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술(丙戌)년 새해, 우리는 을유년의 첫날이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희망과 행복을 품고 한 해를 시작한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해마다 ‘새해의 소망’란에 빠지지 않는 항목이 바로 ‘건강’이라고 한다.
건강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영원한 숙제다.
지난해 건강에 관해 우리의 마음을 더없이 아프게 했던 일이라면 단연코 줄기세포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 쇼킹한 사건은 우리의 건강과도 직결되었던 문제이기에 그 공허함이 한층 컸다.
한편 젊은 층 사이에 불었던 ‘웰빙(Well-being)’ 열풍은 가히 신드롬이라 불릴 정도로 무섭게 확산됐다.
그 열풍은 새해에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보이차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는 짱유화 교수(한서대)
웰빙 문화의 핵심은 물질적 가치에 매달리지 않고 정신과 신체의 조화를 통해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웰빙 문화 속에 다양한 건강기능성식품들이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았다.
이에 그 동안 영양보충제의 대표적 상품이라 여겨왔던 비타민,
무기질제제 등 식이보충제들이 서서히 지고, ‘웰빙 건강 기능성식품’의 시대가 도래되었다.
웰빙 건강 기능성식품의 대표주자 중의 으뜸이 바로 차(茶)다.
차는 기호음료로서의 가치를 뛰어넘어 이젠 건강기능식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지난날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10대 건강식품에 차가
포함되었던 것도 이러한 반증이다.
건강기능성식품의 공통점을 보면, 모두 강력한 항산화물질을 다량으로 함유하고 있다.
산화방지제로서 그동안 가장 각광을 받았던 것은 비타민이었다.
그러나 최근 산화방지제 연구의 관심사는 비타민에서 폴리페놀이란 물질로 옮겨가고 있다.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폴리페놀 추출물에는 산화에 의한 병폐를 막는
식물성 항산화물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비타민류와 비교해 볼 때 적게는 40배에서 많게는 100배 정도의 효과가 있다는 것도 밝혀졌다.
폴리페놀은 피를 맑게 하고 유해산소를 제거하는 기능이 탁월한 성분이다.
이러한 폴리페놀이 가장 많이 함유되어 있는 식품이 바로 차다.
그리고 차 중에서도 보이차 속에 가장 많이 함유되어있다.
21세기 중국에서 생산된 차 중에 가장 돋보인 차를 꼽는다면 단연 보이차이다.
보이차는 중국차의 명성을 높이고 위상을 고양시킴으로서 이젠 중국차의
또 다른 대명사로 굳어지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지금 중국 내에 보이차 전문판매상점은 무려 2만개 넘었다고 한다.
작년 한해 출간된 보이차 관련도서는 18권이며, 이는 차에 관련도서 부문에 37%를 차지하는 수치다.
그리고 보이차만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도 5개나 되는 것을 보면 중국인들의
보이차에 대한 관심도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차의 장래가 그리 밝지 않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보이차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중국 보이차를 보는 세계인의 시선은 보이차의 제작 방법에 대한
논란과 관계없이 이미 싸늘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보이차는 희극적인 소설과도 같다. 그래서 보이차를 가리켜 ‘수수께끼의 차’라고 한다.
누구나 보이차를 아는 것 같으면서도 도통 모르는 것이 또한 보이차다.
다시 말해 입문은 쉽지만 졸업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보이차 공부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연말특집호에서 2006년 세계의 화두(話頭)는 지식(knowledge)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최근 보이차 상품에서 발견된 흠결이 지식과 충돌하면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학문이란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오류를 줄이고 수정해 가는 과정이다.
이에 아무리 세계적인 학자의 연구 성과라도 완전무결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필자의 보이차 연구에 대한 결과도 완전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차에 관한 연재의 변을 단 것은 지식추구이라는 명제 아래 보이차의 베일을 벗김으로서,
독자들이 보이차에 대한 판단을 조금이라도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쨩유화 교수는?
1955년 대만 生. 2005년 중국정부로부터 ‘보이차 세계 10대 권위자’로 선정되기도 한 보이차 전문가이다.
현재 한서대 차학과를 비롯해 중국 남경대, 절강수인대,
운남성 국립보이차연구원 등에서 연구 및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청나라 보이부의 유적지로 지금은 문창공이란 이름으로 정부로부터 보호 받고 있다. 현재 보이현에 남아있는 유일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보이차에 대한 혼란은 진실과 거짓의 갈등 속에서 그 본질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의 거짓말에 거짓말이 보태지는 이와전와(以訛傳訛)의 혼전 속에 보이차 문화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보이차 문화를 가리켜 ‘양두구육(羊頭狗肉)’ 즉 양머리를 대문 앞에 달아놓고
개고기를 파는 격의 ‘짝퉁문화’라고 비아냥거린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그리고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가 그 선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보이차’의 선택도 다를 바가 없다. 당신은 보이차에 대해 어떠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
그 정보는 어느 정도로 깊이가 있으며 근원적인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당신이 보이차를 선택하고자 하는 방향을 결정한다.
아무리 많은 정보가 있어도 스스로가 지식을 활용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기억이란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준다. 그래서 올바른 정보의 가치가 빛나는 것이다.
보이차의 진실 규명은 우리 모두의 의지가 하나가 돼야만 이루어질 수가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동안 떨어진 보이차의 신뢰를 얼마나 회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건전한 의도와 과학적 검증이 어우러져야만 보이차의 진정한 생명력을 부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보이차가 무엇인가를 알기에 앞서 그 이름의 유래와 의미라는 원초적 문제부터 풀어보는 것이 순서인듯 싶다.
중국 독음으로 ‘보이’를 ‘푸얼’이라고 부른다. 이에 ‘보이차’와 ‘푸얼차’는 같은 것으로,
모두 중국 운남(雲南)지역에서 만든 차의 이름을 일컫는다.
‘보이차’라는 이름은 명ㆍ청 시대 당시의 전남 곧 지금 운남 지역의 서쌍판납(西雙版納)과 사모지구(思茅地區)
특히 소위 6대 차산(六大茶山)에서 생산된 찻잎으로 당시의 행정소재지였던 ‘보이부’에서 가공ㆍ판매했기에 붙여진 것이다.
보이현 문창공
‘보이현’이란 지명은 청나라 옹정(雍正) 7년(1729)부터 연차적으로 보이부, 보이진을 거쳐 오늘날까지 약 2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보이현의 정식 명칭은 ‘보이하니족이족자치현’이며 1985년 12월 15일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을 때 붙여진 이름을 오늘까지 사용하고 있다.
‘보이’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이곳 토착민인 하니족(哈尼族)의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보(普)’자는 성채의 뜻을 가진 ‘채(寨)’를 뜻하며, ‘이’자는 물굽이의 뜻을 지닌 ‘수만(水灣)’을 뜻한다.
이러한 토착민의 어원에서 비추어볼 때 ‘보이’라는 의미는 곧 물굽이가 있는 성채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의 물굽이는 란창강(瀾滄江)을 말한다.
란창강의 원류는 중국 티베트이며, 전체길이는 약 4,020㎞이다. 티베트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운남성을 거쳐
인도차이나반도로 흘러들어가 메콩강으로 변한다. 중국 영내에서는 1,800㎞만 흐르고 있다.
운남성의 행정구역 중 가장 넓은 지역이 사모(思茅)지역이다. 오늘날 보이현의 행정구역이 바로 이 사모시(思茅市)에 속해있다.
2005년 통계에 따르면 사모시의 차 재배면적이 약 102만 무(畝)에 이른다고 한다.
한 무를 200평으로 계산한다면 약 6만8천 헥타르라는 숫자가 나온다.(1 헥타르는 약 3,000평에 해당한다)
이 숫자는 한국의 전체 차 재배면적인 2천 5백 헥타르보다 무려 28배에 가까운 숫자다.
차의 전체 생산량은 3만 톤이며, 생산농가는 약 20만 가구이다. 여기에 종사하는 인력은 무려 106만 명에 달한다.
사모시의 전체 인구가 250만인 것을 보면 2.5명 중 한 명이 차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모시의 10개 현(縣) 중 보이현의 차 재배면적은 6만1천 무, 즉 4천 헥타르이고, 차 생산량은 1천2백 톤 정도에 불과하다.
사모시 전체 차 생산량 1/30 밖에 되지 않는 보이현이 이제 보이차의 산업에서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기에는
너무 미약하다는 것이 시정부의 판단이다. 그래서 사모시의 미래 운명을 좌우하는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진행하고 있는데,
이 안건은 현재 중국 중앙정부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다.
내용인 즉 사모시(思茅市)의 명칭을 보이시로 바꾸는 작업이다.
자료에 따르면 ‘보이시’로 개명되면 그 경제 시너지 효과는 무려 1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어느덧 보이차의 위력은 마시는 ‘차’라는 단순경제에서 벗어나 문화ㆍ관광ㆍ건설 등 산업인프라를 구축해나가는데 있어
동력의 핵심으로 부상되고 있는 것이다.
보이차는 지금 ‘세계호’의 깃발을 달고 쾌속으로 항진하고 있다. 보이차를 한번쯤 접해본 사람이면 너나할 것 없이
보이차에 대해 ‘한 말씀’ 할 정도로 보이차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이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바로 ‘보이차 브랜드의 형성’이다.
19세기 지식인 이규경(1788~1856)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도차변증설>에서는 보이차의 인기에 대해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항간에서는 “보이차, 별 불일 없는 차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가난한 변방소수민족들이 마시던 조잡한 차를
홍콩, 타이완 장사꾼들이 유행하게 만든 것이 보이차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시류에 따라 상인들의 ‘띄우기 작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20세기 상업주의에 의해 탄생된 최고의 걸작품이 바로 ‘보이차’라는 것이다.
상품의 명성에 영향을 미치는 학자의 연구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학자의 선행연구 성과를 통해 상품의 시장 활성을 이끌어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에서 이미 유통되고 있는 상품을 후속작업을 통해 연구하는 것이다.
보이차 연구는 후자에 속한다.
뒤늦게 출발한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차의 팽창속도에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주소이다.
그러는 동안 보이차 시장은 너무 커버렸고,
결국 학자들의 연구는 항상 뒷북치는 결과만 낳게 되었다. 물론 필자의 연구도 그 중의 하나다.
‘묵힘’이라는 것은 시간적 흐름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는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다.
그럼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처럼 보이차는 진정 별 불일 없는 차인가?
역사적으로 중국 상류층으로부터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던가?
이 질문에 대한 지금의 필자의 답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지금의 답’이라는 의미는 몇 개월 전만해도 필자의 답이 ‘그렇다’라는 오류를 범했다는 얘기이자,
그러한 잘못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다.
<연원직지(燕轅直指)>에는 청대 지식인들이 가장 진귀하게 여긴 것이 보이차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필자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보이차는 적어도 청나라 초기부터 중국 집권층,
상류층들이 마셨던 차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기록이 발견된 최초의 글은 한국의 문헌에서 비롯되었다.
조선과 청나라간의 정치ㆍ외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기록문학인 <연행록(燕行錄)>이 그것이다.
연경(燕京)은 북경 즉 지금의 베이징을 말하며 청나라 때의 이름이다.
고려 때부터 외교 사신들의 임무수행 이외 많은 식자들이 사행(私行)으로 중국에 건너가
외국의 제도나 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기록은 현재 알려진 것만 해도 100여 종이 넘는다.
사행에 참가하여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당대의 지배층 식자들로서 그들이 만나고 보았던 연경의 실상은
청나라의 지배계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에 그들의 기록은 곧 청나라당시의 풍속도이자 현실문화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연경에는 보이차가 있었다.
<연원직지(燕轅直指)>와 <계산기정>에서 모두 보이차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보다 상세하게 소개한 것이 <연원직지>다. “차의 품목의 수는 다양하다.
그들은 황차(黃茶)와 청차(靑茶)를 항시 이용하며, 그 다음은 향편차(香片茶)이다.
그러나 가장 진귀하게 여긴 것이 보이차다.
다만 가짜가 많다는 것이다”라는 기술은 당시의 수도인 연경에서도 ‘짝퉁’ 보이차가 등장할 만큼 수요층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당시 권력 지식층의 기록한 한문으로 쓴 연행기 이외 여성 및 일반 독자를 의식하여 별도로 쓴 국문본인
<병인연행가(丙寅燕行歌)>와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서도 보이차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19세기 지식인 이규경(1788~1856)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도차변증설’에서는 보이차의 인기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 연도(燕都)에서는 차의 품목이 많고 성행하는데, 이 중 보이차가 제일이요, 백호차(白毫茶)가 둘째, 청차가 셋째, 황차가 넷째다”라고 했다. 특히 오늘날 ‘고증학의 총화’로 평가받고 있는 이규경의 고증은 당시의 보이차가 진귀함과 더불어 인기의 척도를 가늠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청나라 왕실뿐만 아니라 조선의 왕실에서도 보이차를 마셨다는 기록도 발견된다.
청의 건륭황제는 보이차에 대해 “오직 보이차만이 묵직하고 품위가 있다 …
육우도 응당 서투름과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라고 하였고, 조선 정조의 둘째 사위이기도 한 홍현주(洪顯周)는
“대나무 차통에서 고운 흰 비단을 풀어보니 둥근 달과 같은 보이차가 보인다” 등의 시구(詩句)를 남겼다.
이러한 기록들은 보이차가 21세기뿐만 아니라 17세기 청나라 때부터
이미 중국의 최고명차로써 권력의 중심에 서있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있다.
“이곳의 사대부 그리고 백성들이 마시는 차는 찻잎을 찐 후 덩어리 모양을 만든다.
그들은 이를 보차(普茶)라고 부른다.”
명나라 사람 사조제의 <전략>에 기록된 글이다.
이 글은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글로 보일 수 있지만,
필자의 눈에는 수많은 보이차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열쇠가 담겨져 있는 글로 보인다.
첫째, 여기서 말한 ‘보차(普茶)’는 보이차를 말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보이차에 관한 사료(史料)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둘째, ‘전’이라는 곳은 지금의 운남(雲南)을 가리킨다. 즉 보이차의 원산지는 운남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셋째, 차의 모양은 줄기 형태가 아닌 덩어리 상태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명나라 만력(萬曆, 1573~1620)년간에 기록된 것으로,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요지는 당시에도 지금처럼 찻잎을 우려 마시는 것이 일반적인데도 불구하고
운남 지역에서는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덩어리 형태의 차를 마시고 있다는 것이다.
보이병차를 대나무 껍질로 포장하는 모습.
보이차의 총애는 청나라 들어오면서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공으로 바치는 공차(貢茶)의 가지 수는 무려 여덟 가지다.
물론 모양도 다르고 무게도 달랐다.
이중 가장 큰 것은 마치 사람의 머리모양과 같은 것으로 무게는 자그마치 다섯 근이다. 이를 ‘인두공차(人頭貢茶)’라고 한다.
지금도 금과공차(金瓜貢茶)가 하나 남아있어 항주의 중국농업과학원차엽연구소(中國農業科學院茶葉硏究所)에서 소장하고 있다.
청나라부터 흥하기 시작한 보이차의 인기는 청나라와 함께 스러져갔으니 이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보이차가 공차로 지정된 것은 1729년 옹정(雍正) 10년 때의 일이다.
그러나 정권말기에 도달하자 혼란과 소요로 인하여 공차는 방화와 약탈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에 조정도 어쩔 수 없이 1908년 광서(光緖) 30년 때 공납을 폐지시켰으며, 200년 동안 궁중의
영욕과 함께 했던 보이공차는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진다.
사발처럼 생긴 보이 타차(沱茶)
조공으로 바쳤던 공차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의 사업은 계속 이어졌다.
당시 운남에서 보이차를 운영하는 상점들이 상당했다. 대부분 이무(易武)라는 곳에 모였다.
가게에 따라 취급하는 품목의 질도 각자 달랐다.
대체로 품질 좋은 것은 해외로 갔고, 질이 낮은 것은 티베트, 몽골, 위구르 등 빈민지역에 팔았다.
차라는 것은 원래 잎으로 만든 줄기형태인데, 운반할 때 부피가 크고 쉽게 끓어지는 단점도 지닌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안된 방법이 바로 찻잎을 압착하여 긴압차(緊壓茶)로 만드는 것이다.
보이긴압차 중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둥근 형태의 원차(圓茶)이다. 원차의 무게는 357g이다.
예로부터 일곱 편을 묶어 죽순껍질로 포장하는 것이 전통방법이다.
조정으로 보낸 공차는 말할 나위 없이 가장 좋은 찻잎을 원료로 삼는다.
좋은 찻잎이란 봄에 딴 여린 찻잎 춘첨(春尖)을 말한다. 그러나 민간의 상품은 그러한 고급 찻잎만을 쓸 수가 없다.
이에 민간 보이차는 대부분 가공할 때 비율에 따라 찻잎을 혼합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혼합 찻잎의 등급은 1, 3, 5, 7, 8, 9의 6등급으로 나뉘는데, 대체로 보이차 겉 표면에는 20%정도의 3등급 찻잎을 쓴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7등급 20%, 8등급 30%, 9등급 40%의 비율로 채운다.
물론 좋은 등급의 찻잎은 잎차 형태 즉 산차(散茶)로 10등급으로 나눠 비싸게 내다판다.
둥근 형태의 원차는 70년대 접어들어 이름을 ‘칠자병차(七子餠茶)’로 고쳐져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또 다른 형태의 보이차가 보이는데, 사발처럼 생긴 타차, 심장모양처럼 닮은 긴차(緊茶)
그리고 네모난 모양 중 벽돌처럼 생긴 전차와 정사방형의 방차(方茶)가 있다.
가장 오랜 정통을 지니는 차는 병차와 방차이다. 특히 방차는 공차로서 청대부터 ‘복록수희(福祿壽禧)’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어
‘사희방차(四喜方茶)’라고도 불린다.
예로부터 티베트로 공급하는 차는 심장처럼 만든 긴차였다.
모양이 버섯처럼 생겼다하여 ‘마고두’라고도 한다. 1967년 보다 효율적으로 운송하기 위해
모양을 벽돌처럼 바꾼 것이 전차에 관한 유래이다.
긴차는 1986년 당시의 반선(班禪)라마의 요청으로 다시 만들어져 오늘날 시장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그릇처럼 생긴 타차는 1902년 운남 하관(下關)의 차상들이 둥근 형태의
‘구냥단병차(姑娘團餠茶)’라는 작고 둥근 보이차를 그릇의 모양으로 개조하여 만든 것이 유래다.
타차는 지금 사천(四川), 중경(重慶) 지역에서도 만든다.
중국인들은 흔히 길을 가리켜 ‘마로(馬路)’ 즉 말이 다니는 길이라고 한다. 하긴 옛날 교통수단은 모두 말로 이루어졌으니
그러한 단어도 나올 법도 하다. 보이차의 운송도 이러한 ‘말길’을 이용해 이루어졌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보이차의 운송길이 보이차가 뜨자 덩달아 유명세를 타고 있다.
보이차를 싣고 다마고도를 따라 8개월간 걸어 북경에 도착한 <다마고도 북경조공 만리길> 행렬.
15년 전 운남대학 무치홍(木霽弘) 교수 일행은 최초로 이 길을 답사했다.
아니 차라리 탐험이라 말해야 옳은 듯싶다.
그들이 답사한 길은 운남에서 출발해 티베트까지 가는 산길이었는데,
너무나 장엄할 뿐만 아니라 극도로 험악하기도 했다.
어느 산길은 목숨을 내놓아야 비로소 지나갈 수 있는 길도 있다고 한다.
이름조차 없던 이 길이 무치홍 교수에 의해 ‘다마고도(茶馬古道)’라 명명됐고,
불과 15년이란 짧은 세월 사이에 이젠 다마고도를 모르고선 차를 안다고 행세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명해진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보이차 운송 길 즉 다마고도는 6개가 있다고 한다.
이 길들은 대부분 청나라 때 보이차 상점들이 즐비한 이무(易武)에서 출발해 곤명(昆明)을 거쳐 북경으로 간다.
보이차를 조공하는 길을 가리켜 ‘보이관마대도(普이官馬大道)’라고 한다.
작년 필자와 중국운남공산당청년단은 120필의 말에 보이차를 가득 실어 이 길을 8개월간 걸어 북경에 도착했다.
실로 166년 만에 재현한 조공의 길이자 처음 시도했던 프로젝트였다.
다마고도 중 가장 험한 길은 역시 티베트로 가는 길이다.
이 길 역시 이무에서 출발해 하관(下關)과 샹그리라(香格里拉)를 거쳐 티베트에 도착하는데,
‘보이관장다마대도(普이關藏茶馬大道)’라고 한다. 보이병차의 무게가 왜 편당이 357g이고,
왜 한 통이 7개여야 하며 왜 12통을 한 대바구니에 담아야 하는지의 의문은 모두 여기서 해답을 얻을 수가 있다.
티베트로 가는 보이차 운송 말은 사실 대부분 당나귀와 노새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말보다 몸집은 작지만 체질이 강하고
거친 먹이를 잘 먹으며, 지구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말, 당나귀, 노새(이하 말로 지칭함)가 하루 걸 수 있는 길이 60km라고 한다.
이에 대부분 60km마다 하나의 마역(馬驛)이 있다고 한다. 말 한 필이 부담할 수 있는 화물의 무게는 60kg이다.
즉 60kg의 화물을 지녀야 비로소 하루 60km를 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조건들을 모두 헤아려 만들어진 것이 보이차의 무게 즉 357g이다.
357g×7편이면 한 통이 2.5kg이 된다. 2.5kg씩 12통이면 한 대광주리가 되는데,
이것이 30kg으로 말의 양쪽에 대광주리 각각 하나씩을 실으면 정확히 60kg이 된다.
이것이 보이차의 무게가 왜 357g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예로부터 보이차는 대부분 동남아로 수출됐다. 운남의 접경나라인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이 주 대상국이었다.
보이차는 이 나라들을 거쳐 태국, 홍콩, 마카오까지 이르렀다.
작년 ‘다마고도 북경조공 만리길’의 성공은 많은 상인들에게 부를 안겨주었다. 참여의 동기는 순수했으나 결국 돈은 상인들이 벌었다.
이러한 결과는 다마고도를 통해 보이차의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확신을 상인들에게 심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더 없이 좋은 돈벌이를 놓칠 리 없을 상인들이 흥행만 된다면 어느 길이든 어느 곳이든 보이차를 말에 실고
‘다마고도의 재현’이라는 명분을 달고 상혼을 발휘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금년만 해도 운남에서 3개의 각기 다른 다마고도의 재현이 이뤄질 예정이라고 한다.
흥행만 된다면 이벤트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티베트를 거쳐 이탈리아의 로마로,
복건(福建)에서 바다 건너 타이완으로 그리고 북경과 북한을 건너 한국으로 온다는 계획도 있다고 한다.
‘다마수도(茶馬水道)’라는 명칭도 이제 멀지 않아 생길 것 같다.
보이차의 흥망은 청나라 왕조의 성쇠에 따라 운명을 같이했다. 조선의 문고(文藁)에서도 보이듯 보이차의 명성이 가
장 조명을 받은 때는 청나라 중기부터 후기까지였다.
만주족이 지배했던 청나라가 1911년에 망하자,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새로이 구성된 한족의 나라 중화민국이 탄생하게 된다.
이후 40년간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 내전으로 인해 극심한 피폐에 시달린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변방에서 생산된 보이차가 중앙에 공급되는데 장애요인으로 작용되었고,
결국 보이차는 중앙지배계층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것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보이차’란 이름조차 모르고 지내야 했던 역사적 배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운남 현지의 보이차 생산은 위축되지 않았다. 비록 중앙에서의 시장은 잃었으나
광활한 티베트, 위구르, 몽골 등 서역(西域)의 소수민족들이 주 소비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광대한 서역시장의 수요는 보이차의 생명력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었고,
보이차를 취급하는 상점 또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상인들은 보이차를 두 가지 품질로 나누어 만드는데, 서역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것은 하등급 찻잎으로
만든 긴차(緊茶) 혹은 병차(餠茶)였으며 수유차의 원료로 쓰였다.
고급 찻잎으로 잘 만들어진 산차(散茶)와 원차(圓茶)는 주로 해외시장으로 나갔다.
당시 운남성 보이차의 찻잎은 오늘과는 달리 모두 야생종이었으며,
차나무는 교목(喬木) 혹은 반교목(半喬木)이었다. 당시의 보이차는 찻잎을 덖어 숨을 죽여 비빈 후
햇볕으로 말린 방법 즉 전통가공법으로 만들었다.
또한 야생 찻잎은 일반 찻잎과는 달리 카테킨의 함량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아미노산,
당류 등의 성분이 상대적으로 높기에 카테킨의 떫은맛을 상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달리 보이차를 생차(生茶)로도 마실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때의 원료가 야생 찻잎이었기 때문이다.
보이차의 생명력은 생차뿐만 아니라 묵힘으로써도 나타난다는데 그 매력이 있다.
이러한 장점은 보이차를 저장 가능케 하는 직접적 동기가 되었고, 생차와 묵은 차등 두 가지 형태로 상품화하게 된다.
보이차는 묵을수록 생기는 독특한 맛이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자 차상점들은 순환판매(循環販賣)방식을 택하여
매년 새로 만든 보이차는 창고에 저장해두고 묵은 보이차를 연도에 따라 값을 매겨 거래하는 방식으로 영업을 했다.
물론 운송 또는 보관해야하는 차는 증기 압력을 주어 덩어리로 만들어 통풍이 잘되고 서늘한 창고에 저장하였다.
당시 보이차를 취급하는 상점의 집합지는 이무(易武)였다. 이무는 소위 찻잎이 좋다는 6대차산(六大茶山)에 있었고,
유락(攸樂), 혁등(革登), 의방(倚邦), 망지(莽枝), 만단, 만철(曼撤) 등 6대차산을 가리켜 통상 ‘이무차구(易武茶區)’라고도 부른다.
대표적인 차 상점인 복원창(福元昌), 동경호(同慶號), 경창호(敬昌號), 동창호(同昌號), 송빙호(宋聘號) 등이
모두 이곳에 가게를 열어 부를 쌓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생한 돌림병(瘟疫)은 보이차의 상업근간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무에서 발생한 돌림병의 파장은 운송수단인 마방(馬幇)까지 미치게 됐는데,
각지의 마부들이 전염병이 두려워 이곳 출입을 거부하는 사태는 이무 차산업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에 과거에 아주 빈번하게 왕래했던 마방들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보이차 상점들도 잇달아 휴업하게 된다.
공산중국의 등장은 개인 상점마저 허용하지 않는 정책 아래 이무의 보이차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해
그 화려했던 영화(榮華)를 접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산물이라 여긴 옛 보이차는 문화대혁명 때 모두 불태워졌고, 그 나마 지구상에 남아 있는 것은 모두 50여 년 전
다마고도(茶馬古道)를 통해 동남아를 거쳐 홍콩 상인들 손에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희소가치가 있거나 유서 깊은 기물(器物) 또는 서화(書畵) 등의 미술품을 가리켜 골동품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골동품이라 불리는 ‘골동보이차’. 한 편 먹을 때마다
가치가 배로 뛰어 어느덧 호가(呼價)는 있어도 거래가 없는 골동 중의 골동으로 보이차 마니아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보이차가 오늘날까지 신드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인자보이차의 공이 절대적이다.
‘인자(印字)’란 보이차 겉 포장지에 글자를 인쇄했다는 뜻이다.
사실 앞서 출하됐던 골동보이차에는 포장지 자체가 없었다.
둥근 모양으로 만들어진 골동보이차는 보이원차라고도 하는데,
한 편의 중량은 7량 곧 지금의 357g이었으며, 7편을 한 죽통에 담았다.
대체로 찻잎을 증기로 가공할 때 차상점들이 자신들의 상호와 제품에 관한 내용을 작은 종이에 새겨 찻잎과 함께 압제하였으며,
이러한 종이를 가리켜 ‘내비(內飛)’라고 한다.
인자보이차
제품포장을 보면 죽통으로 싼 7편의 푸얼원차에는 포장지가 없었고,
다만 7편의 푸얼원차를 죽순으로 마무리 포장할 때 상호를 가리키는 도안 및 문구를 인쇄한 큰 종이
곧 ‘내표(內票)’를 7편 중 최상단의 원차 위에 깔아 출하한 것이 이들 개인 차상점들의 공통된 포장법이다.
내비와 내표는 모두 차상점의 선전물로 사용됐으며 때로는 차의 진위를 살피는 징표로 이용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만약 당시 보이차에 이러한 내비와 내표 마저 없었다면 보이차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근거 없는 제품은 생명력이 결여되기 마련이며, 자생력 없는 상품은 소비자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남나차창
보이차가 겉 포장지로 쌓이기 시작한 것은 1952년 때부터이며, 중국이 공산화된 후 3년만의 일이다.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 대신에 재산의 공유를 실현시킴으로써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중국공산당정부의 이상이자 신념이다.
그 일환으로 차를 관장하는 각 지방의 국영회사의 이름을 바꾸는 동시에 중국차를 대표할 수 있는 심벌마크를 정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 보이차를 관장하는 회사는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中國茶葉公司雲南省公司)로 개명되었고,
이듬해인 1951년 조승후(趙承煦)라는 사람이 설계한 도안인 ‘팔중차(八中茶)’가 중국 내의 모든 차상품의 공식로고로 등재된다.
상표 등록된 이 도안은 8개의 붉은 ‘중(中)’자로 둥글 원을 만들고 그 중앙에 녹색 ‘차(茶)’자를 새긴 마크로 되어있다.
여기서의 ‘중’자는 중국을 말하고, ‘팔(八)’이란 발(發)의 음을 빌려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색상에 있어 ‘중’자를 붉은 색으로 택한 것은 공산당의 상징적 빛깔과 길상(吉祥)이라는 뜻을 내포되어 있고,
‘차’자를 녹색으로 쓴 것은 찻잎의 원색에서 비롯된 발상이다.
‘팔중차’ 로고가 탄생된 후 보이차는 모두 개별 포장되어 출하됐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개인 차상점
곧 무포장지 보이차 제품의 근거지가 이무(易武)였다면 공산화 이후 국영업체의 포장지 있는
보이차 제품의 중심지는 맹해였다는 점이다. 중국의 공산화는 보이차에 있어 포장지의
유무를 가늠케 하는 하나의 기점이 된 것이다.
인자를 대표하는 보이차로는 홍인(紅印), 녹인(綠印), 황인(黃印) 등 제품이 있으나,
대체로 홍인과 녹인을 주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명칭은 출시 때에서 비롯된 이름이 아니고
후일 시장상인들에 의해 붙여진 상품이름이다. 그냥 보이원차로 출하됐던 차를 어째서 색깔로
새로이 분류되어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일까? 그 연유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쇄상의 오류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50년대 초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생산되었던 인자급 보이차의 포장지에는 사실 2가지 색상밖에 없다.
팔중차 로고 중 ‘차(茶)’자만 녹색으로 될 뿐 남은 글자는 모두 붉은 색으로 인쇄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에 출하된 보이원차 상품에서 ‘차’자를 비롯해 포장지 전체를
붉은 색으로 인쇄했던 것은 당시의 낙후된 인쇄기술과 작업자의 나태한 자세에서 비롯된 합작물이다.
이러한 잘못된 포장지의 인쇄는 몇 년 동안 지속되었고, 이때의 상품을 후일 ‘홍인’이라 명하게 된다.
이후 포장지의 ‘차’자를 원안대로 녹색으로 인쇄하게 되는데, 이 제품을 ‘녹인’이라 불렀고,
이어 잉크 배합비율의 실수로 인해 ‘차’자가 노란색을 띈 것을‘황인’이라 했다.
그리고 홍콩의 상인들이 붙인 ‘녹인’이라는 이름이 타이완 사람에게 건너가‘남인(藍印)’으로 불리어
또 한 차례 변신하게 된다.
홍인과 녹인의 차맛은 다르다. 또한 인자급이라도 인쇄지와 글씨체에 따라 여러 가지의 맛이 배어난다.
이는 찻잎은 농작물이기에 해마다 품질이 같을 수가 없고 찻잎의 원료와 배합비율에서 생긴 차이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이차 속의 광운공병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8
누군가 철관음(鐵觀音)이 부드러운 새색시 같다면 보이차는 강력한 남성을 상징한다고 비유한 적이 있다.
바로 이러한 강인하고 중후한 보이차 맛이 세계 차인들의 혀를 단숨에 사로잡아 어느덧
보이차는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차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어찌 보면 보이차가 근세기에 들어와 이렇게 웅비(雄飛)할 수 있는 것은 홍콩, 마카오,
타이완 등지의 상인들이 그 중심자리에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특별한 맛’을 상징하는 보이차를 더 매혹적이고 화려해 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상술이기 때문이다.
홍콩영기다창.
예로부터 중국 내의 보이차 소비시장은 티베트, 몽고, 위구르 등 서부소수민족지역이었으며,
해외의 주요시장은 홍콩과 마카오였다.
영국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홍콩과 마카오는 자유무역과 항만기능을 이용하여 세계의
물류중심지로 각광을 받은 것은 50년대의 일이었다.
당시 이곳은 수많은 보세창고가 있었으며 여기에 필요한 하역 인부의 수는 상당했다.
이들이 해갈용으로 마시는 차는 대부분 부담 없이
주전자에 끓여 마실 수 있는 값싼 육보차(六堡茶)와 보이차였다.
공산중국 초기의 차 수출에 관한 업무는 주로 상해시와 복건성의 하문(厦門) 그리고
광동성의 광주(廣州)의 수출입공사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운남에는 세관의 검사를 거친 수출입화물에 대해 관세를 납부하고 면장을 발급받는 통관허가증이 없어
보이차에 관한 수출은 모두 중국광동성차엽진출구공사(中國廣東省茶葉進出口公司)에서 도맡아 대행해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소위 인자보이차의 수출은 대부분 이 경로를 통해 홍콩과 마카오로 갔다.
광동에 있는 차엽진출구공사는 운남보이차에 관한 수출 건만 담당할 뿐만 아니라 운남에서
보이차 원료를 공급받아 자체적으로 이윤을 창출하기도 했다. 이 기관은 수출통관을 무기로 삼아 운남에
보이차 원료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운남에서는 부득이 매년 수 백톤의
보이모차(1차 가공된 반제품 잎차)를 이곳에 공급하게 되는데,
이러한 조달관계는 1973년 운남 자체에서 자영(自營)으로 수출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광동지역은 예로부터 자체적으로 차를 만들었다. 물론 주 판매지역은 홍콩과 마카오였다.
그들은 광동의 찻잎, 심지어 월남의 찻잎(越南靑)을 가져와 차를 만들었으나 반응이 좋지 않자,
운남 찻잎(雲南靑)의 가치를 최대한 이용하여 잎차인 산차(散茶) 그리고 보이원차와
같은 병차(餠茶)를 만들어 홍콩 등지에 팔았다. 시장에서 이 병차를 가리켜 광동병(廣東餠)이라 한다.
광동병의 내비(內飛)는 인자보이차의 ‘팔중차(八中茶)’를 본떴으나 포장지 없이
7편을 쌓은 형식은 골동보이차와 같다. 죽순껍질로 포장하여 홍콩 등지에 팔았는데,
반응은 꽤 괜찮았다고 한다. 금속틀로 압제해 운남의 것 보다 단단했으나,
운남 찻잎을 이용했다는 것으로 일정한 고객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물론 운남이 아닌 광동에서 만들어진 제품이었기에 운남보이차보다는 몇 갑절 싸게 유통되었다.
오늘날 시장에서 연도 있는 보이차 중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차가 바로 이 ‘광동병’이다.
광동병은 1990년대에 들어와 상인들의 각색으로 ‘광운공병’이라는 이름으로 환골탈퇴하게 된다. ‘
광(廣)’은 광동지역에 만들었다는 뜻, 운(雲)은 원료가 운남의 것,
공병(貢餠)은 조공으로 바칠 만큼 질이 좋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용어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광운공병의 ‘짝퉁’이 많다는 것이다. 짝퉁 보이차란 아래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에만 해당되면 성립된다. 하나는 보이차의 상표 또는 제작연도를 속이는 것,
다른 하나는 보이차의 산지원료를 속이는 것. 여기서의 ‘보이차 원료’란 운남지역에서 생산된 찻잎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운남 이외의 지역에서 난 찻잎은 보이차의 모양을 흉낼 수 있어도
보이차의 진미(眞味)를 재현할 수 없기에 짝퉁이라 부른다.
지금 시중의 짝퉁 보이차는 ‘광운공병’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1973년, 운남에서 자체적으로 수출업무의 기능이 생기자 광동이란 지역적 이용가치가
떨어져 보이차의 원료공급을 중단시켰다. 이에 73년 이후 만든 모든
‘광운공병’의 원료는 운남의 것이 아니기에 전부 짝퉁으로 분류된다.
만약 당신이 가지고 있는 보이차는 어느 지역의 찻잎으로 만들어졌는가?
운남인가 아니면 광동 또는 동남아의 찻잎인가. 그 판단의 가름선이 바로 1973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칠자병차의 유래는 골동보이차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운송수단인 마필이 하중을 견딜 수 있는 60kg의 무게와 수송 길이었던
다마고도(茶馬古道)의 통행여건에 의해 둥근 보이차의 무게는 357g로 정해졌다.
이때 보이차의 총칭은 보이원차(普洱圓茶)라 했으며,
개별 상점에서 만든 보이차는 모두 자신들의 상호에 따라 이름을 달리했다.
칠자병차.
오늘날 병차(餠茶)와 원차(圓茶)를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서로 다른 재질의 보이차로 존재했다.
당시 상인들은 보이차의 품질을 두 가지로 나눠 만들었는데,
고급 찻잎으로 잘 만들어진 둥근 차를 ‘원차’라 하여 주로 해외시장에 판매한 반면 하등급 찻잎으로 만든 것은 ‘병차’라 하여
판매대상은 주로 서역지역이었다. 즉 둥근 모양은 같으나 원료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 것이다.
공산중국 치하 아래 처음 만든 둥근 보이차 곧 인자보이차의 포장지를 보면 ‘중차패원차(中茶牌圓茶)’라는 글귀가 있다.
글자에서 알 수 있듯 고급 찻잎으로 만들었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 원차이다.
지금 우리가 시중에서 접하고 있는 둥근 형태의 보이차는 대부분 칠자병자다.
칠자병차는 보이원차의 전통 포장법과 같이 7편을 한 죽통에 담았다.
칠자병차의 이름에 대해 예로부터 여러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운남의 민족문헌에 따르면 ‘칠자(七子)’란 ‘다복다손(多福多孫)’의 의미며, ‘병차(餠茶)’는
둥근 모양의 보이차를 가리킨다고 적혀있다.
‘칠자병차’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쇄물로서 등장하게 된 해는 1973년부터다.
이는 문화대혁명 때인 1972년에 그동안 ‘중국차엽공사운남성공사(中國茶葉公司雲南省公司)’라 불렸던
회사의 이름을 ‘중국토산축산진출구공사운남성차엽분공사(中國土産畜産進出口公司雲南省茶葉分公司)’로
개명한 후 비로소 포장지의 인쇄물에 ‘칠자병차(七子餠茶)’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흔히 보이차의 시대적 흐름을 고대와 현대로 나누는데, 그 가름의 잣대가 바로 1973년이다.
1973년은 보이차의 역사에 있어 한 획을 그었던 해다. 회사 이름을 바꾼 것을 비롯해 자체적
수출업무기능의 실현 그리고 미생물발효의 탄생 등 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이 해부터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고대보이차와 현대보이차의 차이는 발효에서 나타난다. 고대보이차의 발효는 자연산화에서 비롯된 것이며
현대보이차의 발효는 미생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다르다.
고대보이차는 다시 골동보이차 즉 호자급(號字級)보이차와 인자급(印字級)보이차로 나뉘지만
모두 자연발효에서 진화(陳化)된 상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골동보이차를 제1세대,
인자보이차를 제2세대 그리고 현대보이차 즉 1973년 이후의 보이차를 제3세대 보이차라 부른다.
제1세대 보이차는 이무(易武)의 개인상점에서 만들어졌던 반면 제2세대와 제3세대 보이차는
모두 국영 맹해차창을 중심으로 생산된 제품이다. 그리고 지금 보이차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신제품들을 가리켜 제4세대 보이차라 부르고 있다.
제3세대 보이차 즉 현대보이차의 또 다른 이름은 숫자급보이차라고 한다.
시장에서 이를 ‘숫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호자급과
인자급의 명칭에 관한 흐름을 일관성 있게 맞추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미생물발효의 탄생을 기점으로 보이차 출하공장을 곤명공장(昆明)은 1번, 맹해공장은 2번,
하관공장(下關)은 3번이라고 지정하여 제품을 관리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제3세대보이차, 현대보이차 또는 숫자보이차라고도 일컬어지는 칠자병차의 탄생은 미생물발효공법에서 비롯되었다.
미생물발효공법을 인공발효 또는 쾌속발효라고도 부른다.
1973년 미생물을 통해 쾌속발효시킨 미생물발효보이차의 등장은 보이차의 기존 생산방식뿐만 아니라
유통시장 질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인위적인 고온다습한 공간을 통해 배양한
미생물의 작용은 찻잎의 산화를 가속화시켰으며 이러한 공법을 가리켜 학계에서는 ‘후발효작용(後醱酵作用),
Post-fermentation’ 또는 ‘악퇴변색(渥堆變色), Pile-fermentation’이라 부르기도 했다.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 자료집
미생물발효보이차에 대해 중국정부 당국이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1979년 운남성 정부가 발표한 ‘운남성보이차제조공법시행규칙’에 관한 시행령이다.
“보이차란 운남성의 대엽종 찻잎으로 만든 녹차긴압차(綠茶緊壓茶)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찻속에
함유되어 있는 여러 효소 성분들, 특히 폴리페놀 중심으로 자연발효 되어 차색이 변하는 동시에 색다른 맛과 향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차의 변화는 오래 묵힐수록 그 향미를 더욱 느낄 수 있는 것이 보이차의 진가다.
보이차의 자연발효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폐쇄적이고
낙후된 운남성의 교통망에 의한 장기간의 운송기간에서 온 발효였다.
오늘날은 운남성의 교통이 발달되어 1년이 소요됐던 운송을 단 며칠 혹은 몇 시간 안에 이룰 수 있게 됐다.
이에 지난날 운송수단에서 비롯된 자연발효의 맛과 향을 재현하기 위해 우리는
‘보이차쾌속발효가공법’을 개발하여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하고자 한다.
쾌속발효가공법이란 물과 습도에 의해 인위적으로 발효한 가공법으로서
1975년 곤명차창(昆明茶廠)에서 생산한 후 점차적으로 맹해, 하관(下關), 보이차창 등으로 확산되었다.
그동안의 가공법에 나타난 여러 난제들을 완벽하게 극복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이 얻어 이제 운남 각 지역의 차공장에서도 보이차를 생산하고 있는 실태이다.
이에 운남성정부는 보이차 품질의 제고를 보다 유효하게 관리하기 위해 아래 같은 시행령을 반포한다.”
인공발효한 보이산차.
이것이 ‘운남성보이차제조공법시행규칙’에 관한 시행령의 모두(冒頭) 내용이다.
모두 내용 중 보이쾌속발효공법이 개발된 시기는 1975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1973년 곤명차창에서 개발됐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보이차쾌속발효공법이 1973년에 개발됐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지雲南省茶葉進出口公司誌>의 ‘보이차발효공법 및 설비개혁시험’에서다.
그러나 내용 중 “1973년부터 곤명차창은 쾌속발효공법을 개발하였으나
대체로 경험을 통한 생산방법으로 진행되었다.
과학적인 데이터의 부족은 결국 발효과정 중 찻잎 변화에 대한 관찰 및 찻잎 성분에 대한 변화를
파악하는데 미흡하였고 또한 획일적이지 못한 발효주기(醱酵週期)와 열악한 설비로 인해 보이차의
생산방식은 무척 낙후된 상태였다”라는 부연설명을 보아 소위 숙병(熟餠)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미생물발효보이차 즉 칠자병차의 상품화는 1975년 이후부터 시작된 일이라 볼 수 있다.
보이차 속의 칠자병차 ③
짱유화 교수의 보이차 이야기 11
운남성 정부가 ‘운남성보이차제조공법시행규칙’을 1979년에 이르러 발표한 것을 보면
쾌속발효공법이 비록 1973년 곤명차창에서 개발됐으나 기술상의 제반 문제들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여러 해의 시험을 거쳐 비로소 정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보이차의 쾌속발효공법의 개발에 대한 일화는 수없이 회자되어 시중에 나돌고 있다.
사실 이러한 개발의 정확한 시기마저 불투명한 것도 사실이다.
일화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1973년(일설은 1974년),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雲南省茶葉進出口公司)의
부경리 송문경(宋文庚)과 오기부(敖其富)씨가 중국차무역박람회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전시장에서 얻은 광동지역에서 만든 지금과 같은 유사한 보이차 샘플을 가지고
당시 곤명차창(昆明茶廠) 공장장인 이희금(李希金)씨에게 보여줘 같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느냐고 제안했다.
인공발효한 보이차.
이 창장이 오계영(吳啓英, 2005년 작고)을 불러 샘플을 살펴본 결과 차의 외형이 튼실하고
색은 흑갈색이었으며 등급은 9~10급 정도의 쇄청모차로 만든 것 같았다.
당시 곤명차창에 마침 400톤 정도의 9~10급의 청모차(靑毛茶) 즉 쇄청모차가 창고에
쌓여있어 처리하는데 골칫거리였을 때였다. 이 원료는 청전,
즉 오늘날의 생전의 원료로 사용될 계획이었다. 창고 내에 있는 원료를 소화하는데 더할 나위가 없는
이 제의는 곤명차창으로 하여금 보이차의 미생물발효를 제작하는데 있어 시험용 원료로 삼도록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미생물공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그들은 보이차 샘플로 만든 것으로 되어 있는 발수차(發水茶)의 근거지인 광동지역에 맹해차창의
추병량(鄒炳良)과 동행하여 학습한 후 개발한 것이 열발효(熱醱酵)였다. 열발효란 쇄청모차 원료에
수증기를 가해 일정한 시간을 통해 산화시켜 모차의 외형을 흑갈색으로 만드는 공법을 말한다.
이 공법을 수차례 실습하여 개발한 것이 바로 쾌속발효인 미생물발효공법이다.
미생물발효의 보이차를 만드는 1차 공정은 녹차와 같다. 다만 사용하는 찻잎 원료는 대부분 함수량이 적은 쇤 찻잎이기에 먼저
10% 정도의 물을 뿌려 찻잎의 함수량을 높인 후 녹차와 같이 솥의 고온을 빌려 찻잎 속에 있는
효소 성분을 억제시켜 발효가 일어나지 않도록 살청(殺靑)이라는 공정을 한다.
이어 비비는 유념과정을 거쳐 세포조직을 약 15~30%를 파괴시키는 동시에 찻잎을 줄기 모양으로 만든다.
유념된 찻잎을 햇빛 아래에 건조해 함수량이 10%정도가 되도록
하는데 이렇게 1차적으로 만들어진 반제품의 차를 가리켜 모차(毛茶), 또는 쇄청모차라고 한다.
여러 형태의 보이차.
쇄청모차를 악퇴(渥堆, 미생물발효)의 공정을 거쳐 만든 것이 ‘쾌속발효보이차’다.
‘악퇴’ 공법이란 물과 습열 등의 작용으로 인해 생긴 미생물들이 촉매작용을 일으켜 찻잎속의 화학물질들로 하여금 산화,
분해 등의 일련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악퇴 또는 퇴적이라고 하는 과정은 주로 곰팡이에 의한 호기성(好氣性)발효로 이루어졌는데,
호기성발효란 미생물들이 산소를 좋아하여 공기 속에서 잘 자라는 성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보이차일 경우 다섯 검체에서 Aspergillus속 15종, Penicillium속 4종이 분리되는 것으로 보아 보이차의
주요한 미생물이 곰팡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40~60일 정도이면
발효의 공정을 마치며 완성한 잎차를 가리켜 보이산차라고 하나 상업적으로는 보이숙차라고 한다.
수증기를 통해 압제한 것을 긴압차(緊壓茶) 혹 압제차(壓制茶)라고 하며 학술적인 명칭은 긴압보이차라고 한다.
모양에 따라 둥근 것은 숙병(熟餠), 벽돌모양은 숙전, 그릇처럼 생긴 것은 숙타라고 한다.
첫댓글 내용은 긴거 같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드네요... 좋은자료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