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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달항아리문화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항아리
ㆍ직지심체요절 :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보관돼 있습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해당국가에 있지 않은데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일한 유산이기도 합니다.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금속활자로 간행한 책으로, 고려 말에 국사를 지냈던 백운 스님이 선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를 모아 만든 책입니다. 원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입니다. 이를 줄여서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 ‘직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세계 최초의 위대한 유산, 직지심체요절이 프랑스에 가 있게 된 사연이 참 허무합니다. 이 책은 구한말,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를 지낸 플랑시라는 사람이 정식으로 구매했고, 우리나라는 이 위대한 유산을 돈을 받고 판매해 프랑스로 가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몇 단계를 거쳐 국립도서관에서 소장 중입니다.
한국 정부가 파리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까지는 박병선 박사의 도움이 컸다. 1975년 박병선 박사는 파리 국립도서관의 촉탁직원으로
ㆍ왕오천축국전 : 통일신라의 혜초가 727년경에 지은 한국 최초의 해외문명 기행서로, 혜초가 4년 동안 인도, 아랍,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1908년 중국의 돈황 석굴 장경동에서 프랑스 동양학자이자 고고학자인 폴 펠리오에 의해 발견돼 프랑스로 들어가게 됐고, 이 역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입니다. 이는 8세기 인도나 중앙아시아를 연구하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ㆍ외규장각 도서 :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역할을 한 곳이 외규장각입니다. 이곳에서는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 내용을 정리한 의궤를 비롯해 총 1,000여 권의 서적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66년 고종 3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일부 서적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에 타 사라지게 됩니다.
이 도서들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는데 1992년, 정부는 서울대로부터 받은 191종 279권 외규장각 도서목록을 프랑스에 전해 도서 반환을 요청했습니다. 1993년 9월 한국·프랑스 정상회담에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경부고속철도부설권을 프랑스의 테제베(TGV)가 따내기 위해 ‘휘경원원소도감의궤’ 1권을 가지고 오는 등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약속했지만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민간단체, 시민 등 이의 환수운동이 다각적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편 문화재청에서는 2008년 11월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외규장각 도서 유일본 30권 등에 대한 원문 이미지를 문화재청 국가기록유산포털 사이트(
한국 정부가 파리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까지는 박병선 박사의 도움이 컸다. 1975년 박병선 박사는 파리 국립도서관의 촉탁직원으로 한국본 도서를 정리하던 중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하여 국내에 알렸고, 1985년에는 규장각, 장서각,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의궤를 조사하고 쿠랑의 『한국서지』에 기록된 사항을 비교하여 『조선조의 의궤』(한국정신문화연구원)라는 책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최초의 종합목록집으로, 2002년 실사단이 파리에 갔을 때에도 이를 참고하였다.
1993년 9월 14일, 한불정상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미테랑 대통령은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를 “교류의 방식으로 우리나라에 영구대여(永久貸與)한다”는 원칙에 합의하였고, 다음날인 9월 15일 미테랑 대통령은 합의를 실천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으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상권 1책을 반환하였다.
1998년, 런던에서 개최된 ASEM 총회 기간 중 양국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때 김대중 대통령은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촉구했고, 이후 교섭 대표의 협상은 양국을 오가며 4차에 걸쳐 전개되었다.
2000년 10월 19일, 프랑스 시락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양국 정상 사이의 외규장각 문제에 관한 기본 원칙에 합의하였다. 프랑스 소장 어람용 의궤를 국내 비어람용 필사본과 교류하며, 프랑스에만 있는 유일본은 프랑스에 없는 유사한 시기의 비어람용 필사본과 교류한다는 내용이었다.
ㆍ몽유도원도 : 1447년 조선 세종 무렵 화원 안견이 그린 두루마리 작품으로 안평대군이 꿈에 보았다는 도원의 모습을 화폭에 옮긴 것입니다. 안견 작품 중 현존하는 유일한 작품일뿐 아니라 그림 왼쪽에 안평대군의 명필로 붙어있는 발문 등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국보급 문화재입니다. 이 작품이 어떻게 일본으로 넘어갔는지 정확하진 않으나 1893년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측하고 있고, 현재 덴리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1947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측에서 몽유도원도 판매의사를 밝혔으나 너무나도 어려웠던 당시 국내 사정으로는 수천달러에 이르는 값을 지불할 수 없어 사 올 수 없었던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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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7년(세종 29) 작. 비단 바탕에 먹과 채색. 38.7×106.5cm.
일본 덴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에 도원에서 논 광경을 안견에게 말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 양식도 여러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특징은 그림의 줄거리가 두루마리 그림의 통례와는 달리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전개되고 있으며 왼편의 현실세계와 오른편의 도원세계가 대조를 이루고, 몇 개의 경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큰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왼편의 현실세계는 정면에서 보고 그렸으나 오른편의 도원세계는 부감법(俯瞰法)을 구사하였다.
안평대군의 발문을 보면, 안견은 이 그림을 3일 만에 완성하였다고 하며, 거기에는 안평대군의 제서와 시 1수를 비롯해 당대 20여 명의 고사(高士)들이 쓴 20여 편의 찬문이 들어 있다. 그림과 그들의 시문은 현재 2개의 두루마리로 나뉘어 표구되어 있는데, 이들 시문은 저마다 친필로 되어 있어 그 내용의 문학적 성격은 물론, 서예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그림은 안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 후의 한국 산수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ㆍ수월관음도 : 고려 불화인 수월관음도는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찾아가 불교의 도를 구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당시엔 중생을 구제해주는 관음보살의 자비심을 기대하며 수월관음도가 많이 제작됐는데 현재는 약 40여 점만이 국내·외에 전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3점만이 있고, 대부분 일본에 있으며, 교토 센오쿠 하쿠코칸에 있는 1323년 서구방 작품, 교토의 다이토쿠사 소장품 등이 많이 알려져 있고,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도 고려 수월관음도가 소장돼 있습니다.
--수월 관음도 [정가당문고미술관]
관세음보살은 치마를 입고 화불이 있는 보관(寶冠)을 썼으며 보관에서부터 전신을 감싸는 베일을 걸치고 있다.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반가부좌의 자세로 몸을 약간 틀어 오른쪽을 향한 채 바위 위에 앉아 있다. 관음보살의 앞쪽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이, 등뒤로는 대나무가 표현되어 있으며, 화면을 향하여 왼쪽 아래 구석에는 선재동자가 허리를 굽혀 합장한 자세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화면의 구성요소와 자세는 14세기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상과 공통되는 것으로 지극히 일반적인 모습이다. 윤곽과 세부의 묘선은 주(朱)로 긋고, 그 선을 따라 아주 엷게 다시 주로 중복하여 그어 입체감을 나타냈다. 베일은 바탕무늬인 마엽문을 백색 안료로 그리고, 윤곽과 주름선도 백색 안료로 그린 다음 그 선을 따라 금니로 겹쳐 그었는데, 다시 그 이중의 선을 따라 백색 안료로 엷게 바림질을 하여 질감을 나타내려 하였다. 베일에는 직경 2.3cm 정도의 고려 불화 특유의 연화당초원문(蓮花唐草圓紋)을 금니로 그려넣었다. 치마는 전면에 주를 칠하고 백색 안료로 거북등무늬를 그렸는데 그 위에 다시 먹선을 그어 뚜렷하게 하였다. 대체로 이 수월관음도의 표현과 기법을 종합하여 보면, 전체적인 형상이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고려 불화의 전통적인 기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매우 희귀한 문화재이다.
ㆍ오백나한화상도 : 석가여래의 제자 500명의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현재 일본 교토 지은원에 소장돼 있습니다. 수많은 봉우리와 계곡 속에 약 2~3㎝크기의 오백나한이 깨알같이 그려져 있는데 토굴 속에서 명상하는 나한, 토론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 나한들, 개울가에서 승복을 빨아 헹구는 나한 등 소박한 스님들의 일상이 담겨 있습니다. 현재 나라지키기 불교도 총연합회 대구지회에서 오백나한도 반환운동을 펼치며 고려불교의 호국정신을 이어받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ㆍ이천5층석탑 : 고려시대 제작된 이 탑은 높이 6.48m로 이천 향교 근처에 있었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이천향교 5층석탑이라 불렀습니다. 이 석탑은 조선총독부가 1915년 9월 경복궁에서 열린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에 전시한다는 명목으로 수탈해 가져간 뒤 3년 뒤인 1918년, 토목·건축사업을 하던 일본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가 이를 도쿄로 반출함으로써 고향 땅을 떠나게 됐습니다.
오쿠라라는 사람은 경복궁 동궁 자선당을 통째로 뜯어가는 등 수천 점의 조선 유물을 일본으로 가져가 일본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오쿠라 슈코칸을 개관한 사람입니다. 현재 석탑은 도쿄 오쿠라 호텔 뒤뜰 집고관(集古館) 한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천시에서는 최근 ‘이천5층석탑 되찾기 범시민운동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일제 강탈 이천5층석탑 환수 10만명 서명 운동을 벌이는 등 환수를 위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ㆍ조선왕실의궤 : 조선시대 왕실에서 거행된 여러 가지 의례의 전모를 소상하게 기록하고 그림으로 만든 서책인데, 대부분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궁내청으로 이관된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와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이 일본 궁내청에 소장하고 있는 조선의궤가 기존 2009년 11월까지 파악한 76종 158책보다 5종 13책이 추가된 총 81종 167책임을 밝혔습니다. 조선 왕실의 귀중한 기록이 일본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희소식이 들립니다. 시민단체와 정부의 노력으로 일본이 조선왕실의궤의 반환을 비공식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8월29일을 전후해 의궤 반환이 이뤄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파리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까지는 박병선 박사의 도움이 컸다. 1975년 박병선 박사는 파리 국립도서관의 촉탁직원으로 한국본 도서를 정리하던 중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하여 국내에 알렸고, 1985년에는 규장각, 장서각,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의궤를 조사하고 쿠랑의 『한국서지』에 기록된 사항을 비교하여 『조선조의 의궤』(한국정신문화연구원)라는 책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최초의 종합목록집으로, 2002년 실사단이 파리에 갔을 때에도 이를 참고하였다.
1993년 9월 14일, 한불정상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미테랑 대통령은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를 “교류의 방식으로 우리나라에 영구대여(永久貸與)한다”는 원칙에 합의하였고, 다음날인 9월 15일 미테랑 대통령은 합의를 실천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으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상권 1책을 반환하였다.
1998년, 런던에서 개최된 ASEM 총회 기간 중 양국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때 김대중 대통령은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촉구했고, 이후 교섭 대표의 협상은 양국을 오가며 4차에 걸쳐 전개되었다.
2000년 10월 19일, 프랑스 시락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양국 정상 사이의 외규장각 문제에 관한 기본 원칙에 합의하였다. 프랑스 소장 어람용 의궤를 국내 비어람용 필사본과 교류하며, 프랑스에만 있는 유일본은 프랑스에 없는 유사한 시기의 비어람용 필사본과 교류한다는 내용이었다.
ㆍ회암사 석가삼존도 :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아들 명종의 병세회복과 건강, 세자 탄생을 기원해 석가, 미륵, 아미타, 약사여래의 화상 총 400여점을 금화, 채화 등으로 제작해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 회암사에 시주한 불화 중 한 폭입니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1점, 일본에 4점, 뉴욕에 1점 총 6점으로, 조선시대 불교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미국 뉴욕 버크컬렉션에서 소장하고 있는 석가삼존도는 채색상태가 매우 선명하게 보존돼 있는데, 1990년 일본에서 발견된 것을 버크컬렉션이 구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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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버크컬렉션 소장 회암사 ‘석가삼존도'가 사진으로나마 국내에 첫 공개됐다.
미주 지역 한국문화재 소장 현황을 조사하고 있는 ‘해외 반출문화재 반환을 한 미국방문단'(대표 백창기 중앙신도회 명예회장)은 지난 8일 버크컬렉션을 방문 , 회암사 ‘석가삼존도'(세로 69.5㎝, 가로 33㎝) 를 관람하고 보존 상태를 확인한 뒤, 직접 촬영한 사진을 11일 언론에 공개했다.
이 ‘석가삼존도'는 오른 손을 들고 있는 중앙박물관 소장 ‘석가삼존도'와는 달리, 본존불의 오른 손이 길게 늘어져 있고, 채색도 붉은 빛이 많이 돌고 있다.
버크컬렉션 소장의 ‘석가삼존도'는 금니(金泥)로 쓰여진 허응당 보우의 글씨임을 나타내는 ‘청평산인 나암 (淸平山人 懶巖)', 원 소장처를 나타낸 ‘회암사(檜岩寺)란 글씨가 뚜렷했고, 불화의 채색들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등 보존상태가 아주 좋았다. 버크 컬렉션 관계자는 이 탱화를 소장하게 된 경위에 대해 “1990년 일본에서 발견되어 버크 컬렉션이 구입한 것”이라고 소장경위를 밝혔다.
이날 버크 컬렉션을 방문한 혜문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은 박물관 관계자의 양해를 얻어 예불의식(禮佛儀式)을 거행한 뒤, 버크 컬렉션 관계자들에 “ 2010년 완공예정인 회암사지 박물관의 개관기념 전시회에 전시될 수 있도록 임대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대해 박물관 관계자는 “본인이 현재 가부를 판정할 수 없지만, 박물관 내부의 논의를 거쳐 허가를 얻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며, “정식으로 공문으로 서면 요청한다면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은 “버크 컬렉션이 임대를 결정해 준다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품을 비롯한 일본등에 흩어진 4점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 긍정적으로 검토해 줄 것을 재삼 요청했다.
이번 방문단은 국회 문광위 소속 정병국 의원과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인 혜문스님, 백창기 조계종중앙신도회 명예회장, 이상근 사무총장, 부두완 문화재반환특별위 위원장, 권두안 회암사유물반환추진위 부회장, 이혁재 간사 등 7명으로 이뤄졌고 미국 현지에서 뉴욕지역사암연합회장 원영스님, 김정광 뉴욕지역신도회장 등이 합류했다.
<회암사 ‘석가삼존도'란>
명 종 20년(1565) 문정왕후가 그 아들 명종의 병세 회복과 건강 그리고 세자의 탄생을 기원하여 석가,미륵,아미타,약사여래의 화상을 각각 금화로 50점, 채화(彩畵)로 50점 등 도합 400점을 제작하여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 회암사에 시주한 불 화 중의 한 폭이다. 이 불화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1점 일본에 4점, 뉴욕에 1점 총 6점이 전래 되고 있으며, 조선시대 왕실발원과 불교의 관계, 허응당 보우의 불교 중흥정책과 회암사 등의 문제를 모두 포괄한 ‘조선 불교사의 기념비' 적인 작품으로 평가 되고 있다.
'석가삼존도'는 구도면에서 여래와 보살이 화면 중심에서 상하로 구분되는 2단 구도를 이루고 있어 고려 불화 양식의 전통을 잇고 있다. 특히 버크 컬렉션 소장 '석가삼존도'의 경우 본존은 높은 수미단(須彌壇) 위에서 결가부좌(結跏趺坐)하였는데 두 발 위에 놓인 왼손으로 약합을 들고 있다. 좌우협시보살은 중앙을 향하여 합장하고 있다. 보관에는 각기 일상(日像)과 월상(月像)의 표식이 보이고 있어 약사불의 협시인 일광·월광 보살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본존의 세장(細長)한 신체 모습과 작고 긴 얼굴, 꼬리가 올라간 가는 눈, 지극히 작은 입, 뾰족한 육계와 큼직한 정상 계주(頂上鉅珠)의 모습 등은 당시 16세기 불화의 양식적 특징을 잘 표출하고 있다.
윤곽선과 세부 묘사에 있어 굵은 선과 가는 선을 적절히 구사하여 채색보다 필선의 효과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박력 있고 거침없는 묘선의 필세가 특히 돋보이고 있다. 보살의 천의(天衣)에 표현된 뾰족한 끝단 처리에서는 당시 불화의 공통적인 특색을 드러내고 있다.
아울러 옷주름 사이에 가해진 복잡, 화려한 문양의 표현, 대좌를 장식한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과 연꽃잎무늬의 세련된 모습은 금색이 주는 효과와 함께 화려한 궁정 취향 불화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본존의 원형 광배 좌우 여백에는 장식적인 서운(瑞雲)과 도안화된 꽃무늬로 채워져 장엄하게 보인다.
이 불화에는 화면의 좌측(향우측)과 하단부에 금자(金字)로 쓰인 화기(畵記)가 있는데, 표구 시 일부가 잘려 전문을 판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부분과 일본 도쿠가와미술관(德川美術館)에 소장된 같은 형식의 약사삼존도와의 비교, 검토로 1565년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발원한 불화임을 알 수 있다.
즉,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그 아들 명종의 병세 회복과 건강 그리고 세자의 탄생을 기원하여 석가·미륵·아미타·약사여래의 화상을 각각 금화로 50점, 채화(彩畵)로 50점 등 도합 400점을 제작하여 회암사 중 수경에 개안 공양(開眼供養)한 불화 중의 한 폭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약사삼존도는 억불 숭유 정책 아래에서도 왕실에서 행하여진 불교 숭배의 상황을 알려 주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그리고 현존 예가 희귀한 조선 전기 불화인 점에서, 당시 불교계의 상황과 불화의 양식 등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ㆍ라마탑형 사리구 : 석가모니 진신사리와 지공스님, 나옹스님의 사리가 봉안된 유골함으로 13세기 경기도 양주 회암사의 부도에 안장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1939년 일본인에 의해 도굴돼 일본으로 건너간 후 이를 미국의 보스턴 미술관이 사들여 소장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불교측의 노력으로 사리를 반환받기로 합의된 바 있으나 문화재청에서 사리구도 함께 돌려받아야 한다며 환수를 거부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