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 스님의 『부자 수업』
가. 간략한 내용 소개
법상 스님의 『부자 수업』은 세속적인 부의 축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자답게 부를 축적하는 것은 결국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한다. 이 글은 스님이 군승 시절 장병들에게 전한 이야기를 새롭게 엮었다고 한다.
따라서 요즈음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상당히 위로가 될 수 있겠다 싶다. 마음이 풍요로우면 부자를 보는 안목이 달라지며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는 스님의 말은 울림이 깊다. 우리는 너무 근시안적 사고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나. 마음공부
스님이 부자 이야기를 한다. 그것도 ‘부자 수업’이라고 한다. 스님이므로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일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법상 스님의 『부자 수업』은 스님이 보는 부자는 어떤 것일까, 그것을 어떻게 이루려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기에 책을 집어 들었다.
스님은 오랫동안 군승으로 근무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스님이 평소에 군인이나 불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 원고를 토대로 엮은 것이라고 한다. 젊은 군인들이 세속적인 부를 추구하다 혹여 잘못된 길로 들까 염려하는 바도 이 책을 쓴 의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세속적인 부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선다. 그렇다고 부를 이루기 위해 투기나 술수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책을 읽다보면 스님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부자는 우리가 말하는 세속적인 부자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게 된다.
세속적인 부자가 아니라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이 부자라는 것이다. 마음이 풍요로우면 무슨 일을 하든 든든할 것이고 세상은 여유로울 것이다. 세상이 여유롭게 보이니 다툴 일이 사라진다. 우리가 가난한 이유는 그런 마음이 풍요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스님의 평소 생각을 담은 짤막한 수필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불자가 보는 부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그래서 부자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호흡을 가다듬도록 등을 토닥이며 속삭인다.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스님이 말하는 부자 공부 비법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마음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돈이 많으면 부자인 것이다. 거기에 달리 토를 달 일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누구나 부자 되기를 꿈꾸지만 부자가 되는 사람은 소수에 국한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부분 부를 생각만큼 이루지 못해도 현실에 만족하고 산다. 더러 만족을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스님은 그것이 안타깝다고 한다. 그저 마음을 조금만 고쳐먹으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사 마음먹기 나름이다. 돈이 있고 없음에 심각해질 것이 아니라, 돈은 그저 하나의 놀이 도구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스님의 부자공부는 마음공부이고, 마음공부의 핵심은 마음을 새롭게 채워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속된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요,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더러 마음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다만 속세의 나 같은 독자들에게는 언뜻언뜻 나오는 불가의 언어에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도 많지 않으니 사전을 찾는 수고를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 수고로움은 분명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것도 불가의 윤회일 것이다.
다. 참된 풍요
흔히 돈이 없어서 괴롭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괴롭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돈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돈에 연연해하는 마음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돈 자체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부여하는 내 마음, 내 인식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라는 말은 절묘하다.
이를 깨닫는다면 그 모든 것들에서 언제나 고요해진다. 우리는 같은 환경 속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 모든 것은 자기의식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 탓으로 돌린다. 분명한 것은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은’ 사람이 진짜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진짜 진실을 얻은 자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생각 속의 일이다. 원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지금 이대로 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 있을 때, 온전한 만족과 깨어있음이 있다.”(27쪽)
그때 우리는 비로소 삶에 뿌리내리게 된다. 이것이 ‘참된 풍요’다. 일반적인 풍요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지만, 이 풍요는 늘 한결같으며, 이것이 본래적인 풍요다. 본래적인 풍요가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었던 것임을 깨달을 때 진짜 부자가 되는 것이다.
인생에서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린다. 오늘 어떤 일을 그만 두게 되었다고 한탄할 필요가 없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가 뛰어나다면 그를 칭찬하도록 한다. 내 일처럼 칭찬하고 기뻐하면 놀랍게도 그의 위대한 덕목들이 내 것인 것처럼 나에게도 공명한다.
너와 나는 참으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일처럼 기뻐할 때 우주에서는 그것을 내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내 일처럼 기뻐할 때 그것은 곧 내 일이 된다. 미래를 향해 추구하는 것은 실상이 아닌 허상을 좇는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은 말 그대로 지금이다.
그런가 하면, 행복이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들 속에 있기도 하고, 아무 이유도 없이 이미 내게 주어진 것 있기도 한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들은 언젠가 다시 소멸한다. 생겨난 모든 것은 반드시 소멸하기 때문이다.
돈, 명예, 권력, 지위, 물질 등에 집착하다 보면 당연한 행복을 누리는 감각을 잃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 그렇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것 것들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것들이다. 공기, 햇빛 같은 것이 그렇다.
인생에서 이처럼 가장 중요한 것들은 전부 다 공짜로 무한정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공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의 귀함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 있는 것이 아닌, 지금 수중에 없는 가짜 행복, 유한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일상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소소한 것들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다는 것은 누군가와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다.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고, 육식동물은 다시 인간의 먹이가 된다. 인간은 죽어 박테리아의 먹이가 된다. 생명은 그렇게 서로를 살린다. 그러니 내가 사는 것도 사랑의 실천이고, 죽는 것도 누군가를 살리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가 하면 분별심도 울림이 크다. 세상을 바라볼 때 분별없이 보는 것, 즉 무념무상으로 욕심 없이 본다면 이는 진리로써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분별해서 본다. 즉 있는 그대로를 자기식대로 해석해서 보는 것이다.
이처럼 분별해서 보면 세상을 구분하게 된다. 좋거나 나쁘다고 나눌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하는 것에 대해 옳다고 주장한다. 괴로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남들과 부를 비교하고 능력을 비교한다. 모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