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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법률가도 인정한 이준기팬카페라는데~ 원문보기 글쓴이: 베틀
http://www.newsfreezo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69923 출처
시대 |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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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0년 11월 23일 |
사망 | 1956년 1월 30일 |
경력 | 일본군 헌병 오장, 육군 특무부대장, 육군 소장·중장(추서) |
유형 | 인물 |
관련 사건 | 여순사건, 김창룡 암살사건 |
직업 | 군인 |
성별 | 남 |
분야 | 정치·법제/국방 |
요약 1920~1956. 군인.
1920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출생했다. 4년제 사립 덕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 2년 과정을 마친 후 가다쿠라제사[片倉製絲]공장에서 2년간 직공으로 일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창춘[長春]역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1940년 신징[新京]의 관동군(關東軍) 헌병교습소에 입소했다. 1941년 4월 교육을 마친 후 일본 관동군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다가, 10월 일본 중지군(中支軍)의 아마카스[甘粕]사단 파견헌병대에 배속되어 소만(蘇滿) 국경 부근으로 파견되어 중국공산당과 소련에 대한 첩보를 수집했다. 1943년 상하이에서 파견되어 싱안베이성[興安北省]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국공산당 거물 왕진리[王近禮]를 체포하는데 공을 세웠고, 그를 이용하여 소만 국경에서 활동하던 지하조직을 색출, 다수의 조직원을 체포했다. 이 공으로 헌병 오장(伍長)으로 특진했고, 1943년 9월부터 만주리(滿洲里)헌병대 및 면도하(免渡河)헌병대 분견업무를 담당했다. 이후 다수의 항일조직을 적발했다.
해방 이후 고향으로 귀향했으나, 1945년 11월 '전범(戰犯)'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송 도중 탈출했다가 다시 체포되어 1946년 4월 다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다시 탈출하여 월남했다. 이후 만주군 장교 출신들의 추천으로 국방경비대에 입대, 일반 사병 및 정보하사관으로 근무했고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제3기로 입교했다. 단기교육을 마치고 그해 4월 소위로 임관, 국방경비대 제1연대 정보주임의 보좌관으로 활동하면서 '숙군(肅軍)'사업을 벌여 국방경비대 내부의 좌익세력 숙청에 주력했다. 1948년 1월 중위로, 정부 수립 이후 대위로 진급했고 방첩부대의 전신인 정보국 3과(SIS : 특별조사과)에서 좌익 혐의자 조사를 담당했다. 그해 10월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본격적인 숙군사업을 전개, 군내 좌익세력을 대거 색출·처벌케 함으로써 소령으로 특진했다.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도 이때 체포되었다. 1949년 6월 육군정보국 방첩 대장이 된 직후 벌어진 '김구 암살사건'에서 사건 당일 범인 안두희(安)를 특무대 영창으로 이감, 특별 배려하면서 배후 은폐에 가담했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경남지구 방첩대(CIC) 대장을 거쳐, 10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재직했다.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사건조작' 등을 이유로 야당 의원들의 비판을 받고 1951년 5월 해체되었고, 그는 특무부재장으로 부임하여 각종 공안사건을 처리했다. 정치적 목적과 성과주의로 상당수의 공안사건을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53년 육군 준장, 1955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56년 1월 30일 과거 부하였던 육군 대령 허태영(許泰榮)의 지시를 받은 특무대 출신 신초식(申初湜) 등에 의한 저격으로 사망했다. 이후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었고, 장례식은 최초의 국군장(國軍葬)으로 안양의 사설 묘역에서 치뤄졌다. 묘비 앞면의 묘주명(墓主名)은 이승만 대통령이, 묘갈명(墓碣銘)은 이병도(李丙燾)가 지었다. 1998년 특무부대의 후신인 국군기무사령부의 노력으로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54년 미국 대통령 공로훈장, 1955년 은성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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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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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7년 |
사망 | 1996년 10월 23일 |
경력 | 육군 소령 |
유형 | 인물 |
직업 | 군인, 암살자 |
성별 | 남 |
분야 | 정치·법제/정치 |
요약 1917년∼1996년. 군인·암살자
평안북도 용천 출생. 아버지는 신의주 부호였던 병서(秉瑞)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안산 김씨이다. 해방 후 서북청년회에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육군사관학교 8기에 입교했다. 현역 육군 소위로 1949년 김구를 암살했다.
1934년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의주와 신의주의 금융조합 서기를 지냈다. 1939년 일본 메이지대(明治大)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서 포기하였다. 1941년 중국으로 건너가 안휘성 회남(淮南), 강소성 서주(徐州) 등을 전전했으며, 회남에서는 일본군 관리기관인 통제품판매조합의 이사로 일하기도 했고, 서주에서는 냉면집을 경영했다. 1945년 1월 귀국해서 용암포 군청에서 고원(雇員)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1947년신의주에서 월남한 뒤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에 가입해 종로지부 총무부장과 중앙 총무부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 및 요원으로, 그리고 우익 테러조직인 백의사(白衣社)의 자살특공대원이었다고 한다. 1948년 11월육군사관학교 8기 특3반에 입교한 뒤 1949년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金學奎)의 추천으로 한독당원이 되었는데 이는 김구(金九)를 죽이기 위한 의도적인 포석이었으며, 당내 내분으로 조작해 배후를 은폐하려는 시도였다. 현역 육군 포병소위로서 1949년 6월 26일백범(白凡)김구 선생의 개인 저택인 경교장(京橋莊)에서 4발의 총탄으로 김구를 암살하였다.
1949년 8월 5일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중앙고등군법회에서 종신형의 선고를 받았으나 같은 해 11월 국방장관신성모(申性模)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의 상신을 받아들여 징역15년으로 감형되었다. 서울육군 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전쟁으로 인해 1950년 6월 27일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7월 10일신성모국무총리서리 겸 국방장관의 국방장관 특별명령4호로 육군 소위에 원대복귀하였다. 9월에 중위로 진급하였고, 1952년 2월 15일 신성모의 명령으로 형이 면제되었으며, 12월 25일 소령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1군사령부 관내 전사단에 공급하는 군납 식료품(두부·콩나물·쇠고기·돼지고기 등) 공장인 신의기업사(信義企業社)를 강원도 양구에서 1956년 10월부터 10년 정도 창업하여 경영하였다. 그는 중형을 면한데다가 1년 여밖에 복역하지 않았으며, 석방 후 군부가 군납사업을 알선해 주었던 사실에서 그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거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의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승만(李承晩) 정부 하에서는 국가 공권력이 그의 범행을 은닉시켜주거나 방임시킨 일면이 있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인 6월 26일 결성된 ‘백범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는 10개월 여의 추적 끝에 1961년 4월 18일안두희를 붙잡아 김구 암살의 배후를 자백받고 본인의 요청에 의해 검찰에 인계하였으나 조사받기는 커녕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한번 확정 판결된 사건은 다시 심리하지 않는다는 형사소송법상의 원칙)의 원칙에 의거해 형사처벌 불가의 판정을 받았다. 또한 테러당할 우려가 있으니 당국에서 보호조치를 하기로 결정되었으며,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에 귀가 조치되었다.
1956년 10월안두희에게 폭행당한 양구경찰서 순경 길종하는 진상규명위원회의 권유로 안두희를 고소했으며, 결국 1962년 1월 25일 특수 폭행 치상죄로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1965년 12월 곽태영이라는 청년이 안두희를 테러했으며, 1966년 김지웅 자신이 김구 암살의 총책임자라고 일본에서 폭로하는 등 진상규명의 분위기가 일자 안두희는 미국 이민을 시도하였다.
1971년 홍종만이 양심선언을 하였으며, 1992년 4월 권중희(權重熙)와 김석용이 안두희의 입을 열게 해 “독자 범행은 아니며 자신은 하수인에 불과하다”라는 진술을 얻어내었다. 1992년 11월 진상규명위원회는 사실의 규명을 국회에 청원했으며, 국회 백범암살진상조사소위원회(위원장 姜信玉 의원)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1995년 12월에 작성하였다.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는 시민 박기서(당시 46세, 경기도 부천소신여객 버스 운전사)에게 1996년 10월 23일 피살되었다.
안두희의 증언을 면밀히 분석하면 백범 암살사건은 안두희에 의한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 분담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안두희는 거대한 조직과 역할에 비추어 볼 때 일개 하수인에 불과하였다. 김지웅은 암살사건 전반을 계획 조율하였으며, 홍종만은 암살 하수인들을 관리하였다. 이들은 모두 정권적 차원의 비호를 받았지만, 그 일차적 배후는 군부라고 할 수 있다. 김구 암살에는 당시 장은산(張恩山) 포병사령관과 김창룡(金昌龍)육군정보국 방첩대장, 채병덕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헌병부사령관, 원용덕(元容德)재판장, 신성모국방장관 등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이 직접적인 지령을 하였다는 증거는 없으나 사건의 뒤처리에는 개입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암살 사건에서 최고위층의 개입을 구체적인 물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승만에게는 도덕적 책임과 상황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