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쯤이면 대한민국 대부분의 학교가 중간고사(요새는 이런 이름을 쓰지 않는다. 1차지필고사라는 이름을 쓴다.) 시험을 앞두고 아이들이나 부모(특히 엄마들)가 긴장모드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보았을때 공부는 로또와 마찬가지로 운수가 좌우하는 것이 크다.
즉, 노력하고 바란다고 다 잘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아마 우리 친구들 대부분이 동의를 할 것이다.
지금도 만나면 항상 자기가 중학교 다닐때 아침자습을 칠판에 적었기 때문에 공부를 잘했다고 우기는 조** 친구도 그 후 대학 진학에 실패했고 실의의 나날을 보냈지만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시험에 합격하고 경찰공무원을 하고 있으니 공부는 확실히 로또이다.
우리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멀어서 쬐그만 아이가 추운 겨울에 들판을 뛰어가는게 안쓰럽다는 생각에 우리 아부지는 우리집 형제 여섯중 다섯을 일년씩 꿉어 호적에 올렸기 때문에 당연히 나도 아홉살에야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웃집에 살았던 내 친구놈이 학교 입학하러 간다는(그때는 학교 든다고 했다.) 소리에 우리 어마님께서도 나의 손을 잡고 자천까지 가서 학교에 넣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70년대라해도 행정에 따라 교육이 시행되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히 나게는 취학통지서가 발급되지 않은 상태라 입학을 시켜 줄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전까지 조금만 아는 사람이 학교에 있으면 우겨서 들어가기도 했던지 지금은 고인이 되신 나의 외숙부가 그 당시 영천지역 국민학교 교사를 하고 계셨고 친한 선배가 자천국민학교에 근무하고 있어 그분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하지만 그분의 빽으로도 학교를 다닐 수 없어서 나는 그냥 돌아 와서 일년을 더 철딱서니 없이 놀면서 보냈다.
나와 동갑이던 옆집놈과 나보다 한살 어렸지만 어떻게 해서 학교에 댕기게 된 놈이 학교 가는 걸 보고 가끔은 학교를 제끼고 나와 함께 놀자고 꼬시기도 했었으니 아마 그 당시 나는 학교 교육이 그렇게 부럽지는 않았나 보다. 그렇게 8살에 학교 들어가는 걸 거부당하고 자천에서부터 먼지나는 도로를 걸어오다가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지경이 된 힝골에 무슨 일때문에 부역을 나가 있던 우리 아부지한테 가서 대한민국 교육의 폐해를 꼬바르면서 같이 밴또밥을 먹은 기억이 아련히 난다.
한해가 더 흘러 드디어 나에게도 국민학교에 입학하라는 국가의 공식 명령서가 왔다. 그때까지 면소재지 자천은 일년에 두어번 장날에나 가볼 수 있던 이상향이라 굉장히 마음이 들떠있었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로 우리는 1979년 3월 5일 입학을 했었다. 첫날 입학식보다는 국민학교 바로 앞에 있던 점빵에서 철이르게 사 먹었던 아이스께끼가 무척이나 달콤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입학생들 모이라고 하는 바람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버려야 하는 참담한 사태가 벌어져 내가 우는 소리로 투덜거렸다는데 그때 그 말을 마흔 중반에 접어든 지금도 나게 모친께서는 하신다.
어떤 입학식을 치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대신 담임선생님(김복희) 인솔에 따라 학교를 한바퀴 돌면서 각종 시설을 견학하던게 생각나는데 특히 남쪽 운동장 구석에 있던 시소가 떠오른다. 시소가 아마 나에게는 매우 현대적이고 시크한 놀이시설이었으니 아마 지금 두류공원의 청룡열차나 작년 수학여행 중에 가본 에버랜드의 어떤 시설보다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단하루, 입학식 날만 오마니의 손을 잡고 학교를 가고 그 후부터는 히야 누부야들을 따라 학교를 가야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때는 국민학교 1학년이던 나부터 중3이던 큰 누나까지 다섯이 학교를 다닐때라 아마 나는 보호를 받으면서 다녔던 것 같은데 그래도 등하교 길은 힘겨웠을 것이다. 지금처럼 포장된 도로도 없었고 더구나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불가능한 일이라 들판을 따라 진흙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는데 가장 힘든 것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온통 흙을 떡처럼 묻혀 다녀야 했으니 얼마나 추접해 보였던지 2학년때 어느 늙은 남자 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세수를 하고 다니지 않는다고 뭐라고 했던 것도 이해가 된다. 사실 그때 나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고역이어서 겨우 욕을 바가지로 먹고 겨우 한술 밥을 먹고 학교로 가야했다. 당연히 숙제는 누부야들이 주로 했었고 한참 학교를 가다가 지금의 우리 모교 운동장 끝자락에 도착해서 맑게 흘러내리던 물에 세수를 하곤 했다. 또한 꼭 학교를 가다가 배가 살살 아파서 동실들 용훈이라는 놈의 포도밭 머리의 수풀에 자주 들어가 응가를 하기도 했었으니 아마 나를 보고 누부야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처량했을지 짐작된다.
두 반이 있었던 나의 반은 2반이었고 아마 20대 중반쯤 되는 여자 담임선생님이었는데 얼굴은 지금 생각해도 이뻤는데 입은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왜냐면 우리가 뭔가를 잘못하면 늘 "꽁꽁 묶어서 똥통에 빠트린다."라는 협박을 달고 사셨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교실 바로 옆에는 변소가 있어서 늘 칙칙하고 냄새가 났다. 나중에 6학년 대빵이 되고 나서 그 변소를 정규와 내가 맡아서 청소를 하면서 정이 많이 들기도 했고 우리 동기 **가 빠졌을때 잽싸게 선생님께 신고한 기억도 있다.
늘 그렇지만 원래 지각은 학교 바로 앞에 사는 놈들이 단골로 하고 먼데 사는 놈들은 새벽같이 온다. 중학교때만해도 공덕이나 배나무진에 살던 동기들이 지각하는 적은 한번도 없지 않았던가. 특히, 한 시간 가까이 돌자갈 산길을 걸어 내려와 다시 차를 타고 학교에 와야했고 야간자율학습을 한 후에는 껌껌한 그 길을 다시 되집어 가야했던 배나무진 친구들이나 동기라고는 아무도 없는 산골 아차에 살면서 마찬가지로 왕복 2시간을 걸어다니며 버스를 타야했던 화선이라는 친구나 하루에 두어번밖에 없는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일찍 마친 날이나 토요일이면 우리집 앞을 지나 산길를 뛰다시피 걸어갔던 공덕 친구들의 노고는 얼마나 컸을 것인가....
35년이 지난 지금에 돌이켜 봐도 늘 아침 일찍 학교에 도착하면 교실문이 잠겨있어 선생님이 열어주거나 아저씨가 도와줘야 했던 기억이 난다. 개방식 복도에 앉아 멍때리거나 겨우 돌삐 던지기 등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덧 교실 문이 열려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아마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번은 무슨 일인지 내 신발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개방식 복도에 있었던 신발장에 두었던 신을 누가 가져갔는지 아홉살이나 먹었던 나는 일단 울었던 것 같은데 항상 엄하던 그 선생님이 어떤 여자 동기의 하얀 실내화를 대신 신고 가도록 해주셨었다. 그 여자동기는 제법 사는게 괜찮았던지 중학교를 1년도 채 다니지 않고 대구라는 도회지로 전학을 가버렸다.
입학 후의 생활은 띄엄띄엄 난다.
교실 칠판 구석에 학습목표를 적던 란의 바로 위에 날짜 표기가 1979년이라고 되어있던 것과 집에 가기 전 늘 칠판옆에 게시된 태극기를 말아넣던, 등치가 산만하던 수환이의 모습과 날마다 나머지 공부를 하며 인생의 쓰라린 맛을 알아 가던 몇몇 친구들의 똥씹은 얼굴들이, 특히 이씨 성을 가진 남자와 여자 동기, 떠 오른다.
왜 그렇게 내가 그때 공부를 못했던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무척이나 힘겨웠다. 숙제중에 1-50까지 세번 써오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게 힘에 겨워 벽지로 붙여놓은 달력을 보고 30까지는 잘 베껴 썼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58명인가 59명의 한반 학생들 중에서 끝 5명 안에 들던 나의 실력때문에 늘 우리반 청소를 대신하러 오던 6학년이던 누나는 나의 담임샘께 구박을 대신 들어야 했으니 공부 못하는 동생을 둔 누부야의 심정도 알만하다.
그런데 늘 10개 중에 3-4개 밖에 맞추지 못해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던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날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6개를 맞추어 간신히 나머지 공부에서 해방되었고 그 다음날부터는 공부가 술술 되었던 것 같다. 아마 늑막염으로 아파서 거의 한달을 학교를 쉬면서 공부를 못했던 일만 아니었다면 그해까지만 있었던 우등상을 탔을 것이다.
평소에는 자습 나오기 싫어 오만가지 핑계를 대던 나의 반 아이들이 오늘은 밤까지 나와있는 모습을 보면서 옛생각이 들어서 횡설수설해 본다.
첫댓글 김복히샘 보고잡다.
니도 그때 내랑 같은반이었나.기억안난데이.ㅋㅋ
선상님만 기억난다. 우짜노.
난 디게 공부 못하고 쩨맨하고 추리하고 어리해서 표시가 안 났다.
김복희샘 몇 년 전에 왜관인가 근무하던데 방금 검색해보니까 없다. 명퇴했는 갑다. 54년인가 55년 생이던데...
복희 샘 18번 말씀 쭈 차가갓꼬 똥통에 빠잦삔다
대신 니는 혓바닥 짤라 묵을뻔했다 아이가. 화곤이는 이빨 빼눅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