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 1627-1704)
선생의 휘는 현일(玄逸)이고 자는 익승(翼升)이며 호는 갈암(葛庵) 또는 남악(南嶽)으로 1627년(인조 5년) 정월 11일에 영해부의
인량리 자택에서 태어나셨는데, 아버지는 석계(石溪, 휘 時明)선생이시고 어머니는 정부인 안동장씨(安東張氏)로서 경당 장흥효
(張興孝)의 따님이다. 선생은 퇴계 이황(李滉)의 학풍을 계승한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로서 영남의 대표적인 산림(山林)으
로 꼽히며, 선생의 퇴계학은 아들 밀암(密菴, 휘 栽)을 거처 외증손인 대산 이상정(李象靖)에게 이어진다.
1646년(인조 24)과 1648년에 걸쳐 두 차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에 칩거하였다. 선생은 40세가 되던 1666년
(현종 7)에 경상도 지방의 사림(士林)을 대표하여 송시열(宋時烈)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등의 예설(禮說)을 비판하는 〈복제
소(服制疏)〉를 작성하면서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하였다.
1674년 학행으로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장악원주부 ·공조조랑 ·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었
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은 51세가되던 1677년(숙종 3년)에 선무랑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로 임명되어 대궐에 나아가 사
은하니 곧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전직됨으로서 비로소 중앙정계에 나아갔다. 이후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때까지 공조정랑
·지평 등을 역임했으나, 근기남인(近畿南人)이 주도하는 정국운영에 대체로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후 남악초당에서 칩
거하면서 1686년에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완성하고 1688년 8월에 이이(李珥)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비판한 《율곡사단
칠정서변(栗谷四端七情書辨)》을 지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남인의 정치적 학문적 입지를 확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유현
(儒賢)으로 천거되어 성균관 사업(司業)을 비롯하여 이조참의 ·성균관좨주(祭主) ·이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 이 시기 산림 ·유
현이 거치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정책결정 및 관원의 인사에 깊이 관여하였다. 1694년 4월 갑술환국(甲戌換局) 때 함경도
홍원으로 유배된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이듬해 겨울에 조식(曺植)을 비롯한 선유들의 학설을 비판한 《수주관규
록(愁州管窺錄)》을 지었으며 1697년(숙종 23년) 봄에 《돈전최어(惇典최語)》를 편찬하였다. 전라도 광양에 유배중이던 1699년 2
월에, 방면하여 향리로 돌아가라는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을 받았으며, 1700년 4월에 안동임하의 금소역(琴韶驛)에 우거하기 시
작하여 두루 영해와 금소을 왕래하였고 77세가 되던 1703년 7월에는 《존주록(尊周錄)》을 편찬하였다 . 1704년 (숙종 31년) 10월
3일에 우거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이 78세이셨다.
1710년(숙종 36) 죄명이 풀리고 이듬해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으며 1718년에 영해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또 1871년
(고종 8)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환수되었고, 1909년에야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선생이 남기신 저서로는 시문집 《갈암집(葛庵集)》과 중형 존재(存齋 ,휘 徽逸)선생과 함께 편찬한 《홍범연의(洪範衍義)》등이
있다. (참고 문헌 : 17세기 한 영남도학자의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