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제사
2024.11.2. 브솔 메아리 방송
오늘은 주님 모시고 작은 일화를 소개함으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독일의 재무부 장관을 지낸 마티 바덴(Marty Bade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아주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고생을 많이 하고 있을 때 한번은 어느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돈이 없어서 싸구려 여관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일어나보니 자신의 구두가 없어졌습니다. 밤새 도둑을 맞은 것이지요. 여행 중에 구두를 잃어버렸으니 다시 사야 하고 다시 사려고 하니 사러 나갈 신발도 없고 그는 화가 나서 ‘어느 놈이 신발을 훔쳐 갔냐?’하고 허공에다 욕을 하면서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 가도록 내버려두시다니’ 하면서 아무 관련도 없는 하나님까지 원망했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은 주일이었는데 여관 주인이 창고에서 헌 신발을 빌려주면서 같이 교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못해 교회에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남들은 다 찬송하고 기도하는데 그는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고 신발을 도둑맞은 것 때문에 계속 화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니 찬송을 하는데 눈물을 훔쳐 가면서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드릴 때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마티 바덴은 큰 충격을 받아서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두 다리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 없겠구나! 그에 비하면 나는 신발만 잃어버렸으니 신발이야 없으면 사서 또 신으면 될 것을... 괜스레 남을 저주하고 하나님까지 원망하였구나’ 하면서 자책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바덴은 인생관이 달라져서 자기에게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남을 원망하지 않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짧은 간증을 읽어보면서 그 장애인 성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가 처음 장애를 가졌을 때는 얼마나 처참하고 자신을 원망했을지 모르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향한 믿음이었고 주님이 그의 친구요, 주님으로 서 주셨기 때문에 그는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화답한 것 같습니다. 전날의 감사가 있어서 빛바랜 앨범 쳐다보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새롭게 임하는 은혜 속에 전날의 은혜까지 계속해서 그 마음속에 살아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은혜가 있어야만 전날에 죄사함과 나의 어려움 속에서 도우셨던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우리는 메마른 심정이 아닌 살아 생생한 심정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마티 바덴에게 그 인생의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결정적으로 주님이 만나주신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도 새롭게 새롭게 주님의 은혜 속에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빌립보서 4장 12절과 13절에 보면 사도 바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가난하게 사는 법도 알고 부유하게 사는 법도 압니다. 배가 부르건 고프던 간에 부유하게 살던 가난하게 살던 간에 삶을 꾸려가는 일체의 비결을 저는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삶을 꾸려갈 때 이런 일 저런 일 만날지라도 주님 향해서 절대적인 감사와 온전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말씀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답니다.
누가복음 15장 말씀에 보면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나오지요.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올 때 동구 밖에 그 아들이 온 것을 보고 버선발로 뛰쳐나가 맞이하시는 그 사랑스런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나중에 그 형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집 안에서 큰 잔치가 벌어졌는데 그 하인들이 말하기를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고 주인 어른이 크게 기뻐하면서 잔치를 벌였다고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 형은 이 일에 대해 이해할 수 없어서 화가 난 상태로 아버지께 따졌는데 그 대답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큰아들은 동생이 가지고 간 재산에 대한 잃어버린 상실감이 그 동생에 대해서보다도 컸던 것 같습니다. 동생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을 크게 생각하고 동생이 돌아온 것에 대해서는 가치를 두고 있지 않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그 아들이지만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돌아왔으며 잃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돌아왔으니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탕진한 재산이 아니라 그 아들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얻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관점이 아버지와 큰아들은 천지 차이로 달랐습니다. 동생은 참회하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돌아왔지요. 아버지는 용서해주셨고 그리고 자식으로 받아주셨습니다. 큰아들은 동생이 살아 돌아온 것보다도 잃어버린 재산에 대해서만 생각하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주님이 천국을 비유하실 때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 고 했습니다. 오후 다섯 시에 부름을 받아 포도원에 들어간 그 품꾼, 한 시간 일했음에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고 감사의 마음이 절정에 다다른 그 품꾼을 생각해봅니다. 자기가 일한 삯보다도 분에 넘치게 받은 은혜에 대해서 그 고마운 포도원 주인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한 마음이 넘쳤겠습니까? 아마도 그 다음 날에는 새벽부터 나가서 포도원에 들어가려고 준비했을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과 16절, 17절에는 기본적인 성도의 자세가 감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장 15절 그리스도의 평강, 16절에는 그리스도의 말씀, 17절에는 그리스도의 허락하심입니다. 주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할 때 우리는 감사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풍성히 거할 때 역시 우리는 또 감사하는 자가 됩니다. 평강은 생명과 함께 역사합니다. 주님의 진액이 평강으로 임합니다. 성전에서 스며나오는 물과 같은 은혜가 평강과 함께 임합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의 평강이 주장하기를 몸 된 교회 안에도 주님의 평강이 주장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에게 날마다 생명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9장 10절 말씀에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 씨는 종자고 먹을 양식은 그날그날 우리의 먹거리이지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에게 올 때 내 영혼이 먹을 양식도 있고 씨처럼 섬길 수 있는 양식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식구님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말씀이 생명으로 임해서 말씀을 풍성하게 힘입고 그리고 예배 시간이나 기회를 따라서 섬길 수 있는 말씀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렸으면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7절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 주님의 이름은 주님의 싸인입니다. 주님의 허락하심을 알고 우리가 삶을 꾸려간다면 그 일을 통해서, 그 말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우리가 오늘의 삶을 주님께 감사함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들 때문에 영광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을 따라 살아 가십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아 가십시다. 그리스도의 허락하심, 곧 주님과의 동행 속에서 이 가을에 많은 감사로 하나님께영광을 돌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