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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상] 단애 윤세복의 생애와 사상
김 종 성(대종교 선도사)
1. 머리말
제 1세 도사교 홍암 나 철 선생, 제 2세 도사교 무원 김교헌 선생 그리고 도사교를 지내지는 않았지만 종사로 추대된 백포 서 일 선생은 모두 일제치하에서 민족정신의 함양과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이다. 한편 제 3세 도사교인 단애 윤세복 선생은 한일 합방 및 대종교의 초기 활동부터 해방될 때까지 일제치하 그것도 망명지 이국땅에서 의롭고 처절한 투쟁으로 일관해 온 형극의 길을 걸은 분이다. 선생의 생애는 파란만장한 인생의 한편의 드라마이면서 동시에 민족 통한의 역사를 대변해 온 삶을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단애 선생의 생애는 일제시대 우리 민족이 겪었던 처절함 그 자체였고 느끼신 고통은 당시 민족의 지도자, 지식인들이 겪었던 단면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음미 해봄은 오늘날 역사인식의 부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귀감이 될 것이며 이런 분들의 희생 위에 현재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냉철한 성찰의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2. 단애 윤세복의 생애
1. 대종교 입교 이전의 활동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근대화를 모색하던 시기인 1881년에 밀양에서 출생한 단애 선생은 22세까지 한학을 수학하고 사서삼경의 유학을 공부하였다. 23세 되던 해인 1903년부터 6년 동안 고향인 밀양읍에 있는 신창소학교와 대구에 있는 협성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육활동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학교를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한편 선생은 1909년 비밀청년운동 단체인 대동 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함께 활동한 사람으로는 안희제, 이원식, 남형우, 서상일, 김동삼,신백우, 신팔균, 곽재기, 신성모, 배천택 등 80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1910년 8월 일제에 의하여 금수강산이 강점 당하자 단애 선생은 큰 충격을 받고 조국을 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두문불출하며 심사숙고하였다. 그러던 중 경성에서 나 철 선생 등이 대종교를 창시하고 조선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종교 교주인 나 철 선생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한다.
2. 대종교 입교 (봉교) 단애 선생은 자주적인 성향이 강한 정신적 소유자였으므로 외래에서 전래된 기존의 종교에 대하여는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민족적 자생의 종교, 더욱이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받드는 종교가 단애 선생에게는 일제하라는 시대적 배경과 부합하여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러한 배경에서 홍암 나 철 선생을 찾는 것이다. 단애 선생이 나 철 선생을 방문하여 대종교의 취지와 목적. 시국에 대하여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대종교 경전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홍암 대종사는 내가 경술년 마지막 무렵 간동(諫洞)에서 처음 뵈었다. 12월 23, 25, 27,일 사흘 밤을 홀로 모시고 역사와 대종교와 시국에 대한 교훈을 감격하게 들은 뒤에 단애 윤세복 (檀崖 尹世復) 의 새 호(號)와 이름을 받고 대종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이렇게 단애 선생은 홍암 선생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고 본명 세린(世麟)을 버리고 나철 선생으로부터 단애(檀崖)라는 호와 세복(世復)이라는 이름을 받고 대종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인 1911년 1월에는 참교(參敎) 교질을 받고 시교사(施敎師)로 임명되어 서간도 지역의 포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국내의 상황이 일제의 감시와 감독으로 포교여건이 매우 어려운 시기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3. 대종교 입교(봉교)후의 활동 만주 환인현 (桓因縣)에 거처를 정한 단애 선생은 우선 학교를 설립하여 후세들에게 단군사상을 교육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을 보다 빨리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대종교 포교의 일환으로 동창학교(東昌學敎)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동창학교 교장은 자신과 함께 망명한 이원식이고, 교사로는 김규찬, 김동석, 김진(김영숙) 등이고 이후로는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이 교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당시 학교에 재학중인 학생들의 경제형편은 대단히 어려웠으며 넉넉한 재산을 갖고 있던 선생은 학생들의 기숙비, 피복비 등을 감당해 주었고 심지어는 가족들의 생계비까지 보조해 주었다. 동창학교는 대종교를 표방한 민족주의 계열의 학교였으므로 이 학교의 설립자인 윤세복 선생의 뜻에 따라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으며 학습에 있어서는 특별히 체육, 역사, 국어를 강조하였다. 즉 체육교육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군사훈련을 전개하였고 국어와 국사를 통하여서는 우리말 우리 혼을 통한 민족의식을 앙양한 것이다. 국어는 김진(白舟 金永肅)이 담당하였는데 그는 주시경 밑에서 한글을 공부하고 만주로 망명한 인물이었다. 역사는 박은식, 신채호 등이 맡아서 민족사관적 입장에서 학생들의 민족의식 도취에 힘썼다. 박은식은 윤세복의 초청으로 1911년 5월 국경을 탈출하여 만주의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에 있는 윤세복 선생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그는 이곳 윤세복 선생의 집에 기거하면서 과거 유교적 사관으로 일관한 자신의 지난 삶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몽배금태조> <명림답부전> <연개소문전> <대동고대사론> 등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당시 동창학교 교사였던 이극로 선생은 여기서 주시경 선생의 제자인 김진 선생과 만남으로써 국어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하였고 상해에서 김두봉 선생을 만나 한글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후에 유럽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 들어와 조선어학회를 이끌고 가는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윤세복, 윤세용 형제의 초청으로 환인현 홍도천으로 와서 체류하게 되는데 이때 신채호도 한국사 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신채호 또한 이 시기에 그의 민족사관의 틀이 되는 낭가사상(郎家思想)의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다. 한편 신채호는 이 시기에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조선사>를 집필 발간하였다. 이렇듯 동창학교를 중심으로 학생들에 대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윤세복 형제에게 유혹과 협박을 통하여 학교 폐지를 종용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일본 영사관측에서 중국관헌들을 협박하여 동창학교를 강제로 폐교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추방당하고, 윤세복 선생 등 일행은 1914년 무송현으로 이동하게 활동하게 된다. 윤세복은 무송현으로 이동하여 전성규와 함께 먼저 백산학교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본격적인 독립 운동을 위한 군사 교육과 민족 교육을 전개하였다. 이 백산학교에는 이극로, 윤필한, 이순필, 신성모 등이 반사반도(半師半徒)의 겸역(兼役)으로 활동하였다. 교육내용도 국어, 국사교육은 물론 대종교에 관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1915년(을묘년)봄에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관헌들에 의해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인 살인 협의로 체포되었는데 단애 선생, 전성규, 윤필한, 성호 등 30여명이었으며 1916년 가을까지 18개월 동안 구금되어 감옥살이를 하였다. 이 때 윤단애 선생 일행의 석방을 위하여 북경, 남경, 상해에서 활동한 조성환, 신규식, 박찬익 선생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이후 선생은 몽강현, 무송현, 안도현 등에서 국민학교 20여개소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와 함께 대종교 포교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중국인들과 친선 도모에도 힘을 썼다. 한편 1917년 7월의 대동단결 선언에 동참하여 서명하고 1918(무오년)에는 만주에서 발표된 대한 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면서 민주공화제와 독립전쟁론을 지지하며 더욱 독립운동의 역량의 결집을 위하여 노력하게 된다. 이것을 보더라도 선생의 독립 운동의 활동 방향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그 인물 비중이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3.1운동의 전개과정을 지켜본 선생은 평화적인 시위운동만으로는 조국의 독립을 달성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19년 7월 무송현에서 흥업단을 조직하고 동포들의 삶과 독립운동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산업을 진흥하면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고자 하기 시작한다. 흥업단 구성원의 대부분은 대종교인이었는데, 홍범도 장군의 총참모로 활약했 던 김 호가 당시 그 단체의 단장이었다. 홍범도 장군도 역시 대종교에 입교하여 활동한 분으로써, 흥업단과의 이런 관계를 보더라도 윤세복 선생과 홍범도 부대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흥업단에 연무소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는데 교관들은 당시 최강의 무장독립단체였던 북로군정서에서 파견하였다. 북로군정서는 백포 서 일 선생이 총재로 대종교인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 단체였으므로 두 단체의 교류와 협력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흥업단에서도 수십 명의 단원을 북로군정서에 파견하여 참모 및 군인으로 활동케 하였다. 한편 흥업단에는 병원시설도 갖추었는데 송림병원이 그것이다. 그 곳의 상주의사는 윤세복의 아들 윤필한이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이곳의 의약품 및 의료기구들은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하고 있는 백산 안희제 선생이 제공하였다. 흥업단은 이렇게 상해, 북경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사뿐만 아니라 북만주의 독립단체 및 국내의 비밀결사단체까지 연결된 체계적인 조직이었다. 이후 보다 효과적인 대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동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게 된다. 그것이 1921년 10월에 결성된 「대한국민단」이다. 여기에는 흥업단 뿐만 아니라 대한독립군비단, 광복단, 태극단, 대진단 등이 협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단애 선생은 대종교의 교세 확장에도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 결과 무송현, 안도현, 화전현, 반석현에 교당을 설치하고 7,000여명의 교우를 획득하고 1922년 6월 5일에는 서일도본사 전리(典理)에 임명되었다.
4. 대종교 도사교로서의 활동 서일도본사의 전리로 임명되어 대종교 시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중 1923년 화전현에서 「상교 윤세복을 사교로 초승하고 경각의 인장을 맡긴다」 (尙敎 尹世復 超昇 司敎 委任 經閣 符印)란 제2세 도사교인 무원 김교헌 선생의 유명을 받들고 제3세 도사교에 취임하게 된다. 도사교 취임 후 선생은 먼저 대종교의 쇄신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흥업단, 북로군정서, 홍범도 부대 등 대종교계열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일제에 끊임없이 대항하고 국내 진공작전 등도 전개하자 일본은 국내치안 확보를 위하여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근절시키고자 타 영토를 침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1920에 조작한 혼춘사건이었다. 당시 일제는 일본국민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미명아래 일본군을 만주지역에 출병시켰는데 주목적은 대종교계열의 독립운동단체들을 없애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에서 참패를 당하므로 이에 대한 보복으로 경신참변이 일어나게 되어 만주에 기거하는 수많은 대종교인이 학살되고 대종교 시교당은 방화되어 소실된다. 경신참변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단체들의 항일 투쟁이 계속되자 조선총독부는 중국의 동북정권과 협의하여 한국독립운동을 탄압하고자 대대적인 계획을 꾸민다. 그리하여 1925년 6월 봉천성 경무국장 우진(于珍)과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삼시궁송(三矢宮松)사이에 삼시(三矢)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삼시협정의 부대조항에 “대종교의 중요 간부인 서일(徐一)이 대한독립군의 수령으로서 일본에 항전하였으니 대종교는 곧 반동군단의 모체로서 영토책임상 이를 해산 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삽입되어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대종교인의 항일운동이 얼마나 강렬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일본이 대종교를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가를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이 조약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1926년 12월에 길림성 독군겸 성장인 장작상(張作霜)은 동 조약의 이행 명목으로 대종교의 포교금지령을 발표하여 대종교의 독립운동과 교세확장은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종교 활동의 금지는 곧 항일 운동의 포기를 의미하기 때문에 단애 선생은 이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북경에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박찬익, 조성환, 이시영, 이동녕 등의 대종교인으로 하여금 동삼성의 군벌정권과 북경의 원세개에게 해금 청원 및 항의 교섭을 시도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손문의 광동 호법 정부의 외교 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인다. 그 결과 1931년에 대종교의 포교 금지령이 마침내 풀리는 것이다. 한편 일제는 동북 만주 침략을 감행하여 1932년에는 괴뢰 만주국을 건설한다.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건국되자 단애 선생은 대종교의 향후 방향에 일대 결단을 내려야 할 처지가 되었다. 완전히 비밀조직으로 운영하느냐 아니면 일제의 승인을 얻어 정식적인 종교포교 활동을 전개하느냐의 문제로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단애 선생은 후자를 결심하고 길을 떠나게 되는데 만약 일제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나 철, 김교헌, 서 일 선생의 뒤를 이을 극단적 생각까지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대종교 포교권 인정 신청에 대한 양해를 얻고 1934년 3월에는 대종교 선도회를 하얼빈시에 설치하고 9月에는 하얼빈 총영사관으로부터 포교허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대종학원을 설립하여 항일민족 교육을 시키는 한편 천진전을 건축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합법적인 대종교 포교 활동은 일종의 함정을 안고 있었다. 즉 대종교의 지도자와 조직체계가 만주국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제는 대종교를 제거하려는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차 국내 조산어학회를 이끌고 있던 이극로가 단애 선생 앞으로 보낸 편지에 동봉된 「널리 펴는 말」을 트집잡은 것이다. 즉 일제는 그 제목을 번역하여 ‘조선독립선언서’라고 하고 내용 중 ‘일어나라 움직이라’를 ‘봉기하자 폭동하자’ 로 날조하고 국내의 조선어학회 사건과 동시에 1942년 (임오년)에 대종교 주요 간부 20여명을 체포 감금하여 고문하므로 10명의 지도자가 돌아가시고 나머지 10명도 구속되어 감옥살이를 하게되니, 이것이 대종교의 임오교변으로 이 때 단애 선생도 무기징역을 언도 받고 복역하였다.
5. 광복후의 활동 단애 선생은 광복 후 환국을 결심하고 1946년 2월 고국 땅을 밟는다. 고국을 떠난 지 36년만의 환국이었다. 환국 후에도 선생은 교리강습회 등을 통하여 교육하였으며, 특히 교육기관설립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일반교육기관으로는 홍익대학, 국학대학을 대종교의 정신으로 설립하고 대종교의 원로인 이시영, 장 형이 신흥대학(현재의 경희대학)과 단국대학을 설립하는데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대종교 중흥회를 조직하여 출판사업을 활발히 진행함은 물론, 제도와 조직을 종신제인 도사교 제도에서 삼권 공화제인 총전교 임기제로 바꾸는 등 제도개혁을 통한 변화에도 노력을 했다. 그리고 후진에게 총전교직을 물려주고 1960년 타계하시니 향년 80세였다.
3. 단애 윤세복의 사상
윤단애 선생은 을사조약 후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교육을 통해 국가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하였고 일제의 토지 조사사업에 의한 경제개혁에서 직접 측량기술을 견습을 받고 토지조사국 측량 기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일합방이 되자 조국을 구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을 찾게되는데 이 방법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역사와 고유한 문화에 뿌리를 둔 사상에 근거해야 함을 깨닫고 홍암 나철 선생을 만나 즉시에 대종교에 입교(봉교)한 점에서 단애 선생의 그러한 의지를 볼 수 있다. 단애 선생은 자신이 이론적인 체계를 층분히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할처럼 항상 뒤에서 후원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동창학교의 설립자이면서도 교장을 이원식에게 맡겼고, 박은식과 신채호 등을 초빙하여 연구를 도운 점이다. 흥업단을 조직 할 때도 선생은 단장을 맡지 않고 총무를 맡아 모든 사무를 총괄 관리하였으며, 연합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단을 결성할 때도 단장을 맡지 않고 의사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따라서 단애 선생의 저술은 많지 않으며 저서도 산견된 내용을 종합하거나 정리한 것이 많다. 그러나 박은식의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을 교열한 것과 같이 환인현의 동창학교 운영 당시, 신채호와 박은식의 저서 그리고 동창학교 교사진의 교육자료는 전부 교열했음을 볼 때 선생은 저술의 능력이 없어서 저술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현실에 닥친 문제의 해결이 더욱 더 중요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단애 선생의 기본사상은 한민족의 영원한 발전과 독립을 위해서는 단군사상에 입각한 교육 체계가 확립되어야 하며 단군이 이 세상에 펼치고자 한 弘益人間 理化世界의 이념으로 온 인류가 살아간다면 지배와 피지배, 침략과 피침략, 강대국과 약소국의 차별이 없는 이상세계를 건설 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이러한 사상을 종교로 승화시키는 길을 일생의 과업으로 추진했다고 볼 수 있다. 단애 선생께서 쓰신 저서는 「檀君考」「倧門指南」「修眞三法會通」이 있고 백포 서일 선생이 저술한 「회삼경」을 역해하였으며 「종사취재고」를 편집 및 정리하였다.
1. 교육관 단애선생은 인재양성에 전력하였으며 그것도 민족정신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일생동안 일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시교자 자격으로 종교를 위해 서간도로 이루 망명한 순간부터 학교를 만들고 훌륭한 교사를 초빙하여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일찍이 동창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강제 폐교된 뒤에도 백산학교에서 계속 교육활동을 하였으며, 일본인 살인혐의를 누명을 쓰고 석방된 뒤에도 무송현 지역에 소학교를 20여개를 설립하여 계속 교육하였다. 또한 포교 금지령으로 인해 밀산현 당벽진으로 총본사를 이전한 후에도 대흥학교를 운영하였으며 대종교 포교 금지령이 해제된 뒤에도 곧바로 대종학원을 개설하여 교육을 계속했음을 볼 때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광복후 환국 후에도 교리강습소를 설치하여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홍익대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의 요람을 만들고자 노력한 것이나 국학대학, 단국대학, 신흥대학(후일 경희대학으로 개칭)의 설립 때도 매우 열렬한 지원을 보냈던 것이다. 심지어 선생은 장기적으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백안 안희제 선생이 운영하는 백산상회의 기미장학회와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규식 선생과 연계하여 동제대학의 입학 및 유럽의 유학을 주선하였는데 대표적 인물이 신성모, 이극로, 안호상 등이었다. 단애 선생은 한일합방으로 인한 망국의 원인을 우리 민족정신의 파괴에 있다고 보고 배달 민족의 국조이신 단군 한배검님께서 세우신 한민족 정통 고위신교(高位神敎)를 올바르게 세우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기초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그러한 노력을 앞에 나서지 않고 수행했다는 점에서 매우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일제하 학교를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그 교육의 과목에는 國語, 國史, 體育(군사훈련)뿐만 아니라 國敎가 반드시 포함되었던 것이다.
2. 수행관 단애선생의 수행관(修行觀)은 선생이 직접 지은 「삼법회통(三法會通)」에 잘 나타나 있다. 三法이란 지감법(止感法), 조식법(調息法), 금촉법(禁觸法)으로 느낌을 그치고 숨쉼을 고르게 하고, 접촉을 금하는 수행법이다. 이 수행법은 대종교 경전 중 교화경(敎化經)인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진리훈(眞理訓)에 명시되어 있다. 사람과 만물이 다같이 세가지 참함을 받는데 이는 성품과 목숨과 정기다.(人物同受三眞 曰性命精) 참성품은 착함도 악함도 없으며(眞性無善惡) 참목숨은 맑고 흐림이 없고(眞命無淸濁), 참정기는 후함도 박함도 없어(眞精無厚薄) 통(通)하고 알고(知)고, 보전(保)하게 되는 데 참을 들이키면 하느님과 함께 하게 된다.(反眞一神)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세가지 가달(나뉘어짐)이 생기는데 마음과 김과 몸이다.(惟衆迷地三妄着根曰心氣身) 그러나 마음은 선과 악이 있고 김은 청과 탁이 있고 몸은 후와 박이 있어 (心有善惡 氣有淸濁 身有厚薄) 인간의 화복(禍福)과 장수(長壽)와 귀천(貴賤)이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참과 가달(眞妄)이 서로 주장하여 세길(三途)이 지어지는 데 느낌과 숨쉼과 부딪침(感息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만히 두면 5가지 고통(五苦)에 빠지게 되므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지감. 조식. 금촉의 3법 수행이다. 이와 같이 단애 선생은 단군께서 교화하신 고대의 심신 수련법으로 수행하였으며 단식과 생식을 병행하였다.
3. 한글관 단애 선생의 한글관은 남달랐다. 세 분 선종사(나철,김교헌,서일)는 교리를 밝힘에 한문을 사용하였지만 단애 선생은 임오교변의 옥중에서도 삼일신고를 한글로 번역하고 광복후에도 동년 8월에 동경성 대종학원에서 한글강습회를 개최하여 청소년 100여명을 교육시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환국 후 1948년에는 대종교 총본사에서 교리강습회를 개최하여「삼일신고」,「신리대전」,「신사기」,「회삼경」등을 국역, 주해하였다. 그리고 국학강좌도 별도로 개최하여 국어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였다. 심지어는 홍암 나철 선생으로부터 단애라는 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애선생은 임오교변시 감옥에서 감상을 적은「복당서정(福堂抒情)」에서「한다물」이라는 순수한 우리말 별호를 사용하였다.이후에 제자들과 함께 저술한 종사취재고 15권도 전부 한글을 혼용하여 펴냈다.
4. 역사관 단애 선생의 역사관은 제일 먼저 홍암 선생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특히 민족사학의 거두인 제2세 도사교 무원 선생의 저서에 많이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단애선생이 지으신「단군고(檀君考)」에 의하면 신시(神市)시대와 배달나라(檀國)시대를 구분하는데 신인(神人)이 개천(開天)하신 갑자(甲子)로부터 단군왕검이 건국하신 무진년(戊辰年)까지 125년을 신시시대라 하고 무진125년 10월 3일에 3천단부 민중의 추대를 받아 나라를 세우니 국호를 단국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무원선생의「신단민사」의 역사관을 계승한 것으로 대종교에서는「단기2333년+125년-1년=2457년」기원전 역년(歷年)을 개천(開天)연호로 사용하고 있다. 조선의 강역인식(認識)도 동쪽은 황해, 서쪽은 흥안령까지, 남으로는 제주도, 북으로는 흑수까지 만여리로 설정했다.
5. 종교관 특히 신관에 있어서는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입장이니 환인․환웅․단군의 3대설(三代說)과 환인시대, 환웅시대, 단군시대의 3왕조설(三王朝說)을 부인한다. 그리고 우리의 종교는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에서와 같이 國有玄妙之道로서 風流道(배달도=단군도)라 하고 유교․불교․도교를 포함하는 매우 심오하고 광범위한 진리를 갖고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우리의 종교는 天神敎로서 明史의 속완위여편(續宛委餘編)을 인용하여 ‘동방에 단군이 나오시어 신의 성덕으로 백성을 가르쳐 근후하게 하고 건져주시니 민족이 강하게 되더라 교명은 부여에서는 대천교(代天敎), 신라에서는 숭천교(崇天敎) 고구려에서는 경천교(敬天敎), 발해에서는 진종교(眞倧敎), 고려에서는 왕검교(王儉敎)라 부르니 매년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낸다’고 하였으니 神敎는 神道로서 인간을 감화하는 종교로서 인간 생활의 원리나 준칙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민속적으로 전래되는 민속제전과 풍속을 잘 따르고 구서(九誓), 오계(五戒), 팔관(八關)을 잘 지키도록 하였다.
三. 맺음말
1923년 제2세 도사교인 김교헌 선생의 타계하자 무원 선생에 의하여 제3세 도사교로 임명되었는데 윤세복 선생이 제1세 도사교인 나 철 선생을 만난 것이 1910년 12월 23, 25, 27일 단 3일간에 불과하였고, 제2대 도사교인 무원 선생도 나 철 선생의 소개로 잠시 인사를 나눈 적만 있을 뿐 서로 대담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2대 도사교로부터 후계자로 임명된 것은 단애 선생이 평소 대종교에 대한 신앙심과 동창학교 운영 등 교육적 측면과 항일독립정신의 뛰어남과 위인 됨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학문과 종교적 신앙심, 가계로 볼 때 당대에 명망 높았던 제2세 도사교의 지명을 받았다는 사실은 단애 윤세복 선생의 탁월함을 그대로 입증하는 것이다. 윤단애 선생은 밀양지역에서는 만석꾼으로 알려진 큰 부자였다. 그러나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대종교에 봉교하고 서간도를 포교하는 시교사로 임명되자 형 윤세용(尹世茸)과 상의하여 가산을 정리하여 1911년 2월 모든 일가가 만주를 향하여 떠나갔는데 이 때 모든 호적을 정리하여 간 까닭에 해방 후 돌아가실 때까지 호적없이 살아 온 것이다. 한마디로 단애 선생은 대종교의 포교활동이 곧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며 자기의 전 재산을 대종교와 독립운동에 헌납했다. 그리고 자신은 개인적인 사유를 버리고 오로지 대종교의 경각과 시교당에 기거하면서 대종교의 분신으로 일생을 마감하겠다는 無所有의 정신을 실천한 위대한「교육자」이자「독립운동가」이자「종교가」였으며 험난한 시대에 민족에게 살신성인의 삶을 보여 준 훌륭한 지도자의 한사람이었다. 선생님의 뜻을 높이 그리고 깊이 받들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이극로는 이러한 단애 선생의 특징을「강의(剛毅)의 인(人)」으로 1936년 조광잡지에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나는 선생을 잘 안다. 나에게 가장 많은 감화를 주신 어른은 단애 윤세복 선생이다. 참 숭배할 인격자다. 첫째로 철석같이 굳은 의지를 가진 어른이다. 한 번 작정하신 일이면 시종여일하게 하여 가신다. 둘째로 보름달과 같이 환하고 둥근 성격을 가지신 어른이라 어디에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시고, 또 컴컴한 행동이 없다. 셋째로 담대(膽大)한 어른이다.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덮치어도 눈도 하나 깜짝아니 하신다. 넷째로 희생적 정신이 많은 어른이라. 억만금(累巨萬)의 사재(私財)도 公을 위하여 희생하고 폐의파립(弊衣破笠)으로 放浪生活을 하실 때에 三旬九食을 하시어도 조금도 불편과 불만과 불안을 느끼지 아니하신다. 끝으로 단애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1년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일기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우리 학원사에서 새해에 선물로 주신 어린이 일기를 늙은이가 쓴다고 꾸지럼 마세요. 우리집에는 어린이고, 젊은이고 다 없어요. 사람은 나하나 뿐인데 내 나이 인간 칠십(七十) 고래희로 일흔살을 떼면 겨우 아홉살입니다. 어린이 구실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끝>
첫댓글 좋은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작 김종성 선도사는 이런 작업을 하지 않으니 원망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