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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할 글은 다라니 수행 넉달 째 되는 때에 쓴 것입니다:
도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수행 4개월 째 한달 간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참고: 지난 기록)
수행 1개월 – 누적 횟수 3,200 (하루 평균 160 회 / 일회 독송 평균 1분)
수행 2개월 – 누적 횟수 9,600 (하루 평균 210 회 / 일회 독송 평균 45초)
수행 3개월 – 누적 횟수 26,500 (하루 평균 570회 / 일회 독송 평균 42초)
수행 4개월 – 누적 횟수 46,870 (하루 평균 655회 / 일회 독송 평균 40초)
1. 다라니의 일부가 계속 뒤엉키어 반복되다
이
달에는 다라니의 일부가 자꾸 뒤엉키어 반복되었다. 다라니를 외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다사명 나막 가리다바 이맘알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라고 외고 있었다. 무심코 외다 보면 이렇게 뒤엉킨 한 구절이 수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래서 뒤엉키는 것이 알아차려 질 때 마다, 매번 다시 처음부터 신경 써서 천천히 제대로 외우곤 하였다. 월말에 이르러선 뒤엉키는 일이 사라졌다.
2. 분심의 에너지를 역이용하다 (2010년 5월 6일)
다라니 수행 이후 한번도 크게 화가 난 적이 없었는데, 눈에 거슬리는 것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나는 상황 하에서 오늘 저녁 문득 화가
치밀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자비심을 일으켜야 하는데 ... 이 방면으로 마음 쓰는 연습을 많이
하질 않아서 결코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 분심을 싣고 다라니에 몰두해 보았다. 분심에서 일어나는 에너지를
다라니 독송에 온통 쏟아 부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랬더니 평상시 보다 다라니 독송이 (느낌 상) 두 배로 빨라 지는 것이
아닌가? 입술이 묶여있던 커다란 풍선 입구를 풀러버리면 바람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빨리 움직였다.
얼마 후 다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까처럼 빨리 독송해 보려니 도저히 되질 않는다. 다시 천천히 더디게 되는 발음
... 이 때 욕심을 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니 보따리 찾는 다는 식으로 방금 전에는 불편한
마음이 가시기 만을 기대하더니, 그 것이 이루어 지니 독송 속도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었다.
수행자는 빨리 효과를
얻으려는 속효심과 찾고 얻으려는 치구심을 쉬지 않으면 여법하게 정진할 수 없다고 한다. 골프건, 야구건 세게 친다는 생각이
앞서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장타를 날릴 수 없는 것이다. 때때로 평상심을 잃지 않도록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겠다.
3. 생각이 언어로 나타나다
다라니를 외는 중에 다른 생각이 스쳐 일어날 경우, 그 생각하는 내용이 말로 튀어나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특히 최근 경험한 일과 관련하여 그 당시 일으켰던 생각이 단어로 튀어나왔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의 가격에 대해 생각한 일이 있었다면, 다라니를 외다가 중간에 불쑥 “얼마에요?” 라고 말을 한다. 길을
가다가 화장을 진하게 한 여성을 보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쁜데, 오히려 너무 진하게 화장해서 추해 보이는 구먼…” 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는데, 다라니 독송 중에 그 생각이 언뜻 스치며 “여자” 라는 단어가 튀어 나왔다. 이민 와서 살다 보니 영어도
튀어 나온다. 나는 길눈이 어두워 낯선 길에선 무척 긴장을 하는데, 낯선 길에서 좌회전 일방인 길을 따라간 적이 있은 뒤에
다라니를 외우는 중에 “You can go left.” 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하루 중 앉아 있을 기회가 별로
없지만, 이렇게 엉뚱한 단어가 튀어나오는 현상은 주로 앉아서 차분히 독송할 때에 일어났다. 운전 중이나 움직이며 다라니를 욀
때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앉아서 움직임이 없이 독송할 때는 아무래도 집중이 더 잘 되고, 간혹 튀어나오는 엉뚱한 말들은 나에게
다시 다라니에 집중하라는 신호를 보내준다.
4. 육식에 대한 부담감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쓴 글)
자주 먹게 되는 육고기와 오신채가 마음에 걸린다. 특히 생선회를 먹을 땐, 칼산 지옥을 거쳐 식탁에 올라온 물고기가 측은하여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요리한 사람 생각도 해야 하고, 버릴 수도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먹는다. 육식을
하고 나면, 확실히 수행에 장애가 된다. 우선 잠자고 있던 성욕이 증가하고, 탁한 기운이 몸에 스며 자비심을 키우려면 곱절의
노력을 해야 할 뿐 아니라, 소화 시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 몸은 우선 소화시키는데 주력하느라 열심히 수행한다
하더라도 머리가 맑고 상쾌한 상태로 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웰빙(채식) 식단을 처에게 제안해 보지만, 골고루 먹어야
건강할 수 있으며 자라나는 자식에겐 더욱 그렇다고 한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어찌 수행이 제대로
이루어지겠는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여법한 수행자의 자세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육식을 피할 수 없으면, 육식을 하되, 마음 속으로 정성껏 극락왕생을 발원해 주면 되지 않겠나? ‘나’ 한테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은 수행자가 버려야 하는 아상을 오히려 키우는 소견이다. 발심한 수행자는 ‘나’에 대한 생각이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제대로 발심하였는가?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5. 채식 예찬 (조직검사 결과 이후 월말에 이르러 쓴 글)
의사의 강력한 권고로 채식 위주의 식단을 이용한 지 3주가 되었다. 가공 식품과 오래 익힌 음식을 최대한 멀리하며, 가급적이면 생야채와 과일이 주된 메뉴가 되도록 하고 있다.
식사량이 전과 비교하여 많이 줄었지만, 점점 익숙해 지면서 배가 고프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전에 많은 양을 먹었을 때는 한 끼만
거르거나 늦어져도 배가 고파 견디기 힘들었는데, 채식과 더불어 과식을 하지 않고부터는 배가 고프다고 느낀 일이 (처음 시작했을 때
하루 이틀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먹는 양이 줄었어도 몸무게는 약간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첫 2주간
5kg 빠졌다가 3주가 되자 다시 2kg 불었음: 결과적으로 3kg 줄은 셈이 된다). 몸무게의 변화가 크지 않지만, 몸이 무척
가볍게 느껴진다. 몸이 가볍게 느껴지므로 바쁜 일과를 보내도 피로가 크게 누적되지 않는 것 같다.
채식은 식후에 소화하는데 부담이 적으므로 졸리는 정도가 훨씬 덜하다. 앉아서 다라니를 독송하는 경우, 꾸벅 꾸벅 조는 횟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몸이 전보다 더 유연해 졌음을 알 수 있다. 시험 삼아 가부좌를 해보았는데 20분 정도까지 편안하였다. 전에는 10분도 되기 전에 통증이 느껴졌었다.
식사와 관련된 – 준비하고 식사하고 설거지 하는 – 시간이 혁명적으로 줄었다. 도시락 (호주에선 직장인 대부분이 도시락을 갖고
다님) 준비도 빈 용기에 야채 썰어놓은 것과 과일 조각 주섬주섬 담고 찐 감자나 생 고구마 혹은 떡 조각 하나 넣으면 끝나고,
기름기가 전혀 없으니 설거지도 초고속으로 끝난다. 하루 중 식사와 관련되어 소비하는 시간은 총 30분 (아침 5분, 점심
10분, 저녁 15분) 이면 족하다. 전에는 아마도 120분은 걸렸던 것 같다. (지금은 식사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너무 조금씩 먹어서 계속해서 살이 빠져 병자처럼 보이길래, 차차로 양을 늘이고 먹는 것도 천천히 휴식을 겸하기 때문에 지금은 총 60분 정도가 걸리는 것 같습니다.)
과식을 하지 않으므로 남기는 음식이 없어서 음식 쓰레기를 버리지 않아 환경 보존에도 이바지 하고 있다.
채식은 여러 모로 몸의 건강에, 그리고 마음의 안정에 도움이 되는 듯하다. 내 경우는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시작하게
되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만족하고 있으므로, 환경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시도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수행자라면
더욱 이상적이라고 생각된다.
6. 지루하지 않은 기다림 (2) (2010년 5월 28일)
오늘은 우리 학교(필자는 호주 시드니의 한 고등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일하고 있음)가 야외 견학 가는 날이다. 우리 팀은 아이맥스
영화관에 갔다. 과학 다큐 영화인데 나는 이미 전에 본 내용이다. 전철 타고 가면서 다라니 챙기고, 달링 하버의 바닷가 경치를
즐기며 다라니를 흥얼거렸다. 날씨도 좋고 산들바람 신선하다. 극장에 도달해서 계수기를 보니 277 이었다.
극장에 들어가기 앞서 화장실에 다녀오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이 때 생각이 전혀 없어서 화장실에 갔다 오지 않았다. 극장에 우리
학교가 제일 처음 입장해서, 극장 좌석 중 제일 가운데 자리에 우리 그룹이 앉았다. 뒤로 오는 다른 학교 학생들은 우리 주위를
둘러싸며 자리를 채웠다.
이윽고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심술궂은 일이 생겼다. 갑자기 소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나 생각이 없더니, 자리 잡고 앉으니까 마음 속에서 자꾸 화장실에 가자고 조른다. 황당한 시츄에이션…
아까 분명히 화장실 가는 시간을 학생들에게 충분히 주었는데, 같이 간 지도교사에게 지금에 와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얘기 하자니 영
말이 안 나오지 않았다. 설사, 자리에서 일어나 나간다고 해도 학생들에게 체면이 말이 아니고, 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Excuse me.” 를 연발해야 하는가? 당황스럽다는 생각이 나자 소변보고 싶은 생각은 자꾸자꾸 눈덩이처럼 더
커진다.
“어떻게 하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한 잠 자면 되지, 뭐. 아침에 자다 일어나면 소변보러 화장실에
달려가는 일이 가끔 있지 않은가? 분명히 자는 동안에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깨어나서야 화장실에 가고 싶은 생각이 생겨나지
않는가 말이다.”
그래 한잠 자자. 어차피 이미 본 영화다. 눈을 감고 다라니를 외우며 잠을 청했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쩌렁쩌렁 울려대는 스피커 소리에 다라니는 자꾸 끊겼다. 끊기면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다라니를 외웠다. 또
끊기고 ... 다시 챙기고 ... 그러다가 제대로 한번 외웠다. 계수기 한번 눌러주고 ... 또 다시 외다가 끊기고
... 또 다시 챙기고 ...
다섯 번 정도 제대로 외웠다고 생각되었을 때 눈을 떴다. 나는 계속 심호흡을 하고 있었으며 주위 소란과 달리 너무나도 편안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깨어나서 몇 초가 지나니, 아까 눈 감기 전에 일어났던 소변보고 싶은 생각이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순간 내 눈 앞에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커다란 극장 스크린에 영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다라니를 다섯 번 정도 제대로 외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1시간 30분이 훌쩍
지나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다시 화장실 가는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몇몇 학생들을 인솔하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당하게, 해우소에 다녀왔다. 화장실에서 나와 환한 데서 계수기를 쳐다 보니 305라는 숫자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섯 번 정도
외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30번 가까이 외웠던 것이다. 극장을 나오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근심 걱정 없이 안락한 상태로
다라니를 외었다고 생각되는 일들은 왜 어설프게 잠이 들었던 상황에서 주로 일어나는 것일까?”
7. 자비심 키우는 연습을 시작하다 (2010년 5월 30일)
인터넷에 올라온 오대산 묘법 노스님의 인과와 자비에 관한 법문은 내게 큰 감화를 주었다. 작년에 그 글들을 읽고 지난날 무심코
저지른 살생에 대하여 참회하고 또 참회하였었다. 호주에선 관광객이 방문하면 롭스터와 머드크랩을 요리해주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있다. 몇 년 전에 우리 집에 손님이 왔는데 접대한답시고 수산시장에 가서 (죽은 것은 속살이 없다고 해서) 살아있는 롭스터와
머드크랩을 사왔었다. 끓는 물에 그들을 넣고 요리를 하였으니, 잠시간의 미각을 돋구기 위해 산 생명을 화탕지옥에 넣어버린
끔직한 업을 지었던 것이다.
노스님의 법문을 읽고 진심으로 참회하였다. 우선 롭스터를 계속 눈 앞에 떠올리며
지장경을 하루 한번씩 일주일간 정성스레 읽어 주었다. 그 다음엔 머드크랩, 같은 방식으로 4번 정도 읽어 주다가 다른 일들이
생겨 바빠지는 바람에 계속 읽어주지 못하고 기도를 지속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기도에 대한 일을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 날 꿈 속에서 머드크랩이 나타났다. 큰 화면에 머드크랩이 꽉차게 보였는데 본래 검푸른 색이지만 꿈에서는 열이 올라
온통 주황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머드크랩은 커다란 한 쪽 집게로 내 다리 하나 전체를 삼키어 물었다. 생시였다면 다리가
잘리는 아픔이 있었겠지만 꿈에서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꿈 속에서 생각하기를 “아 내가 지장경을 일곱번 읽어주려고 마음먹었다가
중도에 그치니 아쉬워서 내게 하소연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머드크랩에게 참회하며 정성껏 염불해 주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 염불하면서 그 머드크랩이 고통에서 벗어나 극락왕생하기를 간절하게 발원하였다. 염불을
계속하자 그 머드크랩의 색깔이 점점 하얀색으로 변해지더니 나중에는 수증기처럼 공기로 화하였다. 꿈에서 깨어 생각하기를 진정으로
참회하며 발원할 때의 불보살님 명호는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가피를 내린다고 느꼈다.
그
일이 있은 후 현생에서의 살생업에 대한 죄의식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엔 그 동안 죽여왔던 수 많은 작은
미물들에 대한 미안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아르바이트로 청소하면서 수없이 많은 개미와 거미를 살생하였다. 어렸을 때는 장난
삼아 개미집에 물을 붓기도 하고, 벌레를 잡아 일부러 개미집 앞에 놓기도 하였다. 파리가 귀찮게 해서 라이터로 태워 죽인 적도
있고 ... 또한 전생에는 얼마나 많은 살생을 알게 모르게 저질렀을 것인가?
오늘 아침에 설거지를 하다가
음식쓰레기를 발견하고, 다른 때 같으면 무심코 쓰레기통에 버렸을 텐데, 이 음식 찌꺼기를 미물들에게 보시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과거에 살생한 수 많은 미물들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배고파하는 미물들에게 맛난 양식을 제공해 주자는 생각이 일어났다.
또 아침마다 새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참조 1) …” 라는 어느 스님의 노래가
생각났다. 배고파하는 새들에게도 먹이를 주자.
음식 찌거기 중에 성한 것들을 골라 용기에 담았다. 먹다 남은 과자
부스러기며, 버려진 사과 껍질도 잘게 썰어 통에 담았다. 밖에 나가 정원에 먹을 것을 여기 저기 흩뿌렸다. 먹을 것이
발견되자 우선 바빠지는 개미들이 보인다. 첫 고객들에게 전한다. “개미들아 고맙다.”
안으로 들어와 이층
베란다(필자는 연립주택 2층을 세 들어 살고 있다.)로 나가서 한동안 정원 쪽을 쳐다 보았다. 호주에는 나무들이 무척 많은 데
(나무에 가리는 부분 때문에 웬만한 집은 부동산에서 그 모양 전체가 제대로 나오게 사진을 찍을 수 없을 정도임), 나무에는 온갖
새들이 서식하고, 그 주위에 거미며, 각종 곤충 들이 살고 있어 확대해서 보면 하나의 작은 세상과 같다.
먹이 놓아 둔 곳을 주시하며 새가 날라와 먹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몇 분이 지나도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윽고 새 한
마리가 조심스럽게 내려 앉아 내가 놓은 음식을 쪼아 먹었다. “새야 고맙다.” 박복한 사람은 모처럼 마음을 내도 복을 짓기
힘든 법인데, 그 새는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내가 베푼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니 너무나도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고마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합장하고 다라니를 외며 발원하였다. “새야 다음 생에는 수행자로 몸 바꿔 태어나 많은 중생들을 제도해
주거라.” 그 새가 음식을 먹고 나무 위로 올라 간 뒤 한 무리의 새들이 내려와 내가 놓아 준 음식을 먹었다. 나는 다시
합장하고 다라니를 외면서 그들을 위해 발원해 주었다.
남은 음식을 보시하는 일은 음식쓰레기 버리지 않으니 죄를 짓지
않아 좋고, 배고픈 중생에게 보시를 행할 수 있게 되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다음에는 매번
나가서 쳐다볼 필요 없이, 안에서 미리 남은 음식을 앞에 놓고 다라니를 외고 발원을 한 후에 베풀어 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서 내가 무리 없이 다른 중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들이 주위에 있는 지 살펴보면서 자비심을 계속 키워 나가는 연습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참조 1)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
다음은 어느 스님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양귀비의 빼어난 미모에 당나라 황제는 양귀비를 궁궐 안으로 들이게 하고 시종을 붙여 돌보게 하였지만, 양귀비는 안녹산을 마음 속
깊이 연모하고 있었답니다. 어느 날, 날이 저물 즈음 양귀비는 안녹산을 그리워하며 속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양귀비는
“소(양귀비의 시종 이름)야” 하고 부릅니다. 시종이 “예, 마님 부르셨습니까?” 하고 달려와서 물으면 “아니다, 부르지
않았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 잠시 뒤에 “소야” 라고 부릅니다. 또 시종이 달려오면 안 불렀다고 했답니다. 양귀비는 님이
그리워 속이 답답한 마음을 애꿎은 시종을 부르며 한탄한 것이지요. 이 광경을 보고 지나가던 스님이 노래를 불렀답니다.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님이 그리워 웁니다.” 양귀비는 그 스님이 자신의 속 마음을 꿰뚫고
있음에 소스라치게 놀라 그 스님을 안으로 맞아들여 법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화두를 처음 받는 참선자에게 화두 드는 요령을 알려줄 때 비유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분명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개에게도 불성이 있냐는 물음에 조주 스님께서는 “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때 “무”는 단순히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랍니다. 비유하자면 위의 양귀비 일화에서 양귀비가 “소야”라고 불렀지만 본 뜻은 시종을 부른 게
아닌 것과 마친 가지죠. 위의 일화에서 나온 스님은 “소야”라고 부른 양귀비의 속마음을 훤히 알았습니다. 그와 같이 무자 화두
참구할 때는 단순히 글자 “무”의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조주 스님이 어떤 생각에서 “무”라고 하였는가? 하고 조주 스님의
마음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사량분별(생각을 지어서 답을 찾는)의 방법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직관으로 탁
떠올라야 합니다. 일반 사람들의 마음도 읽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대 도인인 조주 스님의 마음을 쉽게 읽을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한 번 물어보면 당연히 모르겠다고 나오겠지요. 바로 그렇게 “어째서 무라고 했는가” 라고 물었을 때 “모르겠다” 라고
나오면 제대로 화두를 드는 겁니다. 그 모르는 마음을 지속하되 지극하게 계속 묻고, 또 지극하게 매번 참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서 결국엔 답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위의 인용문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외우고 있는 다라니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그 뜻을 모르고 외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면에서
보면 참선과 비슷한 방법의 수행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말로 전달하면서 계속 자기가 하는 말을 스스로 들어가면서 생각과 말의 내용이 일치하는 지 확인하면서 계속 말을 이어가게 되지요.
따라서 다라니에 전념할 경우는,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망상이 붙을 수가 없게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생각이 일어나면 그
내용을 입으로 혹은 마음 속으로 말을 하게 되는 데 이 말을 하는 내용은 지금 독송하고 있는 다라니와 무조건 내용이 맞지 않게
되기 때문에 이를 알아차리는 순간, 다시 다라니에 집중하게 되면 그 망상을 놓아버리게 될 테니까요. 화두를 드는 것도 결국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망상을 제어하기 위해 알 수 없는 물음을 반복하는 것인데, 다라니 역시 계속 쉬지 않고 알 수 없는 내용을
반복하니 결국은 두 방법 모두 익숙해 져서 틈이 없게 되기만 한다면 망상이 들어올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8. 하루 독송 횟수를 나타낸 그래프
빨간 테두리로 표시된 부분이 수행 4개월 째 한달 간을 나타냄
수행 넷째 달: 최소 112회 / 평균 655회 / 최대 1,220회
도반 여러분, 마음 공부 잘 지어서 모두 계획했던 바를 원만히 성취하시길 바랍니다. _()_
(출처) http://cafe.daum.net/zeol/5cQ9/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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