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체찰사 이강년선생(都體察使 李康秊先生) 묘소(墓所) 오호라 간곳이 없으면 올 것이 없는 고로 국운(國運)이 순탄치 못하여 잊을 수 없는 일제 강점기에 한(限)을 품고 지하에서나마 공의 의기가 천지를 진동케 하도다. 공의 본관은 全州이고 호(號)는 운강(雲崗), 자(字)는 낙인(樂寅)이다. 효령대군의 18세 손이다. 철종 무오(1858)에 탄생하시어 일찍 무과에 올라 부사관을 역임하고 선전관을 제수 받았으나 국정에 문란함에 벼슬을 그만두고 을미년에 왜군이 입궁하여 국모(國母)를 살해하니 이에 가재(家財)를 털어 의병을 창설하고 갑오(甲午)에 동학군을 지휘하여 탐관오리(貪官汚吏)를 무력케 하였으니 그때 나이 36歲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군사를 모집하여 영춘과 단양에 왜적을 격파하니 백남규, 김상태, 하한서, 윤기영, 신돌석, 등이 합류하였고 정미 팔월에 관군이 해산되었는데 그 무리를 양주에 모아 선생과 민금호, 허위, 박정무, 권중희, 방인헌, 전봉준 등을 각도의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여 서울의 일부 통감부를 파괴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先生은 강원도 일대의 왜적을 토벌하다가 1908년 7월 2일 제천 청풍 금수산 기슭에서 적의 총탄에 발목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가 10월 13일 오전10시 50세의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셨다, 왜놈들이 先生의 처형으로 인하여 후사에 봉기가 두려워 비밀로서 시신을 충북 제천 지역에 유기(遺棄)하였다. 1944년 상주 화북출신인 부하 이원제, 이상범 등이 유기된 시신을 거두어 죽음을 각오하고 여러날 동안 낮에 숨고 밤에 이동하여 이곳 상주 화북에 안장(安葬)하였다. 다음해 8월 15일 광복이 되고 이에 1962년 국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최초(最初)의 석물(石物)은 1970년 대통령 하사로 세웠고 관리는 화북 명륜회가 맡고 있으며 매년 삼일절에 향사를 80년간 올리고 있다. 진리에 무성(無聲)이 대성(大聲)이요 무광(無光)이 대광(大光)이라 先生의 보국(保國) 충절(忠節)에 더없는 대광(大光) 대성(大聲)을 남기셨다. 2021년 3월 30일, 화북 명륜회, 여러 번 참배 하였지만 이번 參拜에 전문이 기록되어 있어 감개무량하였다. 이처럼 기록이 세워져 있음이 후세들에게 역사의식을 고취(鼓吹) 시키는 마당인 것이다. 관계기관에 感謝한 마음 전합니다. --2021년 9월15일 자유인백두대간 한문희총대장, ▶입석리 왕송능선 백두대간 탐사팀, -09:40분, 왕송마을 3거리, -10:48분, 늑골계곡-임도길, -11:20분,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왕송마을, -12:10분, 눌재 이강년장군묘소, 산행종료, 10시간소요, - ▶12:22~40분, 운강 이강년 장군 墓域 參拜, -20분 남짓 운강 이강년 의병장 장군묘역을 참배하였다. -12:40~13:10분, 11회차 지체했던 입석리 산8번지 일대 照査, 비로서 백두대간 화북면 입석리 산8번지 눌재 일대 등로를 재 조사 설정을 완료하였다.
▶문경출신 이강년장군 도체찰사 운강 선생의 묘소(墓所) (1858년~1908년) 백두대간의 기상(氣像)이 백두산에서 발원해 북한 땅을 경유해 금강산~설악산에 이르고 큰 맥의 힘은 오대산~태백산~소백산~월악산을 경유 이곳 속리산자락 대야산(大耶山930,7m)~조항산(鳥項山951m)~청화산(靑華山970m)을 일으켜 세워 천혜의 기암에 명산중 명산이다. 청화산이 속리산을 가기위해 늘티재(380m)에서 숨을 고르는 이곳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산11번지에 유택이 안장되어 있다. 선생의 유택(幽宅)은 대한민국의 산자분수령이라 하는 백두대간에 자리하고 있다. 선생의 유택 묘역은 문인석, 무인석, 망부석, 장명등 등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명문(銘文)은 ‘都倡義大將雲崗李先生之墓’ 光復後 丁卯十月 日 建 宣城 金晦鎭謹撰 眞城 李源斗 謹書이다. 지방도괴산-상주를 잇는 32번 지방도 상주시 입석리 378-5번지 도로변에 진입로를 알리는 갓을 쓴 대형 화단 중앙에 표지석이 서 있다. |
첫댓글
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