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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임재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the Presence of God)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신랑이신 예수님과 깨알 쏟아지는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을 말한다. 사람에 따라 이를 내적기도, 명상기도, 관상기도, 친밀한 기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묵상 기도가 지적이고 행동적이라면 임재 기도는 다분히 관계적이고 감정적이다. 임재 기도의 핵심은 기다림과 듣기라고 할 수 있다. 임재 기도는 어느 정도 기도의 습관이 붙은 사람이 하는 것이 좋다.
임재 기도는 기도의 습관이 어느 정도 붙은 사람이 하는 것이 좋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으면 임재 기도의 묘미를 제대로 즐기기가 힘들다.
가, 준비 단계
임재 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새마음 훈련을 통해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인 준비를 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임재 기도는 나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쉽지 않다.
임재 기도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임재하심에 귀를 쫑긋 세우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첫 단계는 '마음을 평정'(recollection)시키는 일이다. 마음의 평정이란 우리 속에서 요동치는 모든 산만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생각이 산만해지면 마음을 고요하게 하거나 하나님께 집중하는 기다림이 어렵다.
많은 경우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기다림이 쉽지 않다. 원수가 조용히 우리 영혼을 주님께 맡기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훈련되지 않은 경우 갑자기 기다림의 단계로 들어가려면 온갖 잡생각이나 염려, 걱정, 두려움이 일어나서 조용히 영혼을 주님께 맡기는 것을 방해한다.
평소에는 생각나지 않는 것들이 왜 기도의 시간에는 그렇게 요란하게 생각날까? 여기에서 우리는 원수가 우리의 기도를 방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수는 우리가 예수님께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잡스러운 생각의 가라지들을 우리 마음에 심어 놓는다. 이것은 원수가 쏘는 생각의 화전 곧 불화살들이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엡 6:16).
갑자기 이전에 미워했던 사람의 생각이 나서 그 생각을 품으면 품을수록 더욱 미워지는 생각이 드는 경우, 집에 있는 가스 불을 제대로 껐나 하는 염려, 오늘 저녁 반찬은 뭘하지 하는 생각, 밀린 돈을 언제 갚을까 하는 생각 등 등.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원수가 주는 생각은 아니지만 원수는 우리의 이런 염려나 우려를 타고 불화살을 쏘아댄다. 또한 의심, 불신, 좌절, 낙심 등의 불화살을 쏘아댄다.
보호 기도.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보호 기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호 기도는 원수를 결박하는 것과 하나님의 보호를 요청하는 두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다.
"내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주변에 서성거리면서 나에게 나쁜 생각의 불화살을 쏘거나 하나님과의 친밀과 교제를 방해하는 모든 흑암의 세력들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썩 물러가고 다시는 오지 말지어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영, 혼, 육을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주옵시고,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거룩하게 해주시고, 천군 천사로 진쳐 주셔서, 제가 주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동안 흑암의 세력들이 일체 틈타지 못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딕 이스트만은 이것을 "깨어서 하는 기도"라고 불렀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깨어 있다'의 헬라어 '그레고레오'는 "깨어 있거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다"는 뜻이다. 깨어 있다는 말은 영적으로 보초를 서서 원수의 공격에 대비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지켜야 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지키라'는 말은 관찰하고 살펴서 보호하고 파수 보듯 경계하라는 말이다.
그래도 부정적인 생각이 나거나 마음을 산만하게 하면 다시 한 번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에게 부정적인 생각들―때에 따라 구체적으로 말한다―을 주는 이 원수는 썩 물러가고 다시는 오지 말지어다"라고 명령한다. 많은 경우 이 한 번의 명령으로 생각이 정리되지만 정도가 심하면 없어질 때까지 한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부정적인 생각들이 사라진다.
생각을 통제하라
물론 이런 모험을 함에 따라 당신의 생각을 통제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왜 그런가? 오랜 세월의 습관을 통해 당신의 생각이 원하는 대로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러한 당신의 생각을 통제하는 것에 관한 일이다.
우리의 삶에 어느 정도의 고독을 가져오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지만 동시에 가장 어려운 훈련이다. 진정한 고독에 대한 깊은 욕망이 있을지라도 그러한 고독한 장소나 시간으로 접근할 때 우리는 어느 정도의 불안을 체험한다. 대화할 상대자, 읽을 책, 시청할 TV, 전화할 상대가 없이 혼자 되자 말자 우리에게는 내적 혼란이 다가온다.
내적 혼란은 너무나 요란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이어서 우리는 참지 못하고 금방 다시 바쁘게 된다. 나만의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는다고 해서, 우리가 금방 내적 의심, 불안, 두려움, 나쁜 기억들, 해결되지 않은 갈등들, 화나는 감정이나 충동적인 욕망을 모두 접어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외적인 산만한 것들을 제거했을 때 자주 외적인 산만한 것들이 우리 속에서 완전히 나타남을 우리는 발견한다.
이 때문에 고독 훈련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된다. 고독은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을 빼앗기거나 선입견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 금방 받아들이기 힘들 분야이다. 고독하지 않을 이유가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스러운 계획을 통해 고독을 시작해야 한다.
조용함을 유지하기 위해 서두르거나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조용함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조용함을 유지하는 동안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는데 당신은 그분의 임재를 당신 속에서 느낄 수 있다. 그분의 즉흥적인 형상들이 생명력을 가지고 흐르기 시작한다. 그분의 음성이 말하며 당신에게 지혜와 능력을 부여한다. 당신은 자신이 "영 안에"(in the Spirit)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계 1:10).
*우리 자신의 속사람을 고요하게 하기
-나중에 할 생각들을 적어두라.
-현재의 긴장과 염려를 주님께 맡겨라
-예수님께 관심을 집중하라.
-고요한 동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단지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긴다. 나는 이 순간에 몰입해 있으며 그분과의 체험을 즐긴다 .
간단한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를 조용함으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제 속에서 저의 관심을 끄는 소음들을 조용하게 해주옵소서.
저의 영혼을 고요하게 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옵소서.
성령님,
저의 마음에 당신의 법을 기록해 주옵소서.
주님,
주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저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 고요의 기도
산만한 생각이 정리된 후의 상태를 사람에 따라 고요의 기도, 집중, 또는 내적 고요라고 부른다.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통해 마음의 모든 장애, 모든 산만한 생각들, 쓸데 없는 의지들을 내버렸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애하는 은혜가 바닷물처럼 우리를 깨끗히 씻어버렸다. 우리는 이제 자아의 깊은 곳으로 인도되었다.
우리 마음 깊숙이 있는 그 무엇이 깨어나서 관심을 끈다. 우리의 영은 정신을 차리고 귀를 기울인다. '하나님을 바라봄'(Beholding the Lord)이라고도 하는 지속적인 마음의 응시가 계속된다. 우리는 이제 그분의 포옹에 힘입어 따뜻함을 입게 된다.
기다림을 통한 애정어린 집중
마음의 평정이 이루어져 마음이 고요해 지면 기다림의 단계로 들어간다. 기다림은 기도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기다림이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조용히 맡기는 행위"이다.
기다림은 마음을 하나님께 고양시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나의 영혼을 하나님께 조용히 맡기고 애정 어린 집중으로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바라보다'는 말의 헬라어인 '아포라오'는 '이것에서 눈을 돌려 저것을 바라보다,' '집중하여 응시하다'라는 뜻이다. 나의 관심을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리고 마음의 눈으로 주님만을 응시하는 것을 말한다.
기다림의 과정에서는 말과 생각이 뒤로 물러나고 하나님에 대한 애정 어린 감정이 전면에 부상된다. 굳이 말을 하고 싶으면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의지합니다," "주님, 신뢰합니다"라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고백한다.
명상 기도는 '헌신으로 불타는 사랑'이다"(Contemplation is 'love on fire with devotion'). 이 시간이 중요한 시간이다. 우리의 영혼 속에서 흘러나오는 육신의 우렁찬 소리를 잠재우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기다림의 중요성에 대해 앤드류 머리는「기도의 삶」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기도생활의 비밀이 있다. 시간을 가지고 혼자 있는 골방에서 무릎 꿇고 경배하라. 그리고 주님이 자신을 드러내고 당신을 소유하고 당신을 데리고 나가서 보이지 않는 주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실 때까지 기다리라."
이 시간은 주님과 연애하는 시간이다.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때로는 말을 하지 않고 같이 있기만 해도 마음이 뿌듯하고 충만함을 맛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다림의 시간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신랑으로 생각하고 느끼면서 주님에게 나의 애정을 마음으로 표시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기다림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 많은 말을 할 수 있다. 무언의 응시를 통해 우리는 더 많은 말을 하나님께 할 수 있다. 장―니꼴라 그라우는 "오, 주님 제게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무언의 언어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기다림을 통한 무언의 기도는 우리를 말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훈련이다.
오늘날 분주하고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서구식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현대들에게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침묵의 기다림이 생소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기다림은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오직 심령의 눈으로 주님만 보고 주님만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의 잡다한 것들로 꽉 채워 있는 내 속을 비워 주님으로 채우는 것이다.
이 침묵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침묵이다. 단순한 침묵이라면 세상의 초월명상이나 불교의 선과 다름이 없다. 기다림은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침묵이다.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예수로 충만하기를 원하는 침묵이다.
이것이 바로 기다림이다. 이때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내려놓아야 하다. 나의 생각, 기도 제목, 나의 일정 등 모든 것을 주님의 발아래 내려놓고 주님의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
시편 46:10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라고 기록한다. 다른 번역본들은 "내가 하나님 됨을 알고 네가 애쓰는 것을 멈추어라, 가만히 있어라, 편안히 하라"라고 번역한다.
여기는 말하는 '안다'는 정보적인 지식을 초월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연합할 때 알아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호흡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마음의 우리 마음과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앎'(knowledge)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서 그리스도와 진정한 교제를 나누는 체험을 가지게 하는 계시의 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철저히 고요해야 함을 잊을 때가 많다. 우리의 삶이 너무나 분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께로 달려가서 우리의 기도를 급하게 쏟아놓고는 다시 달아나 버린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고요함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내가 생각과 몸을 조용히 하여 내 마음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의 움직임은 부드럽기 때문에, 나의 내적 및 외적인 맹렬함이 조용해지지 않으면 나는 그분의 내적인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명상적인 기다림은 단지 기도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인생 행로에서 갈팡질팡 할 때 하나님의 길을 발견하는데 도움을 주는, 하나님의 병기창에서 외면 받아 온 무기 중의 하나이다.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는 업적주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다림은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나를 채우시게 하는 시간이다. 어떤 것에 무엇을 채우기 위해서는 이미 그곳에 차 있는 것을 비워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 속에 예수가 충만하기 위해서는 나의 육신적 모든 것을 비워야 한다. 나의 세상적 욕심, 근심, 염려, 두려움을 모두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채우는 것이 바로 기다림이다.
명상 기도란 내 입술로나 지성으로나 상상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내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하는 기도 즉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내 속으로 내려 오셔서 나를 속박하고 있는 온갖 잡념들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는 기도"라고 말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 존재 안에서 신비한 역사를 하신다.
즉 내 속 깊이 숨겨진 자신의 죄성의 발견과 그것들에 대한 깊은 참회와 모든 허물의 용서의 체험, 옛 자아의 포기와 모든 속박들로부터의 초탈의 실현, 내 영혼의 온전한 정화와 신적 지혜와 광명으로 채워짐, 내 영혼과 하나님과의 연합을 경험과 뜨거운 사랑의 체험, 그리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평강과 기쁨과 함께 주님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코자 하는 결심 등을 일으킨다. 따라서 침묵과 고독은 이웃이나 세계로부터의 도피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독대의 기회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어떤 용기에 물을 채우려면 용기를 비운 후 호수를 통해 수원에 연결시켜야 하듯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차기 위해서는 육신적인 나를 비워야 한다. 이것이 기다림의 핵심이다.
기다림의 과정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자주 들어갈 때 우리는 주님의 형상으로 닮아 거룩해 간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우리가 '고요의 기도'로부터 시작하여 임재 기도의 정수인 주님과의 영적 결혼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이렇다.
영혼이 주님을 조용히 응시하는 고요의 기도의 상태에서는 산만한 생각들이 완전히 평정되지 않는다.
산만한 생각이 전혀 없는 완전한 합일의 단계에서 영혼은 '능력의 띠'에 연결된 것같은 기분을 느낀다.
영혼이 '스스로 꺼진 상태'인 '황홀한 합일'의 단계
영적으로 '변화하는 합일' 또는 '영적 결혼'의 단계.
영적 결혼이란 우리의 영은 신적 광명과 지적 통찰로 불 켜지고 밝아지며 성삼위일체 하나님이 각각 밝히 알려진다. 이 영적 결혼 상태에선 비가 하늘에서 내려 강과 샘물에서 합쳐지듯, 두 창문에서 들어온 빛이 한 방에서 합쳐지듯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된다.
이 영적 결혼의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우리 영혼 사이에 어떤 장벽이나 비밀이 없어지고 신비한 교제가 생기며 주님의 말씀처럼(요 17:22-23), 내 영혼 안에 하나님이 또한 그리스도와 성령이 거하시고, 우리 영혼이 그 안에 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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