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어낸 이야기도 좋아하고, 쓸모없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 정열을 쏟아 넣는 따위의 사람도 좋아합니다. 정치적 목적이 뒤얽혀 있거나 권력자에게 아부하기 위한 날조는 싫지만 말입니다.” 다나카 요시키의 말은 마치, 자신을 두고 하는 말 같다.
<아르수란 전기>는 지어낸 이야기, 픽션을 넘어서 판타지다. 하지만 이른바 J.R. 톨킨 류의 <반지전쟁> 스타일과는 맥을 달리한다. 일본적이라기보다는, 동양적이라고나 할까. 마치 <삼국지>를 기본으로, 무협지의 독특한 인물을 배치해놓은 듯한 양상이다. 한때 PC 통신에서 ‘판타지’의 정의에 대해 논란이 많았는데, 그런 것에 괘념할 필요는 없다. 가상의 시공간, 때로는 현실적 공간일지라도 자신의 상상력으로 변형시킨 세계의 이야기라면 그것은 판타지다. 다나카 요시키의 <창룡전>도 현재의 일본이 등장하지만, 분명히 판타지다. 이를테면 판타지는 ‘쓸모없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담아낸 소설이다. 개념을 끼워 맞춘다는 것은, 광신도인 루시타니아군이나 할법한 만행이다. <아르수란 전기>의 파르스는 중세 페르시아를 상상력의 원천으로 삼아 만들어낸 가상의 제국이다. 마찬가지로 파르스를 침공하는 루시타니아군은 십자군과 미 대륙을 정복한 스페인군의 상상물이고, 신드라는 인도다. 실재했던 과거의 모습이 연상되기는 하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자유로운 시공 속에서 다나카 요시키는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과 말하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정열적으로 풀어놓는다.
다나카 요시키가 쓴 판타지의 강점은, 무엇보다 읽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문체는 빠르고, 강직하고, 유머러스하다. 말하고자 하는 것을 결코 돌리지 않고, 시원스레 파고드는 상쾌함이 있다. 다나카 요시키는 결코 복잡하게, 무게를 잡고 독자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정확한 묘사와 감정의 전달은, 다나카 요시키 특유의 사회비판과 결부되어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 다나카 요시키의 판타지를 읽고 있노라면, ‘세계관’이 절로 교정된다. 그냥 용과 기사가 대충 나와 모험을 벌이고 농담을 지껄이는 ‘하급’ 판타지 소설들과는 격이 다르다. ‘모순을 품지 않는 인간은 돼지만도 못하다. 그런데 왜 종교는 ‘의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인가.‘ ’정의라는 건 태양이 아니라 별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별은 천공에 수없이 떠있으면서도 서로의 빛을 부정한다.‘ 같은 말들을 서슴없이 던지는 판타지가 어디 흔한가. 이 사회비판은 <창룡전>처럼 실재 사회를 배경으로 했을 때, 더욱 독랄하게 치명적으로 기성 사회의 모순을 파고든다.
<아르수란 전기> 역시 다나카 요시키 소설답게 맹렬하게 질주한다. 어찌 보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파르스 제국이 루시타니아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고, 왕세자인 아르수란이 주위에 사람들을 모아 영토를 수복하는 과정. 2부로 가면 사왕 잣하크가 부활한다. 다나카 요시키는 <아르수란 전기>에 흔히 무협지에 등장하는 ‘출생 비화’를 덧붙인다. 아르수란은 안드라고라스의 왕세자이지만 그의 아들이 아니다. 게다가 안드라고라스는 아르수란을 잠재적인 ‘적’으로까지 상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신분은? <아르수란 전기>는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수수께끼의 강도를 높여가면서 독자를 빨아들인다. 수수께끼의 심도를 더해주는 것은 다양하면서도, 개성적인 생생한 등장인물들이다. 아르수란의 주위에는 지략가 나르사스, 기사 다륜, 도둑이자 음유시인인 기이브, 여신관 파랑기스 등이 있다. 판타지에 흔히 등장하는 인물 구성이다. 이들의 직업은 그대로 그들의 성격을 말해준다. 하지만 다나카 요시키는 스테레오타입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각 직업의 일반적인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인물마다 고유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예를 들어 기이브는 “난 태어날 때부터 간사한 짓과 잔혹한 짓은 못”한다고 말한다. 기이브가 아르수란의 곁으로 온 것은 순전히 파랑기스의 미모 때문이었지만, “아르수란의 입장에서 보면 부하의 하인에 불과한 에람을 일부러 구하러” 가는 아르수란을 보고는 충성을 다짐한다. 다나카 요시키의 인물들은 철저히 자기 원칙에 따라, 아르수란을 따르게 된다. 또한 사소한 조역일지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나름의 매력을 불어넣는다. 알후리드, 메를레인 등은 물론이고 히르메스와 잔데 같은 반대편 인물들까지도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이건 사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허풍쟁이’ 쿠바드 같은 인물이 마음에 든다. 쿠바드는 ‘기묘하게도 사물의 본질의 일부가 보이는 인물’이다. 쿠바드는 “나는 쇠고기와 양고기를 먹지만 그것은 특별히 소나 양이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세상은 일방적인 정의만으로 속 시원히 납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며 자신이 원할 때만 움직이고, 싸운다. 아마도 <아르수란 전기> 내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인물이 아닐까, 라고 감히 생각한다.
<아르수란 전기>의 주인공인 아르수란이란 인물 자체도, 처음에는 영웅이 아니다. ‘애송이’라고 모욕을 퍼부어도, 스스로 애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노하지 않는다. 아르수란은 나르사스보다 머리도 나쁘고, 다륜보다 검술도 약하지만, 그는 거대한 바다처럼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아는 심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는 성장한다. 즉 <아르수란 전기>는 아르수란이 어떻게 세상의 지략을 배우고, 자신을 단련시켜 나가는가를 그린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물론 이미 결정은 되어 있다. 아르수란은 파르스를 해방시키고, 전설에 남는 영웅이 된다. 하지만 그 예정된 결말을 위해 아르수란은 나르사스와 다륜, 그리고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서 배우고 채워나가야 한다. “왕이란 건 힘든 자리다. 무엇을 이루려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이루었는가에 따라 그 평가가 정해지지. 어떤 이상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떤 현실을 지상에 실현시켰느냐에 의해 명군이냐 폭군이냐, 신왕이냐 악왕이냐 하는 판정이 내려지는 것이야.” 이 말을 가슴에 새긴 아루스란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을 만들어내기 위해 강고한 노력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다나카 요시키의 세계관은 이처럼, 철저히 현실적이다.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현실 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노예 해방’은 위대한 이상이었지만, 해방된 노예들은 오히려 아루스란을 공격한다. ‘관대한 주인 밑에 있으면 노예가 더 편하다’는 현실을, 아르수란은 미처 알지 못한 것이다. 다나카 요시키는 결코,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다나카 요시키의 판타지는 어떤 소설이나 논픽션 못지않은 ‘현실적인 통쾌함’이 있다. 내가 다나카 요시키를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쓸모없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코 현실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 누군가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현실의 시공에 몸을 놓아두고 있는 이상 모든 것은 현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 역시 현실에서 놓여나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지만,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아루스란의 운명처럼, 우리 역시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 놓여있는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가 판타지 열풍에 빠져있다는 말들이 나돌고 있다. 게임과 만화가 일상문화인 10대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다. 자유로운, 가상의 이야기는 독자에게 자유를 준다. 아마 그것이 판타지의 매력일 것이다. <스타 워즈>가 미국인의 신화가 된 것처럼, 판타지는 누구에게나 가상의 신화를 제공해준다. 가상의 인물과 상황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모든 것은 나름의,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사이버 공간과 인물에 익숙한 10대에게는 그 모든 것이 결코 낯설지 않다. 현실과 가상은, 따지고 보면 종이 한 장만큼의 경계도 없는 것이다. 나는 10대 시절 SF와 추리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물론 지금도. 소위 ‘대중문학’을 읽으면서 나는, 참혹한 현실에서 도망쳐 ‘판타지’의 영역으로 접어들었다. 이른바 도피, 의 황홀경에 빠져 잠시라도 쉴 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도 나는 ‘엔터테인먼트’나 ‘순간의 즐거움’, ‘허구의 쾌락’들을 완강하게 옹호한다. 설사 어떤 깨달음이나 가르침이 없더라도, 나는 ‘엔터테인먼트’를 옹호한다. 그러니 다나카 요시키의 경우야 두말 할 것도 없다. 다나카 요시키만큼의 사회의식과 광활한 이야기, 파릇파릇 숨을 내쉬는 개성적인 인물들이 어우러진 판타지를 어디서 또 만날 수 있을까. 물론 과장섞인 찬사이지만, 가끔씩은 거품도 필요한 법이니까 넘어가자. 유일한 안타까움은, 다나카 요시키를 10대 시절에 만나지 못했던 아쉬움이다. 10대 시절에 다나카 요시키의 판타지를 읽는 것은, 그 자체로 ‘환상’이다.
아루스란 전기 2
<아루스란 전기>의 작가인 다나카 요시키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창룡전> 때였다. 그 전에도 <은하영웅전설>의 작가로서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읽어보기는 <창룡전>이 처음이었다. 워낙 일본 판타지나 추리물 등을 좋아하는지라, 아무런 선입관 없이 문고판으로 나온 <창룡전>을 구해 읽었다. 순정만화 스타일로 그려진 표지는 마음에 안들었지만, 신나게 질주하는 이야기와 문체 그리고 재기어린 독설은 아주 유쾌하게 다음 권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가속도가 붙더니만 순식간에 10권을 넘어섰다.
<창룡전>은 사해용왕이 현대 일본에 환생하여, 갖가지 모험을 벌이는 이야기다. 따지고 보면 판타지는 이렇게 한 문장으로 축약할 수 있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아루스란 전기>는 뺏긴 나라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루스란의 영웅담이다. 당연한 일이지. 판타지는 이야기 자체의 독창성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공식과 인물형을 얼마나 탁월하게 교직하여 새롭게 보이는가에 달려있다. 발상 자체가 아무리 신선해도 기존의 공식을 외면하고 ‘판타지’를 구성하기란 아주 어렵다. 한 권 정도라면 몰라도, 적어도 7, 8권정도 이어지는 장편이라면 더욱 그렇다. 어쨌건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익숙한 이야기는 읽는 사람에게 편안한 느낌을 준다. 여유롭게 읽어나가다가, 작가가 마련한 함정에 풀썩 떨어지거나 반전에 뒤통수를 맞으면 비로소 그 작품에 감탄하게 된다.
1부 7권 중에서 3권이 먼저 나온 <아루스란 전기>도 아주 익숙한 이야기다. 아버지인 안드라고라스가 전쟁에서 패배하고, 수도를 빼앗긴 파르스의 왕자 아루스란이 수도회복을 위해 주변의 인물들을 모으고 힘을 길러간다. 무협지의 구성과도 흡사하다. 특히 ‘출생비화’는 무협지나 판타지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끌어가는 방법은 간단하다. 처음에는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키고, 역시 다양한 적들과 대결을 벌인다. 약간의 암시는 주지만, 여기까지는 그저 화려한 각개전투의 위용만을 과시한다. 하지만 점차 균열이 보인다. 난데없이 등장한 적은 죽어가면서 혹은 도망치면서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진다. 이제부터는 단지 하나의 전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와 적의 진짜 음모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이야기의 스케일은 점점 커지고, 주인공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때로 선악이 뒤집히는 복잡한 상황까지 전개된다. 만화로 나온 <공작왕>이 이런 전개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처음에는 약간 멍청하던 공작왕이, 사실은 세계를 파멸시키는 ‘공작’의 운명을 타고났지만 반대편에서 인간을 위해 싸운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 후 자신의 쌍둥이를 만나고, 세계를 파멸시키려는 집단과 처절한 전투를 벌인다. <창룡전>도 비슷한 전개를 보인다. 이 공식은 가장 쉽게, 독자를 빨아들이는 방법이다. 처음부터 거창하게 나가면, 독자는 지루함을 느끼기 십상이다. 처음에는 액션을 보여주다가, 주인공에게 어느 정도 애착을 갖게 된 시점에서 이야기를 펼치는 거다. 만약 애착을 안가지면 어떻게 하냐고? 간단하다. 그대로 소설이나 만화를 끝내는 거다. 어차피 인기도 없을 테니까. 일본에서 성공하는 만화나 판타지소설 등은 대개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쓸모없는’ 이야기를 만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미있으라고 머리를 굴려가며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가고, 매력적인 인물을 창조해낸다. <반지전쟁>의 J.R. 톨킨은 거의 평생을 걸려가며 <반지전쟁>의 모태가 되는 세계와 인종들을 만들어냈다. 세계지도, 국가들, 인종의 특성과 그들의 지난한 역사를 몽땅 머리 속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북구와 유럽의 신화와 전설, 민담 그리고 중세의 기사 이야기 등을 참조하여 ‘세계’를 창조해낸 것이다. 사이버펑크식으로 보자면, 어쩌면 우리의 세계도 그런 ‘창조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여튼 다나카 요시키는 그런 류의 ‘쓸모없는 이야기를 만드는데 정열을 쏟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다. 그런 쓸모없는 이야기의 효용이 단지 ’재미‘ 뿐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나는 경애심을 느낀다. 왜? 재미있으니까. 단지 2시간일지라도 보는 동안 확실한 재미와 쾌감, 때로 감동까지 준다면 나는 그것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예술도 좋지만, 예술만 감상하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다나카 요시키의 <아루스란 전기>에 열광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루스란 전기>는 좀 ‘정통적’인 냄새가 난다. 삼국지에 무협지의 스타일을 접붙여 만든 정통 ‘판타지’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다나카 요시키만의 사회, 정치 풍자는 여전하지만 그래도 <창룡전>의 현실적 통쾌함보다는 톡 쏘는 맛이 약간 덜하다. 하지만 <아루스란 전기>는 ‘판타지’의 입문 격으로는 너무나 딱맞는 소설이다. 흔히 나이든 사람들이 판타지는 너무 황당해서 읽을 수 없다고 말한다. <아루스란 전기>는 파르스와 루시타니아 등의 가상의 국가를 무대로 펼쳐지고 마법이나 요괴 등도 등장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충실한 ‘역사소설’의 구성을 빌려오고 있다. 파르스는 페르시아를 토대로 재구성한 제국이고, 루시타니아는 십자군이나 잉카제국을 침략한 스페인군을 떠올리며 만든 나라이기 때문에 소설 전체에 ‘현실적’인 함의가 곳곳에 널려있다. <아루스란 전기>의 출판사는 그런 점을 고려해, 중고생을 대상으로 <창룡전>을 문고판에 만화같은 표지를 내세운 것에 비해 <아루스란 전기>는 보통 판형에 약간 중후해 보이는 표지로 일반 독자에게 어필하도록 만들었다. ‘판타지’가 약간 부담스러웠던 사람들이 한번 도전해볼만한 책이 바로 <아루스란 전기>다. 아마 읽고나면 당장 <창룡전>을 읽어야하지 않을까. 다나카 요시키의 소설은 아주 강도 높은 중독성을 갖고 있으니까.
첫댓글 "10대 시절에 다나카 요시키의 판타지를 읽는 것은, 그 자체로 ‘환상’이다." 가슴에 와닿는 문구입니다..
저도 아루스란 전기를 정말 좋아합니다..무엇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전개가 맘에 들어요..<말하고자 하는 것을 결코 돌리지 않고, 시원스레 파고드는 상쾌함이 있다.> 이말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