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라 한동안 못 본 우리 동기님들이 그리워집니다. 그리고 이번 일본 연수에 개인사정으로 빠지게 되어서 참 아쉽습니다.
교수님과 우리 동기님들 아무쪼록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기원할께요. 일본 풍경 많이 보시고 많이 즐기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2000년에 일본에 가서 적었던 기행문을 카페에 올린다도 했는데 아직까지 올리지 못했네요, 지금 아래에 첨부합니다. 코스는 약간 다르나 같은 곳도 있으니 참고하시고 여행에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모두들 건강하게 다녀오셔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기 바랍니다.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기
최해룡
2000. 11. 30일, 여행 첫째날(일본 땅에 첫발을 딛다)
대한항공 783기는 김해공항을 이륙하여 고도를 높이는가 싶더니 곧 하강, 일본 후쿠오카(福岡)란다. 한국과 일본은 이렇게 가까운가. 가깝고도 가장 먼 이웃이란 말이 실감이 난다.
후쿠오카는 하카타(博多)와 같은 지역이다. 같은 지역이지만 후쿠오카는 무사들이 거주하던 지역이고, 하카타는 상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란다. 후쿠오카가 현재 縣의 이름으로 대표성을 가지는 것은 무사들이 지배하던 일본사회의 전통성으로 볼 수 있겠다.
이 지역은 우리 민족과 연관이 많다. 대마도를 지나서 바로이다. 우리 조상들이 남서해안에서 배를 타면 물결이 이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였단다. 따라서 전근대의 한.일교류의 중심지가 될 수 밖에 없다. 또한 하카타는 고려가 몽고의 재배를 받았을 때 여·몽 연합군이 두 차례나 이 지역으로 침공했지만 모두 태풍으로 실패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은 이 태풍을 가미가제(神風)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일본이 스스로를 神國이라고 부르는 계기를 더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본의 환상은 근대에 와서 제국주의 망령으로 환생하여 우리 민족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마중 나온 bus를 타고 大宰府를 관람하였다. 대재부는 백제 구원군이 백강 전투에서 패한 후 신라의 침공이 두려워서 쌓았다는 城인데, 이와 함께 하카타 만에서 대제부에 이르는 길에 水城을 쌓아 완벽한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단다. 일본이 백제 구원에 전 국력을 다 기울이고, 신라의 침공을 그토록 두려워한 까닭은 무엇인가? 선명하게 속내를 들어내지 않는 일본 역사학계, 아직까지 체계적이고도 확실한 연구 성과가 나오지 않는 우리 역사학계, 풀어야할 한·일 고대관계사의 과제이다.
대재부 관람을 마치고 bus를 타고 고쿠라(小倉)에 있는 숙소 리가로얄호텔로 향하였다. 시설이 매우 좋았다. 식사는 별로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식사 후 신영훈님의 강의가 좋았다.
늦은 강의와 약간의 감기 기운으로 그냥 잘려고 한다. 내일은 船山고분과 阿蘇山 草千里를 보러 간단다. 북부 지역 일본인들은 과거에는 "살아 생전 아소산에 가보는 것이 소원이다" 라고 했다고들 하니 남한 사람들이 백두산이나 금강산을 그리는 듯하였겠다. 기대가 된다. 그러나 우리도 이제 금강산, 백두산은 쉽게 갈 수 있지만 마음의 벽은 언제 허물어질지...
2000. 12. 1일, 여행 둘째날(阿蘇山 草千里에 가다)
아침 일찍 bus를 타고 구마모토(熊本)로 가는 길 다나마(玉名)시에 있는 후나야마(船山)고분으로 향하였다. 약간의 비가 뿌리는 날씨지만 여행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이 고분은 前方後圓墳이지만 출토된 유물 중 청동거울, 금동제관모, 금동제신발, 금귀고리 등은 고대 우리의 유물과 흡사하다. 고대 우리문화의 일본 전파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은상감으로 글자를 새겨넣은 큰 칼이 출토되었는데 이 칼에 적혀 있는 명문을 두고 한·일 학자들간의 논란이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부분이 판독되지 않아 결론은 쉽지 않겠다. 왜 일본인들이 발견한 유물에는 광개토대왕릉비나 칠지도나 이 은상감대도와 같이 항상 결정적인 부분은 보이지 않아 일부러 마모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을까? 최근의 구석기 유적 조작 보도를 보면서 더욱 일본의 고고학계나 역사학계를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일본 역사학계의 국수주의적 경향이 아쉽다.
그러나 후나야마 고분의 모든 것이 우리의 영향이라고 보기는 어렵겠다. 고고학 전문가가 아닌 내가 보기에도 전방후원분, 석실구조, 출토 유물의 이질성 등이 나타난다. 특히 이 시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대규모 우세집단의 이주가 이루어졌다면 우리의 적석총이나, 수혈식묘, 횡혈식 석실묘와 같은 墓制가 다수 나타나야 할텐데, 묘제는 가장 유행을 타지 않는 것이니까...
유물의 유사성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고대 우리문화의 우위와 함께 지리적 측면에서도 가장 가까운 한반도의 문화가 일본에 전파되었지 않았겠는가. 따라서 유물의 유사성과 함께 묘제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특히 우리의 묘제가 일본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어떠한 모습으로 발견되고 있는가하는 묘제의 변화에 대한 시차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후나야마 고분에서 阿蘇山 草千里로 가는 길에 일본의 사당인 水前寺 부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사람 당 1개의 작은 액체연료 버너 위에 야채를 곁들여 넣은 소고기가 끓고 있었고, 다른 반찬들은 도시락반찬 같았으나 기무치가 있었다. 양이 적어 "기무치 구다사이"을 외칠 정도였다. 맛은 우리 김치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입맛에 맞았다. 일본 음식이 대체로 닝닝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토속적인 나의 입맛 때문이 아닐까?
점심 후 다른 일행들이 주변 가게에서 토산품 구경을 하는 틈을 타서 水前寺 成趣園을 관람하였다. 수전사는 일본식 사당이었고, 성취원은 아주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은 일본식 정원이었다. 정원 안에는 큰 연못이 있었고 오리와 비단잉어가 놀고 있었는데 아름다웠다.
정원 북쪽에는 작은 언덕만한 인공산을 만들어 놓았는데 마치 경주 시내의 무덤들을 연상시킨다. 궁금해서 물어보았는데 후지산의 축소모형을 만들어 놓은 것이라나... 정원 안에 일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후지산을 만들어 놓은 일본인의 의식이 놀랍다.
정원을 거닐다가 bus에 약간 늦었다. 노래를 부르라나, 약간 미안...
bus를 타고 아소산으로 가는 도중에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큐우슈우는 산지가 많다. 계속 산지를 지나왔는데 평원을 만나니 가슴이 확 트였다. 겹겹의 산들을 지나서 넓은 평원, 평원 앞에 펼쳐져 있는 활화산 아소산! 마치 한라산을 보는 듯하다. 산아래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고 드문드문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일본의 검은 소를 기대했는데 대부분 누렁이였다. 마치 한우를 보는 듯했다.
bus는 가파른 좁은 도로를 계속 달렸다. 드디어 草千里...
아소산 거의 정상부에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초천리인가 보다.
이것이 일본 북부지방 사람들이 꿈에도 그린다는 아소산인가... 그러나 기대 만큼은 아니다. 한라산 생각이 난다만 한라산과는 다른 누런 금빛 일색의 풍광, 한라산의 겨울은 검은 화산석과 누른 초원의 조화인데...
아쉽게도 아소산 분화구에는 가보지 못한단다. 목적이 역사 탐방이라나... 불과 3km인데 융통성이 있었으면... 지리전공 선생님들은 너무 아쉽겠다. 그러나 좋은 날씨 때문에 분화구에서 솟아오르는 구름같은 분출 연기를 볼 수 있었다.
생동하는 지구의 모습! 벅차다...
초천리에는 세가지 볼거리가 있다. 아소산의 분화구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산등성이의 넓은 평원, 저 멀리 산아래로 펼쳐진 넓은 평야, 세 번째가 가장 좋다. 지형적으로 산이 많은 이곳에 펼쳐진 꿈같은 넓은 농경지... 이곳 사람들은 전쟁이 없어도 되겠다. 일본인의 호전성은 이곳에서 생기지는 않았겠다.
아름다운 九州(쿠우슈우)...
2000. 12. 2일, 여행 셋째날(천혜의 온천지대 벳부)
이른 아침 벳부(別府) 스기노이 온천 호텔을 떠난다.
왜 別府인가? 別離의 아쉬움을 달래려고 하는 마음이 담아져있는 것인지?
항구도시, 온천도시...
너무나 좋은 온천이었다.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지열과 분출수, 도시 일대가 장관이다. 탕 속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그 시원함을 알겠다.
항구도시, 연안의 만이 태평양에 맞닿아 있다.
너무나 좋은 온천, 넓은 베란다 창을 통해 보이는 대양, 태평양의 시원하고 광대한 전경...
그리운 이와 2박3일 더 머물다 가고 싶은 곳.
벳부... 온천과 항구도시
역사 탐방이 아닌 관광의 하루였다. 온천지 탐방...
스기노이 온천호텔→湯の花→海地獄→血の池地獄 등, 마치 지옥 순례를 다녀온 듯...
벳부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용암에서 데워진 물과 수증기가 분출하는 지옥 같은 자연 현상을 세상 사람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하는 천국(파라다이스) 같은 온천 명소로 만들었다.
일본인들의 상술은 좀 역겨웠지만 경제 제일의 세계에서 천혜의 자원을 가진 그들이 부러웠다. 왜 우리는 이다지 부족하고, 그들은 많이 가졌을까?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가진 것을 보호하고 극대화 할 줄 아는 민족이다.
자연 상태의 원숭이 무리들을 보존하여 경제 자원화하고, 학술적으로도 도움을 주는 오이따(大分)의 원숭이 공원에서 더욱 이런 마음이 든다.
벳부항에서 선플라워호를 탔다.
9000t급의 대형 여객선, 내가 타본 가장 큰 배였다.
금강산 유람선인 금강호는 선플라워호가 상대가 되지 않게 큰 배라는데 자랑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무리한 투자로 가뜩이나 어려운 현대가 더욱 더 어려워진 것이 아닌지? 남북 교류의 당위성과 경제성은 함께 생각해야할 부분이 아닐까?
하여튼 벳부항을 출발한 선플라워호는 큐우슈우를 벗어나 오사카를 향해서 밤새도록 항진하였다. 가는 도중 함께 참가한 선생님들과의 술과 담화로 여흥을 즐겼다. 선생님들 모두 여행에 즐거운 모습들이었다. 새벽 1시경 일본이 자랑하는 아주 크고 긴 다리를 보았다. 전장 7km에 달한다고 하였다. 일본의 기술력이 놀랍다.
2000. 12. 3일, 여행 넷째날 (아! 東大寺 正倉院...)
쿄토(東都) 도큐 호텔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bus로 오사카(大阪) 해류관(일본이 자랑하는 거대한 수족관)을 관람했다. 해류관은 건물안에 약 100m에 달하는 거대한 수족관을 설치하고 나선형으로 점차 지하로 내려가면서 대형 상어 등 각종의 어류들을 관람하는 구조였다. 수족관의 유리두께는 상부가 15cm이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점차 두꺼워져 30cm에 달한다고 한다.
거대한 수족관을 나선형 구조로 상부로부터 하부로 내려가면서 관람하게 하는 사고의 발상이 뛰어났다. 기존의 실체적 사물에 편리함과 참신함을 추구하는 일본인들의 창조적 모방성이 뛰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해류관 관람 후 bus는 나라(奈良) 도다이사(東大寺)를 향해 달렸다.
동대사는 큰절이었다. 왕권 강화라는 天皇家의 과제가 王卽佛 사상과 맞물려서 우리 조상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절... 엄청나게 큰절이었지만 화재와 여러 차례에 걸친 보수 공사 등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만든 절이라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였다.
본래의 모습을 간직한 正倉院이 있다지만 일반 관람이 어렵단다. 안타까웠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정창원이었던가, 아직도 신라장적과 같은 보물들이 간직되어 있을 수도 있는데...
대열을 이탈하여 정창원으로 달렸다. 그러나 나를 맞이하는 것은 정창원을 둘러싼 높은 담장과 굳게 잠긴 빗장문 뿐, 멀리서 모습이라도 보고 담아가려던 노력이 헛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담장 위로 보이는 지붕은 정창원의 지붕인가? 절 집 같이 않게 너무나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정창원 지역을 그저 바라다보기만 했다.
大佛殿에 있는 거대한 大佛, 엄청난 코와 위압적인 자세는 한국의 불상의 본류에서는 좀 벗어난 듯 좀 낯설었다. 불전 뒤에 있는 초창기 동대사의 모형 구조물을 보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그리고 불타버린 동대사의 7층 목탑의 상륜부와 일본인들이 '고마이누'(고구려 개)라고 부르는 남문내의 쌍사자 상을 보면서 우리 옛 조상들의 희미해진 흔적을 쫓아보려고 애를 썼다.
동대사를 통해 찾아보려는 우리 이주민들의 성공과 영욕의 흔적, 너무나 큰 규모에 스스로 위축되어 신라의 황룡사와의 비교를 통해서 왜소함을 지우려는 우리 탐방 선생님의 의식 등, 우리의 현재 모습이 자꾸 비춰지면서 뭔가 아쉽고 개운찮은 동대사 탐방...
2000. 12. 4일, 여행 다섯째 날 (廣隆寺, 金閣寺, 法隆寺)
교토에서의 첫날 밤, 일본 천년의 古都를 찾아보았다. 걸어서...
그러나 실망, 경주를 기대하였는데 일본 불교의 신사만이 남아있고, 고도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물어서 교토역으로 갔다. 경주역 쯤을 기대했는데 웬걸 엄청난 station(驛舍)이 있었다. 21세기의 최첨단 역을 보는 듯, 도쿄역도 이럴까?
공간미와 기능의 극대화를 꾀한 조형 건축물, 세계 건축물의 미래를 보는 듯... 파헤칠수록 뭔가 있는 일본인...
선생님들과의 공간 카페에서의 커피와 대화도 좋았다.
다섯째날, 백제의 미소라고도 불리는 일본 국보1호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보러 광륭사에 갔다. 어떤 미술학도가 아름다움에 취해서 달려들어 끌어안았다고 했던가, 너무나 아름다운 그 모습에 넋이 나간 듯 마냥 바라보기만 하였다.
※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까?
시간이 지나면 다른 느낌이 섞일 것 같고...
지금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것 같은 두려움...
애잔한 슬픔...
잔잔한 법열...
무아... 나를 잊는다.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은 갓 태어난 그대로의 마음...
신체도 그러한 것 같고,
자궁 속의 기억인가...
무의식의 상태로 젖어들었다.
시간의 흐름이 두려웠다.
그러나 흐름은 이어지고,
현실의 공간으로 추락한다.
아! 부처님...
- 광륭사에서 -
아쉬움을 뒤로하고 금각사로 향하였다.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호수가에 서있는 금박을 입힌 절집, 눈부시다... 초겨울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단풍나무들, 인공 호수가 일본식으로 아우러져 있다.
※ 금각사
해탈의 강렬한 바램인가.
윤회의 황금빛 기대인가.
법열의 강렬한 카타르시스
人間은 불상에 황금빛 옷을 입힌다.
인간 욕망의 끝은 어디인가?
절집까지 황금을 입히니...
두 개의 금각사!
휘황찬란한 3층 건축물과 잔잔한 호수 위에 비치는 그림자...
황금빛 열망이 눈부시다.
- 금각사에서 -
일본식 도시락을 먹은 후 다시 bus를 타고 奈良 법륭사로 향하였다. 계속되는 여행의 피곤함과 나른한 오후의 식곤증이 몰려왔다. "곧 도착합니다"하는 가이드의 말에 눈을 뜨니, 육신은 잠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의식은 나를 채근한다.
주차장에서 법륭사에 이르는 신작로를 지나 일주문을 넘어서니 눈앞에 펼쳐지는 법륭사 경관, 웬지 눈에 익다. 일본 절은 동대사조차 낯설었는데... 동서로 자리잡은 1금당 1탑의 절집 구조, 우리로부터 건너갔단다.
※금당 벽화
삼국시대 우리네 스님들은 무척 바쁘셨겠다.
섬나라 백성들을 깨우치시느라...
중생들에 대한 지순한 자비심,
금당 벽면을 불화로 가득 채우셨다.
담징스님,
그리고 담징으로 대표되는 우리 스님네들,
다 큰 스님이셨을 거다.
- 법륭사에서 -
금당은 철책으로 꽁꽁 둘러쳐졌다. 윤명철 교수가 비춰주는 희미한 손전등 빛을 따라 바쁘게 눈을 움직였다.
희미하게 비춰지는 잔영... 행운이란다. 이렇게나마 벽화를 보는 것은... 아쉬운 행운...
법륭사에서의 일정은 너무 짧았다. 엄청난 볼거리, 주어진 짧은 시간... 허둥대다가 끝났다. 일본 여행 중 가장 아쉬운 일정, 또 한번의 기회가 있을까?
2000. 12. 5일, 여행 여섯째 날(아스카지역 고분을 찾아서)
쿄토에서 아스카(飛鳥)까지는 먼 거리였다. 이른 아침 호텔을 출발하여 중식때가 다 되어서 아스카에 도착하였다. 오늘의 일정은 다가마쓰(高松)고분과 石舞臺고분 탐방이다.
눈으로 본 다카마스고분은 마치 고구려 고분을 보는 듯 했다.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고구려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스카 지역은 백제의 영향을 많아 받은 지역이라고 들었으나, 고구려 또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백제에도 후기 능산리 고분군에는 벽화가 나오지 않는가? 고대 우리민족의 기상과 역량을 느낄 수 있어 반가웠다.
石舞臺는 거대한 돌로서 만든 석실이다. 횡혈식 석실 구조로 보였지만, 김병모 교수께서 적석총으로 추정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잘 납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스카 자료관에서는 황혈식 석실묘로 기재되어있었다. 김병모 교수께서 추정하시는 이유는 方形의 구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횡혈식 석실묘는 우리 한반도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분묘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의 횡혈식 석실묘가 내부 형태는 횡혈식 석실묘의 구조를 가지면서 외부형태는 방형의 구조로 변화된 것은 아닌지? 이것은 모방적 창조의 일본인의 특성이 고대에서 나타난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일본에 건너간 우리 조상들과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한 하루였다.
2000. 12. 6일, 여행 마지막 날(귀국)
오사카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첫날 후쿠오카 현의 오이따의 리가로얄호텔과 같은 이름의 호텔, 너무나 좋은 호텔이었다. 일본에서의 잠자리는 너무나 편안했고 식사도 괜찮았던 것 같다. 입맛에는 별로였지만 그것은 일본음식이 내 입맛에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주최한 조선일보와 후원한 신한은행에 감사한다.
마지막 밤 간단한 쇼핑을 하고 같은 조의 선생님들과 오사카의 번화가를 둘러 보았다. 일본여행을 통해서 느낀 것이었지만 일본의 밤은 조용하다. 집들은 일찍 불이 꺼지고, 거리에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려웠다. 우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사카에서는 일부러 번화가를 찾아와서 그러한지 우리와 마찬가지로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술집에서는 우리의 음주 문화와는 아주 다른 모습, 간단한 안주와 소량의 술을 시켜 놓고 조용하게 담소할 뿐이었다. 우리도 간단하게 마시고 돌아왔다.
아쉬운 아침... 며칠 더 머무르고 싶었다.
그러나 여행은 끝났다. 탐방단을 태운 대한항공 여객기는 오사카 간사이 공항을 이륙, 1시간 남짓 날아서 김해 공항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끝.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우와...대단하십니다. 상담만 대가신줄 알았는데....작가까지...허걱...같이 가시면 정말 좋았을것을...저희들끼리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