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필담 호스티스 01
목차
서문 6p
제1장 "신에게 귀를 빼앗긴" 딸 17
1. 청력을 잃은 나 18.
2. 농아학교와 장애인으로서의 생활 24
3. "일어나!" 27
4. 학원의 학습, 서예의 즐거움 29.
5. 나는 외계인? 34
[칼럼] 소꿉친구 야와타 미유키 38
6. 초등학교 입학 40
7. '들림의 교실' 44
제2장 저는 불량한가요!? 53
1. 중학교 진학 54
2. 죽이겠다! 어머니가 칼을 들고... 53
3. 학교 제1의 문제아 67
[칼럼] 사이토 리에의 어머니 72
제3장 일하는 기쁨 77
1. 재미없었던 고등학교 생활 78
2. 도둑질과 아르바이트 80
[칼럼] 옷가게 전 오너 오오다 히로키씨 88
제4장 필담 호스티스 탄생 93
1. 고등학교 중퇴 -> 물장사 데뷔 94
2. 왕언니 호스티스와의 결전! 101
3. 고객이 스토카로 변신 106
4. 클럽 마담이 유인한 강간의 함정 109
5. 극악 마담의 질투? 114
6. 물장사와 나 125
7. A 선생님과의 재회 131
[칼럼] '리온' 마담 사토 준코 씨 138
[칼럼] 사이토 리에의 부모님 142
제5장 나의 비장 필담술 145
1. 대화의 시작 146
2. 칭찬받는 칭찬법 148
3. 나를 2차에 데려가줘 151
4. 지루해 보이는 고객에 대한 접근법 155
5. 때로는 모르는 척하는 것도 158
6. 피곤한 손님에게는 160.
7. 사랑받는 응석, 미움받는 응석 162
8. 유혹을 말을 들었을 때는 166.
제6장 필담 호스티스 도쿄로 상경하다 173.
1. 동경하던 도쿄 OL 생활 174
2. 청각장애인으로서의 도쿄 생활 177
[칼럼] 사이토 리에의 부모 182
3. 필담 호스티스의 긴자 데뷔 184
[칼럼] '르, 자르당' 오너 마담 모치즈키 아케미씨 188
4. 긴자 생활의 어려움 190
5, 긴자의 손님 195
6. 긴자의 호스티스 197
제7장 [필담 호스티스] 긴자 접객 체험 실화 8
-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의 언어 꽃다발을] - 201
[실화 1] 당신 출세 싸움에서 졌어? 202
[실화 2] 로버트 드 니로류로 건방진 파견 사원을 지도! 204
[실화 3] 재산을 잃으면 인생은 끝? 206
[실화 4] '사랑'보다 강한 것은 없다 208
[실화 5] 니트한 딸의 애인을 격퇴! 211
[실화 6] 'ONE PIECE'의 루후이에게 배우다 213
[실화 7] '행복의 도중' 215
[실화 8] 꿈의 연속 217
제8장 청각장애인의 꿈 221
1. 꿈을 찾은 필담 호스티스 222.
2. 필담이 이끈 꿈의 가게 228
끝으로. 234.
*斉藤里恵(さいとうりえ) 1984.2.3 生
日本青森県青森市出身
<筆談 ホステス> -2009年ベストセラー
-2015年東京都北区 区議員当選
● 필담 호스티스 02
<서문>
"그 아르마니 넥타이 멋져요!" 손님이 "새로운 블랜드의 넥타이를 매고 계셨을 때, 이런 칭찬을 하는 것은 긴자의 호스티스로서는 이류 클래스입니다. "그 아르마니 넥타이 잘 어울리고 너무 멋지네요." 넥타이를 칭찬할 뿐만 아니라 매고 있는 본인도 칭찬하도록 하지 않으면 손님이 기뻐할 수 없습니다.
이런 당연한 칭찬 하나라도 뉘앙스 하나로 매출에 큰 차이가 나는 것이 호스티스의 세계입니다. 하물며 제가 일하는 긴자는 일본에서도 가장 이름난 밤의 무대입니다. 여자에게는 꽃길이라고도 불리는 화려한 무대이지만, 그 경쟁은 치열합니다.
그런 격렬한 밤의 긴자에서 저는 현재 일하고 있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와, 긴자에서 일류의 호스티스를 목표로 노력하고 있는 것은, 다른 여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제가 다른 여자들과 다른 것은 귀가 전혀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입니다.
장애를 가진 제가 고객과 소통하는 수단은 필담입니다. 고객과 메모를 주고 받으며 대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필담 대화로 손님을 접객하여 긴자의 밤을 즐기게 하고 있습니다. 평소, 제가 손님과 어떤 필담을 하고 있는지 조금 소개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W씨는 어느 사립대학 교수를 하시는데, TV나 잡지에도 인기가 많은 문화인입니다. 긴자에 술 마시러 오시는 것도 폐점 직전이거나, 모처럼 이른 시간에 오셔도 조금만 마시고 돌아가시는 등 항상 시간에 쫓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항상 즐겁게 마시고 있고, 그런 생활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게에 오신 W씨는 조금 상황이 이상했습니다. "W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어제 출연하신 TV에서도 핸섬했어요." 그렇게 쓴 저의 메모에 대한 대답은 딱 한마디뿐이었습니다.
"바빠서" 라고. 피곤해 하시는 것 같아 저는 조금 연하게 미즈와리를 만들었습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라고 쓴 후 제가 미소를 짓자 W선생님은 마음속에 있던 울분이 터져 나온 것 같았습니다. "뭐, 바쁜 건 늘 하는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요즘 아내가 '당신은 너무 바빠서 나를 잊고 있다. 이혼하고 싶다' 고 말하고 있어" "사모님과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어요"
W선생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미즈와리를 마시고 있습니다. "차라리 이혼하고 리에와 재혼해 버릴까?" 라는 메모를 쓰면서도 W선생님의 표정은 침울한 채입니다. 이것은 빨리 부인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바쁘다는 뜻의 忙자는 마음을 잃는다고 쓰죠. 잊는다는 忘자도 마음을 잃는다고 쓰죠. 차분하게 사모님과 마음을 되찾는 여행이라도 가시는 게 어떨까요?" W선생님은 건네드린 메모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고개를 들어 빙긋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미안.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와 이야기해 볼 거야.” 그 후 한동안 W선생님은 가게에 오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TV에서도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궁금해 하고 있을 무렵, W선생님이 다시 가게에 오셨습니다.
"TV 정규 프로그램은 일단 하차했어. 그래서 대학 방학 때 아내와 오랜만에 천천히 여행을 다녀왔어.” 완전히 원기를 되찾은 W선생님은 그날은 느긋하게 술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기분은 귀가 들리지 않는 호스티스에게도 느껴졌으며, 때로는 필담이 보통 대화 이상으로 상대의 마음에 울리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필담술의 ABC의 A는 상대의 상황을 살핀 후 말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차분히 글자를 눈으로 읽을 수 있는 필담은 더욱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이것은 긴자 호스티스의 기본이기도 합니다.
아오모리에서 밤의 긴자로 온 지 벌써 2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저에게 긴자의 호스티스가 가능할지 불안했습니다. 저를 받아 주신 클럽도 입점 당시에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에게 호스티스가 가능할까" 당연히 누구나 품는 의심입니다. 지금도 처음 오시는 손님께서는 놀라움이나 호기심의 눈으로 보시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여러분의 걱정을 물리치고 지금도 긴자의 호스티스로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는 접객의 무기인 필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필담으로 대화가 가능한 거야?" 지금까지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YES!' 입니다. 생활 속에서 저는 제 자신의 필담술을 연마함으로써 밤의 긴자를 살아왔습니다. 이번에 이 책을 집필함에 있어서 그 모든 것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제 귀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은 태어나 불과 1년 10개월 무렵이었습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저에게는 그 이전의 소리가 있는 세계의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15세 때 귀속에 전극을 박아 청각신경을 전기적으로 자극해 청각을 되찾는 인공와우 수술을 받았지만 재활치료 과정에서 심한 두통에 시달려 결국 소리를 되찾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저 같은 난청인은 모두 수화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겠지요. 최근에는 난청인을 소재로 한 드라마 등도 많이 제작되어 그 주인공들은 모두 유창하게 수화를 구사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화를 거의 할 수 없는 난청인이 많은 것도 현실입니다.
사실 저도 수화는 초보자 수준이고 어려운 대화는 물론이고 일상 대화조차 거의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제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주된 방법이 이른바 필담입니다. 필담은 당연한 것이지만 대화를 일일이 써야 하기 때문에 귀가 들리는 분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귀찮은 일로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글자만 읽고 쓸 수 있다면 특별한 훈련도 필요 없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비장애인, 일본어, 혹은 다른 언어끼리도 바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쉽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필담의 단점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장점으로 활용하면 호스티스라는 일에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 자신이 일을 시작했을 처음에는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태어나 자란 아오모리에서 호스티스 경력을 쌓고, 지금은 밤의 긴자에서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의 출판 권유를 받았을 때는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장애를 팔고 싶지 않다" 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당신이 책을 씀으로써 비슷한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 격려가 될 수도 있다. 한 사람이라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책을 내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이 말에 공감하여 이 책을 집필할 각오를 했습니다.
그런 제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필수품"은 마음에 드는 펜과 손바닥 크기의 메모장입니다. 펜은 어떤 분의 유품으로 받은 오래된 까르띠에와 몽블랑 만년필입니다.
메모장은 프랑스의 전통 있는 제조업체 로디아의 메모패드에 컬러차트라는 제조사의 부드러운 가죽 커버를 씌운 것으로 이것이 저한테 제일 잘 어울리는 거예요. 이 두 파트너와 함께 저의 필담 호스티스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저의 난청인으로서의 삶과 생각, 가족의 일, 앞으로의 꿈 등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고객님들이 기뻐하시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시기 위해 청각장애인인 제가 어떻게 필담할 때 말을 꺼내며 평소 어떤 접객을 하는지 그 비밀의 모든 것도 함께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장래의 꿈을 향해 지금 저는 전속력으로 밤의 긴자 거리를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긴자의 규칙에는 어긋나지만, 가능한 한 빨리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2개의 가게에서 특별히 투잡을 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살자" 이런 제 마음이 이 책을 읽어주시는 여러분께 조금이나마 전달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필담 부분의 손글씨는 모든 페이지 모두 본인의 친필입니다)
● 필담 호스티스 03
제1장 "신에게 귀를 빼앗긴" 딸
1. 청력을 잃은 나.
먼저 청력을 잃게 된 경위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1984년 차가운 눈이 세차게 내리는 2월 아오모리 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작은 단독주택에 부모님 외에 두 살 위의 오빠와 함께 살았습니다. 현지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아버지는 성실하고 고집이 센 사람을 뜻하는 아오모리의 사투리 '좃빠리(대나무)'라는 말이 딱 맞는 완고한 사람입니다.
간호사인 어머니는 시원시원하고 야무진 사람이며, 항상 나를 지켜주는 착한 오빠 등 극히 일반적인 가정입니다. 그런 평범한 가족에게 사건이 일어난 것은 제가 태어난지 1년 10개월 때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저는 수막염이라는 병에 걸려 고열이 나서 응급 입원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때의 이야기를 직접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적은 없습니다. "딸이 병에 걸린 것은 내 탓" 이라고 어머니가 계속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어렸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으며 어쩌면 그 때의 일을 모르게 하려고 들을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10대 때 어떤 사람이 자세한 상황을 알려 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진실과는 다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충 이런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저는 어머니가 목욕을 시키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잠깐 눈을 팔았다고 합니다. 눈을 팔 정도라면 대야인가 뭔가로 목욕을 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아주 짧은 시간 저는 혼자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저를 발견했을 때는 저는 입에서 거품을 뿜어내는 등 상황이 이상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입원을 했습니다만, 그로부터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병명은 수막염이었습니다. 수막염은 대장균이나 독감균 등의 바이러스가 체내에 들어와 발열이나 두통, 의식장애를 일으키는 질병입니다.
병원의 필사적인 치료와 부모님의 지극한 간병 덕분에 어떻게든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이나 가족은 분명 안심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질병으로 고열이 난 후유증 때문에 제 청력은 완전히 상실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딸의 청력이 상실되었다고 의사로부터 들었을 때부터 현재까지 계속 어머니는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리에가 아프기 전에 온천에 데려갔어요. 그때 리에가 감기에 걸린 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은 귀가 멀게 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리에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끝없이 후회하고 있어요. 할 수만 있다면 제가 대신하고 싶어요"
제 장애에 대해 물으면 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물론 병에 걸린 것은 어머니 잘못이 아닙니다. 저는 물에 빠진 것도 아니고, 고열 상태에서 무리하게 목욕을 한 것도 아닙니다. 우연히 그 타이밍에 병이 발견되었을 뿐. 단지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저 자신도 어머니 때문에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는 한 순간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와는 사춘기 무렵에 크게 싸움을 반복했습니다. "잔소리 듣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결코 사이가 좋은 모녀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어머니 덕분에, 부모님 덕분에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1년 10개월 만에 청력을 잃어 저에게는 병에 대한 기억도 소리에 대한 기억도 일체 없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현재의 이 상태, 귀가 들리지 않는 것, 고요한 소리가 없는 세계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귀가 들리지 않아 불편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필담 호스티스라고 불리게 될 무렵까지는...。
● 필담 호스티스 04
2. 농아학교와 장애인으로서의 생활
저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쭉 소꿉친구이자 친한 친구인 미유키가 있습니다. 소꿉친구라기보다는 피로 연결되지 않은 자매, 거의 가족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와는 동갑이며 집도 바로 이웃이고 노는 것도 배우러 다니는 것도 무엇을 해도 함께였습니다.
저는 자신만 귀가 들리지 않고 함께 놀고 있는 미유키나 오빠에게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는 상황을 어렸을 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자 점점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만 미유키나 오빠가 가지 않는 농아학교(현재의 특수학교)의 유치부에 다니게 된 것입니다.
농아학교는 난청인들이 장애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주체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습관을 길러주는 곳입니다. 연령에 따라 국어나 산수 등의 일반적인 학력도 익혀 나갑니다. 단 4명밖에 없는 반 친구들과 함께 원활하게 일상생활을 하기 위한 노하우와 장애인으로서 자립하여 살아가는 힘을 배우는 것입니다.
농아학교에서는 수화를 가르치지는 않았어요. 당시의 농아학교에서는 기본적으로 난청인에게 수화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교육 방침으로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그 대신 문자와 말을 이해하도록 발성을 배우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동급생과 재회해도 현재 목소리를 내고 있는 친구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알아듣기 쉬운 발성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발성을 하다 보면 사정을 모르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놀라는 모습으로 우리를 보는 거죠. 그렇게 보시는 분에게 악의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보는 것은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합니다만, 역시 부끄럽게 생각하는 청각 장애인도 많습니다.
스스로 수화를 배워 대화를 하고 있는 당시의 친구도 있습니다. 한편, 저처럼 수화를 배우지 않고 주로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청각장애인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20살 정도 무렵, 어떤 분의 소개로 요약필기사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의 강습회를 도와드린 적이 있습니다. 요약필기사라는 것은 저와 같은 난청인들이 내뱉는 말을 알아듣고 그것을 간결하게 정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써서 알려주는 자원봉사자분들입니다. 우리 난청인에게는 매우 고마운 존재입니다.
제가 도와드린 내용은 자신의 성장과 경험을 15분 정도로 정리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저의 말소리를 요약필기사 초보자 분들이 듣고 요약 필기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즉 간단히 말하면, 제 발성으로 요약 필기 연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도 제가 하는 말은 비장애인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족과의 의사소통은 어떻게든 할 수 있어도 그 이외의 분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난청인의 발성 현실입니다.
저는 농아학교에 다니면서 글자와 말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책 읽는 것을 매우 좋아하고, 이렇게 스스로 글을 쓰는 것도 힘들지 않습니다. 다만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아름다운 발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는 저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3 "일어나라"
이야기가 빗나갔지만, 농아학교와 병행해서 저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에도 다니고 있었습니다. 월요일은 농학교, 화요일은 어린이집, 수요일은 유치원 이런 식입니다. 이것은 농아로서 필요한 것을 배우게 하고 평범한 생활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는 부모의 뜻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다니는 3개 중에 제일 좋아했던 게 어린이집이었습니다. 어린이집만 낮잠 시간이 있다는 단순한 이유였어요. 그런 아주 좋아하는 낮잠시간이었지만, 어린 저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항상 아무도 저를 깨워주지 않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다른 아이들은 보육교사 선생님의 말소리에 깨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저에게는 물론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이불을 치우고 다음 준비에 착수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문득 눈을 뜨니 다른 아이들은 행동을 시작하고 있고, 이불에서 자고 있는 것은 자신뿐인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생각했어요.
"왜 선생님은 나를 깨워주지 않을까? 왜 주변 아이들은 나를 깨워주지 않을까?" 저는 귀찮은 장애인으로 방치되어 있는 것일까? 심술을 당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장애인이기 때문에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지금으로서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그런 생각을 했던 건 기억해요. "남들과 똑같이 대해줬으면 좋겠는데!" 라고. 그러나 그 말은 끝까지 전하지 못했어요.
● 필담 호스티스 05
4. 학원의 학습, 서예의 즐거움
초등학교에 올라가기 전부터 저는 정말 많은 학원을 다녔어요. 수영, 피아노, 서예, 발레, 도예교실 등 너무 많은 학원을 다니다 보니 도대체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잘 모를 정도였습니다. 친구들과 놀 시간이 없어져 버리는 것에도 불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학원에는 대개 오빠나 소꿉친구 미유키와 함께였습니다. 제가 뭔가 새로운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 미유키도 바로 그 학원을 다니는 식입니다. 피아노와 전자오르긴을 배우고 있을 때는 미유키의 어머니가 만들어 준 커플 드레스를 입고 발표회에 참가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 저에게는 피아노 연습을 해도 재미가 없었고 성과도 전혀 오르지 않았습니다. 피아노를 칠 때는 소리를 듣는 대신 마음속으로 리듬을 마추어야 하는데 잘 치고 있는지 스스로는 조금도 모르는 거죠. 결국 도중에 그만 두었으며, 그 후로는 한 번도 피아노를 치지 않았고, 건반을 만지지도 않았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나에게 피아노 따위를 배우게 해도 소용없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많을 것입니다. 겨우 리듬감이 조금 붙은 정도이기 때문에, 맞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당시의 저는 많은 연습을 귀찮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만큼 어떤 일이든 체험을 시켜주고 싶다. 그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으면 좋겠다." 그런 부모 마음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연습뿐만 아니라 부모님은 여러 곳에 저를 데려가 체험하게 해주셨습니다. 여름에는 캠핑에, 겨울에는 스키 이런 식입니다.
뭐든지 오빠나 미유키 등의 친구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무렵은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어디가 다른지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피아노 학원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가 오르지 않았지만 배워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학습도 물론 있습니다.
그중 첫째가 서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담이 대화의 중심인 저에게 바르고 예쁜 글씨를 쓴다는 것은 여러분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예는 4살부터 초등학교 3학년 정도까지 배웠습니다. 물론 배우기 시작한 계기는 부모님이 권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서예 선생님은 항상 웃는 얼글의 백발이 섞인 초로의 여성 분으로 기억합니다. 서예는 저 외에 오빠와 미유키, 그리고 미유키의 오빠도 함께 배우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선생님의 지적을 받아 다시 쓰기를 하는 오빠가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머금으며 분해 하면서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던 장면입니다. 그런 오빠를 가엽게 생각하면서 다시 쓰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저는 다시 쓰기를 지적 받게 되면 싫은 얼굴을 하거나 마구 화를 내거나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저를 보고 선생님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능숙하게 치켜세워 주시며 서예에 임하게 해주셨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 미유키와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리에가 서예는 자신이 가장 잘한다고 고집을부리고 있어서, 오빠들은 둘 다 '그럼, 리에가 최고지' 라고 리에를 칭찬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리에가 없는 곳에서는, 오빠들은 '사실은 미유키가 더 잘해' 라고 말해 주었어. 그렇게 말하니 나도 기분이 좋았어. 오빠들은 정말 우리를 잘 다루었지!"
우리 두 사람은 상냥한 오빠들의 보호를 받으며 즐겁게 서예 교실에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귀가 들리지 않는 만큼 서예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먹을 찍고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저에게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힘을 줘서 쓰면 굵고 힘찬 글씨가 되기도 하고,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떨리면서 쓰면 지렁이 같은 미덥지 않은 글씨가 되기도 하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멈추거나 튀는 등 여러 가지 기법에 신경을 쓰면서 하나의 글자를 완성하는 서예는 소리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저를 빠져들게 했습니다.
최근에는 서예를 할 기회가 없었지만 독특한 먹 냄새는 또렷이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서예학원 외에는 따로 서예 연습을 하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에는 서예 2단의 자격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지역 서예 콩쿠르에 응모를 해서 금상을 받고 신문에 실린 적도 있었습니다. 중학생 때는 주위 사람들이 쓰던 동그라미 글씨가 귀여워 보여서 모처럼 배운 올바른 아름다운 글씨 쓰는 법을 버렸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큰 수단인 글 쓰기는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서예에도 여러 가지 표현 방법이 있는 것 같아 매우 관심이 있습니다. 또 언젠가 본격적으로 서예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쓴 글씨를 통하여 그 사람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담 호스티스라고 불리게 되고 나서부터는 조금이라도 더 예쁜 글씨로 손님을 접대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아름다운 글씨를 쓰도록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 필담 호스티스 06
5 나는 "외계인"?
학원이라고 하면 또 하나 생각나는 일이 있어요. 다행히, 저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다니던 수영 교실에서는 주위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비웃음을 당하거나 욕을 먹거나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의 발음이나 억양이 비장애인의 그것과는 달리 왠지 이상하다고 웃고 있는 아이가 여러 명 있었습니다. 점차 그들은 뒤에서만이 아니라 대놓고 저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인!" "미국인!" "외계인!"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런 욕조차도 제 귀에는 닿지 않았습니다. 그 애들이 저를 보면서 웃으면서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내 얘기를 하는 건가?" 그때조차도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네 욕을 하고 있다고 가르쳐 준 것은 역시 소꿉친구 미유키었습니다. 미유키는 저를 향한 욕을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명, 저에 대한 욕을 미유키와 마찬가지로 분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빠였습니다. 저는 미유키에게 들은 것을 모두 오빠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오빠는 그애들에게 뛰어갔습니다. 욕을 다시는 하지 않도록 엄하게 다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는 등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호되게 처리해 주었습니다.
오빠나 미유키, 미유키의 오빠 덕분에 수영 교실에서 그 이상의 괴롭힘을 당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는 말투가 다른 사람과는 역시 다르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는 그냥 나름대로 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외국인!' "미국인!" "외계인!" 이라는 등 아이들로부터 그런 비웃음을 받는 수준이라면, 역시 원활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난청인 중에는 경증부터 중증까지 다양한 수준의 사람이 있습니다. 가벼운 사람 중에는 전화 대화까지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난청 수준은 안타깝게도 심각합니다. 전혀 소리는 들리지 않고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농아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말을 배우기도 전에 소리를 잃었기 때문에 나는 각 말의 올바른 발음을 모릅니다. 전에도 언급하였지만 농아학교에서 발성 공부를 했는데, 그것은 말을 외우기 위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제가 열심히 이야기를 해도 역시 가족이나 상당히 친한 친구가 아니면 제 말, 내뱉는 음성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타고난 성격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 수영 교실의 사건으로 제가 소극적으로 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이 많다는, 내가 중증 장애인이라는 현실에 처음 직면한 것입니다.
[칼럼] "10대 때는 제 앞에서는 자주 울었거든요" 소꿉친구 야와타 미유키 씨.
옆집에 사는 동갑내기 미유키 씨. 철들었을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 리에와는 친한 친구사이이다.
"리에는 어렸을 때부터 밝고 건강했어요. 강한 척하고 우는 것이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성격은 역시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렀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10대 때는 제 앞에서는 많이 울었거든요. 대체로 친구들과 싸웠다든가 누군가가 자신의 진의를 몰라준다는 등의 인간관계에서 생긴 일로 인한 경우가 많았죠"
어릴 때부터 리에의 본모습을 봐온 미유키 씨. 우는 얼굴을 보아 온 몇 안 되는 친구 중 한 명이다.
"리에는 남들과 똑같은 걸 하는 걸 어렸을 때부터 싫어했어요. 아무래도 항상 눈에 띄게 되어서 어렸을 때는 남들한테 오해받는 경우도 많았죠. 그것은 귀가 들린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과는 무관한 그녀의 성격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는 강인함도 갖고 있기 때문에 좀처럼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타입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리에의 행동을 화내거나 비난하는 것은 괜찮아도, 다른 사람이 리에에를 나쁘게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거부감이 있다고 웃는 미유키씨. 그 웃음은 마치 리에의 진짜 자매 같은 미소였다.
"나와 리에의 관계는 그때그때 어느 한쪽이 언니가 되거도 하고 동생이 되기도 하며 아주 잘 균형이 잡혀 있었습니다." 친구라기보다는 가족이라며 리에도 미유키 씨와의 관계를 그렇게 단언하고 있다.
"저와 미유키는 마음이 맞는다, 성격이 맞는다는 게 아니에요. 성격이나 사고방식은 전혀 다르니까요. 하지만 가족이니까 그렇게 맞고 안 맞고 좋고 싫음을 초월해서 계속 사귀는 게 당연한 존재죠." 리에와 미유키 씨는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될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 사이인 것이다.
● 필담 호스티스 07
6 초등학교 입학.
저와 같은 난청인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경우 크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두와 마찬가지로 일반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청각이나 시각장애인, 지적장애인, 지체장애인 등이 다니는 특수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나는 일반 학교인 초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빠나 미유키가 다니는 인근의 학교가 아니라 집에서는 조금 떨어진 초등학교입니다. 일부러 다른 학군에 다니게 된 것은 거기에 청력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교실, "들림의 교실"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들림의 교실"'이란 주요 과목인 국어와 산수만 반 친구들과는 다른 교실로 가서 "들림의 교실" 전속 선생님에게 일대일로 수업을 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즐겁고 건강하게 등교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의 나는 치마나 분홍색 등 귀여운 감을 주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항상 바지를 입고 남자아이들과 뛰어노는 아이였습니다. 말하면 사내아이 같고 상당히 개구쟁이 말괄량이 같았다고나 할까요.
그러면서도 책 읽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는 귀가 들리지 않는 저에게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책을 읽으면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라도 위험하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인간이 앞을 보고 걷지 않다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자살행위입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저는 그것이 그렇게 위험한 행위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읽고 있던 책에 열중해서 주위의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습니다. 문득 몸이 뭔가에 부딪쳤어요. "뭐지?"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들어보니까 깜짝 놀랐어요. 저는 길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딪힌 것은 정차 중인 자동차였습니다. 정차 중이라고 해도 내가 길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기 때문에 달리려 해도 달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운전석에는 성난 얼굴을 한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분명 경적을 계속 울리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들리지 않는 저는 마치 그것을 무시하듯 길 한가운데를 유연하게 걷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 라고 뭔가 저를 향해 말하고 있어요. 안 들려도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어요. 저는 미안하다고 생각하기보다 먼저 깜짝 놀라서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리고 황급히 보도까지 달려갔습니다.
운전을 하던 분은 차 유리창을 열고 뭔가 소리를 지르며 자동차를 몰고갔습니다. "바보 같은 놈! 치이고 싶냐!" 분명 그런 말을 했겠죠. 그건 그렇습니다, 저는 차에 치여도 불평할 수 없는 위험한 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는 당황해서 사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차 운전하셨던 분 정말 죄송해요. 그 후로는 저는 남들 보다도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눈으로 보이는 정보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후 책을 읽으면서 걷는 것은 일절 그만두었습니다.
7 "들림의 교실"
오빠나 미유키는 없었지만, 새로운 친구도 많이 생기고 공부도 즐거웠기 때문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것은 매우 좋았습니다. "들림의 교실" 덕분에 초등학교 때는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어요. 성적은 항상 상위이고 수업에서 고생한 기억도 딱히 없었어요.
시험은 "들림의 교실"에서 배우는 국어와 산수도 포함하여 모든 교과목을 모두와 같은 교실에서 같은 문제로 시험 봅니다. 양옆 아이나 앞에 앉아 있는 아이가 성적이 좋았던 제 답안지를 열심히 훔쳐보고 있었을 정도였어요(웃음). 선생님도 존경할 만한 훌륭한 분이 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슬픈 일이 있습니다. 아직도 용서할 수 없는 선생님이 딱 한 분있었습니다. 바로 4~6학년까지 "들림의 교실" 을 맡은 A라는 선생님입니다. 다른 선생님에 대해서도 위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등 학교 안에서 매우 무서운 선생님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단순히 엄격한 선생님이라서 싫었던 건 아니에요. 선생님은 수업에도 의욕이 없었던 것입니다. 모처럼의 "들림의 교실"인데 김빠진 자습 같은 수업뿐이었어요. A선생님에게 배우기 이전 1학년부터 3학년 때까지는 물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교과서 문제를 풀라고 해서 또다시 자습 같은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제가 있어 나는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조심조심 A선생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읽고 있던 만화책에서 고개를 들지도 않고 "스스로 판단해라!" 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이래서는 '들림 수업'의 의미가 없습니다. 도저히 모르기 때문에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몇 번이나 부탁하면, 아주 귀찮다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가르쳐 주는 식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다른 날, '들림의 교실' 수업 중 저는 갑자기 배가 아팠습니다. A선생님에게 호소하자 또다시 이런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내가 의사가 아니니까 그런 건 내가 알 수가 없잖아" 이 대답에는 역시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그 대답은 너무 심하다." 그렇게 생각한 저는 전에 화가 난 적도 있어서 그대로 말없이 교실을 나와 보건실로 향했습니다. 그 무렵부터 싫은 일이 있으면 보건실에 가서 그곳의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 반항적인 태도가 더욱 그를 짜증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