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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고구려
임진왜란의 전문 사학자 한명기 교수의 네 번째 마지막 강의가 있는 날이다.
지난번 시간에 밀려 하지 못한 [명군 참전의 사회적 영향과 문화적 영향]부터 강의가 시작되었다.
0 명군 참전의 사회적 영향
* 민폐 극심: 쇄미록(瑣尾錄)과 고대일록(孤臺日錄)의 기록,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
* 군기(軍紀) 이완으로 인한 민폐
* 지공(支供) 부담으로 인한 민폐 ← 고상안(高尙顔)의 절규
*고상안: 문집으로 1898년에 간행한 목판본 6권 3책이 전하는데, 그 가운데 행장(行狀)에 보면 농사에 밝고
문장이 능하며, 농군을 가르치고 농사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문집인 《태촌집》에 〈농가월령〉이라는 기록을 볼 수 있음과 행장에 적힌 치사 후의 농사와 관련된
생활을 볼 때, 〈농가월령가〉는 고상안과 관련이 깊었으리라는 짐작에서 학계에서는 현전하는
〈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를 그의 소작이라고도 본다.
그의 문집에는 총화(叢話)·여화(餘話)에 해당되는 〈효빈잡기 効嚬雜記〉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에게 올린 팔책(八策)과 유합(類合), 《해동운부군옥 海東韻府群玉》에
대한 기록과 풍속·전설에 관한 기록 등이 전하여 일반문집에 비해 이색적이다.
명군들의 군량미를 보급하느라 군인이나 의병들에게 군량을 보급하기가 힘들고 심지어
명군이 호조참판을 곤장으로 때리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 조선 군신(君臣)들의 무관심과 ‘충맹(蟲氓)' 관념
명군이 평양 부근의 농가에 들어가 소를 훔치는 사건이 생겼는데, 관과에 고발하자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는데, 그 까짓 소 한 마리로.. 운운” 하여 민이 하소연 할 때가 없다.
* 접촉의 정규화와 장기화: 결혼, 동거, 휼양(恤養)
* 조선인 가운데 ‘고가호위자(孤假虎威者)’ 출현
* 조선인의 유출과 명군 도망병의 속출 cf. 가정(家丁)의 존재
혼혈아가 생기고 명군 귀국 시엔 부녀자들이 남장해서 따라가기도 한다.
명군들 중에는 명으로 돌아가도 죽는 범죄자라든가, 명군 진영에 죄진 자들은 도망하여 조선에 살기를 희망한다.
조선도 남겨두면 유리한 ‘무기제작 기술을 가진 자’ ‘점치는 자’ 들은 남게 한다.
0 명군 참전의 문화적 영향
* 장기 주둔과 양국인의 접촉은 문화 전파와 접변(接變)의 계기
* 명군 지휘관의 고문관 역할 자임
* 송응창(宋應昌) 등 양명학자(陽明學者)들의 래조(來朝) → 주자학(朱子學) 일변도 학풍(學風) 비판
* 조선의 문약(文弱) 풍조에 대한 비난 → 상무관념(尙武觀念) 확대 계기
* 의약(醫藥), 풍수(風水), 점술가(占術家) 들의 영향력
* 관왕묘(關王廟)와 관제(關帝) 신앙의 유입
* 조선선후사의(朝鮮善後事誼)를 내세운 조선개조계획
간섭 내용으로는 상무(尙武)정신을 강조하며, 주자학에 몰두 하지 말라, 노비 해방과 인제 등용등을 강조하며 고문 역활함
5. 임진왜란이 안팎에 남긴 영향
1) 임진왜란과 조선
0 정치적 영향
* 선조(宣祖) 등 지배층의 권위 상실, 정치적 위기
* 대일 적개심 확산: ‘만세불공지수(萬世不共之讐)’ 이중적인 대일인식(對日認識)
같이 하늘을 처다 볼 수 없는 원수이면서 두려움과 선망의 대상으로 된다.
* 明나라에 대한 정신적 부채의식의 심화: ‘재조지은(再造之恩), 생사당(生祠堂)기
0 경제적 영향
* 국토의 황폐화, 수세(收稅) 격감, 노동력 격감/ cf. 두레
* 양반들 경제 기반의 변동
설화에 이여송이 조선 산천의 혈(血)에 말뚝 박았다.
왜란 직후부터 마을 공동모범조직-농악-이 나타남.
전쟁으로 토지 문서 등이 없어져서 양반이 퇴락하고 개개인의 행, 불행이 발생한다.
0 사회문화적 영향
* 민중의 고난, 인구 격감(전사, 부상, 질병, 포로)
* 의약(醫藥) 발달의 역설적 계기 → [동의보감(東醫寶鑑)] 등 편찬
* 민심 흉흉, 질서 이완, [정감록(鄭鑑錄)] 등 새로운 사조(思潮) 대두, 말세관(末世觀) 횡행
정감록의 등장-계룡산과 가야산, 봉화 춘양등은 전쟁 피해가 거의 없는 지역으로 吉地
정감록은 하나의 정치적 예언서임과 동시에 밝은 미래를 희망하는 기대의 표현이었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세계! 그리하여 차별과 부조리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정감록은 현실을 부정했지만, 현실로부터 도망가지 않았던 민중들의 책이었다.
영주시 풍기읍, 이곳은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 중 한 곳이다.
이곳에는 오직 정감록만 믿전쟁으로 토지 문서 등이 없어져서 양반이 퇴락하고 개개인의 행, 불행이
조선의 운명이 다하고 정씨가 새 도읍지를 세울 것’, 다시 말해 이씨왕조가 운명을 다하고 새로운
정씨왕조가 생겨난다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 정감록! 이 예언서는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크게 성행하였다.
계룡산 연천봉 정상 바위에는 ‘方百馬角 口或禾生’ 이 새겨져 있다. 이 글자를 풀이하면 ‘四百八二 國移’가
되는데 482(년) 국이, 즉 482년 ‘나라가 바뀐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글자들은 조선의 멸망을 예언하는 참언으로 여겨졌고 이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 대외인식의 변화 확대 [최척전(崔陟傳)의 사례
최척전〉 〈기우록 奇遇錄〉이라고도 한다. 16, 17세기 동아시아 전란중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하여 가족이산과 재회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임진왜란 때 남원에 사는 최척이 옥영과 약혼한 후에
의병으로 징집되어 나간다. 최척은 이웃 부자가 옥영을 탐낸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중병이 들어 귀가한
뒤 옥영과 혼인하고 몽석을 낳는다. 이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최척은 중국으로 건너가고 옥영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며, 나머지 가족은 집에 남는다. 몇 년 후 최척은 안남으로 장사하러 다니다가 왜인을 따라
장사하러 다니던 옥영과 기적적으로 상봉한다. 두 사람은 중원에 돌아와 살며 몽선을 낳고,
몽선이 성장하자 진위경의 딸 홍도를 며느리로 맞는다. 청군이 침입하여 명군에 종군한 최척은 조선에서
구원병으로 출전한 몽석을 수용소에서 만나 귀국하는 도중에 우연히 진위경도 만나 함께 돌아온다.
옥영도 몽선·홍도와 함께 뱃길로 구사일생으로 귀국하여 온 가족이 상봉한 뒤 행복한 삶을 누린다.
〈최척전〉은 옥영과 최척의 만남과 이별, 홍도와 그 아버지의 이별과 만남을 중심으로 한 내용전개를 통해
당시의 전란이 초래한 이산가족의 고통과 강한 가족애에 의한 재회라는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사건전개의 주요요인으로 불교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대체로 사실주의적 표현으로 당시의
우리나라 사회·역사의 본질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 17세기 소설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0 중국 엄청난 재정 지출
* 700만 냥~1200만 냥 소모, 만역삼대정(萬曆三大征) → 가파(加派)의 배경
* 만주(滿洲) 누루하치에 대한 통제 이완 → 만주사관(滿洲史觀)의 배경
淸의 누루하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은인이다.
0 일본 군사강국으로 등장, ‘무위(武威)의 국‘, “화려한 문화적 외출’
* 유학자(儒學者), 도공(陶工), 서적(書籍) 등의 유출과 문화 발전
6. 임진왜란이 이후의 동아시아
1) 朝日 국교의 재개 배경
0 필사적인 대마도
* 대마도는 1598년 말부터 사절 파견
* 1599년 카케하시 시치다유(梯七太夫, 1600년 유타니 야스케(柚谷彌介) 귀환 X
* 1600년 2월,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이 책임 없다고 강조, 피노인(被擄人) 160명 소환, 사신 파견 요청
* 1600년 4월, 사자(使者) 송환 요구, 계속 회답하지 않으면 재침(再侵) 협박 ← 일본의 꼼수 cf. 6월 21일 준부(駿府)에서 덕천가강(德川家康) 면담
* 포로는 모두 1,418명을 쇄환 ← 일본 지방세력의 비협조, 세월의 흐름
0 조선의 차중지계(借重之計)
* 1600년 5월, 조선 최초 회담: “왜란 이후 明이 결정권“ 운운
* 명은 당시 朝日외교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
* 1600년 8월, 명군 완전 철수
0 복교(復交)가 절실한 덕천막부(德川幕府)
* 1600년 도꾸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德川家康) 승리 → 집권 기반 마련(-범체체제(藩體體制) 출범계기)
* 인국(隣國) 조선과의 우호 회복 필요성, 조선과의 국교를 매개로 明日수교의 지향
* 조선과 명의 보복을 막기 위한 차원, 인국을 통해 덕천정권의 정당성 과시
2) 엄혹한 조건, 내키지 않는 교섭
0 조선의 심중한 입장
* 왜란 직후 조선의 대일 감정: ‘적개심+두려움’
1592년 7월 일본인이 선릉을 파헤친 문제는 용서 못할 일.
* 대마도와 막부(幕府) 분리 대응: 대마도 기미(羈靡: 회유책)하여 적정을 살피고 국력 증진 도모
온다면 막지 말고 간다면 막지 말라는 말의 고뿌레
* 1602년 2월, 전계신(全繼信) 등 대마도 파견 → ‘재침(再侵)’과 강화 요청의 진정성 탐색
* 1603년 10월, 융미(蕯靡) 포로 金光 귀환: 이에야스의 강화의지와 재침 가능성 보고
* 1604년 6월, 사명단(유정:惟政)과 손문욱(孫文稶) 탐적사(探敵使) 파견: “재침 시 명군과 일본 협공” 국서 소지
* 유정은 1605년 3월 경도(京都)에서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만남. 4원에 피로인 3천여 명 인솔 귀국
3)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파견과 국요 재개
0 1606년 조선이 제시한 조건과 대마도의 응수
* 강화 요청 서계(書啓)를 먼저 보내고 범릉적(犯陵賊) 송환,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을 일본 국왕으로 칭할 것
* 풍신수길(豊臣秀吉)을 동아시아 질서 파괴자 인식,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책봉 질서 속으로 편입 시도
* 1606년 11월 대마도는 국서와 범릉적(犯陵賊) 송환 ← 위서(僞書)와 위자(僞者) (각각 37세. 27세)
* 조선은 알면서도 1607년 1월 강화를 위한 사절단 파견 →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 1월 12일 서울 출발, 5월 24일 에도(東京) 도착, 7월 17일 귀환
* 여우길(呂祐吉), 정호관(丁好寬) 등 사절단은 1607년 6월 덕천수충(德川秀忠)에게 국서 봉행
← 일본의 꼼수 cf. 6월 21일 준부(駿府)에서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면담
* 포로는 보두 1,418명을 쇄환 ← 일본 지방세력의 비협조, 세월의 흐름
0 복배수적(腹背受敵)의 나라 조선의 고민
* 귀국 후 덕천수충(德川秀忠대)의 국서에 ‘일본국왕’ 호칭 없는 것, ‘조선국왕 전하께 배복(拜復)’
* ‘폐방(弊邦)의 관유(寬宥)한 명의(命意도’ 등등의 표현이 문제가 됨
* 조선은 일단 대일관계(對日關係) 안정시켜 전쟁의 후유증을 추슬러야 할 시기 ← 만주(滿洲)에서 세력이 커지던 누루하치(奴兒哈赤)의 침략에 대비
* 일본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통해 내외정(內外政)의 위신 제고
* 대마도(對馬島)는 무역 재개의 기회 획득 (1609년 기유조약(己酉條約) 체결)
7. “전쟁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1) 누루하치의 굴기
0 건주좌위(建州左衛) 출신, 아이신교로(愛新覺羅), 명장(明將) 이성양(李成梁: 이여송의 父)의 가신
0 1583년 거병, 1589년 건주여진(建州女眞) 통일
0 山蔘·진주·모피의 물류 확보하여 막대한 이익 → 군사력 기반
0 1599년 만주어(滿洲語) 창제, 1615년 팔기제(八旗制), 1616년 대금(大金), 1618년 明 무순(撫順) 점령
2) 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시도와 조선
0 순이(順夷: 순종 오랑캐)를 ‘재조지은(再造之恩)’ 내세워 활용하라.
0 광해군의 고뇌(1619)와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0 모문룡(毛文龍)과 ‘인계 철선’
0 정묘호란(丁卯胡亂)(1627)과 병자호란(丙子胡亂)(1636)
한명기 교수의 강의를 책으로 만들어 선물한다.
도올 선생이 직접 키우는 암탉 '봉혜'의 새끼가 벌써 어미가 되어 낳은 첫 계란들을 모아
한 교수의 열강 수고에 보답한다
* “선택의 기로를 피하고 약체성을 극복하자“
명대 초기 명군 기마대의 모습. 명은 초기부터 몽골 등 북방 민족을 공격하거나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수많은 기마병을 유지했다. 벽제전투에 참전했던 이여송 휘하의 병력 또한 대부분 기마대였다. 이여송은 기마병만으로도 충분히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막상 벽제전투에서는 조총과 장검을 가진 일본군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97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발행, <중국강역의 변천>에서 전재 |
첫댓글 일본군은 얼레빗,명군은 참빗 교과서에 왜 소개되지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