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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 장
성화
하나님의 형상이 지식과 의만이 아니라 거룩함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온전히 회복되려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어야 함은 물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에 따라 내적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죄는 죄책(guilt)이지만 동시에 오염 (pollution)이기도 하다. 칭의는 사람을 죄책에서 구해내는 것이며, 성화( sanctification) 사람을 죄의 오염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칭의를 통해서는 사람의 의식이 변화되며, 성화를 통해서는 사람의 존재가 변화된다. 칭의를 통해서는 다시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게 되고, 성화틀 통해서는 다시 선해지며 선을 행할 수있게 되는 것이다.
"거룩하다'라는 단어는 사실상 성경의 각 페이지마다 나타난다.
"거록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의 본래의 자연적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규명할 수가 없다. 성경에서는 그 단어가 본래의 자연적인 의미로 쓰이는 일이 한 번도 없고, 언제나 종교적인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사용되는 그 단어는 십중팔구 "잘려지다," 혹은 "분리되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근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 단어가 과연 무슨 의미로 처음 종교적인 논의에 도입되었는가 하는 것도 명확히 말할 수가 없다.
어떤 이들의 논지에 의하면, 처음에 사람들이나 사물들을 거룩하다고 부르게 된 것은 그것들이 일상적인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들과 분리되었고, 말하자면 일상적인 사용에서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룩하다" 하는 말의 반대는 ‘‘거룩하지 않다’, "부정하다’, '속되다", "천하다" 등이라고 한다(레 10:10; 삼상 21:5; 겔 22:6). 또 다른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처음에 그 단어는 종교적인 일을 지칭하면서 사람이나 어떤 사물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런 의미에서 다른 것들과 다르다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곧, 사람이나 사물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거룩한 것이 절대로 아니고, 오로지 그것들에게 행해지는 어떤 명확한 행동을 통해서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자기 자신을 거록하게 할 수는 없다. 모든 거룩과 성별은 하나님께 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거룩하시므로, 그는 거룩한 백성과 거룩한 제사장과 거룩한 성전을 원하신다(출 19:6; 29:43; 레 11:45 이하; 19:2). 여호와께서 친히 자기에게 속한 자가 누구인지,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를 보이시는 것이다(민 16:5).
그리하여 구약에서는 거듭거듭 하나님을 거룩하신 자라 부른다. 느부갓네살 역시 자기의 거룩한 신들을 거론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다니엘서 4:8,9,18과 5:11에만 나타난다. 신적인 존재에 대하여 이 "거룩하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그가 소유하고 계시는 여러 가지 속성들 가운데 한 가지 속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신적 위대하심과 숭고하심, 도저히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그의 위엄 등을 표현하는 뜻으로 쓰인다. "여호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2). 그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시다(호 11:9). 아무도 이 거록하신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다(삼상 6:20).
그는 신들 위에 높이 계신 분이시요,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분 이시다(출 15:11). 그는 성소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 분이시며(시 68:35), 그의 이름은 크고 두려우며(시 99:2,3), 그의 거록함을 두고 맹세하시는 것은 곧 그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는 것과 같다(암 4:2; 6:8). 요컨대, 거록하심이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분리되어 계시고 그들 위에 지극히 높이 계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가 거록한 자이신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특히 하나님에 대해서 "거록한 자"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사 5:16; 6:3; 29:23; 30:11-12. 또한 겔 37:28; 39:7; 합 1:12; 3:3과 비교하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가 그의 백성과 친히 가지시는 모든 관계들에서 드러난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그 근본 원리가 여호와의 거룩하심에 있고 또한 그 목적이 그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데 있다. 그는 그의 모든 계시에서 거록하시며,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 거록하다. 그의 이름이 거룩하며(레20:3), 그의 팔이 거룩하며(시 98:1), 그의 언약이 거록하며(단 11:28), 그의 말씀이 거룩하며(시 105:42), 그의 영이 거룩하시다(시 51:11; 사 63:10,17). 그러므로 그는 그의 백성도 거록하기를 원하신다(출 19:6; 29:43-46; 레 11:44; 19:2). 그리고 백성들 중에서도 특히 거룩한 일을 섬기며 또한 그 직분을 위하여 특별한 의식으로 거록하게 구별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신다(출 29장). 사실, 장소든, 시간이든, 제물이든, 제사장들의 의복이든, 성전이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관계되는 모든 것들이 여호와께 전적으로 드려져야 하고 또한 거룩해야 하는 것이다. 율법을 제정하신 일의 의미는 바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록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출 19:6). 그리고 무슨 일에서든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에 부응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실제로 거룩한 것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이 율법에 도덕적인 계명만이 아니라 또한 수많은 시민적인 계명들과 의식적인 계명들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거록이란 율법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완전함인데, 이 완전함은 도덕적인 것만이 아니라 시민적이며 의식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흔히 한쪽으로 치우쳐서 신앙의 본질을 외형적인 레위인의 순결함에서 찾는 어리석음에 라지곤 했다. 그리하여 선지자 들이 이에 대하여 항거하며,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며(삼상 15:22), 하나님께서는 인애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며 또한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는 말씀을(호 6:6) 선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임을 설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미 6:8).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특히 그의 도덕적인 완전하심에, 피조물을 초월하심에, 또한 죄악된 피조물과 완전히 다르심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사 6:3-7). 백성들이 그의 이름과 그의 언약을 더럽힐 때에도, 여호와께서는 친히 자신을 거록하게 하신다(사 5:16; 겔 28:22). 그는 거록한 자로서 과연 원수들을 징벌하셔서 그가 과연 여호와이심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신다(렘 50:29; 겔 36:23; 39:7). 그러나 그는 그의 백성을 모든 불의에서 정결케 하시고, 그들과 새 언약을 세우시며, 그들로 하여금 새 마음으로 그의 길을 따라 행하도록 하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렘 31:31-34; 겔 36:25-29). 그리고 그가 그렇게 행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그 자신의 위대한 이름을 위함인 것이다(사 43:35; 겔 36:22).
신약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의를 주셨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의 사랑의 아들 안에서 그들에게 거록함도 주셨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요 우리의 구속이신데,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이와 똑같은 의미로, 그는 우리의 거룩함이시요 우리의 성화이시다. 우리는 그가 무엇보다 먼저 친히 거룩함을 소유하신 분이셨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셨더라면, 그가 우리를 위해서 거록을 성취하지 못하셨을 것이니 말이다.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그녀에게서 난 자는 '거록한 이"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받으신 분이시다(눅 1:35). 나중에 세례를 받으실 때에, 그는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고 또한 성령으로 충만하셨다(눅 3:22; 4:1). 귀신 들린 자들도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심을 알아보았고(막 1:24; 눅 4:34), 제자들도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 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8-69)라고 고백하였다. 사도행전 4:37에서는 (3:14과 비교하라) 베드로가 그를 "하나님의 거룩한 종"(혹은 "하나님 의 거룩한 소자)으로 말씀하며, 요한계시록 3:7에서는 그가 친히 자신을 "거록하고 진실한 이'로 부르신다.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죄 없으심을 의식하고 계셨고(마 12:50; 요 4:34; 8:46), 또한 그의 모든 사도들도 그가 그릇 행하신 것이 없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음을 증언하고 있다(고후 5:21; 히 4:15; 7:26; 렘전 1:19; 2:22; 3:18; 요일 2:1; 3:5).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본성적으로 소유하신 거룩함과 또한 그가 자신의 완전한 순종을 통해서 이루신 거룩함을 서로 구별해야 할 것이다. 그가 거룩하게 잉태되시고 탄생하신 사실에는 무엇보다도 그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다는 유익이 있었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6문답), 더 나아가서 그가 우리의 중보자로서 잉태되신 그 순간부터, 죄 속에서 잉태되고 출생한 우리의 그 죄를 그의 하나님 앞에서의 무죄하심과 완전한 거룩하심으로 덮어 주신다는 유익이 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6문답). 그는 자신이 탄생하실 때에 지니신 거록함을 곧바로, 죽으심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를 통틀어서, 그의 교회를 위하여 성취하셔야 할 그 거룩함 의 일부로 삼으셨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그의 성육신 이전에 이미 아버지께서 그를 거록하게 하사 그를 중보자의 직분에 세우셨고, 정확히 그 목적으로 그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잘 안다(요 10:36).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에게 잉태되시고 그에게서 탄생하시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고 자기를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드리셨다. 그의 성육신 자체가 이미 아버지의 뜻의 성취요 또한 거룩한 행위였던 것이다(히 10:5-9). 그리스도께서 거룩 하셨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그는 잉태되신 그 순간부터 죽으시는 순간까지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하셔야 했던 것이다.
여하튼 중보자로서 그는, 특히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시고 그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직후에, 가장 극심한 시련과 유혹을 당하셨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읽는 그때의 사탄의 시험은 싸움으로 가득 찬 생애의 시작이었다. 이 시험이 끝났을 때에, 마귀는 얼마 동안만 그에게서 물러갔을 뿐이다(눅 4:13). 이 시험들이 과연 어떤 것들이 었는지 우리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으나, 성경은 그가 모든 일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음을(히 2:17; 4:15)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모르시는 우리의 연약함은 없으며, 그가 도우실 수 없는 유혹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마다 유혹과 시험에 넘어지지만, 그는 끝까지 신실함을 유지하신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셨다(빌 2:8). 그는 죽음을 그냥 넘어가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고난을 굳건히 당하시고 또한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리하여 들으심을 얻었다(히 5:7).
그러나, 그가 아들이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히 고난을 당하셔서 순종함을 배우셔야 했다(히 5:8). 그는 처음부터 순종하셨으며 또한 순종하기를 원하셨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의 양식이었던 것이다(요 4:34). 그러나 그는 그의 고난에서 그 순종을 입증할 기회를 얻으셨다. 고난을 철저히 당하심으로써 순종하고자 하는 그의 기질과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셔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친히 당하신 고난을 통해서 거룩하게 되셨다(히 2:11; 5:9). 여기서 거록하게 되셨다는 것은 도덕적인 의미에서 거룩하게 되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줄곧 바라보고 계셨던 그 일을 그의 죽으심의 고난을 통해서 결말 지으셨고, 영광과 존귀로 면류관을 쓰셨다는 뜻이다(히 2:9; 12:2).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고 또한 그들의 믿음의 완성자("온전하게 하시는 "이)가 되셨다(히 2:10; 12:2). 낮아지심 이후에 그에게 올 그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심으로써, 그는 그의 백성들의 구원의 창시자요, 선구자요, 주역이 되셨고, 동시에 그들 속에 믿음을 시작하시며 또한 온전하게 마치시는 분이 되신 것이다(히 12:2). 순종의 길에서 자신을 완전하게 하심으로써, 다른 길이 아니라 가장 깊이 자신을 낮추심으로 아버지의 우편에 있을 영광을 구하심으로써, 그는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히 5:9).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하게 되도록, 그가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요, 자신을 죽음의 제사로 넘겨주셨고(요 17:19), 그리하여 그는 우리의 성화( sanctification: 한글 개역 개정판은 "거룩함"으로 번역하고 있다: 역자주) 를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신 것이다(고전 1:30).
신자들의 성화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그가 우리의 거룩함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그는 완전하고도 충족한 구주시다. 그는 그의 일을 부분적으로만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완전하게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영생과 하늘의 복락을 충만히 누리게 되기까지 그의 일을놓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의 상태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의로운 자로 서 있는 그런 상태로 회복시키시고, 그 나머지 일은 우리 손에 맡겨두셔서,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 선을 행하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감으로써 영생에까지 나아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일을 우리를 위하여 끝까지 완성하시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책과 죄의 형벌을 지셨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을 지키셔서 영생을 얻으셨다. 그의 순종은 수동적인 것이었고 동시에 능동적인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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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적시에 헤르만 바빙크 목사님 글을 가져오셨네요. 감사드립니다.
‘왜 히브리서 5장 7절로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설명하신 개혁신학자들이 없으실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헤르만 바빙크 목사님께서 인용해 설명하셨군요.
‘헤르만 바빙크 {하나님의 큰일}’ [제22장 성화]는 {양무리 마을} 시절에 이른바 “십자가 복음주의자들”과 토론하면서 읽었고 임진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뒤에도 읽었는데, 등잔 밑 불빛이 어두웠네요. ㅠㅠ
운영진은 이 글을 {기독론} 게시판으로 옮겨주셨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큰일'에 나오는 내용이군요. 저도 등잔밑이 어두웠네요. 옮겨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