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자대전》을 보다보면 송시열이 성리학을 절대화한 수구꼴통, 반개혁적 인물이라는 대중의 생각과는 다른 멘트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아내에게 깎듯이 존댓말을 썼으며 출근, 외출과 집에 왔을 때는 아내에게 서로 맞절로 큰절을 했다 한다.
여성의 교육을 중요시하고 당연하게 생각하여 여자도 사람답게 살려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통해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야 된다며 여성 교육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가르쳐야 되는 학문은 역시 주자학이었다.
1671년 송시열이 맏 손자 며느리인 박씨에게 써 준 글과 시집간 딸에게 한글로 손수 지어준 계녀서도 있다. 그는 시집간 딸들과 손녀딸들에게도 계녀서라는 것을 손수 써서 보냈으며, 읽기 쉬우라고 한글로 써서 보냈다. 당시는 한글이라 하면 언문이라며 폄하하던 분위기가 남아있던 시대였다. 며느리와 손자며느리, 조카며느리 등에게도 이러한 계녀서를 써서 보냈다.
내수사를 혁파하기를 주장하고, 노비 제도를 노비 종모법으로 완화(적어도 당시엔 완화다.)를 주장했다. 송시열의 이미지로 흔히 알려진 "대동법 반대"도 초기엔 스승(김집)의 영향으로 반대하던 입장이었지만 실질적 효과를 보고는 적극 찬성하게 되었다. 더구나 김집이나 다른 관료들의 반대론도 지주층의 이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기상조론이나 징세액이 오히려 늘 수가 있다거나, 쌀이 잘 나지 않는 지역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즉, 대동법의 이점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주들의 이익을 위해 격렬히 반대한게 아니다. 개인적으로도 김집은 김육이랑 잘~ 교류하는 사이였다. 다만 대동법에 따른 의견 갈등으로 앙금이 생기긴 했다.
또한 관리의 녹봉을 금전으로 지급하자는 의견도 앞장서서 찬성했으며, 관리의 녹봉이 지나치게 적은 것이 수탈의 원인이 된다는 말을 남긴 적도 있다. 게다가 호포제를 주장, 사실상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자고까지 주장하였다.
송시열의 호포제 시행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본래는 찬성론자는 아니었으나 다만 자신의 라이벌(?) 윤휴가 호포법을 적극 관철하자 이에 영향을 받아선지, 그 이후 자신의 제자 '김수항'을 필두로 하여 호포법 실시를 관철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족들의 끊임없는 반발로 실현시키지 못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유계와 송시열 등이 사족출포론을 처음으로 논의, 제안한 것은 효종 10년 무렵이었고, 김수항과 박세당, 송시열, 유계 등이 호포론 등 군역제 대변통론을 제시했으나 논의 미숙과 대사헌 강백년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한 것 또한 이 무렵이었다.
이 당시 윤휴는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상태였고,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송시열이나 유계의 호포론 논의에 비해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그의 호포론 논의는 숙종 초년에 출사한 그가 북벌론을 적극적으로 부르짖으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건의 전후 관계를 통해 라이벌 의식에 기인, 자극을 받았다는 식의 설명이 이루어진다면 도리어 윤휴가 송시열과 유계 등 서인계 산림에게 자극을 받았다는 식의 설명이 더 적합할 것이다.#관련글 이 글에서 함께 제시되고 있는 이이의 입장 변화에 대한 글을 대변통과 소변통 문제를 이해관계 문제 내지는 의지의 약함 문제로 환원하고 마는 것이 얼마나 섣부른 판단인지를 잘 보여준다.이래서 인생이고 정치고 결국엔 이미지인 듯. 진보주의자 이미지가 강한 이이가 입장을 바꾸면 시대의 한계로 돌려지지만 수구꼴통 이미지가 강한 송시열 등이 입장을 바꾸면 그네들 자신의 의지 문제로 환원되고 마니.
또한 청나라를 본받아 수차(물레방아)를 활성화 하자는 말도 있었고, 일본과의 무역을 활발히 하여 포를 많이 구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무과의 궁술 시험을 포병 시험으로 바꾸자고 주장했으니, 이완보다도 시대를 앞서 본 셈.
심지어 "서북 지방의 여자들은 매우 건강하고 민첩하니, 이들에게 포를 쏘는 연습을 시켜... 성을 지키게 한다면 남자 병사만 못지 않을 것이다"라며 여군 창설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덧붙혀 당시 성리학적 차별 논리에 의해 남녀차별이 극심했던 시기에서 보수적인 학자 이미지와 달리 여성 권리에 누구보다도 우호적인 시선을 가졌다는 점은 뜻밖. 이에 대해 기존 이미지와 달라보이는 이 색다른 정책들 중 자신이 주도해 실현한 건 정작 하나도 없으며 위에 열거된 내용도 대개가 경신환국 이후 복귀하면서 내놓은 상소에 나오는 내용들. 그리고 현실적이냐는 측면에선 적잖이 괴리감이 있다는 것. 학자 출신이자 원론주의적인 사상가로서의 한계 또한 있다 볼 수 있다는 비판도 있으나, 17세기 조선의 사회경제적 현실과 송시열의 내수외양론을 드는 반론도 있다.
당시 조선은 전염병과 기근으로 4명 중 1명이 죽어나가는 시절이 있을만큼 사회경제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정부와 지식인 등 실제 정치 영역에서 지배계층의 역할은 세금 제도를 개혁하거나 적극적인 진휼을 통해 백성의 삶을 구제해 주는 영역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즉 다양한 분야에 대해 입론이 있었다고 한들, 그것을 모두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운 일이었다는 이야기. 이런 맥락에서 송시열은 '외양', 즉 북벌의 전제로서의 '내수', 그리고 그 내수의 전제로서의 '정심'을 강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애초에 이런 현실에서 당장 북벌을 실행에 옮기자고 주장하는 게 이상하지 또 수차 도입이나 포수 및 여군 양성 등의 주장을 학자 내지는 사상가라는 지위에 기인한다 하여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만다면, 우리는 어째서 그와 유사한 주장을 제기한 북학파 실학자들의 논의를 '실학'으로 떠받들고 있는가? 성리학자이기에 이러하다, 실학자이기에 이러하다는 식의 설명은 사실과도 잘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공평성에 있어서도 문제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또 그는 스스로를 벌레라고 자학하면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신은 듣건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기한(祁寒)과 서우(暑雨)를 무릅쓰고 농부들이 농사지은 곡식을 내가 얻어 먹고 있는데, 이처럼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니 그야말로 이 천지간에 하나의 좀벌레라 하겠다.’ 하였다 합니다. 신처럼 쓸모없는 자가 천지 가운데 헛되이 살면서 한 가지도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 농민이 생산한 곡식을 먹으니, 이미 좀벌레 중에서도 더욱 심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성리학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완강하고 교조적이었다. 다만 본래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일갈했던 당시 송시열이 문제시했던 것은 윤휴의『중용장구』에 대한 해석 그 자체였다기 보다는 주자라는-그가 공자의 도통을 이은 것으로 여기고 칭송해 마지않는-인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실제로 윤휴는 주자를 유교의 도통(道統)을 이은 성인이라기 보다는 학인의 한 사람으로 간주했고, 이는 당시 조선의 현실을 남송의 그것에 겹쳐보고 있던 송시열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오활(迂闊)한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관련글] 동시에 이이, 김육으로 내려오는 제도 개혁문제에도 관심이 많았고 위에서 보듯 선진적인 주장을 한 점도 많았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성리학에 치우친 학문적 경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송시열을 수구세력의 대표주자이자 개혁의 반대자로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