,
온 몸을 밀어넣자.
중심을, 중심을 잡고 저 산 더 시퍼렇다.
모든 사물을 관류하는 하나의 존재는 생명이다. 생명은 가둠이 아니라, 열림이고, 중합이다. 모든 사물에서 얻는 감지는 동일하지 않다. 어떤 사물이든 스스로의 고유한 존재를 지니며 그러한 존재를 느끼는 일이 다수의 사물 하나 하나를 통해 가능하다. <산을 먹는 구름, 구름 마시는 산>이 <흐렸다 다시 갬>은 사물의 개별성이다. 사물들이 나열되지 않는다. 단지 그 사물이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사물이든 자기 존재를 개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시인은 <흐렸다 다시 개>는 사물의 경계를 섞이도록 <생각이 복잡하다.> 사물들이 나열되지 않는다. 다양한 사물들이 이루는 하나의 세계 즉 <산>과 사물들의 존재가 시간성을 주된 속성으로 지니며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구름>이 만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세계 즉 <산과 구름>의 상호 교감에 있다. <온 몸을 밀어넣자.//중심을, 중심을 잡고/저 산 더 시퍼렇다.>라고 시인은 우리는 일상에서 늘 나와 남을 구별하는 의식을 부정하고 섞임의 미학을 실현하려고 한다.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가진 사물들은 우리의 의식 밖에서, 우리의 의식 앞에 마주 서있는 대칭적 존재다. 그렇게 서로 대상으로서 표상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의식주관에 의한 대상적 파악이다. 하나의 사물은 언제든지 자기 동일성을 지니는 것이요, 결코 타자와는 동일하지 않다라는 '즉 A는 A이요, A는 비A가 아니다'로 집약된다. 이러한 사유의 바탕은 논리적으로 사유의 대상은 항상 고정되어 있거나 적어도 필연성에 예외가 없어야 한다는 점에 두고 있다. 만일 사물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유동과정에 있는 것이라면 논리적 사유는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그 때에는 A는 비A이요, A는 A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은 이런 논리적 사유를 부정한다 오히려 A는 A일 수 있고,, A는 비A일 수도 있음을 발견한다. 이 의식의 저변엔 섞임으로서 생명의 이루는 노장의 사상이 깔려 있다. 마음 씀이 문견聞見(보고 듣는 개별적인 감각활동, 외부사물과의 제한된 접촉)에만 얽매이지 않고, 마음을 비워(虛) 감응한다. 곧 하나로 합한다(合也,咸也). 사물의 개체이면서 합일되는 신비적 리얼리즘(mystic realism)이다. 초목이 빛과 그늘이 교차하면서 만들어 내는 거부할 수 없는, 소리 없는 힘을 드러내는, 각별한 순간의 사물체험을 경험하고 있다. 사물을 드러내는 이 순간(시간)의 빛의 작용은 시인이 느끼기에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작용이며 빛의 작용(빛과 그늘의 절묘한 교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사물의 드러남은 사물의 존재가 가장 여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면서 바로 그 때문에 신비감과 황홀감을 느끼게 한다. 4. 박정남의 시 <하나님의 방심인 코딱지 구름>을 읽는다 이 시는 앞의 시와는 달리 예사롭게 보이는 <구름>을 통해 사물이 보여주는 풍경을 동화적으로 시뮬라크르한다.
하늘 한 모서리에 동그란 무덤들이, 옹기종기, 다시 바다 쪽으로 내려서며 조개 무덤들이 깔려 있다. 억새가 날리듯 조개 무덤들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게 몸을 벗고 있는 중, 깃털처럼 가볍게 떠 있다. 하나님은 심심해서 손가락 가시를 뜯고 콧구멍을 후벼 코딱지를 돌돌 말아 공을 만들고 보던 책 오른편 책상 위에 모아 나열한다는 것이 그만 들켜버렸다. 하늘 한 귀퉁이로 삐져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방심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손가시, 코딱지가 저처럼 가벼운 너울, 하나님이 먹고 버린 조개 껍질.
어차피 세계는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미지들 배후에는 실재가 없다. <구름->하나님 손가시->하나님 코딱지>로 변용되는 은유적 명명이다. 이것은 이미지 속에 실재하는 세계 대신에 오인되는 이미지를 읽어내는 방법이다. 어린아이의 눈을 빌려 시니피앙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풍경의 외형이 은유하는 왜곡된 해석의 축을 거쳐, 사물의 실재를 무화(無化)한다. 남은 것은 존재의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 형상이다. <가벼운 너울, 하나님이 먹고 버린 /조개 껍질>라는 이 의식의 바뀜에는 의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사물은 허구적일 수밖에 없고, 그 허구성을 파기하는 방법은 자신과 세계를 구속하는 그 무엇을 삐딱하게보기라는 것이다. 시니피앙은 있으나, 시니피에는 없는 것과 같다. <가볍게 떠 있>는 <깃털>, 물론 구름은 그러하다. 그러나 시니피앙들만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시의 사물들은 주체가 분열된 모습이기도 하며, 타자화된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심심해서 손가락 가시를 뜯고 / 콧구멍을 후벼 코딱지를 돌돌 말아 공을 만들고 / 보던 책 오른편 책상 위에 모아 나열한다는 것이 /그만 들켜버리게> 된다. 자연은 늘 같은 순환을 하는 듯 하지만 모든 자연 상황은 단 한순간도 동일하지 않다. 어제 갔던 모랫벌은 오늘 또 달라지고 그것을 보는 사람의 심상도 순간순간 달라진다. 이렇게 주체는 분열되고, 우리는 타자화된 시니피앙만 읽어내게 된다.
한편, 최재명의 시 <상형문자> 중 <거울>을 읽으며 나는 장자莊子가 말하는 <거울鏡>을 상기한다.
거울은 사물을 얼비추는 상형문자이다. 맑은 물 같아 어둠을 열고 아침마다 마음의 골짜기를 오르락내리락 얼굴을 씻는다. 무게도 없고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지만 파랑도 없고 빨강도 없고 노랑도 없지만 거울은 높고 깊다.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워 본래의 온전한 모습을 담는 무형의 상형문자다.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하늘에게서 받은 것을 다하지만, 보여지는 것은 없고, 다만 텅 비어 있을 뿐이다. 지인至人의 마음 씀씀이는 거울과 같아서, 어떤 것이든 맞이하거나 보내는 것이 없이 감응感應하고 축적함이 없다. 그러한 까닭에 물物을 감당해내면서도 물物에 자기 자신이 다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천하天下편에서도 <자신을 어떤 특정 입장에 두지 않게 되면, 物은 제 모습을 스스로 드러낸다. 움직임은 물과 같이 하고, 움직임이 없을 때는 거울과 같이 하라. 그 감응함은 마치 메아리와 같이하여, 홀연한 것이 마치 없는 것 같고, 고요한 것이 물이 맑은 것처럼 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거울鏡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아무런 왜곡 없이 비추어낸다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거울과 같은 마음 씀씀이로 대상物에 임했을 때, 자기 자신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대상物에 대응할 수 있다. 흔들림이 없는 물은 그 자신이 밝음明을 내어 거울처럼 비추어 낼 수 있고, 물水은 활동할 때에, 그 움직임이 어떤 정해진 틀이 없이 상황에 맞게 진행된다. 이것은 물이 원래 정해진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감응함이 메아리 같다>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특정한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태에 맞추어 대응한다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5.
인간의 자아가 사물의 세계와 관계를 맺는 양상은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시인은 세계를, 하나의 사물이 그 빛을 발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스스로를 다양하게 드러내며 모든 개체들을 하나로 모으는 살아 움직이는 전체로 이해한다. 사물 하나하나는 그 외형에 고정되기 쉽기 때문에, 시인은 모든 사물을 관류하는 무형의 속살이 지닌 현상적 인식과 선험적 인식을 아우른다. 사물이 존재의 아우라에 비춰질 때, 고정되지 않고 살아나는 존재가 된다. 존재가 무한히 모습을 바꾸어가며 드러나는 유동적 전체로서의 세계는, 사물들이 제 목소리를 내며, 그 목소리가 모여 하나의 신비로운 힘을 드러내는 영성靈聲이다. 시인은 사물과 사물들이 이루는 세계에 반응하며, 그러한 세계의 영성靈聲을 읽어낸다. 형상들의 세계와 유동적 전체가 일치하는 순간, 시인은 황홀한 아포리아를 노래한다. 사물의 육성 및 사물의 형상 자체 가진 육체의 감각과 더불어, 세계로서의 유동적 전체로 나아가는 초월. 시인은 이것으로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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