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장로 제도에 관한 질문이 있었고, 장로직에 관한 작은아이님의 글도 있었습니다. 아래 글이 슬라이더님의 질문을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한국 교회에 정착된 장로제도에 대한 문제점과 대안을 다루고 있기에 어느 정도 연관은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래 전에 쓴 글이지만, 도움이 되실 것 같아 나눕니다.
한국교회와 장로교회 그리고 장로제도
한국교회에 안에서 장로교회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한국에 최초로 세워진 개신교회가 장로교회였으며, 한국교회 초기 선교를 주도한 선교사들도 대부분 장로교 선교사들이었다. 또한 초기 한국 교회의 폭발적 성장에 기폭제가 되었던 ‘평양 대부흥 사건’도 장로교회에서 일어났고, 한국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최초의 신학교도 장로교 신학교였다. 그 후, 한국 교회사에 등장하는 굵직한 사건들에도 장로교회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런데 역사만이 아니다. 한국 개신교의 교단별 교세를 비교하면, 한국교회 안에서 장로교회의 위치는 더 확고해진다.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언제나 가장 큰 교회였다.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한국의 종교현황’을 보면 조사에 응한 118개 개신교 교단 중 77개가 장로교 교단이고, 전체 8,616,438명의 개신교인 중에 70%가 장로교 교인이다. 한국에서 장로교회 다음으로 큰 감리교회의 교세가 장로교회의 10% 미만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한국교회 안에서 장로교회의 존재감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를 꼼꼼히 드려다 보면, 장로교회는 사실 그 존재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영향을 한국교회에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장로교회의 정치제도, 곧 장로제도를 한국교회에 안착시킨 것이다. 장로제도는 장로교회의 고유한 정치제도로 장로교회를 장로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장로교회뿐 아니라 대부분의 다른 교파 교회에서도 장로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교세를 갖고 있는 감리교회는 감독정치를 표방하지만, 1947년에 장로제도를 받아들였다. 물론 감리교회가 처음 장로제도를 받아들일 때만해도 그들의 장로제도는 장로교회의 것과는 달랐다. 감리교회 장로는 오늘날의 전도사 같은 역할을 하는 평신도 사역자였다. 하지만 감리교회는 1967년 10월 총회에서 자신의 장로제도를 장로교회의 장로제도와 비슷하게 바꾸는 법을 통과 시켰다. 장로를 선출하는 방법과 장로의 역할을 장로교회와 비슷하게 바꾼 것이다. 그리고 1975년 감리교 제 12회 총회에서는 장로교회처럼 장로도 안수하여 세우는 법을 통과시킴으로 장로제도를 장로교회의 것과 거의 흡사한 제도로 정착시켰다.
회중정치를 표방하는 침례교회는 아직 공식적인 장로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강남중앙교회, 월드비전교회, 수원중앙교회, 대전중문교회, 지구촌교회 등 대형 침례교회를 비롯해 국내 침례교회 3분의 1 정도가 호칭 장로 직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매 해 총회에서 호칭 장로 직제를 교단의 공식 제도로 만들자는 공식의견이 표결에 부쳐지고 있다. 그들이 총회 표결에 부친 호칭 장로 직제 세칙을 보면, “취임 대상은 안수집사 선발 규정에 의거해 개교회에서 안수집사로 선임된 자, 집사 안수를 받은 날로부터 3년 이상 흠 없이 교회에서 봉사한 자, 개교회 사무처리회에서 호칭 장로로 선임받은 자로 취임할 경우 총회가 실시하는 소정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이다. 몇 가지를 빼고는 장로교회의 규칙과 비슷하다. 침례교 내부에서 장로제도를 적극 지지하는 최보기 남부교회 목사는 “한국 기독교 문화나 현실적으로 장로로 부르는 침례교회가 많은 상황인 데다 연합사역에서 제약되는 부분이 많아 장로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최 목사의 말을 정리하면 한국교회 문화가 장로제도를 원한다는 뜻인데, 이는 한국교회에 장로교회가 미친 영향, 곧 장로제도의 영향이 막대함을 증명한다.
감리교회와 침례교회 외에도 하나님의 성회와 성결 교단 등도 역시 장로제도를 가지고 있다. 물론 모든 한국교회가 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아 장로제도를 채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회 내부로 들어가서 보면, 모든 교회(장로교회를 포함한 모든 한국의 교회)에서 장로의 역할이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어느 한쪽은 분명히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이고, 앞에서 감리교회와 침례교회의 경우를 살펴본 것처럼 그 영향은 장로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전해졌을 확률이 훨씬 높다.
한국교회의 독특한 장로제도
그렇다면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는 왜 장로제도를 선호하는가? 장로교회의 선배들이 채택하고 시행했던 장로제도는 자율사상과 평등사상 아래서 교회 회중이 직접 장로라는 대표를 선택하여 대의정치를 추구하는 교회 정치제도이다. 이 제도를 교회에 처음 정착시킨 사람은 제네바의 존 칼빈이다. 일부 학자들은 칼빈은 구약 시대부터 존재했던 장로제도를 회복한 것이지, 장로제도를 창시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장로제도를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든 사람은 칼빈이 분명하다. 그 후 칼빈에게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존 녹스가 장로교회를 스코틀랜드로 가져가 발전시켰고, 이는 다시 잉글랜드의 개혁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장로교회정치원리’로 완성되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간 영국의 장로교회는 미국에서 세계적인 교파로 성장했다. 이때 장로교회에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는데, 바로 ‘두 장로직’을 정리해서 채택한 것이다. 물론 장로의 이중직제의 개념은 칼빈이 장로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장로교 헌법에 ‘두 장로직’을 명시한 것은 미국 장로교회였다. ‘두 장로직’은 장로를 목사와 치리장로로 구분해 사역자인 목사는 가르치는 일을 하게 하고, 치리장로는 목사와 협력해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교 초기부터 미국 장로교회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한국 장로교회에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장로제도는 당시 한국 문화와 정서에 딱 들어맞았다. 즉 유교 문화권으로 계급사회를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에서 ‘두 장로직’에 근거한 장로제도는 목사, 장로(그리고 집사)로 이어지는 수직적 계급제도로 변질되어 쉽게 흡수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한국교회가 장로교뿐 아니라 감리교, 침례교까지 왜 모두 장로제도를 선호하는지 알 수 있게 한다. 한국교회는 자율사상과 평등사상 아래서 교회 회중이 직접 장로라는 대표를 선택하여 대의정치를 구현하는 장로정치를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에 들어맞는 계급적 두 장로직 제도를 선호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재앙, 두 장로직제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 정착한 장로제도, 곧 ‘두 장로직’이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두 장로직’은 한국 교회를 병들게 했다. 아니 병들게 한 정도가 아니라 프린시스 쉐퍼가 세상 문화에 잘못 적응하고 타협해서 변질된 미국 복음주의를 평가하면서 ‘재앙(disaster)’이라고 했던 것처럼, 한국교회의 ‘두 장로직’은 한국교회의 재앙이 되었다.
한국에서 각종 비리 문제로 지상파 방송에 오르내리는 교회 문제들을 보면 거의 모두 ‘두 장로직’ 때문에 발생한 문제임을 볼 수 있다. 즉, 두 장로직은 목사와 장로를 철저하게 구분함으로, 목사와 장로사이에 불협과 힘의 대결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없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두 장로직’이 교회에서 일으키는 가장 대표적인 문제 두 가지는 ‘독재’와 ‘분열’이다.
목사와 장로의 힘의 대결에서 한 쪽이 압도적으로 강할 때, 강한 쪽은 교회 계급의 정점에서 쉽게 독재할 수 있다. 최근 담임목사 재정유용 문제로 뉴스와 인터넷을 달구는 사랑의 교회, 목사직 세습으로 논란을 일으킨 충현교회, 금란교회, 왕성교회, 경향교회, 목사직 세습 대신 아들에게 큰 예배당을 지어준 명성교회, 소망교회 등,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 안에는 하나같이 당회를 장악한 힘 있는 목사의 독재가 있었다. 그런데 한국교회를 자세히 보면 이런 대형교회들에만 독재로 인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교회들도 담임목사의 독재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서초교회 잔혹사”라는 소설책을 쓴 옥성호는 종교개혁가들은 한 명의 교황을 상대로 싸웠지만, 한국교회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교황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어려움에 처했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교회는 독재하는 목사들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반면 목사와 장로의 힘 대결에서 한 쪽의 힘이 다른 한 쪽을 압도하지 못할 때, 그런 교회는 분열의 과정을 겪게 될 가능성이 크다. 매주 목사파와 반대파가 서로의 예배를 방해하며 싸우는 목동의 제자교회와 강북제일교회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에 ‘두 장로직’이 끼치고 있는 폐해는 막대하며, 이런 폐해는 결국 개신교가 한국에서 가장 신뢰도가 낮은 종교라는 여론조사 결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성경적 장로직의 회복
그렇다면 변질된 장로제도로 인해 대 재앙을 만난 한국교회에 희망은 없는 것일까?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장로제도를 이해하고 실천하면 된다.
전통적으로 두 장로직을 주장하는 학자나 목사들은 고린도전서 12:28과 로마서 12:8, 그리고 디모데전서 5:17절에 그 근거를 둔다. 그들은 고린도전서 12:28에 기록된 “다스리는 자(관리하는 자)”가 치리장로이며, 이들은 가르치는 장로와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고전 12장은 직분에 관해 말하지 않고, 은사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로마서 12:8도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은사에 대한 말씀이지 직분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이제 남은 것은 디모데전서 5:17절이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들”을 로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문제인데, 이 구절도 자세히 보면 두 다른 장로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잘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을 전파하고 수고하는 장로”를 연결하는 단어 “특히”가 헬라어로 ‘말리스타’인데, 이 단어는 ‘즉’으로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잘 다스리는 장로, 즉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로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상의 내용을 이해하면 그동안 두 장로직의 근거를 대기 위해 한국교회에서 억지로 해석하던 다른 성경 구절들도 자연스럽게 해석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에베소서 4:11절을 들 수 있는데, 그동안 한국교회는 목사라는 단어가 언급된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사도, 예언자, 복음 전도자, 목사, 교사” 중에서 사도와 예언자 직분은 끊겼고, 복음 전도자(선교사)와 목사와 교사는 여전히 교회에 남아 있는 직분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이런 주장을 하면서도 왜 사도와 예언자의 직분은 끊기고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의 직분은 남아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복음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 중에서 왜 목사가 교회의 리더가 돼야 하는지 설명하지 못한 채, 다만 이 말씀에 목사가 기록되어 있기에 장로와 구분된 목사직을 성경이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말씀이 교회의 직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를 말하고 있다고 보면 해석은 훨씬 더 자연스러워 진다. 예언하는 은사, 복음을 전하는 은사, 돌보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가 모두 성경에 등장하고,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셨다가도 거두실 수 있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도’도 은사에 따른 구분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도 초대교회 사도들이 자신을 장로라고 표현한 말씀들을 볼 때 은사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사도들도 장로의 직분을 가진 자로써 주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은사를 사용해서 교회를 섬기던 자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교회에는 한 종류의 장로만 있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기존의 ‘두 장로직’의 폐해, 곧 목사와 장로가 서로 대립함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예방한다. 목사와 장로로 이원화 된 직분을 일원화 시켜 목사와 장로가 동등한 자격과 직분으로 교회에서 함께 가르치며 다스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복수의 장로로 구성된 복수 리더십도 리더들 사이에서 경쟁하고 반목할 수 있고, 또 타락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상호 서로 존중하는 기독교적 가치를 잃지 않는다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두 장로직’의 폐해로 병들고 무너진 교회를 개혁하고,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이원화 된 장로직을 하나로 통일하고 복수의 장로들로 구성된 장로회를 통한 복수 리더십을 교회에 정착시키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이를 실천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이를 위해서 극복해야 할 문제도 많다. 특히 한국인의 정서상 교회의 직분을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순으로 구분하고 계급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쉬운데, 이런 정서를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이미 기득권을 쥐고 있는 담임목사들이 복수 리더십을 위해서 담임이라는 권력을 내려놓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학을 전공한 장로(목사)와 평신도로 훈련받은 장로들 사이에 있는 질적 간격을 좁히는 문제도 어렵다. 하지만 진정으로 한국교회를 개혁하려고 한다면 이런 어려움은 극복해야 한다.
물론 제도하나 개선된다고 금방 교회가 건강해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더 큰 재앙을 만나기 전에 최소한 변질 된 장로제도라도 성경적으로 회복한다면, 그것은 앞으로 교회가 건강해 질 수 있는 튼튼한 기틀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