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청소년 문화센타 '하자' 의 명강의 시리즈에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의 인정옥 작가님이 나온다는 기사를 보고 간만에 생긴
약속도 팽개친채 급히 강의를 신청한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사실 말이 강의지 강의는 아니고, 사회자와 관객들이 궁금한걸 질문하고 응답하는 일종의 토크쇼였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매 질문마다
짧막하게 툭툭 던지는 답변들이 어떻게 보면 좀 성의없어 보이기도
했는데, 몇 번 듣다보니 그게 인정옥 작가 본래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씨네21' 에 실린 자신의 사진은 작가적 카리스마를 조장하기
위한 100% 조작된 사진이며 자신은 카리스마 같은 건 전혀 없는 약간의 날탱이 기질을 가진 30대 중반의 여인이라는 그녀의 말에 약간의
환상이 깨지기도 했지만, 그녀와 함께 했던 두 시간은 나에겐 참 즐겁고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 강의中 말,말,말 >
" 작가란 홍대앞 놀이터에서 술먹고 토하는 거다. 머리로 쓰는 작가는
프로지만, 나는 아니다. 마음과 머리가 일치해야 글을 쓸 수 있다. 나를 어디까지 몰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게 항상 문제다. 글이 막힐 때는
작품의 3분의 1을 쓰면 언제나 슬럼프다. 그럴땐 그냥 글을 냅둔다. 책상에 다리 올리고, 소파에 누워서 쓸데없이 리모콘이나 돌리고, 손톱이나 깎다보면 저절로 글이 냅둬진다."
" <네멋> 이전의 작품에서는 초심이 변질됐다. 초심이 변질되지 않으려면 감독과도 싸워야 하고, 주변 환경과도 싸워야 한다. 하지만 굉장한 싸움을 피하고, 도망가기에만 바빴다. 그냥 글만 쓰고 아예 TV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네멋>은 네티즌의 개떼같은 도움으로 싸우는데 흔들리지 않았고, 박성수 감독과 나를 변화시켰다. 비록 <네멋>
집필중엔 거식증까지 걸려가며 고생했지만.... "
" 난 소위 말하는 화목한, 이틀에 한 번꼴로 고기를 먹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썩 행복하진 않았다. TV드라마에서 화목한 중산층을
보여주는 건 죄악이다. 행복의 척도가 만들어지는 거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그 개념만 제시하고, 쓸데없는 짓거리만 한다. "
" 제대로 된 연애란 쓸데없는 거에 집착하지 말고 즐기는 거다. 또한
그 쓸데없는 것도 즐길 수 있다면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건 당사자간의 마음이다. 모든 사랑이 영원해야 하고 불멸의 사랑만이 진실이라
여기지 말길 바란다. 사랑의 현재성이 변함없이 진행되는 한 그것은
사랑이며, 끝난후 좋았던 마음을 간직한다면 그것 역시 사랑이다. "
" <네멋>의 메세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 인생 찾아가는 길에
엄살 떨지 말고 가볍게 걸어가라 ' 이다. 내가 생각하는 대표적 엄살
중 하나가 " 나 오늘 상처 받았어 " 라는 말이다. 상처라는 말을 누가
맨 처음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상처라는 말 좀 안썼으면 좋겠다.
엄살도 자꾸 떨다보면 버릇된다. 인생이 그렇게 상처받을 일이 많은가? "
"<네멋>은 마이너리티에 어필하는 드라마다. 보편적 삶에 벗어 나 있는 세상이 마이너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 느꼈던 문제점이 그대로 어른이 되서도 똑같이 행해진다. 그게 무의식 속에 박힌다는 건데, 그게
참 문제다. 기성질서의 편함을 느낄때 자신을 보는 시선이 굳어진다.
매순간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를 바라보라 "
" 내가 대학다닐때는 충분히 놀아도 되는 분위기였는데, 요즘은 안 그런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학시절 4년을 모조리 취업공부로 떼우는건 허송세월이라고 생각한다. 한 3년은 맘껏 놀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해라. 특히 책을 많이 읽고 철학 공부를 하면 사회를 읽는
눈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것이다. "
< 관객과의 대화 中 >
Q. 양동근의 캐스팅 이유는?
A. 배우 선택폭이 넓지 않았다. 박성수PD가 뽑아온 리스트 중에서 양동근 말고는 별달리 쓸만한 배우가 없었다. 양동근에게 요구한 건 한가지였다. 오버만 하지말라, 애드립 절대 하지 말라.
Q. 3호선 버터플라이의 음악을 쓴 이유는?
A. 그냥 단순히 3호선 버터플라이랑 친해서
Q. 가장 애착이 가는 <네멋>캐릭터는?
A. 이나영이 연기한 '전경'
Q. 노희경 작가와 비교를 많이 한다.
A. 문학적 감수성에서 차이가 난다. 나보다 많이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노희경 작가의 작품은 많은 횟수를 보진 못했다. <거짓말>을
몇회 보았는데, 참 잘쓰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Q. 시나리오, 드라마대본을 쓰는 사람으로서, 대중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A. 내멋대로 쓰지 않는다. 그게 곧 대중성이다. 나는 예술가적 기질이
별로 없어, 내멋대로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정도
선을 유지하는 거 같다.
Q. 작가로서 습작시기는 어떻게 보냈는지..
A. 습작시기는 거의 없었다. 충무로에 뛰어들때도 연출부를 맡았었다.
시나리오와는 전혀 상관없는 조명, 카메라 등의 워크샵이었다. 그리고 바로 <여고괴담> 시나리오를 썼다
Q. 하숙집 아주머니가 아주 성격이 드럽다. 근데 요리 솜씨는 좋다.
만약 작가님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A. 뭘 어떻게 하나? 그냥 밥만 먹고, 안보면 되지.
강의가 끝난 뒤.... 인정옥 작가님에게 간단히 내 소개를 한 뒤 내 아이디어 노트의 맨 앞 페이지에 마치 여중생이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싸인을 받듯 그녀의 싸인을 받았다. 그녀는 싸인뒤에 ' 황호진님 즐겁게
사세요 ' 라는 글귀를 남겨주었다. 이번주부터 나는 한국방송작가교육원에 나간다. 드라마를 지원할지, 비드라마를 지원할지 아직은 결정하지 못했지만, 병아리 방송작가 지망생에게 평소 흠모하던 인정옥
작가의 흔적은 나에게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네.... 홍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