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태어나면서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제가 3살 때 권사님이셨던 할머님께서 우리집 사랑방에서 전도사님 모시고 교회를 개척하셨구요. 충남 예산군 덕산면 복당리에 있는 교회인데 지금은 큰 교회가 되었죠. 당시 아버님은 군인이셨기 때문에 떨어져 계셨고 할아버님이 시골 군수로 계셨기 때문에 저는 할아버님 밑에서 자랐지요. 그러면서 교회를 아주 자연스럽게 온 가정이 나가니까 의무적으로 나갔죠. 그런데 국민학교는 전속 다니시는 할이버지를 따라 여덟번 전학 다녔어요. 한 번 전학갈 떄마다 3개월 정도씩 쉬었기 때문에 공부하기는 참 힘들었죠. 그래도 음악하고 미술만은 수였어요.
목사될 사람 손들으시오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열심히 교회에 다녔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는 않았죠. 모범생으로 다니면서 중,고등부 회장도 했구요. 교회 안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당시의 순수한 교회 인격을 닮을 수 있었던 것은 참 감사한 일이죠. 아름다운 시골의 자연 속에서 활동했고 건전한 대인관계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제게 음악적인 달란트가 있긴 했지만 제가 가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교회활동의 연장이었습니다. 교회에서 피아노도 배우고 학교공부 끝나면 교회 가서 피아노도 치고 했거든요.
중학교 때 저희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어요. 그때 하나님께 장난삼아 서원을 했어요. 목사될 사람 손들으라고 했는데 사실 저는 그런 마음이 없었어요. 예배 빨리 끝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리고 목사님께서 손들라고 하셨는데 아무도 안들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으로 손을 든 거죠. 고등학교 때까지 그렇게 지내다가 음대에 가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께서 굉장히 반대하셔서 법대를 갔죠. 원하던 대학은 다 떨어지고 '67년도에 단국대 법대 행정학과에 들어갔죠. '70년에 군에 갈 때까지 여러 음악단체에서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유명했던 YWCA의 '청개구리'에서도 활동했고 '사랑해'라는 노래도 원래 제가 불렀었죠. 그런데 제가 부를 땐 히트가 안되더라구요.
가수 최고의 영예를 눈앞에 두고
군에 가서는 보직이 운전병이었습니다. 운전병으로 복무하면서 교회에 너무나 가고 싶은데 그 부대에서 고참이 못 가게 하는 거예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씀이 마음 속에 강권적으로 임하는데 교회에 못가니까 고통스럽고, 외롭고, 고독하더라구요. 도저히 교회에 가고 싶어 못견디겠어요. 그래서 고참한테 기합받을 작정을 하고 갔죠.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데 너무 좋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헌금할 시간이 됐는데 헌금할 돈이 없어요. 그래서 목사님께 제가 감사찬송을 부르겠다고 메모에다 써서 냈더니 목사님이 저보고 특송하래요.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등대"를 불렀는데 제가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뜨겁게 부른 찬양이 없을 정도로 온 교우들이 다 울었어요. 거기 온 군인들이 다 울고, 목사님도 우시고, 저도 울고요. 예배 끝나고 최병도 목사님이 "나하고 같이 일하자"고 하셔요. 감사찬양 불렀다가 그날부터 3년 동안 군종참모부에서 목사님을 모시게 된 거예요. 지금 돌아보면 그 기간이 하나님께서 저를 목사로 쓰시려고 훈련시키신 여호와 이레의 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 비서 역할에다가 밥도 해드리고, 구두도 닦아드리고, 청소부, 교회 사무원, 교회 전도사로 일인 몇 역을 3년 동안 했죠. 목사님 어디 가시면 제가 설교도 했는데 사람들이 눈물 흘리고 그랬었죠.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저를 부르신 것 같아요. 제 마음을 두드리시고, 부르시고 그런데 제가 완전히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고 다른 길로 갔지요.
그렇게 군에 다녀와서 1975년에 '너'가 대히트를 한겁니다. 바빠졌지요. '금주의 인기가요'에서 7번 연속 1등을 했죠. 4월부터 12월까지 1등 행진이 계속 됐어요. 그해 12월에는 제가 완전히 주인공이 되어서 모든 연예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눈앞에 두고 있었어요. 톱 프로그램들에 스케줄이 다 잡혀 있었어요.
서대문 구치소에서 만난 사형수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안되겠던 모양이죠. 세상의 영광을 코 앞에 둔 12월 3일 절 치셨어요. 대마초사건이었죠. 대마초 사건으로 저와 윤형주 집사, 이장희씨 셋이 같이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모든 영광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된 거죠. 구치소 안에 있는 110일 동안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오랫만에 "내가 누구인가?"하는 자문을 던진 거죠. 그동안 너무 바빴어요. 바쁘니까 '나'를 볼 수 없었고, 연예인 생활하니까 '나'는 없어지고 어떤 다른 '나'가 되어서 살아갔던 겁니다.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 살아가듯이 시키는 대로 사람들 앞에서 웃는 척하고. '너'라는 똑같은 노래를 수십 번 불러야 하루가 끝났죠.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것이 축복이고,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막상 저에게는 지옥이었죠.
그러면서도 돈이 막 들어오고, 인기도 계속 올라가는 가운데 생긴 일이라 절망에 빠졌고 "내 인생은 끝난 것"이라며 자신을 패배자로 알았죠.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사건이 없었다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교회는 나가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과는 반대의 길에 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한치의 빈틈도 없으시죠. 결국 그 사건은 절 위해서 있었던 것이죠. 구치소에서의 3개월은 어느 인생의 학교에서보다도 제게 값진 시간이었어요. 거기서 예수님을 영접했고 주님을 위한 전적인 헌신도 했습니다.
그 안에서 한 젊은 사형수와의 의미심장한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는 구치소 안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인데, 하나님꼐서는 그를 통해 제게 간증과 도전을 주셨습니다. 어느 날인가 제가 재판받으러 가는데 제게 와서 손을 꼭 잡아요. 그런데 그가 가고 나니까 제 손에 그가 걸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가 있어요. 그 당시에 십자가는 예수님을 영접한 사형수들만 걸 수 있었는데, 그는 자기의 전재산을 저에게 준거죠. 전 그때 꾹 닫힌 그의 입술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정확히 들었어요. "내 몫까지 일해 달라"는 분명한 그의 음성을. 순간적으로 "천국 가면 우리가 이렇게 대화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복음 증거였어요. 가장 기쁜 아름다운 선물을 가지고 있으면 자랑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죠. 나누고 싶고 주고 싶죠. 그런데 가장 귀한 선물을 받아가지고도 혼자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도둑이예요. 이제는 제게도 그 복음 증거의 열정이 있습니다. 못다한 일을 내게 부탁하는 그의 순간순간의 모습이 제게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그 일 후에 저는 집행유예 3년 선고받고 출감했죠.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당시에 대마초 연예인은 방송출연, 레코드 제작 모두 금지당했죠. 저 역시 1975년 12월 3일부터 1979년 12월 3일까지 만 4년 동안 꼼짝 못했죠. 하루도 틀리지 않아요. 지금와서 생각하면 이 기간 역시 저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그 기간이 없었으면 오늘의 저는 없어요. 만 4년 동안 하나님께서 저의 쓴뿌리를 뽑아주셨거든요.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시기 위해 애굽 와실에서 누렸던 명예와 부귀를 다 버릴 수 밖에 없는 살인자로 만들어 광야로 내쫓아서 만 40년 동안 훈련시키신 것을 연상케 해요. 하나님꼐서는 모세를 목동으로 훈련시키셨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이스라엘에 가보니까 가장 힘든 직업이 목동이예요. 밤에는 비바람과 싸워야 하고, 사자와 여우와도 싸워야 하고, 낮에는 태양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니 제대로 못 자고 못 먹는 생활이죠. 그리고 잘 때는 꼭 양들 틈에서 자더라구요. 거기는 천연동굴이 많아서 동굴 안에서 양들이 자는데 그 중간에 목동이 들어가요. 양털이 이불이 되는 거죠. 냄새가 몸에 배겠죠. 왕궁에서 호강하던 사람에게 얼마나 고통스런 생활입니까? 그 고통을 통해서 모세라는 사람을 만들어내신 주님께서 제게 만 4년 동안의 연단을 주셨습니다.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낳은 기간이었습니다. 제게서 연예인의 옷들을 벗겨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다듬어주신 거죠. 그런 만큼 제게는 가장 고독한 기간이었고 고통스럽고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기간에 하용조 목사님꼐서 연예인교회를 개척하셔서 연예인교회로 교회를 옮겼습니다. 연예인 교회가 '76년 3월에 생겼으니까 나오자마자 멤버가 된 거예요. 그때는 하 전도사님이셨는데 항상 제가 옆에 있었죠. 저는 그냥 교회에서 살았어요. 어디 가시면 따라가고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크리스챤 연예인들 기타줄도 맞춰주고, 복음성가도 가르쳐주고 초신자들에게는 주님을 가르쳐주고 초신자들에게는 주님을 가르쳐주면서요. 그러다가 1979년도 11월에 하용조 목사님 가정에서 하나님께 진짜 서원했어요. 주님의 종이 되기로요. 그떄 곽규석 장로님도 그 자리에 계셨죠. 지금은 목사님이시지만, 그렇게 '79년 12월 3일 날 해제될 떄까지 꼬박 연예인교회에서 섬김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해제되어서 부른 노래가 '바보처럼 살았군요'입니다. 그 곡은 사실 제 간증이예요. 흘려버린 세월을 찾을 수가 없다는 거죠. 예수님 영접하면 바보처럼 살 수 없다는 거죠.
249번 십자가에 매달리다.
그리고 나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예수님역을 했어요. 미국에 유학가기 전까지 총 249회를 했어요. 249회의 성전청결, 이런 과정에서 제가 체험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249회 공연했다면 몇 번 연습했겠어요. 연극이라는 것은 그 역에 내가 완전히 몰두하지 않으면 그 역을 감당할 수가 없잖아요? 예수님역을 하면서 제가 예수님의 마음에 들어가게 되더라구요. 그렇지 않겠어요? 십자가 매달려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게 엄청난 얘기거든요. 이것을 249회를 했으니까 할 떄마다 감동과 감격과 이것은 뭐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죠. 이 공연을 하는 동안 저는 점점 더 예수님꼐 빠지게 되었고, 와전히 하나님꼐 항복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뮤지컬에는 서울대 성악과, 이대 무용하과 학생들을 비롯해 연극인, 탤런트, 코메디언, 가수 등 80여 명이 총 출연했습니다. 제가 예수님역으로, 막달라 마리아에 윤복희 집사님, 헤롯왕역에 곽규석 장로님, 빌라도역에 유인촌 씨, 유다역에 추송웅 씨가 참여했는데, 그때 연극만 하시던 최주봉 씨가 로마 병정을 맡아서 가죽채찍으로 때릴 때 옆을 때리게 되어 있는데 병정역에 몰입해 저를 정말로 때리는 거예요. 굉장히 많이 맞았는데 가죽으로 맞을 때 전 아주 죽는 줄 알았어요.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납이 달려 있는 채찍으로 한 대 맞을 때마다 살이 쫙쫙 갈라지는 고통을 당하신 주님의 아픔이 조그이나마 느껴졌지요.
제가 예수님역하니까 사람들이 저보고 "예수님! 예수님!" 하고 불러요. 처음에는 창피해서 도망다녔는데, 10회, 20회, 30회, 50회 하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예수님!" 하면 "네!" 하고 대답을 하게 되고, 그 다음에 심지어는 제 표정이나 대화가 이 공연하는 동안에 바뀌어졌어요. 그렇게 하면서 249회의 종막이 내렸어요.
그런데 뮤지컬이 막을 딱 내리니까 할 것이 없어요. 세상적으로는 주인공으로 249회 공연했고 가창력도 조금 있었으니 사실 그때부터 돈 벌 수 있는 기회가 열리기 시작한 셈이죠. 그러나 용납이 안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하나님 찬양하는 것 아니겠어요. 다시 시시한 세상 노래를 못부르겠는 거예요. 물론 세상 속에서 건전하고 좋은 노래를 불러야 할 크리스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윤형주 집사처럼요. 그러나 왜 나에게 2년 동안이나 예수님 역할을 맡기셨냐 이거죠. 하나님께서 다른 것을 할 수 없도록 막아버리셨어요. 영적 싸움이 제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내 집을 돌아보면 가난한 집의 장남인 제가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가정이 주님만 영접하면 다 해결되는 문제다. 그리고 하나님이 공급해주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믿음이 생기더라구요. 그렇다면 신학의 길은 결정이 됐는데 한국에서 신학을 하게 되면 돈에 대한 유혹이 계속될 것이란 말이죠. 이런 갈등 속에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됐습니다. 미국으로 가면서 취입한 노래가 '겨울 아이'구요. 이곡은 가수 없이 히트됐죠.
센 안토니오 신학교에서의 절망
그런데 주위 분들이 미국으로 가더라도 뉴욕이나 LA로는 가지 말래요. 유명 신학교들이 거기 다 있지만 한국사람들이 많아서 매주마다 찬양하러 다니지 않겠느냐는 것이에요. 거기서는 가만히 있어요(?) 신학교 졸업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공부하면 안된다 이거죠. 그러지 말고 정말 미국사람만 있는 작은 규모의 뜨거운 신학교에 가서 한 3년 푹 담궜다 나오래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쓰실 거래요. 처음엔 그 얘기가 기분 나쁘게 들리더라구요. 그런데 한 1주일 고민해보니까 정말 그분이 날 생각해서 해주신 말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가 장영출 목사님이 공군 군종감으로 계실 때 미공군 군종감의 총청을 받아서 전미국에 있는 공군부대를 투어하는 기간이 있었어요. 그때 간증찬양자로 동행했다가 텍사스에 있는 센 안토니오 신학교를 찾았어요. 당시에 38년 된 학교인데 한국 사람은 한명도 없었죠. 학장을 만나 사정 얘길 했더니 인터뷰에 응해줘서 수속을 밟게 되었죠. 신학생 비자가 안 나올 땐데도 대사관에서 비자를 내주더라구요. 그렇게 미국으로 떠난 것이 1982년 1월이에요.
한국사람이 없는 곳이어서 김치도 못 먹었죠. 처음에는 신학교에 천사들만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깡패도 있고, 도둑놈도 있더라고요. 아직 옛속성이 남아 있는 친구들이었죠. 물론 너무 주님 사역 감당하고 싶어서 온 친구들도 있었지만요. 스위스에서 온 한 친구는 저만 보면 자기 눈을 일자로 잡아늘리면서 놀려요. 어떤 친구는 세계지도 펴놓고 우리나라를 손으로 누르고는 안보인다고 놀리기도 하구요. 실망스러웠죠. 더구나 영어가 안되는 거예요. 아침, 저녁으로 코피가 팍팍 터지고 정말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구치소에서 110일 동안 그리고 4년 간의 연단이 인내를 만들어냈죠. 남들 한두 시간 복습하면 될 것을 저는 8시간 공부해도 못따라가요. 책상 두 개 붙여놓고, 한글성경, 영어성경, 한글 성구사전, 영문 성구사전에다가 공부 잘하는 친구의 노트, 내 노트 다 펴놔도 진도가 안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 모든 것이 불가능이죠. 거기서 오는 좌절과 절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가 33살이었거든요.
브라더 리와 두 명의 룸메이트
그러던 어느 날 학장님이 저보고 뭘 부탁하는데 무슨 순서에서 찬양 하나 해달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다고 했죠. 그런데 그때 전 항상 소형 녹음기를 가지고 다녔거든요. 중요한 얘기를 녹음해 두었다가 기숙사에 와서 한 8번 들어보면 알거든요. 그래서 학장님 얘길 자세히 들어보니까 이번 금요일 예배시간에 1시간 동안 설교도 하고, 간증도 하고, 찬양도 해달라는 얘기였어요. 이걸 모르고 찬양 얘기만 듣고는 선뜻 대답한 거죠. 한참을 고민하다가 목요일 저녁에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나를 통해 영접한 자매를 통역으로 세운거죠. 이 학교에 보낸 것은 여러분을 사랑해서"라고 서두를 꺼냈죠. 그랬더니 "우우" 하더라고요. 그 친구들이 '한국' 하면 전쟁 후에 폐허더미 위에서 아이에게 젖 물리고 있는 아녀자 모습을 떠올리는 정도였어요. 지금의 소말리아 같이 생각한 거죠. 제가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못 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얼굴이 노랗다고 천대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이중에 있습니다. 그분들은 예배가 끝나는 즉시 보따리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왜냐하면 당신들은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주 안에서 형제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하다가 나가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여러분들을 주의 종으로 불렀나 안 불렀나를 분별해주시기 위해 나를 이곳에 불러주신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죠." 그렇게 말했더니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라고요. "아멘!" 하기도 하구요. "난 여러분을 통해서 영어를 배우기 원합니다. 여러분을 통해 미국의 문화를 배우기 원합니다. 여러분 나라의 좋은 것들을 배우기 원합니다. 나는 연예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나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는 금세 압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크리스챤들이라면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여러분들이 신학공부를 하기 전에 크리스챤인 것을 의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찬양을 불렀죠. 앰프 시스템이 굉장히 좋더라구요. 찬양을 하니까 피아노, 키보드가 따라나오고, 첼로, 바이올린, 플룻이 연주되는데 기가 막히더라고요. 항상 마음이 가난할 떄 부르는 찬양은 엄청난 파워가 있지요. 찬양을 부르고 났는데 계속 기립박수를 치는 거예요. 내려가니까 뚱뚱한 자매들이 저를 껴안고 뽀뽀하고 난리가 났어요.
그날부터는 절 대하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영어도 가르쳐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래도 시험 보면 학점이 안 좋으니까 학장이 광고를 하더라구요.
"브라더 리에게 공부 도와줄 룸메이트 두 사람을 구한다"는 내용으로요. 그래서 두 사람이 지원했어요. 갯시올락과 존 반말트라는 친구들이었죠. 갯은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두 시간 동안 그날 공부한 것을 다시 가르쳐주었고, 존은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다음날 공부할 것을 자습시켜주었습니다. 이것을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계속해주는 거예요. 이것을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계속해주는 거예요. 하루 이틀은 쉽지만 몇년 동안이에요. 제가 하기 싫어서 도망가면 저를 잡아와요. 자기들은 브라더 리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약속했다는 거예요.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듯 끌려다니며 공부했어요.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는지 아세요. 제가 아주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어요. 놀라운 일이죠. 전 신학교 3년 반 동안 공부도 배웠지만, 특별히 '원 페이스'(한 얼굴)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제가 연예인일 때는 사람들 앞에서는 최상의 얼굴이었고 집에서는 고독과 비애를 왔다 갔다하는 얼굴이었죠. 구치소 들어가기 전만 해도 전 돈 있는 사람하고만 사귀었어요. 주로 제게 필요한 사람, 저보다 나은 사람들만 사귀었죠. 그런데 구치소 안에 들어가서 누구하고나 잘 수 있는 훈련을 받은 거예요. 콩밥 벅었으니 어떤 음식이나 먹을 수 있는 훈련도 된 셈이구요. 이 훈련이 신학교에서 더욱 순수해지는 훈련으로 이어진 거예요.
아름다운 교회의 축복을 내려놓고
원래는 신학교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85년도 5월에 졸업했는데 졸업 전부터 전도사로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센 안토니오에는 DLI라는 군사영어학교가 있는데 세계 약 87개국으로 부터 미국에 장교들이 공부하러 오면 이곳에 와서 9주 동안 영어교육을 받아야 돼요. 한국에서 미국에 공부하러 오는 장교의 100%가 이곳을 거쳐가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군복음화율이 35% 정도로 말하는데 거기 오시는 엘리트 장교들 가운데 교회 가는 사람들이 25% 밖에 안되요. 그래서 제 마음에 부담이 오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한국장교들을 선교하기 위해 개척한 거죠. 처음엔 목사님 한 분께 목회를 부탁드렸는데 졸업할 때 못견디시고 떠나시는 거예요. 그래서 꼼짝없이 목회를 하게 되었어요.
먼저 미니버스를 하나 구입했어요. 교육 받으러 오는 한국장교들을 공항으로 마중나가기 위해서죠. 이 분들이 처음 공항에 딱 떨어지면 언어에서부터 하루종일 고생하게 돼요. 우리가 나가서 부대까지 모셔다드리고 방 배치까지 도와드리니까 그 모든 불편이 싹 없어지는 거죠. 미리 명단을 알아서 "아무개 중령님이시죠?"하는 식으로 환영하니까 한번은 간첩으로 오인받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종교에 구분없이 한국장교라면 다 우리 교회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죠. 교회에 나오라고 전혀 말하지 않아요. 그냥 "한인남부침례교회에서 나왔습니다. 필요한 것 있으면 연락주세요. 최대한으로 섬기겠습니다." 한 마디만 하는 거죠. 그리고 한 달에 두 번 초청해서 음식 대접해 드리고 또 두 번 관광보내 드리죠. 관광 때는 차 안에서 꼼짝 못하니까 갈 때와 올 떄 집사님들이 간증을 해요. 불교신자인 분들도 고마우니까 인사차라도 예배에 오세요. 그러다가 말씀으로 꺠우쳐서 주님을 영접하기도 하시구요. 그렇게 8년 동안 섬겼습니다. 그동안 저희 교회를 다녀가신 분들이 최소한 2천여 분 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도 성장했습니다. 출석 성도가 600여 분 됐어요. 그렇게 되니까 미국남부침례교단 총회에서 투표를 통해 남침례교단 소속으로 받아줬어요. 교회 나와서 영접하신 분들이 60%이상 돼니까 교회는 항상 순수했어요. 예배당도 교육관, 식당이 따로 있는 교회 건물을 하나 사서 주차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추었죠. 또 텍사스에서 저에 대한 소분도 참 좋게 났어요. 그런데 이제 안정기에 들어가니까 제 마음이 편하질 않아요. 대접받는 단계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제 자신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놓은 약하고 게으른 종처럼 보이기 시작했어요. 또 제 부전공이 교회음악인데 고생이 되더라도 새롭게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거죠. 제 마음에서 그런 생각들이 계속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러나 주님께서 자꾸만 그런 마음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교회를 그대로 새로운 목회자에게 위임하고 저는 LA로 떠난 겁니다. 1993년 10월 말의 일입니다.
코너스톤 교회와 크리스챤 토크 쇼
하나님꼐서 첫 목회를 너무나 아름답게 하셨기 때문에 제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꼐서 하실 터이니 저는 주님 주시는 모든 아이디어를 위해 시간과 모든 것을 바쳐서 순종하면 "댓츠 잇"(That's it)인 거죠. 열매는 주님꼐서 맺게 해주시니까요.
그래서 코너스톤 교회(미국 남침교단 소속)를 개척하면서 한 10년간 연구한 하나님꼐서 경외받으시는 음악, 찬송중에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목회자 세미나와 교회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겁니다. 미국 내, 멕시코, 브라질 등지로 한 달에 한 번씩은 부흥회를 인도하러 다니고요. 크리스챤 TV 토크 쇼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도 제가 꼭 발전시키고 싶은 분야입니다. 신학 이해와 더불어 TV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식적인 대화가 아니라 편안하고 진실된 토크쇼를 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촉 스미스 목사가 목회하는 갈보리채플의 마라다타 뮤직, 호산나 뮤직, 존 윔버 목사의 빈야드 뮤직 등 LA는 미국 크리스챤 음악의 본고장이니까 저희 교회가 이 음악들을 소화하면서 한국교회로 연결하는 일도 하려고 하고요. 그래서 교회안에 음악시설과 녹음실을 완벽하게 갖추어가고 있습니다.
목회는 젊은 1.5세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어렵지만 주님은 땀흘리는 모습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해요. 제게 주신 사명이 작은 빛을 비추다 꺼지는 것이어도 제 그릇에 맞는 만큼 땀흘려드리고 싶어요. 올해 7월 1일에는 저희 교회 25명의 청년들이 구소련 지역에 선교차 들어갑니다. 헌신하는 선교사가 나오면 전적으로 지원할 계획입니다.
그런데 제가 LA에 와서 깜짝 놀란 것은 LA 한인사회가 너무 뒤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미군부대가 있는 오산시나 동두천시 정도라고 생각하면 딱 맞을 거예요. 제가 있던 텍사스는 미국사회였습니다. 영어예배도 인도했구요. 그래서 미국사회의 장단점을 어느 정도는 알아요. 그런데 온통 한국말로 통하는 LA 한인사회는 미국사회를 너무 모르고 알 엄두도 못내요. 접촉 자체가 없는 것이죠. 저는 오히료 시민권 갖기 운동을 펴고 있습니다. 미국은 연합국이고 한국인들에게 투표권이 생기면 자연히 한국인들의 권리는 신장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 가족은 아내(최희선 씨)와 아들 둘입니다. 아내는 뿌리 깊은 신앙집안에서 자랐어요.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LA에 사시구요. 장인어른은 평생 영화인으로 사시는 분이세요. 아내와는 주위 분의 소개로 만나 신학교 졸업하고 3주 후에 결혼했어요. 교회에서 첫 설교를 하고 월요일 날 저녁에 교인들을 모시고 결혼예배를 참 아름답게 드렸어요. 정말 작게요. 그날부터 신혼여행도 없이 개척교회를 시작한 겁니다. 큰 아이는 철호(9세), 작은 아이는 영호(6세)예요. 영어 이름은 데이빗과 죠슈아구요. 제 부모님은 서울에 계세요. 어머님은 불교신자이셨는데 제가 목사되고 나서 믿으셨죠. 지금 아버님은 안수집사(갈보리침례교회, 장영출목사 시무)시구요. 두 분이 새신자반을 맡아서 얼마나 신실하게 섬기시는지 몰라요. 동생들도 잘 믿구요.
제 인생의 황금기에 저를 부르셔서 훈련시키시고 아낌없이 쓰신 하나님꼐 너무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