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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1 -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하는 전쟁, 협력, 선의등 3가지 유형
해외 식민지의 유래를 보자면 고대에 해외로 나가 식민 도시를 세운 두 민족이 있었으니.....
"그리스 와 페니키아(레바논)" 는 상호 독립적인 여러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스와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은 인구가 늘면서 도시가 비좁게 되자 자원과 무역로 등을
확보하기 위해 기원전 8세기부터 해외로 나가 지중해 연안에 많은 도시들을 세웠으니....
이 도시들은 모국과 정치, 경제, 종교적인 유대관계에 있으면서 모국에 공납금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본국 페니키아 도시 “티레” 가 페르시아등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니 식민지 “카르타고”
는 스스로 종주국이 되어 이웃의 동료 도시국가들에서 공납을 받아 성장했고, 로마는
총독과 군대를 보내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였으니.... 파견된 부대의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경작지를 마련하는데 이를 colonia 라고 불렀으니 영어 colony(식민지) 의 어원 입니다.
아메리카 20개 국가는 모두 식민지니 독립국가가 없고 아프리카 40개 국가 중 독립국은 남아프리카,
리베리아 및 이디오피아 세나라지만....... 남아프리카는 유럽인들이 침략해 세웠으며, 리베리아는
미국이 미국내 흑인들을 이주시켜 만들었으니 순수한 원주민의 나라는 이디오피아 한 나라 입니다.
아시아 40개 국가중 독립국은 중국, 태국 및 일본 세나라지만 중국과 태국은 서양의 반식민지니
완전한 독립국은 일본 한나라뿐으로, 100개 국가 중에 원주민의 독립 국가는 이디오피아 와
일본 단 두나라에 불과한 셈인데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들의 독립과정과 유형은 제각각 입니다.
독립을 이루게 되는 유형은 제1형 전쟁, 제2형 식민지 본국에 협력, 제3형 선의 3가지가 있는데 독립전쟁도
순수 자력인 1-A 형은 아이티와 멕시코, 콜롬비아에 페루와 칠레, 아르헨티나 및 알제리 등이고 독립전쟁
에서 제3국의 도움을 받은 1-B형은 미국과 서아시아 나라와 콩고와 앙골라, 쿠바 등이며 제3국이 식민지
를 점령했다가 물러간후 재침략에 나선 식민지 본국과 싸워 이긴 1-C 형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 입니다.
식민지 본국에 협력해 군대에 입대해 총알받이로 죽은 희생을해 본국이 독립을 허락한 제2형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필리핀이 있으며, 선의는 독립전쟁을 조금만 했으나 독립을 얻는 3-A 형의 경우는 식민지
본국이 독립을 허락한 미얀마와 말레이시아등 영국 식민지 나라들이 있고 식민지를 점령한 제3국이
독립을 허락하는 3-B 형의 예로는 한국이 있으며, 4형은 식민지 정부가 자립하는 경우니 브라질 입니다.
이 시리즈는 중남미와 아시아에 아프리카 나라들을 언급하자면 아무래도 20편이 될 것 같으니, 여기
제 1편에서는 치열한 독립전쟁을 치른 몇나라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2편 부터는 각 나라별로 그
역사에서 부터 시작해 식민지화 되는 과정과 이후 전개된 독립전쟁 및 독립 후를 기술하고자 합니다.
1. 아이티(1-A 형 : 자력으로 독립전쟁)
아이티는 18세기 무렵에 설탕과 커피 생산 세계 1위였으니.... 한때 프랑스 국부의 무려 70%(?)
를 차지할 정도로 효자 식민지 였는데, 농장주들은 흑인들이 작업중 혹시라도 사탕수수를
먹지 않을까 염려되어 그 무더운 날씨에도 깡통으로 된 자물쇠를 입에 채울 정도로 짐승
취급을 했는데, 전 세계 식민지 본국 중에 잔인무도하지 않은 나라는 단 한나라도 없었습니다!
또 흑인 노예들이 백인인 프랑스 농장주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채찍질은 기본이고 남자 노예를 거세
시켰으며 땅에 엎드리고 마차를 달려서 팔다리를 분질러 버렸고, 화형을 시키고 물에 수장시키며
가마솥에 산채로 넣은후 불을 피워 삶아 죽이며 원형 경기장에 넣고 사냥개를 풀어 물어 죽였습니다.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후 1794년에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자 독립운동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 튀르는 혁명정부의 자유 평등 박애에 희망을 걸었으니, 1107년 고려 윤관이 잡아둔 허정
(許貞)·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내겠다며 화의를 하자고 여진족 추장 400명을 초대해 잔치를 열어 술을
먹인후 몰살시킨 것처럼 연회에 초대해 남치해서 투옥시키고 옥사시키니 절망한 아이티인들이 궐기합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1801년 11월 3만명의 원정대를 아이티(산도밍고)에 파견해 식민지 재탈환과 노예제
부활을 시도하였으니..... 아이티 독립군을 붙잡아 가혹하게 처형하는데, 배의 선창 짐칸에 아이티인
들을 실은후 “이산화 황” 가스를 살포해 죽이고 빈배로 돌아오길 반복하니, 해변은 파도에 시체들이
떠밀려오는데 나폴레옹을 존경했다는 히틀러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가스실” 을 만들었는가 합니다?
프랑스 원정대의 초기활동은 순조로운 편이었으나 2년만인 1803년 11월에는 최종적으로 아이티
점령을 포기하고 철군하는데..... 아이티 정복에 실패한 이유는 노예제 부활에 대한 현지인들의
강한 저항과 “황열병” 그리고 강한 해군력을 가진 영국 해군의 강력한 해상 봉쇄 때문이었습니다.
황열병은 모기에 의해 전파되며 남미 지역에서 유행하는 바이러스성 질병인데 이 병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으니 초기 파병 군인 33,000명 가운데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은 3,000명뿐이었며, 또한 영국군이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프랑스 선박에
대해 해상봉쇄에 나서자 기세가 위축되면서 요청받은 추가 파병을 망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이티(산도밍고)는 1804년 1월1일 정식으로 독립했으며 최초의 흑인공화국이 되었으니 이로써 아이티
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독립한 국가가 되었으며, 노예제 폐지를 법령화한 최초의
북아메리카 국가가 되었으니, 아이티의 독립은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이티는 흑인 노예들이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치는 대혁명을 통해 중남미 최초로 독립국가가 됐으니
흑인 노예의 혁명으로 건국된 지구상 유일한 나라이기도 한데, 이후 아이티는 베네수엘라
· 콜롬비아 · 에콰도르 · 파나마 · 페루 등이 독립할 수 있도록 병력과 무기에 자금을 지원 했습니다.
그런데 독립한지 21년이나 지난 1825년에 부르봉왕조 루이 18세의 프랑스는 아이티 수도
항구에 군함을 정박시킨후 자기들이 설탕과 커피농장의 나라 아이티를 잃었으니.....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면서 1억 5천만 프랑이라는 천문학적이 배상금을 요구하면서
만약 불응하면 수도를 불바다로 만들고 프랑스군이 상륙해 모조리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이때 아이티가 거부했더라면 프랑스는 함포사격으로 수도를 불바다 잿더미로 만든후 프랑스군이 상륙해
아이티는 다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을 것이니.... 아이티 정부는 굴복해 요구조건을 수락했는데 워낙
거금이라 한꺼번에 갚을수 없으니 분할 지급하는데, 대부업체처럼 해마다 비싼 고율의 이자가 붙는지라
쉽게 줄어들지 않아 다 갚은건 122년만인 “1947년” 이니 이게 오늘날 아이티가 최빈국이 된 이유입니다!
2. 멕시코(1-A 형: 자력으로 독립전쟁)
스페인의 식민지 멕시코에서는 스페인 본토의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멕시코 땅에서는
포도와 올리브 재배를 전면 금지하자.... 이달고 신부는 1810년에 반란을 일으키지만
멕시코에서 태어난 백인 상층 “크리올” 들이 스페인군에 협조하니 바로 진압당했습니다.
이후 스페인이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하자 처음엔 독립 운동에 회의적이던 멕시코 크리올들도 아이티에서
반란이 성공하자 자신감을 얻고 반스페인 독립 투쟁에 합류하니..... 이달고 신부에 이어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4년간 항쟁하지만 결국 1815년 식민지군 사령관인 아구스틴 데이투르비데에게 패배 합니다.
1821년 반란군을 진압했던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보수파로 왕권신수설 신봉자였는데, 나폴레옹이
물러난 이후 스페인 본국이 급속히 자유주의적으로 개혁되는 것을 보고는... 누에바에스파냐에 충성
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멕시코 독립을 주장하던 반란군과 화해한 후에 멕시코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후 1846년에 미국과 전쟁이 벌어져 다음해 수도 멕시코시티가 함락당해 항복하는데 멕시코는 패전
으로 자국 영토의 55% 를 미국에 빼았겼으니 텍사스, 캘리포니아, 유타, 네바다 4개주와 뉴멕시코,
애리조나주의 대부분, 콜로라도주의 절반과 와이오밍주 남부 지역, 캔자스와 오클라호마 일부 입니다!
3. 인도네시아(1-C 형: 제3국 점령후 식민지 본국과 독립전쟁)
네델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는 일제가 항복한후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해 수카르노를 대통령
으로 선출했으나 동쪽에는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자바섬과 중앙 인도네시아는 영국군이 상륙
했는데.... 네덜란드는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됐는데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연합국의 일원이자 식민제국주의 열강으로서 네덜란드의 동인도 재점령을 지지
했으니.... 어처구니 없게도 식민지 민중들은 네덜란드의 합리적 통치를 여전히
'원하고 있을 것' 이라고 오판했기 때문인데, 1945년 말 동인도에 진주한 영국군
은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을 단순 소요로 치부하고 네덜란드를 도와 진압에 들어갑니다.
영국군은 인도네시아 인민치안군을 비롯 민중들의 무장해제를 명했으며 무기를 제출하라는
통보를 내리니 급기야 인도네시아 독립군은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어이
영국군 놈들! 인도네시아의 성난 황소들에게 흰옷을 적실 붉은피가 흐르는한 절대 항복
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신은 가장 위대하시다 ('Allahu 'Akbar)! 자유를!"
1945년 10월 27일 영국군과 인도네시아 독립군 간에 전투가 시작되었으니 수라바야 전투
에서 영국군은 12만명에 달하는 독립군에 맞서, 3만명의 정규군 및 해군의 엄호와 전차
와 전투기를 동원해서 힘겹게 승리하는데.... 영국측 사상자는 최소 600명, 최대 4000명
이상이었고 무장과 훈련이 빈약했던 인도네시아군은 훨씬 큰 피해를 입었으니, 전사자
는 6,000~ 16,000명이었고 또 20,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피란민은 20만명이었습니다.
중부 자바의 암바라와 전투에서는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고 암바라와 지역을 점거했지만, 11월 말
시작된 독립군의 조직적인 공격으로 전투에 패배하여 암바라와를 인도네시아군에 넘겨주고
퇴각하는데.... 이때 영국군 병사들은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일본군 부역자들이 세운 단명할
괴뢰국이고, 극단주의자들에 불과하다는 아주 편향된 네덜란드측 정보를 들은지라 당황합니다.
자기들이 싸운 상대는 진심으로 조국 인도네시아 독립을 원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을 침략자로 인식하고
죽기살기로 처절하게 대항했던 것이니.... 자바에 동원된 인도 제국군들은 자신들 역시 식민지인
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모순을 느끼기도 했으며, 인도네시아군으로 전향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영국은 독립파가 추축국 잔당이라는 판단이 오판임을 인정하고, 네덜란드 식민지 유지는 불가능한 만큼
인도네시아를 독립시킨뒤 친서방 진영으로 편입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으니, 영국 세력은 1946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사이의 협상을 중재하면서 1946년 11월과 12월에 군대를 모두 철수 시켰습니다.
그 전에 1945년 말부터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에 상륙하는데, 1946년 11월에는 총계 12만
으로 자바에만 5만 5천에 이르렀으니 자카르타(1946년 1월), 보고르 등 주요도시 지역을
재점령하고는 기존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민정부를 재수립했으니..... 인도네시아군은 1946년
초 자카르타 방어를 위해 노력했으나 8천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고 도시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1946년 시점에 모든 도시가 재점령된 것은 아니어서 자바 중부 욕야카르타 나 수마트라
동부 프칸바루, 잠비처럼 인도네시아가 계속 보유한 도시도 있었으니, 특히 수마트라
서북부 아체 지역은 반네덜란드 정서가 워낙 강해서 네덜란드군이 한번 반다아체로
진입을 시도했다가 민심이 흉흉해 쫓겨나온 후에는 다시 진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메단에서는 1945년 10월 9일 네덜란드-영국 연합군이 도시로 진입해 인도네시아군과 전투를
벌였으니 도시를 반분한 상태에서 12월 중순부터 전투가 격해졌고, 1946년 4월 결국
인도네시아군은 패배해 도시를 내주고 후퇴했는데..... 마카사르를 비롯한 남술라웨시
에서도 1946년 4월 초까지 귀환한 네덜란드군이 독립파에게 행정기구를 빼앗는데 성공합니다.
남술라웨시에서는 1946년 12월이 되면 네덜란드가 통제 가능한 지역은 마카사르시 영역 뿐인
상황으로까지 가기도 했으니.... 네덜란드는 비정규전 전문가 라이몬트 베스테를링이 이끄는
특공대를 투입해, 전쟁 범죄에 해당하는 잔혹한 즉결처형을 하니 네델란드측 주장은
1,500명의 인도네시아인을 살해했다지만 인도네시아측은 40,000명이 학살됐다고 주장합니다.
영국군이 반둥에서 대규모 공세로 나오자 인도네시아군과 민병대, 남부 지역의 민간인들은 3월 23일
밤, 함께 도시를 떠나면서 반둥 남부의 가옥과 상점 등에 대규모 방화를 벌여 도시 남부를 초토화
하니 소위 반둥 불바다(Bandung Lautan Api)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반둥 시가지의 3분의
1이 파괴되고 민병대 2명은 다이너마이트를 안고 영국군 탄약고로 뛰어들어가 자폭하기도 했습니다.
1946년 11월 15일, 영국이 물러나기전 중재로 인도네시아 측과 네덜란드 측은 링가르자티
협정을 맺었으니.... 이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자바, 마두라, 수마트라 지역에서 신생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반대로 인도네시아는 보르네오와
동인도네시아 (술라웨시, 말루쿠, 소순다 열도) 에서 식민 정부를 인정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마르가라나의 푸푸탄'(Puputan Margarana) 으로 불리게된 전투에서 응우라 라이의 인도네시아군
96명은 수적으로 우세한 네덜란드군에 4배가 넘는 전사자를 강요했으나 결국 패배했고 응우라 라이
중령등 96명 전원이 전사하였는데 이후 위협적인 인도네시아군 세력이 사라지고 발리가 안정화됩니다.
네덜란드군은 1947년 7월 20일,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12만 병력을 동원하여 링가르자티 협정
을 깨고 전면 공세에 나섰으니.... 이 작전은 네덜란드 측의 전략, 전술적 대성공이었고
인도네시아 측 사상자는 최대 15만에 달했지만 네덜란드 측 사상자는 6천명에 불과 하였습니다.
8월 25일 미국은 휴전 요구결의안을 안보리에 제안해 통과시킨후 중재자로 나서자 네덜란드
도 무시할 수 없었으니... 분쟁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킬 위원회를 만드니 네덜란드는
벨기에인 대표를, 인도네시아는 호주인 대표를 선정했고 중립 측으로는 미국인
대표가 참가해 영연방처럼 네델란드 왕 아래에서 인도네시아연방으로 독립을 이루게 됩니다.
4. 베트남(1-C 형: 제3국 점령후 식민지 본국과 독립전쟁)
베트남은 5~30만 몽고군의 침략을 3차례나 물리쳤으나, 1406년 명나라 대군의 침략에 패해
식민지가 되었는데 1428년 레러이가 명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레왕조를 세워 독립했고,
1780년 청나라 20만 대군이 침공해 수도 탕롱을 점령해 독립을 위협했으나 1788년 베트남
후에에서 왕위에 올라 떠이산 왕조를 연 응웬후에는 청나라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지켜냅니다.
그후 베트남은 1885년에 프랑스군에 점령당해 식민지가 되었고 1941년에 일본군이 점령했으며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9월 2일 호치민이 하노이에 베트남국가 수립을 선포했지만
북위 16도 북부는 중화민국군이, 남부는 영국군이 진주했으며, 북부를 지배했던
중화민국군은 국공내전 탓에 1946년 4월에 장제스 총통은 베트남을 프랑스에 양도합니다.
베트남 남부는 영국군이 양도해주니 프랑스가 다시 지배를 시작하는데 프랑스는 1946년 3월, 베트민
과 하노이 예비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자유국가로 인정했으니, 프랑스 연방 내 자치령으로 남는
것을 의미했고 프랑스군이 1952년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것으로 협상이 됐으나 이는 시간을
벌려는 프랑스 눈속임으로 베트남에 공산주의자들이 통치하는 것을 묵인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호찌민 역시 이 협상을 두고 공산당 내부에서 매국노라고 욕을 들어먹고 있던 상황이었고, 양국
간에 전면전쟁이 벌어지는데.... 1946년 11월 20일 프랑스가 함포사격으로 베트민군을 공격
하면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하는 하이퐁 사건이 터지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됩니다.
1946년 12월 19일 부터 프랑스군은 통킹 삼각주 일대 요새와 하노이의 호치민 관저 및 요충지
를 습격했고 1947년 2월 중부 다낭, 후에에 상륙했으며... 프랑스가 코친차이나 지역에
세운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은 프랑스의 괴뢰국가로 월남이라고 하니 1949년
바오다이 황제가 취임했는데 그는 1946년에 홍콩으로 망명했다가 3년 만에 돌아온 것입니다.
한편 남베트남은 온건한 독립을 준비중이었으니 프랑스군은 응우옌 왕조의 황제를 명분
으로 친프랑스 정부를 세우려 한 것이니... 1946년 성립된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자치
공화국을 이어받아, 1948년 베트남의 여러 세력과 프랑스가 절충을 한 결과, 같은
해 5월 27일에 잠정 정부로서 베트남 임시 중앙정부를 설립하니 바로 괴뢰국 월남입니다.
프랑스의 재식민지화 정책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베트민군의 대반격과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오는 재정적인 문제에 국제여론마저
악화되면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니....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서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에게 프랑스군은 대패해 철수하게 되니 그후 제네바 협정이 맺어집니다.
그러나 남북베트남 총선거를 하면 베트남에 합법적인 공산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
한 미국이 개입하니 남베트남이 선거에 응하지 않는지라... 베트남이 평화적으로
통일될 기회를 놓치게 되자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자들은 테러 공격을 감행하였고습니다.
1960년 12월,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 이란 '비엣콩(베트콩)' 빨치산을 결성하니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 과 중국, 소련의 원조를 받아 더욱 세력을 확장합니다.
미국은 중국 공산화와 한국 전쟁 등으로 공산주의가 동남아로 퍼질까 우려해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을 거짓으로 날조 조작해서 하노이를 폭격해 불바다로 만드니 이른바 추악하고 더러운 전쟁인
월남전쟁이 벌어지고.... 결국에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패전이라는 치욕을 남긴 채 1973년 파리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떠나니 1975년 월맹군의 남침으로 전쟁개시 50일 만에 베트남은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5. 콩 고(1-B 형: 독립전쟁에서 제3국 도움)
벨기에국왕 레오폴드 2세는 콩고를 개인 사유지로 삼아 상아, 고무 등 자원을 손에 넣기위해 무자비한
치를 자행했으니,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콩고 원주민들은 손목이 잘리는 등의 가혹한 형벌을 가해
원주민이 100만명이나 사망해 국제적 비난을 받자, 벨기에 정부가 콩고 자유국을 레오폴드
2세로 부터 몰수해서는 벨기에령 콩고를 수립하니 막대한 착취를 대가로 벨기에는 부를 누렸습니다.
1950년대에 미국과 소련은 벨기에령 콩고를 독립시키라고 벨기에에 압력을 넣으니 벨기에는 미국에
렌드리스 등 빚을 지고 있었던지라 1955년부터 단계적인 독립안을 마련했으나 너무 더딘지라
노동조합과 학생 운동가들은 경찰과 대치하며 독립시위가 벌어졌으니.... 원주민들은 끊임
없는 투쟁 끝에 1960년 3월에 킨샤사 콩고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하게되나 내란으로 이어집니다.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던 루뭄바와 벨기에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 차별 백인 정권의
지원을 받던 촘베,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받던 카사부부 간의 삼파전으로 번졌으니....
쿠바 혁명후 체 게바라가 콩고 내전에 참전해 게릴라 훈련 및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체 게바라는 콩고 인민군의 무능과 사치에 학을 떼고는 쿠바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제프 모부투가 잠정정권을 수립해 루뭄바를 죽이고 1963년 카탕가의 촘베를 진압
했으나 1964년 촘베가 콩고민주공화국 실권을 쥐게 되자 1965년 모부투는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저 유명한 콩고 내전은 최대 20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일단락 되는데...... 독재자로서 정권을
장악한 모부투는 국명을 자이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는 부패와 사치, 실정으로 '도둑
정치' 라는 악명을 얻지만 냉전이라는 국제환경에서 반공주의자로 행세해 권력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1998~2002년에 아프리카의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불린 2차 콩고 전쟁이 일어
나게 되니 이 콩고 전쟁에는 8개 아프리카 국가가 관여하고 25개의 무장세력이
참전 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피해를 낸 전쟁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나미비아, 짐바브웨, 앙골라, 차드는 민주콩고 정부의 편에 섰고, 우간다와 르완다, 부룬디는 카빌라
에 반대하는 반군들을 지원하면서 반대편에 섰으니.... 르완다와 부룬디는 동부 지역의 광물에
눈독을 들이고 서로 충돌하는 사태까지 발생했고 반군들도 자원 때문에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6. 앙골라(1-B 형: 독립전쟁에서 제3국 도움)
포르투갈 식민지 앙골라는 1961년부터 1974년까지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단체들이 전쟁을
벌였는데.... 브라질은 뺏겼지만 포르투칼은 1934년에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포르투갈령 인도(고아) 와 마카오 식민지 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해외
식민지를 전부 합치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의 영토를 합친 것만 했습니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 부터 해외식민지를 개척해 온 식민지 경영에 도가 튼 나라였으니 세계 각지에
거점을 건설하고 식민지 착취를 통해 얻은 지하자원과 농산물 등으로 국부를 축적하였는데....
1960년대에 들어 무장 게릴라가 출현하기에 이르렀으니 주로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올뎅 호베르투를 지도자로 하는 우파 성향의 앙골라 인민동맹(UPA)을 지원하니 1961년 2월 4일,
콩고에 거점을 둔 UPA 게릴라가 국경을 넘어 앙골라 북부에 침공, 형무소를 습격하여 경찰관 7명과
현지인 40명을 살해한데 이어 3월 15일엔 앙골라 북부를 침공해 농장, 정부 청사, 시장에 불을
지르니 백인 1천명과 흑인 6천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13년에 걸친 식민지 전쟁이 시작됩니다.
미국의 압력과 군부의 반발을 물리친 포르투칼 총리 살라자르는 해외 영토를 사수
한다는 결의하에 육군장관직을 겸임했으며 대규모 증원부대를 아프리카에 파견
하였으니... 모든 성인 남성은 3년간의 병역의무를 지게 되었으며, 대부분이
식민지에서 싸울수 있도록 소집령이 내려지는 등 군국화 현상이 농후해져 갔습니다.
개전 당시 앙골라는 중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 무력투쟁이 전개되었는데 게릴라들이 사회
기반시설 파괴 및 민간인 살해등 활동지역에서 혼란을 유발시키자, 포르투갈군은 '사회 혼란
을 유발시키는 게릴라에 맞서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함께 싸운다' 는 프란시스쿠 고므스
포르투갈 앙골라 주둔군 사령관의 공투(共鬪) 전략에 따라 지방 농민을 회유하는데 성공합니다.
동맹국인 남아공 백인정부의 지원도 가능했던 덕에, 토벌작전을 수행할수 있었으니 모잠비크도 동맹국
남아공과 로디지아, 그리고 흑인국가였음에도 반공주의에 친남아공, 친로디지아, 친포르투갈 노선을
견지하던 말라위의 지원을 얻은 포르투갈군이 북부 지방에 게릴라들을 밀어붙이고 있었고 카보
베르데나 상투메프린시페는 바다 상에 고립되어 있는 섬나라라는 여건상 게릴라 활동이 불가능했습니다.
1970년대 초가 되면 포르투갈의 군사적 능력은 한계에 이르렀지만 포르투갈군의 공세로 게릴라
는 산간벽지로 밀려났고, 앙골라의 모든 도시와 대부분의 농촌을 장악한 포르투갈군이 인종을
불문하고 주민들을 군사적 위협으 로부터 보호하고 있었으니 후반기에 미국, 프랑스, 영국,
서독, 네덜란드, 이탈리아, 그리스등 서방 국가들도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배를 인정합니다.
남아공, 로디지아, 말라위 지원을 얻은 포르투갈군에게 게릴라군들이 밀리던 모잠비크, 앙골라등 식민지들
과 달리 기니비사우는 총력전에 가까운 양상으로 전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으니 중국, 쿠바, 소련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인접국인 세네갈과 기니의 지원을 받은 게릴라가 전세를 역전시켰고 앙골라,
모잠비크에서는 남아공이 포르투갈을 지원해준 것과 달리 기니비사우 전선에서는 지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포르투갈군은 초기에 '특수 경보병대' 라 불리는 대 게릴라전에 특화된 특전부대를 투입했으니
페르난두 호블르스는 '효과적인' 식민지 게릴라 토벌로 명성이 자자했으니 포르투갈군은
공세를 펼쳐 UPA 의 앙골라 내 주요 거점인 페드라베르드를 탈환하고 콩고-킨샤사 지역으로
UPA 게릴라를 몰아앴고 루안다 동북쪽의 뎀부스 지역을 점령한 MPLA를 내쫓는데 성공합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61년 6월 안보리 결의 163호를 통과시켰는데, 이 결의는 앙골라를 비자치
지역으로 규정했으며 포르투갈군에 앙골라인에 대한 핍박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으니 미국,
소련, 중화민국을 포함한 9개국이 찬성했으며, 같은 유럽 식민제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기권했습니다.
포르투갈군은 앙골라 전선에서 승기를 잡았는데, 첫째는 앙골라의 중심부와 이웃 국가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 외부세력이 게릴라를 지원하기 어려웠고 두번째는 저항세력 내부 갈등이 있으니
세 기둥인 MPLA, FNLA, 그리고 UNITA는 이념 갈등에다가 서로 다른 부족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 세력은 포르투갈에 저항하는 것만큼이나 서로 싸우고 견제하는데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장기간 지속된 식민지 전쟁으로 국가경제는 파산 직전이었고 포르투갈 국민 사이에
반전 사상이 퍼져나갔으니 1970년대에 들어서는 게릴라 활동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작전이 감행되었고, 국가 예산의 44% 가 군비로 지출되었으며 모든
남성은 군대에서 3년 이상에다가 최소 2년 이상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복무해야 했습니다.
징병에 반대한 포르투갈 젊은이들이 해외로 탈출했고 포르투갈군은 식민지 현지인을 징집하기 시작했으며
전쟁이 시작한 1961년 식민지 흑인들이 포르투갈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쟁
이 끝날 무렵인 1974년 4월에는 50% 를 넘어섰으며 전쟁 말기에는 초급 장교로 진급한 흑인도 많아집니다.
1974년 4월 25일 새벽, 좌익계열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된 '국군 운동' 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리스본과
포르투갈 전국의 전략 요충지를 점령했는데 초기에는 일부 병력만이 쿠데타 세력에 동조했으나
점차 그 세가 불어났으며 정부에 충성하는 부대는 병력을 출동시키길 꺼리자 카에타누 총리는 투항
하고 쿠데타 세력에게 추대된 스피놀라 장군에게 권력을 이양하니 '카네이션 혁명' 이 일어난 것입니다.
전쟁과 전시 체제에 지친 리스본 시민들은 군인들의 궐기에 환호했으며 좌파 장교들이 중심이
된 임시정부는 해외 식민지들을 모두 포기하기로 결의하자, 포르투갈 군대와 관료들이
식민지를 포기하고 떠났으며 해외에 나가있던 수십만의 포르투갈 노동자들, 소상공인들,
그리고 농부들도 포르투갈로 귀국했는데 포르투갈 본토 사람들은 이들을 '귀환자' 라 불렀습니다.
카네이션 혁명에 의한 혼란은 식민지 주민과 군 관계자의 대규모 탈출을 초래하였으니 최대의
식민지인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는 백인과 흑인을 불문하고 총 1백만명 이상의 주민이
떠났는데, 이 일련의 대탈주는 역사상 평시에 행해진 집단 이주 가운데서도 최대 규모였습니다.
7.알제리(1-A 형: 자력으로 독립전쟁)
1945년 5월 1일 메이데이에 시위대가 프랑스 식민당국과 충돌해 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사망자
5명이 발생했으며 스티프주 세티프 시에서는 참극이 발생했으니... 5천명에 달하는 무슬림
시위대가 프랑스인 상점가를 행진하자 경찰과 헌병대가 막아섰는데, 독립을 상징하는
알제리 깃발을 빼앗으려고 하는 도중에 쌍방간 총격전이 시작되어 대규모 충돌이 벌어집니다.
프랑스 경찰과 헌병대에서 일부 총상자가 발생하고, 시위대에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이때 알제리 깃발을 들고 있다가 머리에 총을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한 12살 소년 사르
알 부지드는 이후 알제리 독립의 상징이 되었으며, 분노한 시위대로 인해 주변 지역으로
폭동이 확산되면서 비무장 민간 유럽인에 대한 공격으로 102명의 유럽인들이 사망했습니다.
프랑스는 반항을 무력으로 제압할 명분을 주는 좋은 기회로 여겼으니 세티프에는 계엄령이 선포
되었고.... 프랑스 경찰뿐 아니라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정규군, 알제리인-튀니지인-모로코인-
세네갈인 식민지 부대에 외인부대 까지 보복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심지어 이탈리아군
포로들까지 무장을 지급받고 동원되었고 백인 민간인들로 구성된 민병대까지 가담합니다.
본보기를 보이기위해 케라타 라는 해안 마을에는 해군 순양함 뒤게-트루앵 함이 함포사격을 하고 내륙
의 40개 마을에는 공군 급강하폭격기가 폭탄을 퍼붓는 학살을 벌였으니..... 당시 인구 4천명이
넘은 마을이 알제리 깃발을 내걸었다고 프랑스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4천명 중에 단 3명만이
살아남은 참사” 가 벌어지기도 했으니 99.9%가 죽은지라 그럼 조선 총독부 보다 훨씬 더 잔혹했습니다.
5월 16일까지 계속된 학살로 죽은 알제리인의 숫자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1,020~ 1,300명이라는
숫자를 공식적으로 내세웠으나 그 뒤에 2만명으로 늘렸으며, 알제리인들은 45,000명은
된다고 주장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에 지원해서 나치 독일군과 싸우고
돌아온 알제리인 병사들이 이 꼴을 보았으니...... 다수가 FLN 에 투신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이들(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북아프리카 식민지인의 숫자
는 12만 3천명임)도 속속 가담했으니.... 실전 경험을 가진 이들이 참여하면서 오합지졸이던
FLN 은 군조직을 잘 정비하고 프랑스 군경을 괴롭히게 되니, 알제리의 초대 대통령 벤 벨라
와 제2대 대통령 우아리 부메디엔은 2차대전에 참전한 프랑스 육군 부사관 출신이었습니다.
FLN 이 1955년 필립빌 학살을 일으켜 100여명의 프랑스 민간인을 죽이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알제리인 1천명 이상을 죽이는 보복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는데.... 이“10배 비율”은 서양에서는
공통적인 것이니,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에서 승리해 빼앗은 필리핀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이 1명 죽으면 미군은 근처 마을로 들어가 무고한 일반 청년 10명을 죽이는 것과 유사합니다!
1957년 진행된 알제 전투에서 프랑스는 수만명을 불법 체포해서 3천명을 처형하는 극악무도한
방식으로 FLN 의 내부 조직망을 일망타진하는 군사적 대승을 거두었으나.... 부녀자와 노인
까지 무차별로 체포해 고문한 것이 폭로되면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어 도덕적
으로는 패배하게 되었고, 병사와 장교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져 근무 거부, 탈영이 이어집니다.
독립 운동에 유화적이던 프랑스 좌파 사회당 정권의 르네 코티는 여론의 반발과 프랑스 정규군
의 쿠데타 위협 속에서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며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니 프랑스군도
67만 대군중 9만여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며 200만에 이르는 알제리인들과 6천명
에 이르는 프랑스계 알제리인들이 사망하면서 프랑스 여론도 전쟁에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게릴라에 가담한 프랑스 탈영병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우리는 나치 SS 와 다르다!" 라며 나름
자부심을 지녔으며,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먼 훗날 우리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증명
해 줄 것입니다" 라고 밝혔는데, 1956년 8월 말, 프랑스군 내부에서 벌어지는 알제리인들에
대한 고문에 항의하는 뜻으로 자크 파리스 드 볼라르디에르 장군은 자진해서 군복을 벗었습니다.
1956년 5월 알제리 제8공수 연대에 징집된 노엘 파블리에르 육군 하사는 약식 처형을
앞둔 알제리인을 풀어주고 탈영해 알제리 민족해방군에 들어갔고, 10개월후 튀니지
로 넘어갔으니 1928년 3월 31일의 법 90조에 따르면, 원대 복귀 불이행은 1개월
에서 1년의 구금형에 처할수 있었으니 탈영으로 두차례의 궐석 재판을 받았습니다.
또한 좌파 성향의 프랑스 지식인들은 아예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 기사를 실은 신문을 발행하거나
적인 FLN 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고, 알제리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프랑스군에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된 알제리인들을 무료로 변호해 주는 변호사가 되기도 했으니, 이들은 반역자
라며 프랑스군이나 정부로 부터 탄압을 받았고 프랑스 정부의 암살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내 좌-우익간 여론이 분열되며 피해가 누적되어 갔지만 1957년의 알제 전투에서 프랑스는
다시한번 결정적 승리를 거두면서 알제리 전쟁의 행방은 오리무중으로 치달았으니..... 이 와중
에 1958년 5월, 알제리에 대해 유화적인 중도우파 플림맹 정부가 출범하자 알제리 주둔군
을 시작으로 군부는 총궐기하여 정부를 붕괴시키는 한편 드골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추대합니다.
드골 정부는 초기에 강력한 군사작전으로 FLN 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실시하는 한편 협상
을 제시했으나.... FLN 이 호응하지 않고 여성 해방정책 등으로 알제리 내부 프랑스
지지 세력이 확고하다는 오판 속에서 국민투표로 승부가 가능하다고 여긴 드골이
1959년 "알제리의 운명은 알제리인이 결정한다" 는 파격적인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격렬히 반발한 지휘관들을 숙청한 드골은 자신의 알제리 정책을 강행하였고, 드골에 의해
1961년 사실상 평화협정 체결이 확정되자... 군 내부 사조직인 OAS 소속 극우파 장군
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알제리에 주둔하였던 제14, 18 공수연대 외 제1 외인공수연대를
동원해 알제리의 주요 전략거점을 수시간 동안 무력으로 장악하는 군사 반란을 일으킵니다.
정권을 잡은 드골 정부는 알제리에 "1. 알제리는 프랑스의 한 주가 되며 프랑스인들과
동등한 혜택을 받는다. 2. 알제리는 프랑스의 자치 공화국이 된다. 3. 알제리는
국민투표를 통하여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된다" 의 세가지 제안을 내놓았고, 알제리
독립 세력은 이에 3번안을 선택하여 1962년 에비앙 합의를 통해 독립을 쟁취합니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병력 340,000명 중에 141,000~153,000명이 전사하고 160,000명이 부상
했으며.... 민간인은 1천만 인구 중에 무려 210만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알제리측의 주장이니
좀 과장됐다고 본다면 실제로는 인구의 15% 인 150만명 정도의 알제리인이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프랑스군은 670,000명과 아르키(알제리계 프랑스인) 260,000명등 930,000명 으로
프랑스군 29,000명이 전사하고 65,000명 부상했으며 아르키는 30,000~90,000
이 전사했고 또 프랑스계 알제리 민간인 3,000~ 6,000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기에 정석적인(?) 진압을 시도하던 프랑스군은 FLN 의 게릴라전에 솟친 나머지 방향을 전환
하여 FLN 과 똑같이 암살, 테러, 전보다 더한 학살로 무자비하게 대응했는데...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프랑스군이 똑같은 전법으로 나서자 FLN 의 활동은 급격하게 약화되었습니다.
알제리 독립 전쟁에서 여성들이 대거 민족해방전선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이 덕분에 알제리는 다른 보수
이슬람 국가들에 비해서 여성 인권이 진보적으로 보장받는 결과를 낳았으나... 인구 대다수인 아랍계
와 오랫동안 살아오던 이마지겐(베르베르인)들 사이의 갈등이 고민거리로 남았는데, 해안지대에 살며
프랑스어를 쓰는 아랍인 상류층이 척박한 내륙에 사는 베르베르인들을 촌놈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