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 왕산면의 산사태로 승용차 십여대가 매몰되고 교통이 두절되어 경찰서장이 현장으로 가고 있다는 지휘보고다.
서둘러 현지에 도착하니 산 한 모퉁이가 빗줄기에 못 이겨 무너져 도로 위에 누웠고 길은 형체가 없었다. 현장 옆 산이 금방 내려 덮칠 것 같은 위험지역에서 진흙더미에 묻힌 승용차들을 꺼내기 위해 경찰, 소방구조원 수백명이 달려들어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얼마 후 우리가 있는 후방 500m 지점의 도로가 유실되어 고립되었다며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큰 일 난다는 보고다. 장대비는 그칠 줄 모르고 의경은 물에 빠진 강아지처럼 덜덜 떨면서 내 눈치만 보고 있다.
매몰된 사람은 차치하고 우선 200여명의 산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 되돌아가기를 서둘렀다. 철수도 만만치 않았다. 하마터면 의경 30여명을 모두 진흙탕물 급류에 보낼 뻔한 우여곡절 끝에 구조 인력 대부분을 철수시켰으나 내 차를 비롯한 차량 18대와 22명(소방관12명, 민간4명, 경찰6명)은 안전지대에서 밤을 새도록 하고 나도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왔다. 강릉시내 거리마다 진흙탕 물이 쏟아져 허리에 차고 거의 차량통행도 어려운데 위험을 무릅쓴 교통경찰의 안쓰런 교통정리는 눈물나는 구세주였다. 왕산면 대원들이 칠흑 같은 밤에 장대비를 맞으며 두려움과 추위와 허기를 참아가며 새우 잠자는 공포의 모습을 생각하니 저녁 한끼쯤 굶는 것은 별거 아니란 생각을 하면서 강릉시장실을 찾았다. 도의회의장과 시장이 반가워한다. 시내주변 3개의 저수지 아래 주민들을 우선 대피시키긴 했지만 대부분 그대로 있을 주민의 피해가 걱정된다는 이야기다. 750mm의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 월현리 등이 전기두절, 교통두절됐다는 관계관의 피해보고가 계속 이어진다.
8월 31일 밤9시 30분 강릉시장실에서 건설차관, 부지사, 도의회의장, 국토관리청장, 강릉시장 등 참석하에 자연스런 대책회의가 시작되었다. 밖에는 계속 장대비가 쏟아지고 말수는 적은 편으로 서로 눈치만 보면서 부시장의 상황보고에 입만 벌릴 뿐이다. 이날 밤11시 무렵 비는 835mm가 내리고 있고 태풍 루사의 중심권은 전북 익산 부근이며 오봉댐의 만수위가 80cm 남았는데 곧 붕괴 또는 넘치기 시작하면 강릉시민 25만명은 수장된다는 보고다.
새로 지은 18층 강릉시청도 살아 남을 수 없어 대관령으로 피신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국장들은 심기섭 시장께서 대피령을 내려주어야 한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다며 보체고 있었고, 이때 저수지타령만 하던 시장의 큼지막한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시장 10여년에 대관령 혈을 질러 고속도로를 놓고, 정동진에 호화 유람선을 산에다 올려놓았으며 시청사는 전국에서 가장 높아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어줍잖은 반풍수가의 말대로 천벌을 받는 것은 아닌지? 대피령을 내리면 많은 시민이 가슴에 차는 물길 속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뒤엉켜 아비규환이 될 것은 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단계별 철수계획을 짜도록 했다. 남대천 주변 저지대 사람들은 자막방송, 사이렌, 핸드마이크등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자정까지 대피토록 하고 주문진 방향과 대관령 고지대로 이주하는 철수계획을 2차·3차로 나누어 세우기로 했다. 10년 전 강릉경찰서장을 한 덕분에 지리감도 있었고 간부들의 보고가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어 판단에 좋은 경험이 되었다.
다음날 새벽 1시 무렵 2차 철수계획을 내리느냐 마느냐 하는 숨가쁜 상황 속에서 모두가 긴장하고 있을 때 다행히 빗줄기가 가늘어지면서 오봉댐 수위도 늘지 않는 상태로 변화가 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 후속 철수 발령은 보류되었으며 정전과 통신 불통 속에 루사의 심술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난 날이 밝자마자 밤새워 허기에 떨고 있는 직원들을 생각하면서 왕산면으로 달렸다. 임시 도로를 내고 점심 무렵 그들과 악수 할 때의 감격은 평생 못 잊을게다. 그 날 3구의 사체를 인양한 후 피해상황이 서서히 집계되는데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참혹한 현상이었다. 물줄기가 스쳐간 곳은 모두 성한 구석 없이 폐허가 되고 말았다.
엄청난 피해에 망연자실, 복구 임무 분담기회조차 앗아갔다. 우선 고립지역 해소가 최대 임무라고 생각되었다. 도로가 응급복구 되면 전기와 통신은 자동 해소될 것이 아니겠는가.
이재옥 원주국토관리청장과 함께 유실 도로 복구에 최우선을 기했다.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 기타도로 할 것 없이 끊어진 도로는 모두 현장 확인서부터 복구에 박차를 가했다.
양양 어성전천의 참혹성은 도를 넘고 있었다. 50km 가량의 아름다웠던 그 계곡이 마구 파헤쳐지고 굴러온 집채 같은 바윗덩이와 자갈, 모래로 뒤덮인 전답은 말할 것도 없고 도로와 다리는 형체도 없어 마치 폐허 그대로였다. 어성전천은 양양 오십천과 연결되는 큰 계곡으로 고기들의 전당, 연어, 은어를 포함해서 많은 종류의 고기가 알을 품고 새 생명을 잉태하는 성스러운 강이라 하여 어성전이라 이름했다는데 최근 강변에 도로도 내고 수중보도 만들어 고기길을 막아 놓은 인간의 자연 경시 풍조 때문에 천벌을 받은 것이란다.
끊어진 다리와 길을 어렵게 임시로 복구하여 우리 일행이 건너편 동리로 첫발을 내디딜 때 마치 한국전쟁시 평양 입성하는 것 같은 환희와 기쁨이 가슴 벅차게 한다. 짜릿한 자긍심을 가지면서 어렵게 어렵게 길과 다리는 이어졌다. 그때마다 우리를 맞이하던 주민들의 환한 얼굴이 지금도 어른거린다. 도랑을 비롯한 물줄기 옆은 모두 범람, 집들이 떠내려가고 새 물길이 나있었지만 지난 9월 11일 중요도로 모두를 임시 개통시키는데 성공하였다.
66년전 丙子年 (1936년)에 전 국토를 쓸고 간 그 당시의 대 홍수로 충주 달래강 주변 부유한 외가댁이 모두 폐허가 된 후 돌림병에서 겨우 살아난 어머니께서는 식구를 모두 잃어버리고 15세에 신림으로 무작정 이주한 후 아버님을 만났다고 하신다. 그때 홍수가 얼마나 심했던지 영동지역 사람들도 그 당시 일을 전설같이 기억하고 있다.
丙子年 수해때 강우량은 300∼400mm 정도가 아닐까 추정되는데 제방둑이 없던 강릉시내는 중앙시장을 비롯한 모든 가옥이 바다로 떠내려갔으며 강릉에서 1,000여명, 양양에서 6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삼척엔 고성산이 있는데 38선 이북이던 고성에서 홍수에 떠내려가 삼척에 겨우 붙었다하여 고성산이라고 한단다. 이번 수해로 양양 어성전에서 가옥침수로 실종되었던 부부의 사체를 천리밖에 있는 포항에서 수거하였다고 하니 그런 전설이 생길 법도하다고 생각되었다. 태풍 루사는 영동지역의 사회기반 시설 전체를 단 이틀만에 모두 파괴하고 말았다. 전쟁 폭격보다 더 비참한 파괴참상은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나무뿌리가 뒤엉켜 다리에 걸리면 아무리 든든한 다리일망정 두세 동강이 났고 가옥전답이 진흙더미에 묻혀 있는 모습은 처참함 그대로였다. 없어지고, 쓰러지고, 묻혀버린 가옥들, 철교, 도로, 교량, 전신주, 농경지는 폐허 그 자체였으며 루사가 할퀴고 간 심술치고 너무나 컸다.
그런데 말문이 막혀 어안이 벙벙한 수해현장 부근 갯가에는 인간의 괴로움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백로 두어마리가 물가에서 천연덕스럽게 루사의 심술을 쪼아 흔들며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망연자실 허공만 쳐다보고 있는 그들, 자원봉사자들의 복구 손길조차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재민들의 넋나간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우리는 이재민들의 어떠한 상처와 허탈감도 서로 합심하여 백로의 일상같이 힘내어 내일을 일구어내야 한다. 어떠한 아픔이라 할지라도 이겨 견디며 더 훌륭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 몇 십년 뒤의 사람들은 오늘의 이 모습들을 어떻게 이야기할까. 옛날 강릉 남쪽 모산봉 옆 장현 저수지가 터져 그 아래 마을과 도로, 철로 모두를 한 숨에 삼키면서 300만평 넓이의 큰 비행장이 2m 높이 물길 속에 잠겼으며 전투기 16대를 비롯하여 모든 공군 막사와 장비가 진흙탕 물에 둥둥 떠다니고 골프장 건물에 군인 수백여명이 대피하고 있었는데 폭우가 조금만 더 쏟아졌더라면 대피병력 모두가 바다 고기밥이 될 뻔했었다는 이야기들이 여기 저기서 전설로 전해지고 있지 않을까.
壬午年 홍수에 영동지방 곳곳이 전쟁 폭격은 비길 것이 아닌 만큼 쑥대밭이 되었지만 대통령, 총리, 장관님들 할 것 없이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 재해지구로 선포하고 서로 돕고 삽질하면서 오히려 50년을 앞당겨 개발되어 더 잘 살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