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절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바울이 베드로의 이중성을 지적하고 그 앞에서 면박을 줬다고 말합니다.
면책을 했다는 말은 확실하게 해 두기 위해서 정면에서 마주보고 책망을
했다는 뜻입니다. 외식을 매우 싫어하는 바울의 성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12절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베드로가 비록 성령을 받아 자유를 얻은 자이지만 유대인의 의식이
남아 있어 할례자들이 오니까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떴습니다. 할례자는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로서 요즘 말로 하면 총회 조사위원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모르는 사람들인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외식하는 모습이 대쪽 같은 바울에게 걸려들었습니다.
13절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 결과 다른 유대인들도 외식을 하게 되었고 바나바까지도 외식에 유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외식은 언제나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어쩜 외식이
세련된 사람들이 교회에서 좋은 일꾼으로 인정을 받고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그 당시는 유대인이 이방인들과 같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참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도 창기와 죄인들과 식사를 할 때에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인들과 불신자들 사이에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을 것입니다.
유혹이란 덤으로 무더기로 끌려들어가는 것입니다. 대표인 베드로를 따라
사람들이 엉겁결에 따라서 행동을 하므로 전부가 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육체의 모양을 내는 사람들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줏대 없이 그들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14절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복음의 진리를 직선적으로 행하지 않음을 보고 바울이 게바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이면서 이방인같이 살면서 다시 말하면 철저하게 율법적으로
살지 않으면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율법적으로 살게 하려 하느냐’고 따집니다.
15절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우리는 본성적으로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비록 유대인이었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by faith in Christ)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은 믿음에 의해 의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 믿음의 목적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답게, 노릇하려고’하는 시도를 말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미국의
교육의 창시자인 존 듀이의 교육이론입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이 이론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이 교육학으로 인해 미국이 하나님을 배척하므로 저 꼴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공립학교의 채플이 차별금지법으로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로인해 청교도의 신앙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나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각종 폭력이 난무합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말씀이 말하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야 합니다.
신앙은 낮은 차원에서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하나님께 받으려고 하는 자세에서 시작해야죠.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섬기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려고 오셨습니다(마20:28, 막10:45)
그 다음에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주 예수그리스도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신앙이 처음부터 무엇을 바치오리까? 무엇을 하오리까? 하고 나오면 참 곤란합니다.
아담 안에 있는 본성으로 선을 추구하는 가르침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유튜브를 보면 그런 설교가 가득합니다. 환난 중에 있음에도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자유의지 운운하면서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로 땅의 의인을 하늘의 의인으로
끌어올리시려 하신 욥의 고난과 같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하심을 모르고 있습니다.
17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의롭게 되려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는다고 했는데 만약 죄인이 된다면 그리스도가
죄를 범하게 하는 분이냐 하는 반문입니다. 만일 국가가 범인에게 자수를
하라고 권해 놓고 그를 구속을 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식입니다.
18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범법자는 길을 잘 못 가게 하는 자입니다. 만약 바울이 율법에 대한 것을 다시
세우면 자신이 범법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의롭게 하려고 했다가 다시 죄인의 길로
밀어 넣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사람들을
모아서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든다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를 깊이 연구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고
그 의로 말미암아 거룩한 능력의 삶을 살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 된 자가
더 큰 심판을 받게 됩니다(약3:1) 문제는 땅에 속한 자에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는 한 여름에 핫바지와 같은데 있습니다. 땅에 속한 자들에게는
법이 그들의 체질에 맞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율법을 좋아하게 됩니다.
욥과 세 친구가 갑론을박하는 것 보세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장군 멍군합니다.
땅에 속한 자들이 하늘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머리가 하얘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평강이 되지만 땅에 속한 자들에게는
검이 되어 베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어렵다고 하고 알아듣질 못합니다.
복음전도자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아무나 이해를 하지만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연합이 된 세례(침례)를
이해하는 데는 한참 듣고 들어야만 희미하게 보이다가 점점 분명해 지는 겁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복음, 진리의 말씀을 꾸준히 들려줘서 하늘에 속한 자들의
모임인 참 교회가 되도록 먼저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탄생의
신비를 죽을 때까지 다 이해하지 못하듯 거듭남의 신비는 인간으로서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고
영생을 얻은 것으로 나는 거듭났다고 소리치고 하나님께 찬양을 하게 될 뿐입니다.
바람이 부는 소리는 들리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 않듯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와 동일합니다(요3:8) 다만 진리의 말씀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들려집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자들에게 아무 말이나 은혜이니,
진리이니 해서 억지로 자유를 주면 그 자유로 인해 방종을 하고, 오히려 말씀을
전하는 자를 물고 뜯고 할퀴게 됩니다. 지금 교회가 이 지경이 된 이유입니다.
설교자가 시작부터 오늘 이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겠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섞여 있는 회중들에게
어떤 말이든지 공감하고 감동을 주는 것이 은혜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와 같은 점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기름부으심이!